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61화
시간을 거슬러, 며칠 전.
라이언 윌의 저택에 차량 한 대가 멈추어 섰다. 서준과 최태우가 도착한 것이었다.
“어서 와라.”
“어서 와. 준!”
“안녕하세요. 라이언 감독님. 조나단.”
반겨주는 라이언 윌과 조나단 윌에 백팩을 메고 있던 서준이 활짝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서준의 옆에서 바짝 긴장하고 있던 최태우도 꾸벅 인사했다. 안다호도 없이 홀로 서준을 서포트하게 되어 평소보다 긴장하고 있긴 했지만, 촬영은 아니라서 조금 안도하고 있었다.
최태우와 공항까지 마중 나와준 킹즈 에이전시 직원이 짐을 내리고 있는 동안, 서준이 라이언 윌에게 말했다.
“묵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감독님.”
“오고 가는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LA에 있는 동안 서준과 최태우는 라이언 윌의 저택에서 묵게 되었다.
[오버 더 레인보우2]를 촬영하는 동안 머물렀던 집이 있기는 했지만, 아직 학기 중이라 금방 돌아가야 하는 서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조나단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면 이동하는 시간조차 아껴야 했다.
“그럼 들어가 볼까?”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어쩌면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 하루종일 회의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조나단이 긴장한 목소리로 저택 안으로 서준과 최태우를 안내했다.
“여긴 그대로네요.”
조나단을 따라 2층으로 향하던 서준이 변하지 않은 라이언 감독의 저택을 둘러보며 말했다.
[쉐도우맨 시리즈]를 촬영하는 동안이나 방학 기간 LA에 놀러 왔을 때, 시간이 맞으면 라이언 감독님의 저택에도 종종 놀러 왔기 때문에 이곳저곳 기억에 남는 곳들이 많았다.
“뭐, 집에 신경 쓸 여유가 있으면 차기작을 쓸 삼촌이니까.”
그건 그렇다.
조나단의 말에 서준이 웃었다. 아마 이 집은 10년 뒤에 와도 이런 모습일 거다.
조나단이 잘 정리되어 있는 두 개의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방은 준이 쓰고 최는 바로 옆방을 쓰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시차 적응도 해야 하니까 조금 빨리 준비할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편한 시간에 같이 먹겠습니다!”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하는 최태우에 조나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녁 식사 시간까지 푹 쉬세요. 준, 너도.”
“전 괜찮아요. 그것보다 조나단 지금부터 시간 되죠?”
“……응?”
묘하게 의미심장한 서준의 말에 조금 한기가 든 조나단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잠시만요.”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캐리어를 자신의 방으로 옮긴 서준이 다시 복도로 나왔다. 짐가방이라고 생각했던 백팩을 그대로 메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 시차 적응 안 해도 괜찮으니까 회의부터 해요.”
서준의 말대로.
비행기에 14시간 갇혀 있어 조금 피곤해 보이는 최태우와는 달리, 서준은 피곤이라고는 1도 없는 생기가 가득한 모습이긴 했다.
“……지금?”
“네. 조나단이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거든요.”
서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에 내일이나 회의를 시작하지 않을까, 조금 안도하고 있던 조나단 윌 감독이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그럼 저는 이만…….”
긴장이 풀리니 피곤이 몰려온 모양이었다. 비척비척, 피곤이 가득한 최태우가 방으로 들어가고 서준과 조나단은 서재로 향했다.
“여기가 내 서재야. 저번에 온 적 있지?”
조나단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근데 그때보다 책이 많이 늘었어요.”
“이것저것 공부하다 보니까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도 아직 못 읽은 책들도 있어.”
조나단의 설명을 들으며 서준은 서재를 둘러보았다. 많은 책과 함께 책 특유의 냄새가 서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작은 도서관에 온 느낌이었다. 그리고 책들 사이로 제본되지 않은, 그러니까 새하얀 종이에 프린트되어 있는 종이 뭉치들이 꽂혀 있었다.
하나를 꺼내 살펴보니 조나단 윌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건 조나단이 쓴 대본이에요?”
“응. 아직 완성은 못 했지만.”
그래도 대단하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이 서재는 마치 ‘조나단 윌’이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곳 같았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으며 앞으로는 저렇게 살아갈 거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마치 생의 도서관 같은 느낌.
