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664화 (664/1,055)

0살부터 슈퍼스타 664화

[LA/ 자선 연주회 이틀 전]

그레이는 꽃다발을 사서 레베카를 따라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근데 이 다큐멘터리 방송해도 되는 거야?’

과몰입한 이미연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원래 촬영자의 맨얼굴과 삶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저 세계’가 진짜 있는 세계가 아니긴 하지만, 그레이 바이니의 팬으로서 슬럼프를 겪고 슬퍼하고 있는 모습을 방송하는 것은 싫었다.

‘조지가 알아서 편집해 주겠지.’

믿는다. 조지.

‘아니, 이게 편집본인가?’

자막이 있는 걸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이어지던 이미연의 생각이 멈춘 것은 그레이와 레베카가 도착한 장소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

열다섯 소년이라고 하길래, 친척이라도 만나러 가는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공동묘지였다. 데엥- 데엥-. 교회의 종소리도 들렸다.

레베카가 안내한 묘비에 꽃다발을 내려놓는 사이, 레베카가 전화를 받고 자리를 떴다. 타이밍을 맞춘 듯 누군가 나타났다.

“어머!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씨죠?”

꽃다발을 든 중년 여성이 그레이를 보며 놀라 물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연주 잘 듣고 있어요. 우리 아들도 엄청 좋아했어요.”

그레이가 놓은 꽃다발 옆에 꽃을 놓는 중년 여성의 모습에, 이미연과 관객들은 그 아들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럴 때면 그레이 씨의 연주를 들어요. 아들과 함께 들을 때의 기억이 떠오르거든요.”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면 연주를 부탁해도 될까요? 아들이 그동안 병원에만 계속 있어서 그레이 씨의 연주회를 한 번도 못 갔거든요. 꼭 가고 싶어 했는데…… 간단한 곡이라도 좋아요. 한 곡만이라도 부탁드립니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관객들도 안쓰러운 감정이 앞섰다. 열다섯. 어린 나이였다.

왠지 미리 준비한 것처럼 바이올린을 내미는 조지에 의아한 것도 잠시, 관객들은 악몽을 꾸지 않고 좋은 꿈을 꾸면서 편하게 잘 수 있는 음악을 들려달라는 엄마의 말에 눈물을 글썽였다.

가족을 잃은 기억이 있는 몇몇은 벌써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레이는 바이올린을 들어,

천천히. 고요하게.

차분하게. 평온하게.

이제는 깨어날 수 없는 잠을 청하고 있을 이들을 위한 [자장가]를 연주했다.

그동안 당신을 괴롭게 했던 악몽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저 행복한 꿈을 꾸기만을 바라는 남겨진 자들의 애정과 사랑이, 듣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정말 고마워요. 그레이.”

[자장가]를 들은 죽은 아이의 엄마가 붉어진 눈시울로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대신 표현한 듯, 사랑이 듬뿍 담긴 이 부드럽고 다정한 곡은 멀리 떠나버린 아이에게도 확실하게 들렸을 것이다.

“별말씀을요.”

그레이가 작게 웃고는 아이를 잃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슬픔과 걱정, 그리고 사랑과 애정으로 울듯 웃고 있는 표정에, 어쩐지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엄마가 떠올랐다.

“…….”

바이올린을 더 이상 연주하지 못하게 되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런 고민으로 밤새 뒤척이며 고민하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아직 극단적인 생각까지 뻗어 나가지는 않았으나, 그만큼 막막하고 암담했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엄마도 이렇게 계속 슬퍼하고 걱정하겠지.

그렇다면 그레이는 엄마가 오래 슬퍼하지 않기를 바랐다. 슬픈 기억보다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보다는 미소를 지어주면 좋을 것 같았다.

아마 여기 잠든 아이도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제가…… 한 곡 들려드려도 될까요?”

“네?”

“꼭 들려드리고 싶어서요.”

중년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화면에 등장한 조지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가 바이올린에 턱을 괬다.

이 곡은 죽은 자가 남겨진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이제 깨어나지 못할, 그러나 여전히 엄마를 사랑하는 아이의 마음을 대변하듯, 그레이는 천천히 활을 내리그었다.

