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663화 (663/1,055)

0살부터 슈퍼스타 663화

11월 30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마린사의 OTT플랫폼 [유니버스]가 출시되었다.

슈퍼히어로 영화 등을 제작하는 마린 스튜디오,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시즌 스튜디오, 일상&음악 영화를 제작하는 웨일 스튜디오와 ABS 방송국에서 방영했던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등의 프로그램들까지.

-가입! 가입! 가입!!!

-내 돈 가져가아아!!

-같이 보실 분 구함 (1/4)

=저요!!

오랫동안 수많은 팬들을 생성했던 작품들이 모인 플랫폼이 만들어지자, 밀려드는 가입자들로 사이트가 잠시 버벅거렸다.

-터지나? 터져?!?!?

-터지면 미국까지 찾아감(궁서체)

다행히도 터지지 않고 안정을 찾아가는 유니버스였다.

유니버스는 오리지널 작품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중 가장 관심을 받은 건 마린사의 추측대로 [오버 더 레인보우2]였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재생률이 가장 높았다.

아무래도 10년 전, [오버 더 레인보우1]를 감명깊게 본 세대들이 OTT플랫폼 사용자의 중심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오버 더 레인보우2]를 보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보지 않을 뿐만아니라 스포일러를 피해, 생명수 같은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는 노력까지 하고 있었다.

-영화관에서 봐야지!!!

=222 레인보우1 본 사람으로서 영화관에서 안 보면 큰일 남.

=333 음향 빵빵한 곳으로.

-왜 OTT로 공개하는 건데ㅠㅠㅠ

=개봉해(짝!)개봉해(짝!)개봉해(짝!)

[오버 더 레인보우2] 단관 이벤트([새싹부터]&코코아엔터 주최)에 당첨된 새싹들이었다.

-레인보우2 음원도 공개됐음ㅠㅠ탑100 자동재생 주의!

=벌써 탑 100이여??ㅠ

=서준이 곡이잖아ㅠㅠ

-ㅅㅂ 카페도 못 들어가겠네.

=22노래 틀어주는 곳은 다 못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됨.

=33그냥 길거리 걸어가도 들릴 듯ㅋㅋㅋㅋ(이어폰&헤드폰 낌)

-영화객님 리뷰는 언제하신대? 라이브로 보고 싶은데 OTT면 공개하자마자 보셨을 거 아님ㅠㅠ

=영화객님 [새싹부터] 주최 이벤트 당첨됨!! 그거 보고 리뷰하신대!

=헐? 똥손님이 웬일이시래? 몇 번째 타임인데?

=ㅋㅋㅋ마지막ㅋㅋㅋ

=앜ㅋㅋㅋ그때까지 스포일러 피하셔야겠네ㅋㅋ 난 중간 타임이라 다행임ㅋㅋㅋ

=ㅋㅋㅋ난 마지막ㅋㅋㅋ(안웃김)

=아앗……!

철저하게 스포일러가 막혀 있는 [새싹부터]의 게시판, [오버 더 레인보우2 아직 안 본 새싹들만(스포X)]만이 단관 이벤트에 당첨된 새싹들에게 유일한 대화 장소였다.

-저 [오버 더 레인보우2 후기(스포有)] 게시판 너무 가고 싶어요.

=222 마치 판도라의 상자 같아…… 계속 눈이 가…….

=333 마우스 커서가 혼자서 움직여!?!

=안돼! 다들 참아!!

-제목! 제목만 보고 오면 안 될까요??

=제목보면 내용도 보고 싶어질걸ㅋ큐ㅠㅠㅠ

-하아……나도 빨리 보고 후기 남기고 싶다. 새싹들이랑 막 이야기 나누고 싶어……

-우리 딴 이야기해요……ㅠ

=무슨 이야기 하죠?

=으음. 팝업 스토어요?

=오! 기념 티켓 사신 분!

=저 샀어요!! 1편 기념 티켓도 팔아서 좋았어요! 문구가 여전히 감동ㅠㅠㅠ

=22 이번에는 나라랑 도시도 설정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영화객님은 월드 투어 못 돌아서 아쉬우실 듯ㅋㅋㅋ

=저도 샀어요! 2편 기념 티켓도요!

* * *

“1편 기념 티켓을 팔다니! 내가 진짜 마린사에 큰절 올린다! 이쪽이야, 저쪽이야?”

“10주년 기념인가 봐.”

딱 상영 중에만 팔았던 기간 한정 굿즈, [오버 더 레인보우]의 기념 티켓.

10주년을 맞이해서 똑같은 디자인과 문구로 재판매를 하기로 결정되었다.

