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66화
김수한은 이어폰을 끼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영화관 구석에서 앞 타임의 상영이 끝나길 기다렸다.
이어폰을 낀 이유는 [오버 더 레인보우2]를 본 사람들(유니버스로 보고 다른 영화를 보러온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오는 스포일러를 실수로라도 들어버릴까 봐 그런 것이었고, 모자를 쓴 이유는 자신이 ‘나 진의 첫 팬’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조금 시끄러워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김수한 감독도 일반적인 영화관이라면 이어폰이라면 몰라도 모자는 쓰고 오지 않았을 거다. 엄청 유명한 감독이 아니면 알아볼 일반인들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여기가 어딘가.
배우 이서준의 팬, 새싹들이 잔뜩 모인 장소였다. 이번에 서준의 담당이 된 새 매니저에 대한 정보도 빠르게 퍼진 새싹들 사이에서, 예전부터 성덕으로 기사가 났던 ‘나 진의 첫 팬’인 김수한 감독을 알아보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터였다.
‘뭐, 그렇게 크게 떠들썩해지지는 않겠지만.’
다들 서준의 전역 후 첫 작품인 [오버 더 레인보우2]를 보러 온 만큼 김수한에게 오래 신경을 쓰진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조용하게 관람하기를 원하는 김수한이었다.
>영화관이냐?
<ㅇㅇ 이제 곧 시작함.
<넌 봤냐?
>아쉽지만 유니버스로 봤지.
>영화관에서 봐야 했는데……
매번 붙어 다녔던 고등학교 친구들은 다들 바빠서 같이 오지 못했다. 할 일 없이 노는 것보다 바쁜 게 좋은 일이니 김수한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영화는 역시 영화관에서 봐야지!
<여기 스크린도 크고 음향기기도 좋다더라ㅋㅋㅋ
<실제로 연주 듣는 느낌이라고 하던데ㅋㅋㅋ
그래도 물론 놀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 때문에 오지 못한 친구들의 아우성이 섞인 메시지가 쏟아지자, 김수한이 킬킬 웃었다. 그에 친구들이 약이 오른 모양이었다.
>……
>그레이가 뉴욕에서 연주했는데,
김수한은 얼른 바나나톡 메시지 창을 껐다.
스포일러할 녀석들은 아니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법이 있으니까.
“5관 오버 더 레인보우2 대관 상영! 입장하시겠습니다!”
이제 들어갈 차례도 됐고.
“오버 더 레인보우2를 영화관에서 상영한다고?”
다른 영화를 보러온 일반인들이 그 안내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유니버스에 공개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영화관에서 볼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우리 저거 보자.”
“오버 더 레인보우2 자리 있어요?”
“아뇨. 저건 팬분들이 대관한 거라서 티켓을 판매하고 있지 않습니다.”
일반인들과 영화관 직원의 대화를 들으며, 어깨를 으쓱한 김수한과 새싹들이 상영관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 어두운 공간. 배정받은 좌석에 앉는데 어쩐지 가슴이 떨렸다. [오버 더 레인보우1]을 떠올려보면 연주홀의 관객석이었던 자리였다.
김수한은 팝업스토어에서 새롭게 산 1편 기념 티켓을 괜스레 만져보았다. 그때의 감동은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했다. 그리고 다른 봉투에 들어 있는 2편 기념 티켓도 꺼내보았다.
[김수한 님. 당신의 깊은 우정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친구, 그레이 바이니 드림.]
으히히힣.
바보 같은 웃음이 나왔다.
‘뭐, 내가 좀 오랜 친구이긴 하지.’
‘그레이 바이니’로 치자면 10년, ‘이서준’으로 치자면 15년쯤.
오랜 친구가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기대가 됐다.
김수한과 새싹들이 설레며 영화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 김수한이 꺼놓은 바나나톡 단체창에 메시지가 쌓여갔다.
>살인범으로 지목받음.
>ㅇㅇ 추격전도 나온다.
>에이ㅋㅋㅋ김수한 고새 튀었네.
>ㅋㅋ그러게ㅋㅋㅋ낚을 수 있었는데ㅋㅋㅋ
>근데 살인범은 너무 뜬금없지 않냐ㅋㅋ
>22 오버 더 레인보우 급작스럽게 범죄물로ㅋㅋㅋ
>ㅋㅋ차라리 사고를 당했다고 하지
>휴지는 챙겼나 몰라.