연약한 음이 점점 강해진다. 마치 망자가 죽음의 끝에서 되돌아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망자는 느릿하게 흐르는 스틱스강을 건너 살아 있는 자의 앞에 섰다. 그리고 차갑지만 약간의 온기가 깃든 손으로 남겨진 이의 손을 맞잡는다.

꼬옥 잡는다.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5:  Good Night]

부디 오랫동안 슬퍼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뒤척이지 말고.

그저 간간이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남겨진 이가 잘 자기를 바라는 죽은 자들이 보내는 답장.

“아드님도 어머니가 이제 그만 슬퍼하길 바랄 거예요. 슬픈 기억보다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면서요.”

“네…… 고마워요…… 정말로…….”

중년여성의 울음과 함께 관객석에서도 작은 흐느낌들이 흘러나왔다.

* * *

[LA 숙소]

그레이와 레베카, 조지가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운록에 가자고?”

“응! 오랜만에 가 보는 것도 괜찮지 않아? 모레 있을 자선 연주회까지 시간도 남았고. 할 일도 없으니까!”

“다큐멘터리에도 그런 장면이 하나쯤은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네가 어떤 동네에서 자랐는지 말이야.”

보통 유명인의 다큐멘터리에서는 유명인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한 번쯤은 찍게 마련이었다. 더불어 ‘어릴 때부터 특별한 아이였지!’ 같은 말이나 ‘저랑 얼마나 친했다고요!’ 같은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이웃의 인터뷰도 넣고 말이다.

‘근데…….’

착각인가.

어쩐지 이동하는 장소마다 묘한 인연(그것도 음악적인)이 생기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의 목적지도 레베카나 조지가 정한 곳이기도 하고.’

(페이크)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기승전결과 사건사고 등의 스토리가 필요한 영화라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슬럼프에 빠진 그레이가 뭘 주체적으로 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일련의 의문을 잠시 묻어두고 이미연은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 * *

[다운록/그레이 바이니의 고향]

“다운록은 그대로네.”

“그러게.”

레베카의 말에 그레이가 동의했다. [오버 더 레인보우1]을 기억하는 관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변할 법도 한데, 다운록은 그대로였다.

“옛날 집 보러 갈까?”

“응. 그러자.”

그레이의 옛집. 작고 낡은 아파트.

[오버 더 레인보우1]에서 봤던 그 집을 찾아간다고 하니, 관객들이 더 가슴이 뛰었다.

변했을까. 변하지 않았을까.

옛집으로 향하는 길.

길거리의 변함없는 지저분함과 혼란함, 그리고 마구잡이로 그려진 그래피티들이 익숙하게 세 아이와 관객들을 반겼다.

“그래피티 잘 그렸다!”

“응? 그러-”

-게.

하고 대답하려던 그레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언제나 같은 풍경이라서 지나쳤던 그래피티들이 레베카의 감탄을 듣고 나서야 그레이와 관객들의 눈에 들어왔다.

“바이올린이지? 저건 첼로고!”

“피아노랑 플루트도 있네.”

그건 악기였다.

“그레이! 이건 오버 더 레인보우 악보야!”

“클래식 악보도 있네. 저 곡 알아, 레베카?”

“비발디의 사계 중에 봄이야.”

그건 음악이었다.

아……!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쉰 그레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와 함께 스크린에 변한 다운록의 모습이 비쳤다. 이미연과 박성아, 관객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왜 이렇게 됐지……?”

……그러게.

당황하는 그레이처럼 관객들도 넋을 놓고 다운록의 변화를 바라보았다. [오버 더 레인보우1]에서 봤던 암울하고 어두웠던 다운록이 아니었다. 이전의 다운록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에, 어쩐지 관객들의 마음까지 벅차올랐다.

“……그레이?”

“아저씨……”

“오랜만이구나!”

마주 잡은 아저씨의 손은 여전히 컸다. 아니, 조금 작아진 것 같다. 그레이가 컸기 때문이리라.