중학생 때부터 입덕해 1편 기념 티켓이 있는 임예나도, 늦덕인 송유정도 기쁜 표정으로 얼른 자신들의 기념 티켓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여기 티켓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티켓 봉투까지 예쁜 기념 티켓에 저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 기뻐하던 송유정과 임예나는 조심스럽게 봉투에서 티켓을 꺼내보았다. 정말로 연주회의 입장권 같은 티켓이 나타났다.

[송유정 님. 당신의 오랜 지지에 감사드립니다.]

[장소: 한국, 서울, 고래 클래식 홀]

[날짜: 20XX년 4월 17일, 20시.]

[좌석: 마 31]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

“크으. 드디어 내가 이걸 갖다니……!”

생일을 연주회 날짜로 새겨넣은 송유정이 감격한 표정으로 기념 티켓을 바라보고 있을 때, 임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옛날에 받은 티켓이랑 같이 넣어둬야겠다.”

그말에 송유정이 진심 부러운 표정으로 임예나를 바라보았다. 같은 디자인의 기념 티켓이지만 초판과 재판의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늦게 입덕한 게 죄지.”

“좋게 생각해. 이제 3편이 안 나오는 이상 기념 티켓 판매는 이게 마지막일 거 아냐.”

“그건 그렇네. 몇 장 더 사둬야겠다! 소장용하고 보관용하고 전시용하고 잃어버릴 때를 대비해서 한 10장 정도!”

라고, 직장인 송유정이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원래 덕질하려고 돈 버는 거니까!”

그 목소리에 기념 티켓을 만들기 위해 이름을 적어넣고 있던 이미연과 박성아가 작게 웃었다.

“귀엽네.”

“그러게.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기념 티켓을 보며 감동받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지났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오버 더 레인보우가 시리즈로 나오다니 전혀 예상 못 했어.”

“나도.”

여기서 기념 티켓을 사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어느 나라로 해드릴까요?”

[유니버스]의 팝업스토어 직원의 물음에 이미연과 박성아는 1초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뉴욕, 클리블랜드, 시카고, 캔자스시티로 부탁드립니다.”

“똑같이요.”

“네. 알겠습니다.”

기념 티켓을 제작하는 직원이 웃으며 화면을 모습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팝업스토어가 열리고 기념 티켓의 판매를 시작한 일주일 동안,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은 도시가 바로 저 세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로 홍보해 줘서 다행이네. 이렇게 넣을 수 있어서.”

“맞아. 진짜 그레이의 연주회가 열렸던 도시의 티켓이라니.”

[오버 더 레인보우1]를 촬영할 때는 LA음대의 브레드홀을 제외하고는 따로 정해진 연주회장이 없었는데 [오버 더 레인보우2]를 촬영할 때는 3곳에서나 연주회를 진행했다고 기사가 떴다.

“나도 연주회 가고 싶었는데…… 서준이 팬미팅은 안 하나?”

“한 번 할 것 같은데.”

이미연과 박성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기념 티켓 제작이 끝났다.

“여기 티켓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버 더 레인보우1]과 [오버 더 레이보우2]의 기념 티켓을 모두 산 이미연과 박성아가 2편의 기념 티켓을 꺼내보았다.

“2편 기념 티켓은 문구가 다르네?”

“그러게. 무슨 의미지?”

[오버 더 레인보우1]에서 겪었듯 문구 하나도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는 웨일 스튜디오라는 것을 알고 있어, 이미연과 박성아는 탐정처럼 추리하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곧 있으면 알게 되겠지. 시간 다 됐어. 가자, 미연아.”

“그래.”

구김 한 점 생기지 않게 조심스럽게 1편과 2편의 기념 티켓을 가방에 넣은 이미연과 박성아가 들뜬 몸짓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쫓아 몇몇 사람들도 이동했다.

이제 곧 [새싹부터]에서 대관한 영화관에서 [오버 더 레인보우2: For My Friend]가 상영할 시간이었다.

* * *

“안녕하세요. 이번 타임의 관리를 맡게 된 담당자입니다.”

넓은 영화관.

제법 스크린이 잘 보이는 좌석에 앉은 이미연과 박성아가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든 담당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마도 [새싹부터]나 코코아엔터에서 나온 사람일 터였다.

“지금부터 새싹부터와 코코아엔터가 주최하는 오버 더 레인보우 For My Friend의 관람 행사가 있겠습니다. 음악이 주인 영화인만큼 휴대폰은 모두 꺼주시거나 무음으로 바꿔주시고…….”

