0살부터 슈퍼스타 705화
윌리엄의 등장에 다음 대사를 받아줘야 하는 조성환이 그대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버렸다.
이서준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빠질 수 없는 연기의 온오프.
알고는 있었지만, 영상으로도 많이 봤지만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다를 줄은 몰랐다.
‘의상도 별로 다를 게 없는데 말이지.’
의상팀에서 준비한 ‘윌리엄의 옷’이라고는 하지만, 서준이 입고 왔던 옷과 크게 다르지 않은 캐주얼한 옷이었다. 그래서 촬영을 시작해 윌리엄을 연기하더라도 별 차이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냥 다른 사람이네.’
서준 리라는 배우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그저 윌리엄 리라는 사람만 거기에 서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빛나는 모습으로.
조금 전에도 봤던 서준의 얼굴이지만 왜 이렇게 반짝이면서 후광이 흘러나오는지 모르겠다. 저도 모르게 감탄해 버리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컷!”
눈도 깜빡이지 않고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조나단 감독이 컷을 외치고 나서야, 조성환은 그것을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다!”
화들짝 놀란 조성환이 얼른 사과를 했다.
넋 놓고 있다가 첫 촬영부터 NG를 내버리다니.
예민한 감독이라면 재수 없다며 큰소리를 낼 수도 있는 경우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조나단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준이 연기하는 걸 처음 본 배우분들은 원래 그래요.”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하긴 쉐도우맨 촬영 때도 준이 NG를 내는 것보다 상대방이 준의 연기를 보고 NG를 내는 경우가 많긴 했지.”
“들으셨죠? 원래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조.”
[쉐도우맨 시리즈]를 촬영해 왔던 제임스 촬영감독의 말에 조나단 감독까지 그렇게 말을 하니, 조성환은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원래 그런 거라뇨. 감독님.”
어느새 ‘서준 리’로 돌아온 서준이 웃고 말았다.
“네가 등장씬에 힘을 줘서 그런 거잖아.”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니까 이 정도는 해야죠. 감독님도 동의하셨잖아요.”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으음.
그에 잠시 생각하던 서준이 말했다.
“그럼 수정할까요?”
“아니!”
“절대 안 되죠!”
즉각적인 반응이 두 군데에서 튀어나왔다.
하나는 감독인 조나단 윌. 나머지 하나는 멀리 떨어져 있다가 촬영 직전 슬금슬금 모니터 근처로 온 페일런 박이었다.
이런 인상적인 장면을 날려 버리다니!
“쉐도우맨 시리즈의 팬이라면 멜리사 월튼 배우를 보고 입을 쩌억 벌렸다가 2층에서 들려오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에 숨이 거칠어질 거고, 2층에서 내려오는 모습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다가, 끝내 반짝반짝 빛나는 윌리엄 리의 행복한 미소에 심장은 물론이고 눈물샘이 폭발할 겁니다!”
하고 쉐도우맨 시리즈의 팬이 격렬하게 주장했다.
그런 페일런 박(마린사 부사장)을 조나단 감독과 서준, 두 배우와 재촬영을 위해 세트장을 준비하던 스태프들이 바라보았다.
‘부사장님도 팬이셨구나. 그것도 찐팬.’
그 시선을 느낀 페일런 박이 헛기침을 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크흠. 죄송합니다. 이야기 나누세요.”
“예.”
웃음을 삼킨 조나단 감독이 대답하고는 세 배우에게 말했다.
“NG난 김에 촬영분 볼래? 멜리사와 조도요.”
“그럴까요?”
서준이 앞장서 모니터 쪽으로 향했다. 멜리사 월튼과 조성환이 뒤따라갔다.
커다란 모니터 화면에서 조금 전 세 배우가 연기한 촬영분이 재생되었다. 세 배우와 감독은 그것을 살펴보며 재촬영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 촬영분에서는 딱히 수정할 부분이 없습니다. 나중에 바스트샷과 클로즈업샷 촬영 때, 표정 주의해 주시고요.”
“준의 연기에만 홀리지 않으면 되겠지만…… 자신 없네요. 5살 때도 휩쓸렸는데 지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멜리사 월튼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지만, 오직 배우 조성환만이 멜리사 월튼의 말에 동의하듯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두 번째 촬영이 시작되었다.