“다운록이…… 많이 달라졌어요. 아저씨.”

“네 덕분이야.”

“……저요?”

“그래. 다운록의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 다운록에서도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증명됐으니까 다들 희망이 생긴 거지.”

그레이는 얼떨떨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가 떠오르는 아침의 다운록.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언제나 어둡고 힘들며 지친 사람들의 모습이 가득했는데, 눈에 보이는 풍경은 전혀 달랐다.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어른들의 대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거기에는 마음을 아리게 하는 울음소리도, 귀를 찢는 날카로운 목소리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커다란 목소리도 없었다.

그저 웃음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전 세계를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보지 못했던, 다운록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대화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들린다. 귓가에 맴도는 소리는 태양처럼 따뜻하게 그레이에게 내리쬔다.

행복한 아침이다.

“그레이? 그레이잖아!”

“그레이라고?”

같은 건물에 살았던 형이, 이웃이, 가게 주인이, 다운록의 주민들이 그레이를 알아보았다.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얼굴들이었다.

한 명 한 명 얼굴을 살펴보던 그레이는 기억한다.

이들이 모두 자신을 지지해 줬다는 사실을.

“제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에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다.

“연주를, 해드려도 괜찮을까요?”

흘러나오는 그레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다운록의 주민들이 활짝 웃었다.

“당연하지!”

“뭐, 조금 지각하는 게 대수겠어!”

“얼마나 늘었는지 들어볼까!”

다운록의 주민들도 6년 전, 매일같이 바이올린을 연습하던 꼬마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어린 녀석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어쩌면 그게 이렇게 변한 계기일 터였다.

그레이가 조지를 바라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조지가 바이올린을 내밀었다.

그레이가 바이올린에 턱을 괬다.

그리고 햇살이 몸속으로 스며들듯 활을 그으며 연주를 시작했다. 조금 전 봤던 다운록 주민들의 아침, 그리고 다운록에서 행복했던 어린 날을 떠올리며 아침을 맞는 선율을 연주했다.

사랑하는 이, 엄마가 어린 그레이를 깨운다. 낡았지만 깨끗하게 세탁된 이불에서는 햇살 냄새가 난다. 그래서 더욱 포근해 일어나기가 싫었다.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반쯤 잠들어 있던 어린 그레이도 웃고 말았다.

엄마가 ‘이제 일어나야지.’ 하고 말한다.

그래. 이제 일어나야 한다.

맛있는 아침도 먹고, 소중한 친구들도 만나고, 선생님에게 바이올린도 배워야 했다. 오늘도 정말정말 즐거운 하루가 될 거다.

‘……이제는 다운록에서도 그런 하루하루가 펼쳐질 거야.’

그런 마음이 가득 담긴,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2 : Good morning]이 그레이의 바이올린에서 흘러나왔다.

흐으윽-

연주는 경쾌하고 아름다운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역시 휴지를 챙겨오길 잘했다.

‘서준이의 영화니까.’

이미연도 박성아도, 새싹들도 모두 들고 있던 휴지로 눈물을 닦아냈다.

이미 휴지가 흥건히 젖어 모자라는 이들도 있었지만, 옆자리에 앉은 처음 보는 새싹들이 친절해 새 휴지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다운록 못지않은 새싹들의 유대감이 쌓여갔다.

* * *

다운록의 모습이 천천히 어둠으로 물들고, 새로운 장소가 나타났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평범한 카페의 풍경은 마치 다큐멘터리에 종종 등장하는 인터뷰 촬영 장면처럼 보였다.

예상대로 인터뷰 촬영이었다.

대상자는 그레이 바이니의 친구, 레베카 리스와 조지 패트릭.

그레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거라는 새싹들의 생각과 달리 첫 질문부터 특이했다.

“이번 다큐멘터리를 찍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상사의 압력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고 관객들이 생각할 때, 조지가 그레이와 레베카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삐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뚱한 기분이 아주 확연히 드러난다.

“원래는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다큐멘터리 촬영.”

관객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랬어? 조지?

