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699화 (699/1,055)

0살부터 슈퍼스타 699화

십여 년 전.

잭은 거실 테이블에 양팔을 올려 턱을 괴고, 여름을 맞아 놀러 온 친구 서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폭신한 소파에 앉아 빤히 TV화면을 바라보는 서준. 눈동자가 아주 초롱초롱하다.

‘TV가 재미있는 건 알겠지만.’

저런 드라마는 무슨 재미로 보는 걸까?

잭도 TV에서 하는 만화를 좋아하지만, 어른들이 나와 이야기하는데 솔직히 이해도 잘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

잭의 고개가 창문 쪽으로 향했다.

유리창 너머, 정원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잔디밭에 내리쬐는 야구하기 딱 좋은 햇살이 잭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사람은 준이 아닌가!

같은 동네 친구들을 모아서 놀아도 되지만 다들 잭의 (야구)수준에 맞지 않았다.

오직 친동생 같은(서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준만이 자신의 대단한 야구 실력에 어울릴 수 있는 라, 라,

‘맞아! 라이벌!’

라이벌이었다!

어려운 단어를 생각해 낸 꼬꼬마 잭이 흐흐흥 웃었다.

어쨌든.

그럼에도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것 같았던 잭이 이렇게 가만히 준을 쳐다만 보고 있는 건 부엌에서 들려오는 어른들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준은 정말 배우가 되려나 보네. 한국에서도 저래?”

엄마의 말에 준의 엄마가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국에서는 더 심하지. 한국에서는 한국 드라마 본다고 바쁘거든. 미국 드라마는 보기 힘드니까 아마 한동안은 TV에 푹 빠져 있을 거야.”

준이 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는 건 잭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벌써 배우였다. 짧지만 [쉐도우맨]에도 나왔던 준이 아닌가.

‘쟤가 내 친구야!’

하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자랑하고 다녔던 잭이었다.

‘그러니까 방해하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마안…….’

어린아이의 인내심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잭의 입술이 천천히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온 준의 참을성을 아는 잭은 더더욱 초조해졌다.

그림을 그릴 때도, 유치원 숙제를 할 때도 잭은 10분 만에 크레파스를 놓고 딴짓을 했었는데, 준은 완성할 때까지 꼼짝도 않고 열심히 하던 녀석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잭도 슬금슬금 다시 자리에 앉아 크레파스를 들 수밖에 없었다.

‘준은 진짜 여기서 하루종일 TV만 보라고 해도 볼 거야.’

준이 미국에 놀러 온다고 해서 계획을 공책 가득 적어놓았는데 말이다.

오오, 눈을 반짝이며 TV를 보는 준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잭이 입을 열었다.

“준.”

“……응?”

“재미있어?”

“……응.”

서준의 대답에 잭이 눈을 끔벅였다.

뭐랄까.

준의 대답이 한 박자씩 느렸다. 게다가 어른스러운 평소와는 달리 반쯤 정신이 팔린 듯 보였다.

‘이거 어디서 봤는데…….’

곰곰히 생각하던 잭의 귀에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잭! 간식 먹을래? 준한테도 물어봐!”

“알았어!”

간식!

준이 놀러 왔으니 평소보다 더 맛있는 간식일 거다!

눈을 빛낸 잭이 서준에게 물었다.

“준! 간식 먹을 거지?”

“……응.”

시선은 여전히 TV로 향한 상태로 멍하게 대답하는 준. 어지간히 드라마에 푹 빠진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준이 좋아하는 실력파 배우들이 잔뜩 나온 드라마였다.)

……아!

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잭! 이제 그만하고 밥 먹자!’

‘잠깐만! 엄마! 조금만 더 하고!’

꼭 신나게 야구를 할 때 엄마의 부름에 건성으로 대답하는 잭, 자신 같았다.

눈을 데굴 굴린 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준. ……드라마 재미없지?”

“……응.”

서준에게서는 절대 들려올 수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오호라.

잭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으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자신의 방, 장난감 상자를 뒤져 장난감 하나를 가져왔다.

마이크처럼 생긴 장난감이었는데, 스위치를 누르고 말하거나 노래를 하면 그대로 재생시켜 주는 장난감이었다. 일종의 녹음되는 장난감이랄까.

잭은 장난감의 스위치를 누르고 조심스럽게 준의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준, TV 다 보고 야구할래?”

“……응.”

오오!

잭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점심 먹고 나서 캐치볼도 하자.”

“……응.”

“저녁 먹고 다락방에서 야구 게임도 하고.”

“……응.”

점점 신이 난 잭이 목소리를 높였다.

“내일도 야구 하는 거야!”

“……응.”

“한국 돌아갈 때까지 야구하자!”

“……응.”

그렇게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오는 드라마에 서준이 정신이 팔린 사이, 잭과의 (야구)약속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장남감 제작회사도 자신들의 장난감이 이렇게 쓰일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 * *

[내일도 야구 하는 거야!]

