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88화
서준이 관객석을 둘러보았다.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그런 건지, 많은 팬들이 모인 만큼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구분하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보였다.
아쉬움과 부족함으로 가득한 팬들의 얼굴.
서준도 아쉬웠지만 이제는 정말로 끝내야 할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들려드릴 곡은 제가 제일 처음 작곡한 곡입니다.”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1!!
-NO.1!!
말하기 무섭게 대답하는 새싹들에 서준이 하하 웃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네. 맞아요.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1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꿈요정, 고블린,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1]이지만 그건 서준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제목이었다.
“이 곡은 오버 더 레인보우1을 촬영할 당시, 영화 홍보로 버스킹 영상을 찍고 있던 저에게 친절한 마음으로 기꺼이 다가와 준 분들을 위해 연주했던 곡이에요.”
그래. 그랬지.
모든 새싹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의 팬이라면 서준에게 오스카상을 안겨준 [오버 더 레인보우1]에 관련된 영상 중 하나인 버스킹 영상을 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작년 11월 말 [오버 더 레인보우2]가 공개되기도 했었고. 복습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로 정말로 기쁘고 행복하고 감사했었어요. 아참, 3년 전 여름에 제가 참여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제이슨 무어의 연주회 기억하세요? G.B.로 참여했던 오케스트라 말이에요.”
당연히 기억한다.
그게 [오버 더 레인보우2]의 시작이었다는 영화객의 정보가 있었으니까.
“……이래서 못 끊나 봐요. 영화객 리뷰.”
“그러게요…….”
핵매운맛과 함께 좋은 정보도 전달해 주니, 안 볼 수가 없는 영화객의 리뷰였다.
“그때 오케스트라 단원들 중에 버스킹에서 도와주셨던 분들이 계셨어요. 얼마나 신기하고 반가웠는지 몰라요!”
오오!
그건 놀라운 일이었다.
“바이올린 전공자라고는 생각했는데…….”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정도로 실력자들이 됐구나. 그분들.”
“게다가 그레이 바이니랑 만나다니…….”
오래전 버스킹 때 만난 ‘아이’를, 시간이 흘러 같은 오케스트라에서 만나 함께 연주하다니.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는 게 이런 때 나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물론 버스킹에서 본 아이가 슈퍼스타라는 게 더 영화 같지만.”
“그건 그래.”
임예나의 말에 송유정과 강태영이 작게 웃었다.
“아, 이야기가 옆으로 샜네요.”
마이크를 통해 서준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전해졌다.
새싹들이 안타까워했다. 더 길어져도 괜찮았는데!
그런 새싹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준이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제목에도 나와 있듯 원래는 바이올린 연주곡이지만 피아노 연주곡으로 편곡해 봤어요.”
스크린으로 보이는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사랑해 주신 새싹 여러분들께 감사와 고마움을 꼭 전하고 싶었거든요.”
진심이 가득 담긴 서준의 말과 표정에 아쉬워하던 새싹들의 표정이 금세 풀어져 울먹울먹해졌다.
“이제 정말 마지막인가 봐요.”
“시간 너무 빨리 지나간다…….”
멈추지 않는 시간의 흐름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새싹들은 곧 들려올 연주를 위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런 새싹들을 보며 서준은 꽃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사랑해 주셔서, 지금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싹 여러분.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다시 한번 방긋 웃은 서준은 피아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건반 위에 두 손을 올렸다.
♬
바이올린과는 다른 느낌의 선율이 팬 미팅장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서준의 마음은 같았다. 아니, 버스킹 때보다 훨씬 깊은 감사와 사랑이 담겨 있었다.
많은 전생을 통해, 이렇게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새싹들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은데, 너무너무 사랑이 많은 팬들이라 다 돌려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앞으로 더 열심히 연기하자.’
멋진 작품을 보여 드리자.
여기에 있는 팬들과 DVD로 볼 팬들을 생각하자, 서준의 입가에는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두 손은 조금 더 섬세하게 움직이며 건반을 두드렸다.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연주하는 서준에 새싹들은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이 시간이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어느 작품이든, 연주든 끝은 있는 법.
♪--
끝내 피아노로 편곡된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1]의 마지막 건반이 눌러졌다.
……아…….
[NO.1]을 수백 수천 번은 들어본 새싹들은 그게 마지막임을 알 수 있었다.
천천히 검은색 그랜드피아노에서 서준의 두 손이 떨어진다. 마치 슬로우 모션이라도 걸린 것처럼 아주 천천히.