단합력으로 유명한 배우 이서준의 팬들인 만큼 다들 열심히 지시에 따랐다.

“이번만큼은 관크 하나도 없겠다.”

“그러게 말이야.”

뭐랄까.

다들 서준이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팬들이라고 생각하니, 내적 친분이 마구마구 생기는 느낌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오버 더 레인보우2 :For My Friend의 상영을 시작하겠습니다.”

상영관이 천천히 어두워지고 스크린이 빛이 비쳤다. 고래를 형상화한 웨일 스튜디오의 로고가 나타났다. 관객들이 숨을 죽였다.

* * *

카메라가 대기실 문을 비추고, 반대편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올라갈 시간입니다!”

“예.”

카메라가 빙글 돌아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를 비추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입고 있던 정장을 바로 하고 테이블에 놓여 있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었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섰다.

뒷모습만 보이는 남자가 무대로 향하는 길.

일하고 있던 스태프들이 ‘저번 연주회 잘 들었어요!’, ‘이번에도 멋진 연주 부탁드립니다!’하고 한마디씩 응원을 보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남자는 뒷모습만 보이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은 한 번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연과 박성아는 ‘남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왠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오늘 팝업스토어에 오기 전 보고 왔던 [오버 더 레인보우1]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오버 더 레인보우1]을 떠올리게 하는 내레이션이 들려왔다. 레베카의 목소리였다.

[음악을 하는 데 필요한 건 뭘까?]

뚜벅뚜벅.

단정한 발소리가 복도를 지나쳐 무대 뒤쪽으로 향한 남자는 익숙하게 왼손으로 바이올린을 잡고 들어 올리고 기다란 활도 겹쳐 잡았다. 그리고는 다시 걸어갔다.

[재능?]

빛이 보였다.

무대다.

[노력?]

빛으로 향하는 길 바로 앞에서 남자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마음을 가다듬는 것 같다.

[돈?]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아니,]

이제는 멈추지 않는다.

계속, 계속 걸어가 빛나는 무대 중앙에 남자는 홀로 섰다.

[사랑이다.]

관객들의 커다란 박수 소리와 함께,

남자의 뒤만 쫓고 있던 카메라가 빙글 돌아 천천히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온다. 바이올린을 몸 앞에 들고 있던 남자가 꾸벅 인사를 하고 바이올린을 목 쪽으로 가져가는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드디어,

얼굴이 보였다.

이미연과 박성아, 송유정과 임예나, 그리고 관객들이 입을 틀어막으며 나올 것만 같은 비명을 삼켰다. 두근두근 뛰던 심장도 너무 빨리 뛰어 터질 것만 같았다.

훌륭하게 자란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가 반짝이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서 있었다.

* * *

꾸벅.

관객들에게 인사한 그레이 바이니가 바이올린에 턱을 괴고 연주를 시작했다.

감미로운 선율이 들려왔다.

뒤를 받쳐주는 피아노 반주와 함께 바이올린의 소리가 연주홀을 가득 채웠다. 도저히 바이올린 한 대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소리였다.

그 훌륭한 연주에 관객들은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는 그레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G.B.로 참여했던 제이슨 무어의 연주회도 잠시 떠올랐다.

연주를 감상하던 이미연과 박성아의 눈에, 흐뭇하게 웃고 있는 레베카와 조지가 들어왔다. 크으. 삼총사가 다시 모이다니! 다들 잘 컸다. 잘 컸어.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 * *

뉴욕에서의 연주회가 끝났다.

레베카와 조지의 시야에서 무대 위의 그레이를 비추던 카메라는 꽃다발을 든 두 사람을 따라 움직였다.

무대 뒤.

연주를 끝낸 그레이에게 레베카와 조지가 웃으며 꽃다발을 건넸다.

“그레이! 연주 정말 멋졌어!”

“진짜 네 연주는 언제 들어도 훌륭하다니까.”

친구들의 등장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던 그레이가 이내 풀어진 얼굴로 웃었다. 여전히 순수한 얼굴에 관객들의 표정도 함께 풀어졌다. 연주할 때는 관객들을 압도할 정도의 카리스마가 있는 그레이 바이니인데 이럴 때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정말 고마워…… 다행이다…….”

꽃의 향기를 맡듯 꽃다발에 얼굴을 반쯤 묻은 그레이를 비추던 카메라가 빙글 돌아갔다. 레베카와 조지의 얼굴이 비쳤다.

‘아니, 왜!’

관객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 속으로.

꽃다발에 파묻힌 그레이를 더 비춰줘야지! 꽃다발 효과 몰라?!