>오. 어쩐 일임? 너 요즘 바쁘잖아?
>그러게. 잠 잘 시간도 없다더니, 영화 볼 시간은 있음?
>서준이 영화인데 봐야지.
>어허! 서준이라니! 선배님이지! 선배님!
>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서준이 경력이 경력이라 요즘 배우들 중에는 후배가 아닌 배우가 없을 듯ㅋㅋㅋ
>그러니까ㅋㅋ
* * *
“서준 선배님!”
“아니, 그러지 말라니까요. 찬희 형!”
코코아엔터의 막내 배우, 김찬희 (그래도 서준보다 형이다)이 으헤헤 웃으며 달라붙자 서준이 어색하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그에 더 재미있는지 다른 배우들도 ‘선배님! 선배님!’ 하며 달라붙었다.
아무래도 경력이 중요시되는 연예계다 보니, 서준도 선배님이라는 단어에 나름 익숙하지만, 친한 배우들에게 듣는 건 놀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팝콘이며 음료수며 바리바리 챙겨주는 배우들의 모습에 서준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선배라면서 챙겨주는 건 동생 취급이었다.
회의 때문에 조금 늦게 도착한 배승원과 권강민이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이렇게 친해질 거라고 생각 못했는데 말이야.”
“그러게.”
무명과 유명.
경력 차이는 많이 났지만, 같은 소속사의 동갑으로 편하게 지내고 있는 배승원과 권강민이었다. 연기에도 열정적이라서 이야기 나누기도 좋았다.
“형들 오셨어요?”
“오빠! 이제 곧 시작한대요!”
뭐, 코코아엔터 소속 배우들이 다 그랬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한 사람쯤 이상한 녀석이 있게 마련인데, 어떻게 뽑아도 이렇게 연기를 좋아하는 배우들만 뽑을 수 있었는지. 역시 코코아엔터인가. 하는 생각이 든 권강민이었다.
“형들 팝콘 드실래요?”
서준의 물음에 배승원이 웃으며 말했다.
“글쎄. 영화 보면서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저 휴지 엄청 챙겨왔어요!”
이곳은 코코아엔터 3층에 위치한 다목적홀.
원래는 가수팀의 가수들이나 연습생들이 무대를 경험하거나 코코아엔터의 단체 회의가 있을 때 무대 위에 올라 발표를 하는 등의 행사가 열리는 곳이지만 오늘은 [오버 더 레인보우:포 마이 프렌드]를 상영할 예정이었다.
배우들은 물론이고 가수들, 연습생, 직원들까지 누구나 와서 볼 수 있었다. 물론, 모두 동시에 자리를 비울 수는 없어서 교대로 관람해야 했지만.
“영화관보다 여기가 좋죠?”
“당연하지. 여기 음향기기만 해도 얼마짜린데.”
“이번에 안 이사님이 미국 다녀오시면서 또 새로 들여왔잖아.”
“오오!”
대선배인 브라운블랙과 화이트도 있었다. 선배들과 편하게 대화하는 레드 크라운과 블루문 멤버들과 달리, 별생각 없이 ‘서준 선배님 영화라니! 좋아!’ 하면서 왔다가 쭈구리가 된 신인 걸그룹 앰버와 남자 연습생들도 보였다.
“너희 서준이가 이서준 실드 줬다며?”
“그거 되게 편함.”
“진짜 힘들 때 쓰면 좋아. 직원분들한테도 통하니까 앰버 너희들도 써봐.”
“넵! 저번에 이서준 선배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존경하고 좋아하는 레드 크라운과 블루문이 친절하게 대해준 덕분에 금세 에헤헤 풀린 얼굴로 편해진 모습들이었다.
“왜 주제가 이서준 실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수팀, 김상우 이사의 말에 사장 서은찬과 배우팀 안다호 이사가 작게 웃었다. 한참 분위기 좋은데, 맨 뒷자리에 세 사람이 앉아 있다는 걸 알면 기절할지도 몰랐다.
“시끌벅적해서 좋네.”
“그러게 말입니다.”
배우팀 직원들이 웃으며 배우들과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열정적인지 이 짧은 시간에도 매니저와 이야기하는 배우의 모습도 보였다. 가수팀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일 욕심이 있어. 배우팀도 그렇지?”
“예. 성과도 좋습니다.”