“조나단 같은 곳이에요.”
“하하. 그런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하는 조나단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이제 회의 시작할까요?”
웃던 얼굴 그대로 조나단 감독이 잠시 굳어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서재에는 조나단이 사용하는 책상과 의자밖에 없었지만, 서준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넓은 테이블과 의자들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제가 먼저 이야기할게요.”
서준이 등에 메고 있던 백팩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그에 ‘도대체 저 가방에 뭐가 들었길래 계속 메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하고 있던 조나단의 의문이 풀렸다.
가방 안에는 종이와 종이와 종이가 있었다.
종이뭉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서준의 모습에 조나단 윌 감독의 표정 또한 진지해졌다.
종이마다 한가득 적혀 있는 글씨들이며 여기저기 붙여져 있는 포스트잇이, 서준 리라는 배우가 얼마나 이번 영화에 진심인지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나단. 노트북 써도 될까요?”
“그래. 편하게 써. 다른 건 뭐 필요한 거 없어?”
그에 조나단 윌 감독도 적극적으로 서준의 준비를 도왔다.
“그럼 시작할게요. 시놉시스 상에서 윌리엄은 이제 고등학생이잖아요. 그러니까…….”
“음. 그렇긴 하지만.”
노트북을 테이블 한쪽에 놓고 마주 보고 앉은 배우와 감독은 진지한 표정과 차분한 목소리로 회의를 시작했다.
* * *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코코아엔터에 도착했다는 것을 보고하고 잠시 눈을 붙였던 최태우는 조금 피곤이 가신 얼굴로 일어났다.
“회의는 끝났으려나?”
기지개를 크게 피고는 방을 나와 조나단의 서재라고 들었던 방으로 향했다.
“자. 보세요. 조나단.”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틈 사이로 보니, 서준은 화이트보드 앞에서 자석으로 붙인 종이들 사이를 매직으로 그으며 차분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나단 감독은 그 앞에 앉아 마치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서준의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직 회의가 안 끝난 모양이었다.
들어가도 되나 싶어서 눈을 데굴 굴리는데 마치 방청객처럼 한쪽에 앉아 있던 라이언 감독님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들어오라는 라이언 감독의 손짓에 최태우가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 그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아직 안 끝난 건가요?”
“하루 이틀로 안 끝날 것 같습니다만…….”
……네?
내일 출발해야 하는데요?
의아해하는 최태우의 귀를 쨍하고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들썩일 정도로 큰 목소리들이었다.
“아니! 그럼 캐릭터 해석이 완전히 달라진다니까요!”
“아니지! 원래부터 이런 캐릭터였다니까! 쉐도우맨2 38분 장면을 봐봐! 이 대사가 나온 이유가 뭐겠어!”
서준과 조나단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분한 목소리로 ‘자. 보세요. 조나단.’이라고 말하고 수업을 듣는 학생처럼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던 모습은 마치 꿈이었던 것 같았다.
“그 대사의 이유는 그 이후의 장면에 나오는……!”
“그럼 쉐도우맨3에서 나온 장면은 어떻게 설명할 거야!”
“설명할 필요도 없죠! 그건……!”
……으아……?
서준과 조나단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각자의 자료를 내밀면서 반박하고 또 반박하는 모습에 최태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렸다. 서준을 만난 게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지만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지금…… 두 사람…… 싸우는 건가요?”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라이언 감독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의아해하는 최태우의 귀에 다시금 차분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이 부분은 좋았어요.”
“역시 그렇지? 많이 생각한 부분이야. 이런 방식도 생각해 봤는데…….”
“그것도 괜찮네요.”
왁왁대며 싸웠던 게 언제냐는 듯, 다시 의자에 앉아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는 배우와 감독에 최태우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라이언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저녁 먹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조나단과 서준이 놀라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어? 삼촌 언제 오셨어요?”
“태우 형도 있었어요?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에요?”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지?”
의아해하면서도 배는 고픈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는 서준과 조나단이었다.
“근데 조나단. 그 장면은 빼는 게 낫지 않아요?”
“그게 빠지면 안 되지. 차라리 뒤쪽으로 옮기는 건 어때?”
“으음. 그건 좀 생각해 봐요.”
다이닝룸으로 이동하는 중에도 두 사람의 회의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그랬다.