답답한 관객들의 시야에, 그레이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 레베카와 조지의 표정이 보였다.

‘얼마나 잘생겼으면……!’

‘나도 보여줘. 꽃다발에 파묻힌 그레이!’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통곡을 하게될 착각이었다.

* * *

호텔 스위트룸의 침실.

맞춰놓은 시간에 울리는 알람과 함께, 열린 커튼 사이로 밝은 빛이 들어와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남자는 잠버릇도 없는지 누워 있는 모습마저도 단정했다.

밝은 빛과 알람 소리에 움찔대던 눈꺼풀이 스르륵 열리고 두어 번 깜빡이자, 선명한 검은색 눈동자가 보였다.

잠에서 깬 남자는 몸을 일으켜 잠시 침대에 앉아 있다가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남자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차분하고 고요했다.

곧 들리던 물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흰색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으며 나오는 남자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바지는 입고 있지만 위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

여기저기서 음소거된 감탄과 함께 헉! 하는 숨소리도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나온 것이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뒤돌아 서 있어서 보이는 건 대부분 등쪽이었지만, 과하지 않고 보기 좋은 근육이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따라 움직이는 모습에 숨소리마저 잦아들었다. 마치 그린 것 같은 근육이었다.

남자가 놓여 있던 새하얀 셔츠를 들어 올렸다. 한쪽 팔을 넣고 다른 한쪽 팔도 집어넣었다. 약간 뒤로 젖혀진 양어깨에 등에 자리 잡은 근육들이 선명해졌다가 곧 어깨를 덮는 새하얀 셔츠에 가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잔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터져 나오지 못한 감탄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쇄골 근처의 단추를 잠글 때까지 이어졌다.

아무 말 없이 곧고 단정한 손으로 양쪽 손목의 단추까지 잠근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차분하고 말끔한 표정이었다. 일견 차가운 느낌도 들었다.

그제야 관객석 여기저기에서 숨소리가 튀어나왔다. 제법 큰소리도 있었지만 새싹들은 모두 이해했다. 무려 그레이(본체: 이서준)의 상체 탈의가 아닌가. 뒷모습뿐이긴 했지만!

‘……이건 소장각이다.’

‘뭔데, 오늘 내 생일이야?’

‘웨일 스튜디오 큰절 예약.’

몰입과 비몰입 사이를 오가는, 새싹들에게는 힘겨운 영화 관람이었다.

그래도 금세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연기하는 배우가 이서준이니까.

아침식사를 준비하던 그레이에게 레베카와 조지가 찾아왔다. 차갑던 그레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상사들의 압박으로 다큐멘터리를 부탁하는 조지와 상사의 심부름에 울분을 토하는 레베카의 모습에, 직장인인 새싹들은 속으로 공감의 눈물을 흘렸다. 꿈과 희망이 가득했던 삼총사도 어느새 현실과 마주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뉴욕에서의 연주가 끝나고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의 다큐멘터리’ 촬영이 시작되었다.

[클리블랜드/이리스홀]

자막으로 오늘 연주회가 열릴 장소의 정보가 나타났다.

“오늘도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그레이가 연주회 직전까지 혼자 시간을 갖는다는 걸 알고 있는 스태프들이 대기실을 나갔다. 그러자 그레이는 이내 명상을 하듯 눈을 감았다.

남아 있던 다큐멘터리 촬영진, 조지와 스태프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죽이며 조용히 그런 그레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레이는 조금 전까지 신경 쓰던 카메라는 모두 잊은 듯, 이제 곧 있을 연주회의 곡들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되새겼다. 이전 연주회 때의 아쉬운 부분을 다시 생각하고 좀 더 멋진 연주를 하기 위해서.

바이올린을 처음 잡았을 때부터, 그레이 바이니는 항상 그렇게 진심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요즘은…….

그레이가 눈을 떴다. 미세하게 금이 간 미간과 낮게 가라앉은 검은색 눈동자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조용히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그레이 바이니는 찬란하게 빛나던 색이 천천히 바래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레이의 모습을 보고 있던 조지의 진지한 표정이 스크린에 비쳤다.

그 작지만 확실한 변화에 관객들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그게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그레이는 원상태로 돌아왔다.

바이올린을 조율하던 그레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

자신을 찍는 카메라들과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조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다큐멘터리 촬영이 한두 번이 아닌지, 존재감을 줄이는 게 아주 수준급이었다.

