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84화
조금 전,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
의상을 갈아입은 연주자들이 각자의 악기를 챙겨 무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푸른색의 단정한 한복을 입은 서준은 매니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봤어? 스태프들 놀란 거.”
대금 연주자가 웃으며 말했다. 리허설 때를 떠올린 다른 연주자들도 키득키득 웃었다.
“놀랄 만도 하죠. 어른이 된 성녕대군마마라니. 아무도 생각 못 했을걸요.”
미리 설명을 들어 서준과 연주자들이 국악기를 연주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 주체가 ‘성녕대군’이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스태프들이었다.
가야금 연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해해. 어른이 된 성녕대군이라니…… 드라마에서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으니까 상상도 못 할 수밖에.”
“그건 그래요.”
솔직히 연주자들도 처음 이 공연의 설명을 들었을 때는 의아해했었다.
이서준 배우가 아직 아역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내의원]에 나왔던 모습이라면 다들 ‘성녕대군’으로 봐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이서준 배우는 성인이었다.
“물론 어렸을 때 모습이 지금 모습에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요.”
그래도 어른이 된 성녕대군이라니.
어린 나이에 죽은 성녕대군을 어떻게 보여주나 했다.
연주자들은 ‘그레이 바이니’의 어른 모습을 보여주었던 [오버 더 레인보우2]는 영화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의상도, 배역도, 스토리도 갖추어져 있었으니 어른 배역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 무대는 의상도 평범한 한복(고급이긴 하지만)이었고 스토리나 대사는 따로 없는 그저 평범한 연주 공연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성녕대군’임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근데 그게 연기로 되더라.”
“그러니까요.”
연주자들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코코아엔터 가수팀 연습실에서 실전처럼 연습했던 당시.
배우 이서준은 왜 그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탑배우’인지 연주자들에게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대사는 진짜 한마디도 없었는데 말이에요.”
“순간 궁궐에 있는 것 같았다니까.”
“허의관이 왜 왕으로 만들려고 했는지 알겠더라.”
“저 그날 내의원 다시 정주행 했잖아요.”
“저도요!”
정말로 백 번의 설명보다도 한 번 눈으로 보는 게 확실하다는 말이 절절히 다가왔던 순간이었다.
“팬들도 엄청 놀라겠죠?”
“안 놀랄 사람이 없을걸.”
연주자들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이제 준비하겠습니다!”
스태프의 말에 연주자들이 각자 자리를 잡았다. 매니저와 이야기를 마친 서준도 무대 중앙, 아쟁이 놓인 자리에 앉았다.
“오늘 공연 잘 부탁드려요.”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성녕대군마마.”
“하핫.”
장난스럽게 꾸벅 인사하는 연주자들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서준은 시선을 앞으로 돌려 앞을 가린 막을 바라보았다.
아까 슬쩍, 관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새싹들의 모습을 보았다. 다들 상기된 표정으로 소중히 응원봉을 잡고 재잘재잘 떠들던 모습이 서준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작품 촬영도 좋지만 이렇게 팬들과 만나는 자리도 정말 좋았다.
‘열심히 하자.’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드리자.
[딱!]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박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를 바로 하는 연주자들처럼 서준도 아쟁 위에 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팬미팅 준비를 하는 동안 했던 ‘어른 성녕대군’에 대한 분석을 다시금 떠올렸다.
[따악-!]
‘레디,’
배우에게만 효과가 있는 마법의 주문.
[성녕대군마마이십니다.]
‘액션!’
[(선)어린 사자왕의 위엄이 발동됩니다.]
서준, 아니, 성녕대군이 거기에 있었다.
* * *
강태영은 가끔 눈물과 함께 [내의원]을 정주행하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만약 성녕대군이 병을 이겨내고 자랐다면 어떻게 자랐을까.
[오버 더 레인보우2]의 어른 그레이 바이니를 보면서도 몇 번 생각해 보았다.
어릴 때처럼 천진난만하게 자랐을까.
아니면 사춘기를 겪고 사고뭉치로 자랐을까.
아니면 형인 세종대왕님처럼 훌륭하게 자라 나랏일을 도왔을지도 몰랐다.
어떤 추측을 해도 이미 죽어버린 터라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슬펐다.
[성녕대군마마이십니다.]
……!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후광과 함께 장성한 성녕대군마마가 나타난 것이었다.
12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죽어 [내의원]에서는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어른이 된 성녕대군’이었고, 대사도 하나 없었고 배경도 평범한 무대일 뿐이었으나, 새싹들은 납득할 수 있었다.