이대로 팬 미팅을 끝내기에는 너무 아쉬운 나머지, 뇌의 오작동으로 자신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가 싶었는데.
“아쉬워서 손이 안 떨어지네요.”
사실은 서준의 자체 슬로우 모션이었다.
평범한 속도로 말하는 것과 다른 서준의 느린 움직임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았던 새싹들이 푸핫!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내 배우는 그렇게 대단한 연기력을 이런 데 쓰는 건지…….
“진짜…… 너무 귀엽다…….”
속마음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근데 왜 웃으면서도 눈물이 맺히는지 모르겠다.
아쉽다고 생각하는 게 팬들만이 아니라서, 그만큼 내 배우가 팬들을 사랑하는 게 느껴져서 그런 것 같았다.
자체 슬로우 모션을 끝낸 서준이 팬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하루 재미있게 보내셨나요, 새싹들?”
-재미있었어!!
-저도 행복했어요!
“다행이에요. 정말 열심히 준비했거든요.”
왠지 뿌듯해 보이는 서준의 표정에 새싹들은 웃음과 함께 마음이 벅찼다.
생각지도 못한 아쟁에, 피아노에, 캐릭터 맞춤 편곡들까지.
아무리 음악에 재능이 있어도 열심히 준비했다는 게 느껴지는 이벤트들이었다.
“실수 없이 준비한 만큼, 아니, 준비한 것보다 완벽하게 보여 드릴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실수해도 괜찮아!
-이서준 최고!!
-우리 배우님 최고예요!!
-서준아, 사랑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팬들의 외침에, 잠시 귀를 기울이던 서준은 이내 가슴이 벅찬 듯 크게 숨을 내쉬더니, 눈을 둥글게 휘며 말했다.
“……새싹들이 있어서 참 행복한 배우예요. 전.”
클로즈업한 스크린에 보이는 서준의 눈가에 반짝이는 것은 눈물이리라.
새싹들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앞으로도 열심히 연기할 테니까! 기대해 주세요! 여러분!”
와아아아!!!
서준이 팔을 크게 흔들며 인사하자, 오늘 행복했던 감정들과 아쉬움을 토해내듯 새싹들은 커다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은 막지 못한 듯, 블루문의 [블루문]이 흘러나오며 무대의 막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너의 빛을 받아!]
[가장 높이 올라-!]
[가장 밝게 빛날 거야-!]
방긋 웃은 서준이 이내 그 막 뒤로 사라졌다.
[네가 볼 수 있도록]
“이것도 공연했으면 좋았을 텐데…… 파란 머리 서준이 또 보고 싶다…….”
“그쵸? 전 다른 색 머리도 보고 싶어요. 아, 혹시 SNS 하세요?”
“네! 잠시만요!”
팬미팅를 진행하는 사이 친해진 새싹들이 서로의 연락처와 SNS를 주고받으며 주섬주섬 짐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송유정과 임예나, 강태영도 비슷했다.
“오늘 재미있었어요! 혹시 SNS 하시면…… 아…….”
“아…….”
이야기가 너무 잘 통해서 SNS를 물어보려다, 강태영이 유명한 배우인 걸 떠올린 송유정과 임예나가 아차, 싶었다.
나이 차이도 있는 데다가 사심은 1도 없고 오직 서준에 대한 이야기만 나눌 테지만, 기레기들은 그런 건 1도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스캔들은 절대 안 돼!’를 외치는 매니저 주용진을 떠올린 강태영이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다음에 또 인연이 되면 봬요…….”
어째선지 시무룩하게 내려온 꼬리와 귀가 보이는 것 같았다. 송유정과 임예나도 아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짐을 정리했다.
“아까 물병을 여기 뒀는데? 의자 밑으로 들어갔나?”
“어두워서 안 보이나 봐.”
“응원봉 켜드릴까요?”
손전등 대신 응원봉을 사용하자는 강태영의 말에 임예나와 송유정이 엄지를 들어 올렸다. 참…… 유명 배우만 아니면 덕질친구하기 딱 좋은데 말이다.
응원봉 불빛으로 의자 아래에서 물병을 찾은 송유정이 의아한 듯 팬 미팅장을 둘러보았다.
“근데 왜 불을 안 켜주지?”
“……그러게?”
송유정의 말에 임예나와 강태영도 팬 미팅장을 둘러보았다.
팬 미팅장은 여전히 어두웠고 출구로 안내해야 하는 직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새싹들도 세 사람과 같은 것을 깨달았는지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그때, 배경음으로 들려오던 코코아엔터 가수들의 노래가 멈추었다.