이제야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 낸 그레이 바이니가 커다란 카메라 렌즈를 보며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보통 영화와 달리, 카메라를 인식하는 주인공이라서 그런가. 제작자의 의도대로 다큐멘터리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정말로 어딘가에 있는 ‘그레이 바이니’라는 연주자의 일상을 그대로 찍은 것 같은 영상에, 관객들은 빠르게 몰입했다.

무대와 가까워질수록 스태프들이 줄어들며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과 함께 묻어두었던 무언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빙그레 웃고 있던 그레이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 모든 그레이의 표정이 카메라에 담겨, 관객들에게 전해졌다.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점차 확신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고 이미연과 박성아는 생각했다.

손에 든 바이올린이 묵직하다. 언제나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던 바이올린이, 전에 없이 힘겨워졌다. 팔이 떨어질 것 같았다. 놓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레이 바이니는 언제나처럼 바이올린과 활을 왼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다정했다.

바이올린을 손에 든 그레이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빛이 보였다.

무대다.

빛으로 향하는 길, 빛과 어둠의 경계선 바로 앞에서 그레이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겁이 났다.

지금의 상태가 나빠지고 나빠져,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될까 봐.

지금의 두려움이 커지고 커져, 다시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게 되지 못하게 될까 봐.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놓아버리면 영원히 바이올린을 잡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그레이는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는 멈추지 않는다.

계속, 계속 걸어가 빛나는 무대 중앙에 홀로 섰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꾸벅 인사한 그레이 바이니는 언제나처럼 바이올린에 턱을 괴고 길다란 활을 움직였다.

바이올린에서는 그레이의 생각대로, 움직임대로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아.

다행이다.

연주할 수 있어서.

찔끔 나오려는 눈물을 삼키고 있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는 지금,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짝짝짝짝!

이미연은 스크린 속 관객들이 보내는 환호성과 박수가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대 뒤의 어두웠던 그레이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면 자신도 훌륭한 연주에 감탄하고 있었을 거다.

‘마치 뉴욕 연주회처럼.’

연주를 마치고 무대 위에서 꾸벅 인사하는 그레이가 보였다.

이미연은 슬퍼졌다. 상영관에 있던 새싹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의 천재성이 너무 압도적이고 무대 위에서의 모습이 너무 빛나 그 누구도 그레이의 어둠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화면이 잠시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그레이가 카메라를 흘깃 보며 볼을 긁적였다. 밝은 그레이의 표정에 괜찮아진 것 같다고 좋아해야 할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에 답답해야 할지, 마음이 복잡해진 이미연과 박성아였다.

“으음. 쉬는 날에도 카메라가 같이 다니는 거야?”

카메라 너머, 보이지 않는 조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큐멘터리잖아. 바이올리니스트가 어떻게 휴식 시간을 보내는지도 보여줘야지. 이런 시간을 보내면서 어떤 영감을 얻는다, 그런 이야기?”

“으응.”

두 손을 만지작거리는 그레이의 작은 움직임이 안쓰러웠다.

“그레이! 우리 이리호수에 갈까? 나 아직 못 가 봤거든!”

레베카의 말에 목적지가 정해졌다.

이리호수에 도착한 후, 레베카와 조지가 점심을 사러간 사이, 어딘가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밝은 표정의 그레이는 바이올린 음을 따라 이동했다.

---.

이어지는 연주는 조금 어설펐다. 프로는 아닌 것 같았다.

가끔 삑사리도 들렸다. 깽깽거리는 소리가, 바이올린도 그렇게 좋은 것 같지가 않았다. 활도, 현도 이미 제 수명을 한참 넘기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같이 아슬아슬했다.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은 듯한 바이올린 소리에 그레이는 조금 화가 났다.

바이올리니스트가 누구길래 바이올린 관리를 이렇게 하는 걸까.

점점 가까워지는 바이올린 소리에, 그레이의 걸음은 조용하면서도 빨라졌다.

그레이는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 그대로 멈추어 섰다.

와아아!

짝짝 박수 소리와 함께 모여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중앙에 서 있는 연주자.

햇볕에 탄 주름진 얼굴. 거칠고 상처가 난 두 손. 빛바랜 옷. 낡은 신발. 조율도 제대로 되지 않은 낡은 바이올린. 몇 가닥 끊어져 버린 활.

그러나 행복한 노인의 표정.

어설픈 다음 연주가 흘러나올 때까지,

그레이 바이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묘하게 [오버 더 레인보우1]의 어린 그레이가 생각나는 노인이었다. 지금 그레이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이미연과 박성아는 숨도 쉬지 않고 노인을, 노인의 연주를, 노인의 표정을 바라보는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 * *

[시카고/ 디터리홀]

빛과 어둠의 경계선.

