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87화
일단, 영화객에 대한 응징(?)은 뒤로하고.
새싹들은 어른이 된 정가람의 [굿 애프터눈]에 귀를 기울였다.
네 개의 현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활을 긋는 바이올린 선율도 아름다웠지만, 새하얗고 새까만 건반을 이리저리 누르며 소리를 내는 피아노의 선율도 그 못지않게 감미로웠다.
‘처음 굿 애프터눈을 들었을 때는 미래를 꿈꾸는 마냥 밝은 곡이라고 생각했는데…….’
연주하는 사람이 ‘그 정가람’이니 새롭게 들려왔다.
너의 오늘은 누군가 바랐던 내일.
그 문구가 지금처럼 절절히 느껴지는 때도 없었던 것 같은 새싹들이었다.
그렇다고 [굿 애프터눈]이 마냥 어둡게 편곡된 것은 아니었다.
의외로 가장 원곡에 가깝게, 그저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던 것을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만 바꿔놓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곡에 담긴 즐거움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오히려 너무 눈부셔 눈물이 나왔다.
새싹들이 목이 멘 사이에도 서준은 정가람을 연기하며 피아노 연주를 계속했다.
살랑이는 머리카락, 행복하다는 듯한 부드러운 미소.
엄마 아빠와의 행복한 일상, 권희찬과의 즐거웠던 시간, 여행하면서 했던 촬영을 떠올렸다. 그리고 앞으로의 영화감독이 될 미래를 상상하며 마치 깃털이 내려앉듯 가볍게 눈처럼 하얀 건반들을 눌렸다.
새하얀 스웨터를 입고 검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는 ‘정가람’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천사라니……!’
평범한 수식어가 ‘정가람’과 만나니, 또 슬픔이 울컥 올라왔다.
아니다.
우리 가람이는 살아있다.
영화객의 리뷰일 뿐이지, 살아 있어!
근데 왜 이렇게 눈물이 차오르고 가슴이 찢어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팬미팅장이 눈물로 가득 차는 사이, 정가람의 피아노 연주가 끝났다.
‘컷, 오케이.’
만족스럽게 연기를 끝낸 서준이 열심히 연주한 두 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그러고는 마이크를 들기 위해 손을 뻗을 때,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준이 작게 웃었다. 이럴 것 같았다.
“이번 곡은 가람이가 연주해 줬는데, 어떠셨어요?”
으허허헝!!
대답 대신, 연주가 끝나니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새싹들의 울음소리만 들렸다. 그에 팬들이 얼마나 ‘정가람’을 사랑해 줬는지 알 수 있어, 서준은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 분들이 많으니 가람이도 좋아할 거예요.”
……천국에서?
으허허헝헝!!!
새싹들이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그에 서준이 작게 웃었다.
배우를 놀리는 데 진심인 팬들만큼, 팬들을 울리는 데 진심인 배우였다.
[(선)하급천사의 부채가 발동됩니다.]
물론 달래는 것도 배우였지만 말이다.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적당한 여운을 남겨두고 새싹들은 조금씩 진정해갔다.
“다들 진정하셨으면 물 한 모금 마시세요.”
마치 선생님 말을 듣는 아이들처럼, 서준의 말대로 물을 마시는 새싹들이었다. 눈물로 배출된 수분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럼 다음은…….”
‘이서준의 팬미팅’인 만큼 서준과 보내는 시간도 넉넉했다.
‘가람이도 좋지만, 역시 서준이가 최고지!’
스크린 가득, 반짝이는 미모를 뽐내며 꽃처럼 웃는 서준의 모습에 다시 활기가 넘치기 시작한 팬미팅장이었다.
* * *
“다음으로 연주할 곡은,”
서준의 말에 새싹들 사이에 조금 긴장감이 들었다. 이번에는 어떤 캐릭터로 어떤 곡을 들고 나타날까.
“피아노가 계속 있는 걸 봐서는 피아노 연주인가 봐.”
“그러게.”
송유정과 임예나가 속닥거렸다.
강태영이 부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현실 친구랑 덕질까지 함께 하다니(게다가 같이 팬미팅에 당첨될 정도로 운이 좋은), 진심으로 부러웠다.
“굿 이브닝입니다. 그럼 전 준비하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찡긋, 웃은 서준이 무대 뒤로 들어갔다.
서준의 눈웃음에 비명도 못 지르고 허억, 하고 숨 쉬는 것도 잊고 있던 새싹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서준아……!”