김상진 이사의 말에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준과 같은 소속사 배우’라는 이름이 무거울 텐데도 다들 열심히 제 실력, 아니, 그 이상을 발휘해 주고 있었다. 기존에도 주연급이었던 권강민 배우는 더 높은 위치에 올랐고 무명이나 신인이었던 배우들도 신선한 얼굴로 주목받으며 주, 조연급에 자리를 잡았다.
겨우 2년.
역시 코코아엔터 배우들, 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인지도가 탄탄해졌다.
“정말 좋네.”
아주 옛날, 낡은 사무실에서 연습하던 브라운블랙의 모습을 떠올린 서은찬과 김상진이 빙그레 웃었다. 배우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서준을 보며 안다호도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함께 해온 만큼 앞으로도 함께 즐겁고 행복하게 해나가길 바랐다.
“그럼 지금부터 오버 더 레인보우2 : 포 마이 프렌드를 관람하시겠습니다!”
홍보팀 직원의 말에 모두 조용히 입을 다물고 반짝이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영화관 못지않게 큰 스크린이 내려오고, 지난달 안다호 이사가 미국에서 사온 최신형 음향기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다 같이 보는 건 처음이네.’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친구들과 같이 보는 것도 좋았지만 코코아엔터 가족들과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았다.
그동안 일반인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숨기고 영화를 본다고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정체를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재미있고.
영화가 시작되고 서준은 집중했다. 물론 직접 연기까지 한 터라 스토리는 다 알고 있었지만, 보고 싶은 장면들이 있었다.
노인 음악가와 세 악사.
그때는 그저 제작사에서 고용한 음악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때 연기에 집중하느라 미처 그들을 자세히 보지 못했었다.
알면 비로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이런 걸까.
노인 음악가의 연주가 들렸다.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음악가라서, 연주하는 것 자체로도 즐겁다고 생각해 그런 표정이 나온 줄 알았는데, 그 음악을 ‘나’에게 들려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한다는 것이 지금에서야 느껴져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세 악사도 마찬가지였다.
행복하게 연주하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이전의 모습이 알코올중독자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나’에게 들려주기 위해, 감사를 전하기 위해 이렇게 출연해 준 모습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누군가에게는 어설픈 연주일지도 모르나 서준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연주들이었다. 서준이 연주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이, 서준의 머리 위가 반짝 빛났다.
훌쩍-
서준이 조용히 휴지를 김찬희에게 넘겨주었다. 감수성이 얼마나 넘치는 형인지. 벌써 펑펑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슬쩍 옆을 보니 권강민도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슬럼프라는 건 어느 직업에서도 어느 사람이라도 느낄 수 있는 법이니까.
곧 [굿 애프터눈]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와아-
가수팀이 앉은 쪽이 들썩였다. 확실히 새로 들여온 스피커는 대단했다. 실연보다는 모자라긴 하지만 그 당시의 생생함을 어느 정도 보전해 주고 있었다.
[굿 이브닝], [자장가]와 [굿나잇]도, [굿모닝]까지.
배우들의 연기도 연주도 곡도.
연출도 스토리도 편집도.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스크린을 보던 안다호는 역시 아깝다고 생각했다.
영화관에 올라가지 않는 터라, 아카데미 시상식에 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음악상은 확실히 받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화제성만큼은 어마어마할 거다. 안다호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영화의 마지막이 가까워지자, 여기저기서 감동의 (소리 없는) 울음소리가 들리고, 휴지가 손에 손을 거쳐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브레드홀의 관객들의 정체를 알고 난 후에는 더욱 감격이 짙어졌다.
앞서 연주한 이들의 정체를 알게 된 블루문 멤버들이 감격했다.
실수가 많은 연주였지만 보통의 연주들보다도 듣기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모두 그 연주에 담긴 연주자들의 마음과 진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악은 이렇게 대단하구나!’
하고 블루문 멤버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할 때,
[모든 유대감이 최대치에 다다랐습니다.]
서준의 표정은 약간 어색하게 굳어있었다.
[(선)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선)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의 등급이 중급에서 중상급으로 상승합니다.]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고.
[(선)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중상급-]
지휘자와 연결된 존재들의 유대감에 따라 음악 실력이 최대 6배까지 증감합니다.
지휘자와의 유대감과 연결자들의 유대감이 숫자로 표현됩니다.
최대 연결 : 30 (5/30)
낄낄낄 웃는 정령의 나무의 모습이 환상처럼 보이는 것 같아, 서준은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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