무대로 나가는 길 바로 앞에선 그레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손에 든 바이올린이 다른 때보다 무거웠다.

행복해 보이던 노인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실수투성이의 연주였고 보잘것없는 무대였다. 바이올린 연주에 방해가 되는지도 모르고 떠드는 아이들도 있었고 탁 트인 공간이라 여러 잡음도 들렸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릿속에서 그날 그 모습이 떠나질 않는 걸까.

“그레이?”

조지의 목소리에 그레이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레이는 친구들과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도움을 받아 이 자리에 섰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저기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대에, 내 성공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응원에 보답해야 했다.

목에 맨 넥타이가 숨통을 꽉 조이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한 그레이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와아아아!

커다란 박수 소리와 함성이 들렸다.

그리고 화면이 새까맣게 변하고 기사 제목들이 떴다.

[그레이 바이니,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성공적인 연주회 가져!]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의 훌륭한 연주에 박수갈채!]

* * *

[시카고 연주회 후/쉬는 날]

주변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레베카를 위해, 그레이가 텅 빈 오선지를 들었다. ……응?

“그레이 넌 여기서 작곡하고 있어.”

“……작곡?”

“조지가 편집해 주겠대. 하는 척만 하래. 하는 척만.”

……와.

“조지 너…….”

세상의 진실을 본 것 같은, 그레이의 짜게 식은 눈빛에 카메라 건너에 있던 조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왜. 길거리에서 영감 얻고 작곡하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괜찮잖아.”

“……그래. 알았어.”

뻔뻔한 조지의 모습에 그레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대놓고 방송조작을 하겠다는 조지의 말에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조지와 레베카가 있어 그레이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펜을 잡은 그레이의 손이 텅 빈 오선지 위에서 헤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황하는 그레이의 표정도 관객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때, 음악이 들렸다.

그레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레이가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벤치 주위를 찍고 있던 촬영팀도 함께 움직였다.

오선지를 손에 쥔 그레이가 걸음을 옮겼다. 벤치에서 조금 걸어가다 보니 작은 공원 같은 곳이 나왔다. 그곳에 연주자들이 있었다.

전자 피아노, 기타 그리고 바이올린.

수준급은 아니지만 제법 실력 있는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레이 바이니는 걸음도 멈춘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클리블랜드에서 봤던 노인처럼 이 세 연주자도 밝고 행복한 얼굴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조금 전, 레베카의 얼굴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묻어두었던 마음이 살짝 머리를 내민다.

부럽다.

그 세 글자가 떠오르자, 넥타이도 없는 옷인데 숨통이 턱하고 막혀왔다.

연주자들이 서 있는 곳은 빛이 드는 것 같은데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자신의 자리는 어둠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불쑥, 밀려오는 초조함과 답답함에 그레이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꽉 쥐어버리고 말았다.

부스럭.

들리는 소리에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조금 떨리는 양손에는 텅 빈 악보와 펜이 들려 있었다.

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막막했었는데, 지금은 마구잡이로 악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둡고 진득한 감정이 자신을 악보에 새겨달라는 듯 꿈틀댔다. 듣는 사람도, 연주하는 사람도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을 치게 만드는 그런 악상들이 자신을 꺼내 달라며 외치고 있었다.

‘……아니야.’

물론, 그런 감정들도 훌륭한 곡이 될 수 있겠지만, 그레이는 지금 다른 것을 오선지에 담고 싶었다.

누가 쳐다보든 말든 그레이는 바닥에 엎드려 오선지를 채워나갔다. 물론, 좁은 오선지에 모든 것을 넣을 수는 없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선율로 가득했다.

바닥에 업드려 미친 듯이 작곡하는 그레이의 모습은 마치 [오버 더 레인보우1]의 어린 그레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때도 사기꾼에게 속아 억울하고 분했던 마음을 [오버 더 레인보우]라는 멋진 곡으로 만들어냈던 아이였다.

이미연과 관객들은 기대감에 떨리는 두 손을 붙잡았다.

그래. 그레이.

너는 여기서 쓰러질 아이가 아니야.

“자.”

어느새 가득 채워진 오선지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레이의 앞에 익숙하다 못해 그리운 것이 나타났다. 바이올린이었다.

조지가 웃으며 바이올린을 내밀고 있었다.

“연주해 봐야지.”

눈을 끔벅이며 바이올린을 바라보던 그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어쩐지 어렸던 그 날, 처음 바이올린을 잡았던 그 날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겁이 나면서도 기쁜 마음에 손이 조금 떨려왔다.