“그리고 친구라는 이유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공연과 바이올린 이외의 것에는 신경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다큐멘터리가 없어도 그레이는…… 잘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럼 마음을 바꿔서 촬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뉴욕에서의 공연 때문이었습니다.”

“그 공연은 아주 훌륭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조지와 레베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새싹들도 마찬가지였다. 영화가 처음 시작할 때의 연주회는 아주아주 훌륭했다. 다들 팔불출이었다.

“아주 훌륭했죠. 저희도 그저 감탄만 하고 있었을 정도로요. 그래서…… 연주가 너무 훌륭해서 그레이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그저 무대 위에서의 모습을 보면서 멍청하게 기뻐하기만 했죠.”

레베카와 조지가 축하의 꽃다발을 들고 웃으며 찾아갔던 무대 뒤의 장면이 다시 나왔다.

꽃과 꽃의 만남이라며, 새싹들이 좀더 보여달라고 속으로 외쳤던 그 장면.

꽃다발에 반쯤 얼굴을 묻은 그레이의 눈이 동그랗게 휘었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다들 알 수 있었다. 그건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애써 울음을 참는 12살의 그레이였다.

그레이는 이미 그때부터 그레이는 슬럼프에 시달리고 있었던 거였다.

그레이……!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새싹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멍청한 새싹! 나쁜 새싹!

저런 것도 못 알아채다니!

“표정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친구라면 알 수 있는 얼굴이었죠.”

마치, 그 사기꾼 선생의 정체를 알았을 때와 같은.

어찌할 줄 모르는.

절망적인.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던 레베카와 조지였지만, 티 내지 않으려는 그레이의 모습을 보니 그냥 웃으며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는 착해서, 지지해 준 분들이 기뻐할 만큼, 자랑스러워할 만큼 유명해지길 바랐죠. 그래서 공연을 하고 연주를 하고, 세계를 돌며 무대에 섰습니다.”

“자신이 연주하고 싶어 했던 이유도 잊은 채로요.”

자신을 응원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 더 넓은, 더 먼 세상에 닿기 위해 바다를 헤쳐 나가던 그레이였지만, 어느새 목적지를 잃고 방향도 잃고 망망대해를 헤매고 있었다.

“우리는 그레이를 도와줄 방법을 찾았어요. 해결하지는 못해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요.”

“꽤 괜찮은 계획도 세웠죠. 하지만 저희 둘만의 힘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방송국의 힘을 빌리게 됐죠. 거절했던 다큐멘터리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아아, 그래서.

두 아이가 이른 아침부터 그레이를 찾아갔던 것이 떠올랐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모두 친구를 위한 일이었다.

“괜찮은 계획이라는 건 뭔가요?”

“클리블랜드의 노인 음악가 기억하시나요? 갑자기 바이올린 연주라니 뜬금없긴 했죠? 시카고의 세 악사도 있었고 가족 전체가 악기를 연주하는 캔자스시티의 린다 가족도 그랬죠. 게다가 갑자기 공동묘지에서의 연주라니…… 우연치고는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했지.

너무 음악적인 요소들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추리가 맞음에 만족하는 이미연과는 달리, 박성아는 전혀 몰랐던 듯 입을 쩌억 벌렸다.

“전부 저희가 기획한 겁니다.”

그리고 조지는 영화를 보고 있던 모든 관객들을 놀라게 할 말을 내뱉었다.

“그분들은 그레이를 후원해 주셨던 분들입니다.”

?!?!

놀란 관객들이 진정할 틈도 없이, 조지와 레베카가 말을 이었다.

클리블랜드의 노인 음악가, 시카고의 세 악사 ,캔자스시티의 린다 가족의 이야기에 관객들의 눈과 입이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던 조지가 입을 뗐다.

“공동묘지에서 만났던 분은 아드님과 함께 그레이를 후원했다고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동안, 아드님의 행복이 크라우드 펀딩에서 보여주는 그레이의 연주를 듣는 것이라고 하셨죠.”

허억!

관객석 어디선가 소리가 났다. 하지만 모두 같은 마음이라 신경도 쓰지 않았다.