저기 중앙에 앉아 순하게 웃고 있는 남자가 정말로 성녕대군마마라는 것을.
서준의 훌륭한 연기력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으아아아……!
새싹들이 완벽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마음속으로는 소리 없는 비명을, 겉으로는 홍수 저리가라할 정도로 눈물을 쏟고 있을 때였다.
[따악!]
또 한 번 박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와 달리, 그 소리는 공연의 진짜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는지, 각자의 악기를 손에 쥔 악공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야금, 해금, 대금, 단소, 세피리 등의 국악기들의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길쭉한 아쟁을 앞에 두고 고운 한복을 입고 앉아, 허의관이 봤을 후광을 내뿜고 있던 성녕대군도 가벼운 손길로 아쟁을 어루어만졌다.
디잉-
오른손으로는 활을 밀고 당기고 왼손으로는 현을 누르고 튕기니, 마치 바닥에 내려놓고 연주하는 바이올린이나 첼로와 비슷한 것 같았다.
폭풍눈물을 흘리던 새싹들은 얼른 눈물을 닦아내고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무대 위의 성녕대군마마를 바라보았다.
이건 놓치면 안 된다. 절대 안 돼!
하지만 새싹들의 양쪽 귀는 다른 쪽으로 신경이 쏠린 것 같았다. 마냥 무시하기에는 스피커로 들려오는 연주가 너무, 너무 좋았다.
[(선)태백 구미호의 풍류가 발동됩니다.]
[(선)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이 발동됩니다.]
서준과 악공들의 머리 위에서 숫자들이 반짝이고 있었으니, 안 좋을 리가 없었다.
강태영과 임예나, 송유정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저 ‘성녕대군마마’의 출연을 위해 낯설지만 국악 공연을 하나 싶었는데, 잘 들어보니 익숙한 곡이었다.
“오버 더 레인보우……!”
국악버전으로 편곡된 [오버 더 레인보우]였다.
귀를 기울이니, 어쩐지 [내의원]의 영상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성녕대군’과 ‘허의관’의 이야기가.
설렘, 즐거움을 표현한 부분에서는 서로를 처음 만났을 때와 행복했던 성녕대군과 허의관의 한 때가 저절로 떠올랐다.
크흡.
새싹들이 눈물을 삼켰다.
분명 행복한 부분인데도 눈물이 차오르는 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알기 때문일까.
예상처럼 좌절 부분에서는, 병에 걸린 성녕대군이 죽었을 때 느꼈던 허의관의 절망이 물씬 느껴졌다.
악기 때문인지, 아니면 편곡을 그렇게 한 것인지, 원곡보다 보다 짙고 어두운 서글픔이 느껴졌는데, 그게 너무나 절절해서 [내의원]을 볼 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내의원]을 가장 좋아하는 강태영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거의 울면서 공연을 바라보았다. 그런 새싹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오버 더 레인보우]의 마지막 부분, 찬란.
원곡에서는 그레이와 친구들이 희망을 발견해서 이루어나가는 장면이라 그 어느 부분보다 밝은 부분이었지만, 편곡된 [국악버전]은 달랐다.
밝긴 했으나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성녕대군과 닮은 약초꾼 아이를 치료한 내용을 성녕대군의 묘 앞에서 읊다가 결국 그 앞에 엎드려 울면서 ‘돌아와 주십시오……!’라는 소원을 토해내는 허의관의 목소리처럼, 절절하고 슬픈 악기의 소리들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흐윽, 흐으윽…….
미처 막지 못한 얕은 흐느낌이 관객석 여기저기에서 작게 들려왔다.
서준, 아니, 성녕대군이 옆에 놓인 마이크를 들었다. 그러고는 [내의원]에서 봤던, 장난기 많던 모습 그대로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성녕대군입니다. 허의관과 여러분이 얼마나 열심히 저를 찾던지, 옥황상제님께서 잠시 내려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보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
아주 짧은 침묵 후.
으어어헝헝!!!
팬미팅장은 새싹들이 대성통곡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 * *
“농담이었는데 말이죠…….”
새싹들의 대성통곡에 서준이 난감한 듯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팬미팅이니 계속 ‘성녕대군’으로 있을 수는 없어, ‘컷!’을 외친 것처럼 서준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서준아…… 그런 농담은 심장에 위험해…….”