끊임없이 이어 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최태우도 이 회의가 금방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전문가에게 자문했다.
“……저, 라이언 감독님. 하루 이틀이면 끝날 수 있을까요?”
“무리죠. 다호에게 연락해야 할 겁니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캠프파이어처럼 불이 붙어버린 배우와 감독이었다. 하루 이틀로는 부족할 거다.
“그렇겠죠…….”
라이언 감독의 조언에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다시 서재로 향해서 ‘그게 아니라니까!’, ‘맞다니까요!’ 하고 싸움인지 회의인지 모를 것을 하고 있는 조나단과 서준을 보며, 최태우는 안다호 이사님께 연락했다.
* * *
다시 현재.
“그래서 일주일 정도 더 지내게 됐지.”
라이언 감독의 말에, 이마를 짚고 있을 다호 안의 모습이 떠오른 제임스 랜던이 킬킬 웃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봐왔던 매니저 안이라면 배우가 하고 싶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있을 터였다.
“근데 뭐 때문에 저렇게 이야기가 길어진 거야? 준은 네 대본이라면 그대로 연기했잖아? 조나단의 대본에 믿음이 안 갔나?”
“그랬다면 ‘신의 이름으로’를 연기하지 않았겠지.”
물론 대학 실기 시험이긴 했지만.
서준이 연기했다는 그 자체로도 조나단 윌 감독의 대본은 합격점이라는 소리였다.
“주인공이 진 나트라라서 문제인 거지.”
지금까지 서준이 연기했던 캐릭터들은 모두 감독의 손에서 탄생해서 촬영할 때까지 그 캐릭터의 성격이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들([생존자들]은 예외다)이었다. 그리고 시리즈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시리즈의 감독이 그대로 이어졌으니, 캐릭터의 성격 또한 그대로 이어지는 환경이었다.
“진 나트라는 내가 만든 캐릭터지만, 앞으로의 감독은 내가 아니니까.”
아무리 바로 옆에서 배웠다고 해도, 라이언 감독의 ‘진 나트라’와 조나단 감독의 ‘진 나트라’는 완전히 똑같을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라이언 감독의 ‘진 나트라’를 연기해온 서준과 어쩌면 ‘새로운 진 나트라’를 구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조나단 감독도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작가나 감독이 바뀌어서 망가지는 작품이나 캐릭터는 꽤 있지. 그래서 진 나트라를 정말로 좋아하는 준과 조나단이 다른 때보다 열정적인 거군.”
제임스 랜던의 말에 라이언 윌이 미소를 지었다.
“그 ‘정말로’ 좋아하는 점도 문제지. 좋아하는 마음은 같지만 그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이니까.”
누군가는 강해서, 누군가는 안쓰러워서.
감정변화가 좋아서, 공감이 가서.
이야기가 좋아서, 영상이 화려해서.
“준과 조나단가 진 나트라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는 같은 부분도 많을 테지만 다른 이유도 많겠지.”
진 나트라의 사연 있는 우울한 모습을 좋아하는 팬과 파괴적이고 강렬한 모습을 좋아하는 팬이 있다면 어떤 쪽의 기대에 맞춰야 할까. 어느 쪽을 영화에서 더욱 강조해야 할까.
“그 중간을 찾는 게 힘들긴 하지. 어중간하면 더 큰 일이고.”
제임스 랜던의 말에 라이언 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서준과 조나단은 그 중심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윌리엄은 이렇게 자랐을 거라니까!”
“아니죠! 주변 환경을 생각해 봐요!”
조금 많이 격하긴 하지만.
라이언 윌과 제임스 랜던이 웃었다.
“윌리엄이 기억상실이라는 것도 중요한 점이지. 아마 고등학생으로 설정될 것 같은데 어떤 성격으로 자랐을지는 아무도 모르거든.”
코믹북 [쉐도우맨]을 바탕으로 영화 [쉐도우맨 시리즈]를 만들었으며 ‘진 나트라’와 ‘윌리엄 리’라는 캐릭터를 숨 쉬게 만든 라이언 윌 감독이 시끌벅적한 서재를 보며 말했다.
“나조차도.”
새롭게 펼쳐질 ‘진 나트라’의 이야기에 대한 기대가 담긴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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