“몸이 나아 퇴원을 하게 된다면, 꼭 직접 그레이의 연주를 들어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 설마, 그런……!

놀람 뒤로 슬픔이 밀려들어왔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라고, 우연한 만남이라고 생각했던 그 만남이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을 줄이야!

‘다시 봐야지…….’

개봉했다면 N차를 뛰었을 거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박성아는 생각했다.

다운록의 일까지 설명한 조지와 레베카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계획만 남았습니다.”

“원래는 이게 가장 중요한 계획이었는데 말이에요.”

“마지막 계획이라면?”

다큐멘터리를 찍어야 했던 이유. 방송국의 힘을 빌려야 했던 이유.

“자선 연주회가 남았죠. 정확히 말하자면,”

조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레이 바이니를 위한 연주회가 말입니다.”

미쳤다……!

관객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멋지다! 조지! 레베카!

* * *

[LA 자선 연주회/브레드홀]

브레드홀의 대기실.

그레이는 조용히 테이블 위에 놓인 바이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결 가벼워진 그레이의 표정에 흘러내리던 눈물을 닦아내는 관객들의 마음 또한 가벼워졌다.

대기실에서 대기하던 그레이는 자선 연주회가 시작하기전 관객석으로 이동했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그레이를 보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레이도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기뻐하는 사람들에 그레이의 표정도 밝아졌다.

그레이의 양옆에는 레베카와 조지가 앉아 있었다.

“음. 이것도 찍는 거야?”

“편집할 때 조금 넣으려고.”

으흐흐흐.

이젠 조지와 레베카의 계획을 알고 있는 새싹들이라, 저렇게 시치미 떼는 모습이 참 귀여워 보였다. 잘한다! 조지! 레베카!

곧 관객석이 어두워지고.

삐---

하고 알림음이 들리고, 설레는 고요가 연주홀에 내려앉았다.

자선 연주회라서 그런지 아마추어팀들의 연주는 아주 훌륭하진 않았지만 표정만은 행복해 보여 새싹들까지 미소 짓게 만들었다.

세 번째 연주팀은 그레이보다 어린아이들의 연주였다. 나비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입고 어색한 걸음으로 무대 위로 나왔지만, 악기를 들고 있을 때는 즐거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그레이가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그렇게 이어지던 자선 연주회는 마지막 연주만을 남겨두고 20분간의 쉬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준비하러 가자. 그레이!”

“그래.”

그레이의 대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레베카와 조지가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도 충분한 것 같지만 아직 남은 것이 있었다.

그레이 바이니의 대기실.

쉬는 시간이 20분이나 됐는데, 그레이가 검은색 정장으로 갈아입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습하면서 기다릴까, 고민하는 그레이의 앞에 조지가 모니터를 설치했다.

“? 이건 뭐야?”

“오래 안 걸릴 테니까 보면 돼.”

고개를 갸웃하던 그레이가 알았다고 대답했다. 친구들이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할 리가 없으니까. 그레이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거기에서는,

소중한 친구들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다.

‘여기서 밝히는 거구나!’

관객들이 입을 틀어막고 두근두근한 얼굴로 그레이의 표정을 관찰했다. 자신들도 그렇게 놀랐는데 당사자인 그레이는 얼마나 놀랄까!

[그분들은 그레이를 후원해 주셨던 분들입니다.]

숨이 턱 하고 막히며,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그레이의 마음속에서 휘몰아쳤다.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제대로 인사를 할걸. 고맙다고 하고 싶었는데. 여러분 덕분에 바이올린을 계속 연주할 수 있었다고.

모니터 속 친구들은 오히려 후원자들이 그레이의 연주에, 노력에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연주하던 후원자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연주를 들으며 미소를 짓던 어머님과 다운록의 사람들도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잘하고 있었나 보다.

그들의 기대에 부족하지 않게, 잘한 모양이었다.

말없이 쌓여갔던 부담감이 눈 녹듯, 눈물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자선 연주회가 남았죠. 정확히 말하자면,]

모니터 속 조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레이 바이니를 위한 연주회가 말입니다.]

“……나를 위한 연주회라고?”