그레이 바이니가 바이올린에 턱을 괬다. 그리고 활을 크게 내리그었다.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3: Good afternoon]

와아-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는 아름다운 선율에 관객석에서 자그마한 감탄이 튀어나왔다. 이해한다. 방해가 될까 봐 차마 내뱉지는 못했지만 자신들도 같은 마음이니까.

마치 방금 전 봤던 공원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달려가는 레베카의 경쾌한 발걸음도 떠올랐다.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 같았다.

---!

마지막 음표를 따라 활이 내리그어졌다.

온 힘을 다하듯 연주하던 그레이가 조금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주변은 그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지저귀던 새들마저도 부리를 다문 듯 조용해진 공원.

와아아아!

공원에 있던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그레이가 상기된 얼굴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 * *

[캔자스시티/메카니홀]

무대는 다르다.

관객도 다르다.

그러나 무대 뒤의 어둠은 언제나 같다.

바이올린을 손에 든 그레이 바이니는 어둠 속에서 숨을 들이마셨다. 바로 며칠 전, 미친 듯이 작곡했던 [굿 애프터눈]이 어쩐지 희미해졌다.

딴, 따단.

손가락을 까딱이며 음을 되짚으며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러나 새하얀 백지가 되어버린 머리는 그 무엇도 보여주지 않았다.

한 번에 극복해 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기는 될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이나마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렇게 독이 되어버릴 줄은 몰랐다.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레베카의 걸음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미소가 떠올랐다. 거리의 악사의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어떤 표정이지?

나는…… 어떻게 연주를 했지?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는 생각이 드니, 오늘 연주할 곡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레이 바이니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관객석의 가득 채운 사람들의 기대 가득한 눈빛이, 태양보다도 환하게 빛나는 조명의 빛이 온몸을 따갑게 찔러오는 듯했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멋지게 연주했던 그레이가 또다시 어둠에 물드는 모습에 이미연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단번에 고민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는 걸, 이미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레이.”

파드득, 그레이 바이니가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카메라 뒤에 서 있는 친구, 조지와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어둠 때문인지 그레이의 표정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레이가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지, 힘들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괜찮아.”

친구들의 걱정 어린 얼굴을 본 그레이가 말했다.

“나는 괜찮아.”

자신에게 말하는 듯했다.

나는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기에 서 있을 수가 있었다.

자신은 그 지지에 보답해야 했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위로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이번 연주회가 마지막이잖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이런 상태로 다음 투어를 시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투어의 마지막 연주회만큼은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힘내라고 말해줄래?”

“……힘내. 그레이.”

“힘내라.”

레베카와 조지의 말에 그레이가 미소를 지었다.

곧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무대로 발을 내디뎠다.

커다란 환호성이 들려왔다.

화면이 새까맣게 변하고 화려한 제목들의 기사들이 스크린을 뒤덮어갔다.

[그레이 바이니, 투어 마지막 연주회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의 다음 투어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를 바라보고 있는지.

보고 있던 이미연의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투어가 끝나도 다큐멘터리 촬영은 계속 이어졌다.

매니저가 자선 연주회의 참석 여부를 묻자 그레이는 연주는 잠시 보류한 채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곧바로 자선연주회에 대한 준비과정을 보여주나 싶었는데, 레베카가 초대장을 들고 오면서 목적지가 바뀌었다.

“와아.”

감탄을 숨기지 못하는 그레이처럼, 관객들도 그 넓은 풍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땅덩이 넓은 미국.

지평선 저너머까지 광활하게 펼쳐진 황금빛 밀밭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초대장을 보낸 린다 가족과의 만남.

진짜 여행하다 우연히 만나 식사에 초대받는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져 이미연은 웃음이 나왔다.

마침, 린다 가족은 악기를 다룬다고 했다. 그래서 즐거운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는 거실에서 린다 가족의 작은 연주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레이가 듣기에는 부족할지도 모르겠지만, 잘 들어주셨으면 좋겠네요.”

피아노 앞에 앉은 할머니의 온화한 목소리에 그레이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기대하고 있어요. 정말로.”

그 말에 쑥스러워하는 린다 가족의 얼굴이 똑 닮아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할머니, 밀 빛을 닮은 금색 색소폰을 든 할아버지, 두툼한 손보다 작은 캐스터네츠를 들고 있는 아빠, 익숙한 듯 앉아 기타를 칠 준비를 할 엄마, 그리고 은색 플루트를 들어 올린 린다까지.

“그럼 시작해요!”

딱딱-!