[……응.]

[한국 돌아갈 때까지 야구하자!]

[……응.]

장난감에서 들려오는 어린 자신과 잭의 목소리에, 어른이 된 서준이 이마를 짚었다.

“이게 뭐야…….”

내가 이렇게 드라마에 정신이 팔렸었다고?

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이미 전적이 있는 서준이었다.

소설 [거울]을 보자마자 곧바로 연극 제안을 하기도 했고, 한강공원 산책로에 떨어져 있던 [흘러가다]의 대본들을 따라가다 처음 보는 감독님과 이야기하기도 했고.

‘음…….’

이 이야기를 들으면 은찬이 삼촌과 다호 형, 그리고 태우 형까지 끄응 앓으며 이마를 짚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서준이었다. 구두계약도 계약이라면서 말이다.

“으하하하!”

마찬가지로 듬직하게 자란 잭이 큰 소리로 웃었다.

“이랬었다니까. 나도 참 똑똑했지! 녹음할 생각을 다 하고.”

“그러게. 똑똑하네. 꼬마 잭. 지금보다 더 똑똑한 것 같다.”

“……그거 칭찬 아니지 않나?”

빤히 바라보는 잭의 시선을 피하며 서준은 얼른 말을 돌렸다.

“근데 난 이 녹음 처음 듣는 것 같은데?”

“아, 그게 말이지.”

단순한 내 친구.

서준이 웃으며 설명을 시작한 잭 스미스를 바라보았다.

“드라마 끝나고 간식 먹으면서 야구할래? 라고 물으니까 네가 순순히 그래, 라고 하더라고. 점심 먹고 캐치볼도, 저녁 먹고 야구 게임도 거절 안 하고 해주더라. 녹음한 거 사용할 필요도 없었지.”

잭이 웃으며 그날을 떠올렸다.

‘그럼 지금 나갈까?’

하고 묻는 준에, ‘그래!!’하고 대답한 꼬마 잭은 신이 나서 장난감 녹음기를 어디론가 휙- 던지고는 얼른 야구글러브와 배트를 가지고 왔더랬다.

“그 이후로는 그냥 까먹고 있었지.”

“똑똑하다는 말 취소.”

웃으며 말하는 서준에 잭도 동의하듯 킬킬 웃고 말았다.

* * *

이런저런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눈 서준과 잭은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여기야?”

“여기야.”

킬킬 웃는 잭의 모습에, 서준은 고개를 들어 올려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LA스타디움이었다.

“그냥 작은 경기장이면 됐는데…….”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즐겁게 했던 야구라서, 잭과 함께 가볍게 공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장소가 너무 화려해진 것 같았다.

일반인과 함께 사용하는 장소라면 아무래도 폐가 될까 봐, 잭에게 작은 운동장이라도 좋으니까 대여할 수 있을까, 라고 물어봤는데 LA스타디움이 나타난 것이었다.

“꼭 써달라고 하더라고. 홍보팀에서.”

잭 스미스가 킬킬 웃었다. 그에 서준도 웃고 말았다.

라커룸에서 LA다저스 유니폼(홍보팀에서 준비했다.)으로 갈아입은 서준과 잭이 경기장으로 향했다. 슈퍼스타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구경 나온 직원들도 보였다. 그중 스카우트들의 눈이 번뜩였다.

“너 시타 했을 때 엄청 물어보더라. 너 야구 할 생각 있냐고. 그래서 내가 절대 없을 거라고 했지.”

글러브와 배트, 야구공을 들고 오며 말하는 잭에 서준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준. 던질래, 칠래?”

“둘 다 하지, 뭐. 카메라 설치 좀 도와줘.”

“그래.”

차 트렁크에서 가져온 카메라들을 경기장에 설치한 서준과 잭은 가볍게 몸을 풀고는 각자의 자리에 섰다.

마운드에 선 투수 서준 리.

타석에 타자 잭 스미스.

일반인(?)과 메이저리거의 대결답게, 서준 리가 던지는 공마다 홈런과 안타가 터져 나왔다.

아아……!

서준 리의 팬인 듯한 직원들의 안타까운 탄성들 속에서도 스카우트들과 코치들의 눈은 빛났다.

“속도 쟀지?”

“네. 제대로 하면 장난 아니겠는데요?”

타자로서의 재능에다가 투수로서의 재능까지 있다니!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사람들의 눈이 날카로워질 때, 서준 리와 잭 스미스의 자리가 바뀌었다.

마운드에 선 투수 잭 스미스.

타석에 선 타자 서준 리.

대부분의 관심은 몇 년 전 시타에서 일반인답지 않은 실력을 뽐냈던 서준에게로 향했다.

“리가 시타를 했던 게 몇 년 전인데, 어떨까요?”

“글쎄. 지금은 좀 못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중 몇몇은 마운드에 선 잭 스미스를 바라보았다.