“아직 안 드셨어요? 먼저 드시라니까요.”
이전 촬영처럼 반짝이는 아우라를 뿌리며, 눈을 뗄 수 없는 등장씬을 보여준 서준의 뒤를 이어 조성환이 대사를 이어나갔다.
“다 같이 먹어야 맛있지.”
“맞아. 윌리엄. 어서 와서 앉으렴.”
“네.”
어깨에 메고 있던 백팩을 한쪽에 놔둔 윌리엄이 웃으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사랑하는 엄마와 아빠, 평화로운 아침. 평범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경기는 언제니?”
고슬고슬한 밥과 따뜻한 국그릇을 윌리엄의 앞에 놓아준 엄마가 물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밝게 웃으며 말한 윌리엄이 대답했다.
“다음 주 일요일이에요. 오실 수 있으세요?”
“우리 아들 시합인데 당연히 가야지!”
“열심히 응원할게!”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말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에 윌리엄이 활짝 웃었다.
“이제 2주 남았으면 훈련도 자주 할 텐데, 언제 하니?”
“수업 마치고 하고 있는데 이번 주말에도 스케줄이 잡혀 있어요.”
“주말마다 조깅하던 건 어쩌고?”
야구선수라는 꿈을 가진 후, 주말마다 빼놓지 않고 성실하게 집 근처 공원으로 체력단련을 하러 나가는 윌리엄의 스케줄을 아는 아빠가 물었다.
“오후 연습이라서 괜찮아요. 공원에서 좀 뛰다가 야구장으로 가려고요.”
양식과 한식이 뒤섞인 아침식사를 먹으며 세 가족이 단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윌리엄…… 행복해졌구나!’
그 포근하고 따뜻한 분위기에 [쉐도우맨 시리즈]의 팬인 페일런 박과 최태우, 그리고 스태프들이 촬영에 방해될까 입을 틀어막고 찔끔 눈물을 흘렸다.
라이언 감독도 [쉐도우맨 시리즈]에서 멈춰 버린 ‘윌리엄 리’의 이야기가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조용히,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윌리엄 리의 삶’이 다른 감독의 손에서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조금 생소하면서도,
‘좋군.’
기뻤다.
한편 조나단 감독은 그런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촬영 직전까지 초조해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쩐지 삼촌인 라이언 윌 감독을 닮은 모습으로, 오직 모니터와 촬영장만을 바라보며 촬영에만 집중했다.
“컷! 오케이!”
그렇게 훈훈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조나단 감독의 첫 오케이가 떨어졌다.
* * *
오전 촬영이 끝나고 점심시간.
순조롭게 흘러간 오전 촬영에 배우들은 물론이고 스태프들도 제법 긴 점심시간 겸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거의 뷔페급인 것 같은데?”
“그러게요.”
까다로운 배우들이라면 식사부터 마실 물의 종류까지 세세하게 계약서 조항으로 넣었겠지만 서준이나 멜리사 월튼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조성환은 안타깝지만 그 정도 영향력을 가진 배우는 아니었고.
“첫 촬영이라서 그런가 봐요.”
“……아니면 쉐도우앤나이트를 그 정도로 기대하고 있다든가.”
서준의 말에 배우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조나단 감독이 하.하.하. 해탈한 듯 웃었다. 촬영할 때는 집중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부담감이 어깨 위로 다시금 올라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을 것 같던데요? 준도 잘했고 우리도 괜찮지 않았어요, 조나단 감독님?”
웃으며 묻는 멜리사 월튼에 조성환도 조나단 감독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조나단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다 잘해주셨죠. 진짜 윌리엄의 부모님처럼요.”
“준이 진짜 윌리엄처럼 느껴졌거든요.”
멜리사 월튼이 파스타를 돌돌 말던 포크를 멈추고 기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쉐도우맨1 촬영 때 봤던 어린 윌리엄, 그리고 쉐도우맨3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을 하면서 봤던 꼬마 윌리엄의 모습과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진 것 같아서 더 몰입할 수 있었어요.”