……!
그에 눈을 동그랗게 뜬 새싹들이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무대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서 번쩍번쩍 빛이 났다.
그건 뭐랄까.
일종의 파블로프의 개 같은 거랄까.
끝난 영화 > 켜지지 않는 조명 > 흘러나 오다가 멈춘 음악 >
‘설마…… 설마……!’
>> 쿠키 영상.
그리고 새싹들의 학습된 기대 그대로.
무대의 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기쁨과 놀람이 가득한 비명과도 같은 우렁찬 환호성에 팬미팅장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무대에 앉아 있던 악공들이 놀라 눈을 끔벅였고, 첫 무대와는 또 다른 멋스러운 한복을 입고 나온 서준, 아니, 성녕대군이 웃으며 마이크를 들었다.
“성대한 환영 감사합니다. 새싹 여러분.”
으아아아악!!
“기껏 내려왔는데 이대로 하늘로 돌아가기엔 아쉽고,”
으아아아……
성녕대군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웃고 우는 새싹들의 모습을 보던 악공들이 어깨를 잘게 떨며 웃었다.
“여러분들이 단잠을 자기를 바라는 서준 도령의 마지막 부탁으로 이렇게 왔습니다.”
꺄아아악!!
새싹들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서준은 열심히 연기했다.
“서양어로 하면 굿 나잇이라고 하지요? 그럼 잘 들어주세요. 서준 도령의 팬 여러분.”
[딱!]
성녕대군의 말이 끝나자 박을 든 악공이 소리를 냈다. 다시 한번 [따악!]
♬♪
성녕대군이 오른손에 쥔 활로 아쟁의 현을 긋고 왼손으로 현을 눌렀다. 아쟁의 현에 닿는 손길이 가볍고 우아했다. 그에 따라 다른 악공들도 각자의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굿나잇]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이들에게 보내는, 살아 있는 이들이 잘 지내기를 바라는 편지.
허 의관이 생각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내의원 꼭 정주행해야지……!’
하여튼, 그 곡을 이미 죽어버린 성녕대군이 연주하니, 마치 현실과 환상 그 사이에 있는 듯했다.
♪--
아쟁의 깊은 소리와 국악기들의 특유의 소리들이 합쳐져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굿나잇]과는 다른, 한국적인 느낌을 만들어냈다.
좋다.
성녕대군 마마의 말씀대로 단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주뿐만이 아니라 무대도 보는 맛이 있었다.
첫 공연 때는 ‘성녕대군 마마?!’ 하고 너무 놀라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다시 보니 무대가 눈에 잘 들어왔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성녕대군이 아쟁의 활을 긋고 현을 누를 때마다 입고 있는 두루마기가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움직였다. 갓에 달린 화려한 갓끈도 성녕대군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그리고 입가에 맺힌 고상하고 기품있는 미소까지.
역시 우리 대군마마셨다.
그렇게 새싹들이 끙끙 앓는 사이, 국악 버전 [굿나잇]도 어느새 끝에 다다랐다.
성녕대군을 연기하면서 아쟁을 연주하던 서준이 관객석을 둘러보았다.
아쉬움이 남지 않기 위해서 넣은 이벤트인데, 어쩐지 팬들의 아쉬움이 몇 배로 쌓인 것 같은 건 착각일까.
작게 웃은 서준이, 아니, 성녕대군 마마가 아쟁의 활을 내려놓았다.
“살아 있을 때…… 크면 무엇을 할까, 종친으로 형님 전하를 도울까, 아니면 허 의관과 함께 다른 일을 하게 될까, 종종 생각했었는데……이렇게 여러분들의 앞에서 연주를 하게 됐네요. 오늘 저와 악공들의 연주를 들어주어서 고맙습니다. 여러분.”
말하지 않았나.
팬들을 울리는 데 진심인 배우라고.
울먹이는 새싹들을 바라보던 성녕대군이 말을 이었다.
“이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세계로, 저는 제 세계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몸 조심히, 길 잃지 말고 빛을 따라 돌아가세요.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
부드럽게 웃는 성녕대군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무대의 막이 내렸다.
곧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팬 미팅장에 하나둘 출입구들이 열리고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빛을 따라 돌아가세요.
성녕대군 마마의 그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평범한 안내일 뿐인데도, 어쩐지 지금까지 이승과 저승 그 사이에 있었던 기분이 든 새싹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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