린다의 말에 맞춰 아빠의 캐스터네츠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가족의 사랑을 표현한 오래된 가요를 연주하며 서로 눈을 마주치는 린다 가족의 단란한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 그레이처럼 이미연과 박성아도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지의 제안으로 그레이는 바이올린 연주로 보답하기로 했다. 레베카가 바이올린을 가지러 간 사이, 린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레이. 바깥 좀 보실래요?”

“바깥이요?”

“마침 우리 가족이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거든요!”

“그레이도 보면 좋아할 겁니다.”

린다의 아빠가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환한 빛이 들어왔다. 무언가 싶어 바라보고 있던 그레이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조지의 카메라에 따뜻한 주황빛이 그레이의 얼굴에 닿는 장면이 그대로 담겼다.

“저희 가족이 가장 사랑하는 풍경입니다.”

“그레이도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자부심이 가득 담긴 린다 가족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레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새파란 하늘의 끝을 천천히 붉은색, 노란색, 주황색으로 바꾸어놓는 태양이 보였다.

노을.

노을이었다.

주황빛 노을이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빛이 황금빛 밀밭에 내려앉아, 주변을 모두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아…….”

경이로운 자연의 풍경에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레이가 천천히 밀밭으로 다가갔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황금빛 태양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황빛 노을과 황금빛 밀밭과 그 앞에 홀로 서 있는 그레이.

마치 고전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황홀한 풍경과 밀려들어오는 영감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그레이가 입을 달싹였다.

“바이올린…….”

“여기!”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레베카가 얼른 들고 있던 바이올린을 내밀었다. 어쩐지 그레이보다 더욱 떨리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레이도, 풍경에 압도당한 관객들도 눈치채지 못했다.

“고마워.”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든 그레이가 바이올린에 턱을 괬다. 그리고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활을 내리그었다.

그레이가 움직이는 활과 누르는 현에 따라 하늘을 가득 채운 따뜻한 노을빛이, 드넓은 황금빛 밀밭의 지평선이, 즐거웠던 린다 가족과의 저녁 식사 시간이, 서로 눈을 맞추며 어설프지만 인상 깊었던 연주가 선율로 바뀌어 흘러나왔다.

감탄마저 방해가 될까 봐, 관객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평범하지만 그래도 평범하지 않은.

매일 해가 질 때면 언제나 볼 수 있지만 직접 겪어보면 경이로운 노을 같은.

있을 때는 모르나 없으면 느껴지는 가족의 사랑 같은.

우리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자.

그렇게 다정한 곡이었다.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4: Good evening]은.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만 같았던 연주가 끝나고, 밤이 되었다.

2층 손님방에서 자게 된 그레이와 조지는 차를 마시며 밤하늘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레이.”

“응?”

“……후회 안 해?”

“후회?”

그레이가 조지를 바라보았다. 조지는 여전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후회?”

“……크라우드 펀딩 말이야.”

어렸던 자신이 제안했던 그 일.

조지는 조금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네 이야기가 전 세계에 알려지고.”

어쩐지 목소리가 먹먹하게 잠긴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거 말이야.”

“후회 안 해.”

단번에 들려온 시원스러운 대답에, 조지가 고개를 돌려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레이는 보기 드물게 단단한 표정이었다.

아니, 보기 드문 건 아닌가.

이 착하고 순한 녀석은 바이올린에 관해서만큼은 저렇게 단단하고 올곧은 표정을 짓고는 했다.

“조지와 레베카가 없었으면, 크라우드 펀딩이 아니었으면 나는 바이올린을 만나지도 못했을 거고 이렇게 연주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래.”

진심이 가득 담긴 그레이의 말에 조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잘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조지가 먼저 씻으러 떠난 자리.

그레이는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따뜻한 주황빛으로 물들었던 하늘과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족해지던 황금빛 밀밭은 어둡고 고요해져 있었다.

어두운 유리창에 비친 그레이의 얼굴이 슬픔과 서글픔으로 물들어갔다.

이미연은 조지와 그레이의 대화로 그동안 알듯 말듯했던 그레이의 슬럼프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지지해 준 크라우드 펀딩, 사람들의 관심, 착한 그레이의 성격, 무대 뒤에서의 어둠, 무대 위의 화려함,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행복한 그레이의 연주와 표정.

그레이의 삶 전체를 ‘후원자들을 위해서 꼭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해 버린 것이었다.

바이올린 연주하면서 느끼는 행복은 느낄 새도 없이.

[이미연 님, 당신의 오랜 지지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이미연은 후원자로서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런 건 전혀 바라지 않는다고.

그저 네가 즐겁게 연주하기만을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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