조성환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몰입하기 위해서 그 장면들을 계속 돌려봤는데, 멜리사 씨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쉐프가 직접 구워준 스테이크를 잘라 입속에 넣던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윌리엄은 윌리엄이니까요. 고등학생이 되었어도 어렸을 때 모습이나 분위기는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니까 그렇게 연기해봤어요.”
누가 봐도 ‘윌리엄이구나!’ 하면서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말이다.
“그게 연기하고 싶다고 해서 된다는 게 대단한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서준의 말에 멜리사 월튼과 조성환은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역시, 준.”
조나단 감독은 믿음직한 주연배우에 엄지를 들어 올렸고 그걸 본 서준이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 * *
다음 날.
이번 촬영은 고등학교에서 진행할 예정이었다.
“고등학교에서 촬영한다길래 학교를 빌릴 줄 알았더니…….”
최태우가 앞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학교를 만들어 버릴 줄이야…….”
사방에 깔린 잔디밭에 빨간 벽돌로 된 제법 유서 깊어 보이는 건물.
하이틴 영화에서나 볼 법한 학교가 거기에 있었다.
“하하하. 아무래도 윌리엄이 고등학생이라서 학교에서 지내는 장면이 자주 나오니까요.”
이미 할리우드 스케일에 익숙해진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자신처럼 다호 형이나 다른 사람들은 이제는 할리우드 스케일에 익숙해져서 덤덤한 반응이었는데, 이렇게 놀라는 태우 형의 모습을 보니 재미있었다.
조나단 감독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서준의 말을 이어 최태우에게 설명했다.
“전부 다 만든 건 아니고 겉모습하고 윌리엄이 사용할 교실이나 식당, 운동장 정도만 공들여 만들었습니다.”
“……네.”
최태우는 ‘그게 전부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해탈한 듯 대답하다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럼 안전은?”
“세트장이라고는 해도 최대한 안전하게 만들었으니 걱정 마세요.”
조나단 감독의 대답에 최태우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조나단이 서준에게 속삭였다.
“좋은 매니저네.”
“그렇죠?”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 * *
아무래도 고등학교가 배경이라서 그런지 학생 역의 엑스트라들이 많았다.
스태프들은 바쁘게 그들에게 동선을 알려주었고, 대사가 있는 배우들은 실수하지 않게 대본을 들고 눈이 빠져라 읽고 있었다.
물론 몇 줄 안 되는 대사지만.
“혹시 모르지. 윌리엄 리의 친구로 다음 영화에도 나올 수 있을지.”
누군가 그렇게 읊조리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나오는 친구라도 좋았고, 슈퍼히어로의 조력자라면 더욱 좋았다. 어찌 되었든 영화에 한 편이라도 더 나오면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거고 영화관계자들의 기억에 남을 터였다. 그럼 다른 영화에도 출연할 수 있겠지.
“리도 그랬잖아. 나도 그렇게 될지도?”
“준이랑 네 연기력이랑 같은 줄 알아?”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왔다가 대사 한두 줄을 얻게 된 두 친구가 투닥거렸다. 대화만 들어도 누가 서준 리의 팬인지 알 것 같은 엑스트라들이었다.
“준을 실제로 보다니……!”
“앞에서 대사나 까먹지 마.”
“진짜 까먹을 것 같다…….”
“그럼 같이 연습할까요?”
“너랑 연습한다고 안 까먹겠…… 응?”
서준 리의 팬이 익숙한 목소리에 친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항상 스피커 너머로 들어서 생생한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분명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의 목소리였다. 주연배우를 위해 마련된 대기실에 있을 배우가 여기 있을 리가 없으니 친구가 자신을 놀라게 하기 위해 성대모사를 했나, 싶었다.
하지만 친구는 오히려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단역배우들도 비슷한 얼굴로 자신의 뒤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조금 시끄럽던 주위가 조용해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니, 자신의 귀가 맛이 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서준 리의 팬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침이 꼴깍 넘어가고 대본을 든 손이 덜덜 떨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 입 밖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돌아간 시선 끝에,
대본을 들고 빙그레 웃는 남자가 있었다.
“괜찮을까요? 같이 연습해도?”
할리우드 스타, 서준 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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