강태영의 혼잣말에 코코아엔터에서 좌석마다 준비해둔 휴지를 꺼내 눈물을 닦던 임예나와 송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지를 봤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작품이 아니라 팬미팅장에서 이렇게 울게 될 줄은 몰랐어.”
“저도요.”
중간에 나눠줄 간식을 먹을 때 사용하라고 놔둔 휴지와 틈틈이 마시라고 놓아둔 물병인 줄 알았는데, 너무 울어서 탈수가 올까 봐 준비한 물이었다니.
너무…… 너무…….
“……일 잘하네. 코코아엔터.”
“이런 서프라이즈라면 백 번 천 번 당해주겠음.”
앞자리에서 들려오는 새싹들의 목소리에 강태영과 임예나, 송유정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이 된 성녕대군이라니. 다시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다들 이제 좀 진정하셨어요?”
“크흡…… 네에…….”
한복을 입고 꽃처럼 활짝 웃는 서준을 보니, 새싹들도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우리 배우님.
대단해…… 잘생겼어…….
“그럼 다시 한번 인사 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배우 이서준입니다!”
꺄아아아악!!
그렇게 본격적으로 배우 이서준의 팬미팅이 시작되었다.
* * *
“어때요, 안 이사?”
사장 서은찬의 등장에 스태프들이 슬금슬금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며 웃던 안다호가 대답했다.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촬영은요?”
그에 안다호의 고개가 한쪽으로 향했다. 모니터가 여러 대 있는 곳에서 오늘 촬영을 맡은 촬영감독이 엄지를 척 들고 있었다.
“괜찮다네요.”
하하.
서은찬이 웃으며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서준은 입고 있던 한복을 벗고 편안한 복장으로 의자에 앉아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준의 얼굴에서도 팬들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물론 팬들의 눈은 부어 있었지만.
붉은 기가 남아 있는 팬들의 눈가에 서은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촬영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건 그렇습니다.”
안다호도 동의했다.
저런 새싹들의 반응을 보니 감동과 눈물이 담긴 후기는 당연히 올라갈 터였고, 그 후기를 본 팬미팅에 오지 못한 새싹들의 반응도 저절로 상상이 됐다.
-□□!?□□□□!??!?
-□□□□?!?
-□□□□□□?!??
-□□□□!!!□□□□!!!!
음.
모자이크 처리를 해도 무섭군.
서준이 성인이 되고 어린 팬들이 유입되면서 반말과 존댓말이 어우러져 가고 있는 [새싹부터]지만 그래도 여전히 차분한 분위기인데, 만약 오늘 팬미팅에 대한 게 알려지면 그 착한 [새싹부터]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진짜 회사까지 쳐들어올지도…….’
안다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서은찬이 물었다.
“DVD 판매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죠?”
“다른 건 다 준비해 놨습니다. 영상만 편집해서 DVD로 제작하면 됩니다.”
DVD 패키지부터 포토카드 등의 굿즈까지.
벌써 제작을 끝낸 상태였다.
“역시 안 이사.”
사장 서은찬이 엄지를 들어 올렸다.
* * *
“다음은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드릴 건데요.”
연주라는 소리에 웃고 있던 새싹들이 바짝 몸을 세웠다. 또 뭔가 나오는 건가?!
그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게스트랑 함께 연주하는 거니까 긴장 푸시고 편하게 들으시면 됩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이라는 곡이에요.”
JUN!!
BIN!!
열렬한 반응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네. 맞습니다. 제 동생인 빈, 김수빈 군이 함께 연주할 예정입니다. 모두 큰 박수로 맞아주세요!”
짝짝짝!!!
팬미팅장을 가득 채운 박수와 환호성에 무대 끝에서 두 대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든 수빈이가 조금 어색하게 굳은 걸음으로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수빈이는 이런 환호성이 가득한 무대에는 서 본 적이 없었지?’
지금껏 수빈이가 섰던 무대는 콩쿠르뿐이었는데, 콩쿠르에서는 박수를 치지 않고 조용히 있는 것이 예의였기 때문이었다.
조금 걱정된 서준이 수빈이를 바라봤다가 웃고 말았다.
언제 어색한 모습을 보였냐는 듯, 관객석을 한번 둘러본 수빈이가 상기된 얼굴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내 동생.’
서준은 수빈이가 전해준 바이올린을 들며, 평소처럼 수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빈이도 익숙하다는 듯 헤헤 웃었다.
꺄아아악!!
그 자연스러운 형제의 모습에 새싹들이 팬미팅장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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