먹먹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레이에 조지와 레베카가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이 자선 연주회는 너를 위한 연주회야.”

“무대에 오른 연주자들하고 관객석에 있는 사람들. 누군지 알겠어?”

……응?

레베카의 말에 새싹들이 눈을 끔벅였다. 눈치 빠른 이들은 그 말을 이해한 듯 어느새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설마…… 설마……!

“그레이 네가 그랬잖아. 다들 너를 도와준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네가 처음 수익을 얻기 시작하면서부터 후원했던 사람들이야.”

그와 동시에, 모니터에 브레드홀에 가득 앉아 있는 관객들이 비쳤다. 그레이는 떨리는 눈동자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스크린 가득 관객석이 나타났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뭐라고요?

새싹들이 입을 쩌억 벌렸다.

이제 이 다큐멘터리의 비밀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프라이즈는 인터뷰로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널 후원해 주셨던 분들도 계셔. 다들 널 보러 와주셨어.”

그레이를 후원해 준 사람들과 그레이가 후원한 사람들이 브레드홀에 모여 있었다.

방송국의 힘이었다.

“그레이. 네가 이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은 것처럼, 널 후원했던 사람들도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 그저 네가 행복하게 바이올린을 연주하길 바라고 있어.”

안 그래도 눈물로 가득하던 그레이의 얼굴이 더욱 젖어갔다. 그 때문에 그레이는 말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가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닦아내도 닦아내도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지지해 주신 분들과 자신이 후원한 분들이 이곳에 모두 모여 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거.”

조지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건넸다. 겉모습만 보면 보통의 바이올린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본 그레이 바이니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스트라디바리우스.

3대 명기 중 하나였다.

“널 후원하셨던 분이 보내주신 거야. 괜찮다면 앞으로는 이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셨어.”

“……뭐……?”

그건 마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레이! 숨! 숨 쉬어!”

정말 숨도 쉬지 않는 상태였나 보다.

허억!

하고 숨이 들이마셔졌다. 새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변해가던 그레이의 혈색이 천천히 돌아……오지 못했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떨리는 눈동자로 케이스에 들어 있는 몇백 년 된 바이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연주한다고……?”

“꼭 연주하지 않아도 괜찮아.”

조지의 말에 그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네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야.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되고.”

레베카도 말했다.

“모든 건 네가 결정하는 거야. 그레이.”

조지와 레베카의 눈동자에 어쩐지 긴장이 확 풀어졌다.

두 친구의 눈동자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자신이 무슨 결정을 내리든 믿을 것이며 지지하겠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게 한때는 부담으로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그 어떤 위험으로도 자신을 지켜줄 것만 같은 커다란 보호막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창백하던 그레이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생겨났다.

친구의 미소에 조지도 레베카도 따라 웃었다.

“어떻게 할래?”

“할래. 연주.”

그레이 바이니가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손을 뻗었다. 조심스러우나 설렘이 가득한 손길이었다.

“하고 싶어.”

그레이 바이니의 눈동자가 10년 전처럼 반짝, 빛났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서프라이즈 속.

빛을 찾은 그레이의 모습에 새싹들은 이제 곧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마지막 연주를 기다렸다.

‘정말이지…….’

감동하고 울고 놀라고 또 놀라고 울고.

감정 기복이 아주 격렬했던 영화였다. 그래서 더 행복했다.

어둠 속에 서 있던 그레이는 빛나는 무대를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두려워지기 시작했던 빛나는 무대, 관객들의 기대, 홀을 가득 채우는 자신의 연주.

그레이는 손에 든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무겁게 느껴지던 바이올린이 오늘따라 가볍다. 아니, 무겁다. 그러나 따뜻했다. 뜨거웠다. 모두의 마음이 바이올린으로 실체화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레이는 더 이상 빛이 무섭지 않았다.

그레이는 뒤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 커다란 이벤트를 힘들게 준비했을 소중한 친구들이 거기에 있었다. 걱정이 가득한 조지와 레베카의 눈빛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래.

10년 전에도. 그 이후에도.

친구들은 이랬다.