“그렇게 웃으면 심장이……!”
아니, 정신을 차린 건 아닌 것 같았다.
“오늘 팬미팅 오길 잘했다. 나새끼.”
“하나하나 레전드가 아닌 게 없어!”
새싹들이 황홀경을 헤매고 있는 사이, 일부 새싹들은 이번에는 어떤 캐릭터가 나올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 안 나온 캐릭터가 뭐가 있죠?”
“그러니까…….”
팬미팅 시간도 정해져 있으니, 서준이 연기했던 캐릭터들이 전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연주곡이 굿 이브닝이라는 게 힌트가 되지 않을까요?”
[굿 이브닝]
린다 가족의 연주를 듣고 그레이가 황금빛 노을과 밀밭을 보면서 연주한 곡으로, 가족 간의 사랑이 잘 느껴지는 곡이었다.
가족. 가족.
“생존자들!……은 이미 했고.”
“으음.”
송유정과 임예나, 강태영도 고민에 잠겼다.
“……설마 윌리엄인가?”
“역시 그것밖에 없긴 하지?”
앞서 나왔던 작품들을 제외하면 가장 가능성 있는 캐릭터였다.
“쉐도우 앤 나이트도 나온다고 하고.”
“그렇죠? 영화객 님…….”
임예나의 말에, 강태영은 잠시 애증의 리뷰어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가끔 핵매운맛을 보여줘서 열받기는 한데, 그만한 리뷰 실력을 가진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 리뷰 했던 매드해터 쿠키영상을 보면, 서준이는 벌써 ‘윌리엄 리’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할지 생각해 놓은 것 같더라구요.”
윌리엄의 발소리!
강태영의 말에 송유정과 임예나가 눈을 번쩍였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강태영을 바라보았다.
‘아참, 이 사람도 배우였지.’
너무 즐겁게 서준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서 잠깐 잊고 있었다.
하여튼, 그 추측은 불길이 번지듯 새싹들 사이로 번져 나갔다. 진짜? 정말로?! 관객석이 들썩였다.
윌리엄 리라니!
발소리만 들었던 그 주인공이 모습을 보여주고 피아노 연주까지 하는 건가!
새싹들의 눈동자에 기대가 가득 차오르고 있을 때, 무대가 하나의 빛도 없이 어두워졌다.
시작하려나 보다.
모두 숨을 죽였다.
스크린에 서양 궁전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아치형의 창문들이 나타났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창문들이라고 새싹들이 생각할 때, 창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곧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별이 가득한 밤하늘과 왠지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응?
잠깐만…….
……저기는?
생각을 더 이어나가기도 전에,
뚜벅뚜벅-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스피커를 울리는 그 발소리에,
새싹들은 영화객과 새싹0310호(강태영)가 나누었던 ‘발소리의 차이’에 대해 아주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무거운 긴장감이 팬미팅장을 가득 채웠다.
영화에서보다 배는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오싹함에 진땀이 났다.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는 아니었지만, 심장이 두근두근두근 빠르게 뛰었다.
어두운 무대 옆으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쳤다.
뚜벅뚜벅.
한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두운 와이셔츠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남자는 얼굴과 손만이 창백할 정도로 새하얬다.
발소리만 들어도,
누가 봐도,
진 나트라였다.
!!!!
무대는 물론이고 관객석까지 가득 채운 섬뜩한 분위기에 아무도 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모두 경악하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니, 이게 뭐예요. 배우님!
굿 이브닝이라면서요……!
그런 새싹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도 서준, 아니, 진 나트라는 우아한 걸음으로 걸어와 검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그의 표정은 차갑고 오만했다.
오싹하고 섬뜩하다.
……근데 멋있어!
별이 가득한 밤하늘, 나트라 궁전의 아치형 창문, 검은 그랜드 피아노, 정장을 입은 서준(진 나트라)까지.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분위기에 새싹들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런 분위기의 서준이도 너무 좋아!
물론, 스크린이 아닌 직접 만나게 된 진 나트라가 무서워서 비명을 지르지는 못했다.
잠시 가만히 있던 진 나트라가 피아노 건반 위에 새하얀 두 손을 올렸다.
♬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며, 스크린에는 밤하늘이 사라지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진 나트라의 모습이 확대되어 비쳤다.