“잭이 투수를 했었던가?”

“중학교 이후로는 없습니다.”

“음. 오늘 투수 중에 나온 사람 없어? 리를 제대로 테스트해 보고 싶은데…….”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스카우트들과 코치진이었다.

그때, 마운드에 선 잭 스미스가 자세를 잡았다.

“……음?”

정석적이다. 그리고 왠지 익숙해 보였다.

투수한 적 없다며?

모두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떴을 때,

잭 스미스의 손에서 떠난 새하얀 야구공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러고는 타앙! 하고 서준 리가 휘두른 배트에 맞고 힘차게 뻗어 나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스카우트들과 코치진이 벌떡 일어났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탕! 하고 야구공이 텅 빈 좌석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소, 속도는?!”

“잭 스미스 투수도 할 수 있었던 거냐!?”

“지금 꺼 홈런이지!?”

뭐라뭐라 시끄러운 직원들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어깨를 으쓱인 잭과 서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한 번 더 간다!”

“그래!”

여느 때와 다름없이 즐겁게 노는(?) 두 사람이었다.

* * *

그날 저녁.

저녁을 먹고 떠난 잭 스미스와 교체하듯, 조나단 윌 감독이 서준의 숙소에 들렀다.

“오셨습니까. 감독님.”

“매일같이 와서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현관에서 맞이하는 최태우에 조나단 감독이 멋쩍은 듯 말했다.

서준이 LA에 온 이후로 거의 매일같이 드나드는 조나단이었다. 대본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아니었고 그저 불안해서였다. 아마 크랭크인까지는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저녁은 드셨어요?”

“네. 먹었습니다. 준은요?”

“방에서 오늘 촬영한 거 편집 중입니다.”

“그래요?”

서준이 팬들을 위해 브이로그를 찍을 거라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편집도 제법 했지.’

그러니까 준의 대학 실기였던가.

실기 영상이 비공개라, 서준이 직접 [신의 이름으로]를 연습실에서 촬영하고 편집했던 것이 떠올랐다.

“가서 봐도 될까요?”

“네. 괜찮을 겁니다.”

최태우의 말에 조나단 윌이 2층 서준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노크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조나단 왔어요?”

거의 매일같이 보는 터라, 편집하던 모습 그대로 평온하게 조나단 윌을 맞이하는 서준이었다.

“그래. 편집 중이라며?”

조나단 윌이 의자를 끌고 와 서준의 옆에 앉았다.

“네. 장소별로 자른 다음에 세세하게 손대려고요.”

“자막은?”

“그건 1팀에서 해주기로 하셨어요.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도 같이 검사해 주실 거래요.”

서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조나단 윌이 마우스를 클릭하며 편집하는 서준을 바라보았다.

모니터에는 조나단 윌에게도 익숙한 영상편집 프로그램이 떠 있었다. 영상편집 프로그램을 보니 어쩐지 손이 근질근질해졌다.

‘직업병인가.’

그에 피식 웃고만 조나단 윌 감독이었다.

잘할 수 있을까, 하고 복잡하던 마음이 차분해지며, 얼른 [쉐도우앤나이트]를 촬영하고 편집하고 싶어졌다.

“준, 편집한 거 볼 수 있을까?”

“조금 엉망이긴 하지만…… 네. 파인패드로 보낼게요.”

영화감독에게 보여주기는 조금 쑥스러웠던 서준이 볼을 긁적였다.

“조언할 게 있으면 편하게 해주세요. 조나단.”

영화감독의 조언으로 영상이 더 좋아진다면 좋은 거겠지.

새싹들이 재미있게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서준은 1차 편집본을 자신의 파인패드에 보냈다. 그리고 그 파인패드를 조나단 윌에게 건네주었다.

“그래.”

서준의 파인패드를 켜고 영상을 재생시킨 조나단 윌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상시 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브이로그이니만큼, 화려한 편집보다는 친근한 느낌의 편집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조나단 윌이 1차 편집본을 보는 사이, 서준은 열심히 마우스를 클릭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편집 작업에 한창이었다.

‘하루 만에 하긴 힘들겠지.’

게다가 이틀 전 월요일부터 개강을 해서 학교 수업도 같이 들어야 했다.

‘뭐, 사이버강의니 여유가 있겠지만.’

그래도 오늘 촬영하면 어떤 장면을 중심으로 편집할지는 다 생각해 뒀으니, 틈틈이 편집하면 금방 끝날 것 같았다.

“……준.”

“네?”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준이 클릭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파인패드를 보며 뭔가 고민하고 있는 조나단의 얼굴이 보였다. 슬쩍 보니, LA스타디움에서의 영상이었다.

“우리 야구경기 장면 말이야.”

“네.”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쉐도우앤나이트]에는 야구 경기 장면이 있었다.

“카메오로 잭 스미스 선수를 부르면 어떨까?”

……!

조나단 윌 감독의 말에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