어떻게 하면 다 갚아줄 수 있을까. 끙끙 앓으며 고민하게 될 정도의 애정을 주었다.

그레이는 알고 있었다.

친구들의 걱정을 없앨 말을.

“즐겁게 연주하고 올게.”

레베카와 조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리고 둥글게 휘어졌다.

“! 그래!”

“즐기고 와. 그레이.”

그저 한마디.

그말만으로도 함박웃음을 짓는 친구들에 그레이는 웃음으로 찔끔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숨겼다. 신이 주신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은 친구들일 터였다.

차르륵.

그레이 바이니의 손과 바이올린을 꽈악 묶고 있던 무거운 쇠사슬이 풀리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손에 든 바이올린이 가볍다.

차르륵.

그레이 바이니의 다리를 묶고 있던 쇠사슬도.

빛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가뿐하다.

차르륵.

그레이 바이니의 몸을 휘감고 있던 쇠사슬도.

무대를 가로지르는 걸음이 경쾌하다.

차르륵.

그레이 바이니의 어깨와 목을 감고 있던 사슬도.

우렁찬 박수 속에서 꾸벅 인사하는 모습이 홀가분하다.

하아!

그동안 온몸을 휘감고 있던 모든 사슬들이 모두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과 몸으로,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는 스트라디바리우스에 턱을 괬다.

첫 곡은 [오버 더 레인보우]의 OST, [오버 더 레인보우]였다.

10년 전 연주보다 훨씬 성숙해진 그레이 바이니의 연주는 설렘과 기쁨으로 관객들을 행복하게 만들었으며, 더욱 절절한 절망으로 가슴 아프게 만들었고, 끝내 파도와 같은 찬란함으로 저도 모르게 의자 손잡이를 꽉 잡게 만들었다.

새싹들은 언제 눈을 깜빡였는지, 언제 숨을 쉬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음악에 푹 빠져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음이 크게 공연장을 울리는 것을 끝으로 그레이의 활이 멈추었다.

열정적인 연주를 보여준 그레이 바이니가 꾸벅 인사를 하자 관객들이 약속한 듯 하나둘 일어나며 박수를 보냈다. 원래 그렇게 정해진 것이기도 했지만, 반쯤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사였다.

그때,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이 그레이 바이니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어?’

이미연은 어쩐지 기시감을 느꼈다. 이 장면을 본 기억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레이가 지금 입고 있는 정장도, 연주했던 스트라디바리우스도.

……!

새싹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이크를 든 그레이 바이니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 다들 입을 틀어막았다.

단정하게 머리를 넘긴 그레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맴돌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분이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레이 바이니가 벅찬 얼굴로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글자로만 표시되던, 그레이 바이니에게 후원해 준 사람들이, 그리고 그레이 바이니가 후원했던 사람들이 모두 실체를 가지고 앉아 있었다.

경이롭다.

문득 묘비가 떠올랐다.

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보고 있을 거야.’

입술을 꾹 다물고 관객석을 둘러보던 그레이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후원 덕분에,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오랜 지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짝짝짝짝!!

브레드홀을 가득 채우는 박수 소리가 들렸다.

10년 전, 이미연은 이 장면에서 기념 티켓을 꺼내보았다. 그리고 엄청난 감동을 느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벅차 올라 숨까지 멈춰 버린 느낌이었다.

‘오버 더 레인보우1의 마지막 장면이 이 장면이었구나!’

그럼 여기서 끝나는 건가 생각했지만, [오버 더 레인보우1]과 달리 그레이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려움을 딛고 이 자리에 모여주신 분들께도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멋진 연주였습니다.”

와아아아!!

그레이 바이니에게 후원받은 이들이 감사가 가득 담긴 환호성을 내질렀다.

“여러분들과 제 친구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곡이 있습니다.”

무대 뒤에서 붉어진 눈시울로 손바닥이 불타오를 정도로 손뼉을 치던 조지와 레베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지 않아도 친구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것 같아, 그레이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목은 For My Friend입니다.”

마이크를 내려놓은 그레이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섰다.