첫 부분은 원곡처럼 사랑이 담긴 선율이었지만 불안불안한 느낌도 있었다. 마치 진 나트라의 어린 시절처럼.
나는 누구인가. 아버지와 누나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 걸까.
고민하던 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 새싹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렇게 불안한 사랑이 이어지던 중, 진 나트라는 진실을 알았다. 충격받은 진 나트라의 마음처럼 들려오는 선율도 무겁고 무거웠다.
가족의 사랑이 가짜였다는 사실에, 아이를 사랑해 줄 진짜 가족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다.
곡의 흐름에 따라 연주하던 진 나트라의 표정도 변했다. 가족의 사랑을 원하는 표정, 외로운 표정, 그리고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입술을 꽉 깨무는 모습까지.
아아-
원곡에서는 황금빛 노을로 표현됐던 뜨거운 불꽃이, 지금은 아이의 심장에서 피어올라 아이의 몸까지 태우기 시작했다.
그건 복수였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결국 자신까지 불태워 버리는 파멸적인.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진 나트라의 손짓이 빨라졌다. 강렬하고 숨이 막히는 아득한 음들이 새싹들에게 밀려들었다. 피할 수도 없는 감정들이 쏟아져 내렸다.
‘이게 진 나트라의 굿 이브닝.’
가족의 사랑,
을 원하고 또 원하던 아이의 연주였다.
천천히.
쏟아내던 감정들이 다시 차분해졌다.
표정과 몸짓으로 제 감정을 표현하던 진 나트라도 그에 따라 다시금 차가운 표정으로 변했다.
무언가 결심한 듯하면서, [진 나트라의 굿 이브닝]이 끝났다.
[(선)중급천사의 부채가 발동됩니다.]
서준이 피아노에서 손을 떼자 팬미팅장의 공기도 변했다. 그제서야 숨을 쉬는 새싹들이었다.
“다들 어떠셨어요?”
따뜻하고 애정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따뜻한 음색이 새싹들은 너무 반가웠다. 분장과 의상은 조금 전과 다름없었지만, 서준이였다. 위험한 진 나트라도 좋긴 했지만 지금의 다정한 서준이가 더 좋았다.
역시 우리 배우님의 온오프는 대단해.
물론, 감탄은 잊지 않았다.
-슬펐어!
-오싹했어요!!
-다른 공연하고는 다른 것 같았어!
새싹들의 의견에, 가볍게 흐른 땀을 닦아낸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네. 맞아요. 지금까지 미래의 모습을 보여준 캐릭터들과 다르게, 진 나트라는 이제 윌리엄 리가 됐기 때문에 미래의 모습이랄 게 없거든요.”
그렇다.
이제 기억을 잃은 윌리엄 리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뭐랄까. 같은 사람인데도 사라진 진 나트라를 생각하니 새싹들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래서 지구를 침공하기 전날의 진 나트라를 연기해 봤어요. 빌런이었지만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하면서요.”
아하.
그래서 앞서 공연들과 다른 느낌이 들었던 것이었다.
“왠지 집에 가서 쉐도우맨3를 봐야 될 것 같은 느낌이에요.”
“저도 꼭 보려고요.”
임예나의 말에 강태영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다른 작품들도 다시 정주행해야 할 것 같았다.
* * *
“이제 드디어 제 연주를 들려드릴 차례가 됐네요.”
잠시 새싹들과 잡담을 나누던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와아아악!!
그 말에 진 나트라의 여운에서 벗어난 새싹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캐릭터들 버전의 연주도 좋지만 서준의 연주도 직접 듣고 싶었다. 게다가 아직 그랜드피아노가 있는 걸 보면 피아노 연주일지도 몰랐다.
“이제 팬미팅도 끝날 시간이라는 거지만요.”
아아아아…….
그랬다. 이건 시간제한이 있는 팬미팅이었다.
조금 전과 확실하게 차이 나는 새싹들의 반응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 저도 엄청 아쉬워요. 근데 다들 집에 가셔야 하잖아요.”
-안 가도 돼!! 여기가 집이야!!
그 커다란 목소리에 서준이 빵 터졌다.
으아아아!!
그 귀엽고 멋지고 예쁘고…… 하여튼 온갖 좋은 수식어는 다 붙여버리고 싶은 내 배우의 웃음에, 새싹들은 아파트를 부수는 대신 응원봉을 잡고 흔들어댔다. 팬미팅이 끝나는 걸 아쉬워하는 마음도 듬뿍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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