그리고 후원자가 준 스트라디바리우스에 턱을 괴고 활을 길게 내리그었다.

수백 년 동안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를 만나며 아름다운 음을 들려줬을 바이올린은 그레이의 손안에서도 훌륭한 선율을 들려주었다.

홀로 있는 이가 보였다.

쓸쓸하고 지치고 서럽고 외로운 이였다.

그건 그레이 바이니.

자신이었다.

눈을 감고 바이올린의 현을 누르고 활을 내리그으며, 그레이는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슬픔과 눈물을 곡을 통해 흘려보냈다.

마치 늪에 빠진 듯, 아주 천천히 그레이를 잠식해 나가던 우울은 깨닫고 나서는 너무 늦은 상태였었다.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우울의 늪에서 그레이는 마지막 힘을 짜내 손을 내밀었다.

얼굴 끝까지 묻힌 무거운 진흙에 숨이 턱 막히고 눈까지 가려져서 그저 아무도 없는 위로, 의미 없는 손을 간절히 내밀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감정이, 그레이의 숨죽인 울음이 가득 담긴 음은 듣는 이의 마음을 울렸다.

구해줘.

누군가.

나를…… 구해줘.

희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마지막 발악처럼, 고독이 진득하게 묻은 손을 의미 없이 내젓던 그때.

무언가 닿았다.

따뜻하다.

그에 손에 묻었던 진흙 같은 고독이 하나둘 떨어져 나간다.

잡힌 손에 이끌려 ‘나’는 천천히, 위로 끌어당겨져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간다.

♪-

따뜻한 손의 주인이 묻는다.

‘괜찮아?’ 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 ♬-

곡의 흐름이 바뀌었다.

길게 이어지는 음 하나하나마다 따뜻하고 황홀한 다정이 흘러넘쳤다.

마음속에 있는 감정의 그릇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흘러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가득 채웠다. 너무나도 충만한 감정에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가슴이 벅차다.

[For My Friend 나의 친구를 위해]

아름답고 순수한 선율에 온몸의 긴장을 풀리고 저절로 눈이 감겼다.

친구란 단어에

관객석에 앉아 있던 후원자들과 후원받은 이들은 ‘그레이 바이니’를 떠올렸고,

조지와 레베카는 ‘그레이’를,

그레이는 ‘조지와 레베카’, 그리고 ‘관객석에 앉아 있는 이들’을 떠올렸다.

손을 마주 잡고 인사를 하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직접 친분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크라우드 펀딩과 후원이라는 ‘특별한 인연’을 통해 이어진 ‘친구’를 위한 선율이 스트라디바리우스에서 흘러나와 브레드홀을 가득 채웠다.

♪-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고요 속.

그 누구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어린아이들마저도 조용히 듣고만 있을 정도로 그레이의 감정이 듬뿍 담겨 있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선율은 정말로 환상적이었다.

♩♬-

넘치는 다정과 애정과 사랑에도 끝은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연주한 듯,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그레이의 숨이 가빠졌다. 뜨거운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들을 적절히 선율로 표현하느라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럼에도 그레이 바이니의 표정만큼은 아주 행복해 보였다.

마치 클리블랜드의 노인 음악가처럼, 시카고의 세 악사처럼, 캔자스시티의 린다 가족처럼.

그리고 10년 전의 ‘어린 그레이 바이니’처럼.

♪-!

길다란 활이 마지막 현을 내리그었다.

하아- 하아-

그레이 바이니의 거칠지만 만족한 듯한 숨소리만이 울리는 고요 속.

짝짝!

하고 무대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웃으면서 울고 있는 레베카였다. 그 뒤를 이어 코를 훌쩍이는 조지의 박수 소리도 들려왔지만,

짝짝짝짝!!

와아아아!!

관객석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와 환호성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커다란 박수와 환호성 속.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는 그레이 바이니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짝짝짝짝!!

상영관도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정말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감동이었다.

그런 새싹들과 함께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치던 이미연은 곧 10년 전의 그날처럼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기념 티켓을 꺼냈다.

[이미연 님. 당신의 깊은 우정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친구, 그레이 바이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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