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659화 (659/1,055)

0살부터 슈퍼스타 659화

조나단 윌은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책상에 있는 컴퓨터를 켜고 천천히 켜지고 있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문서 프로그램을 열었다. 조나단 윌의 머릿속처럼 새하얗게 텅 빈 화면과 깜빡거리는 검은색 커서가 보였다.

“……으아아…….”

쾅!

조나단 윌이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이마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오락가락했다.

남에게 기회가 갈 때는 그 고생마저 부러웠는데, 막상 그 기회가 자신에게 오게 되니 앞으로의 일이 막막해졌다.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

‘삼촌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지, 준은 자신의 일은 연기라고 하면서 조언만 해준다고 하지…….’

뭐, 그 조언이라는 것도 굉장히 험난할 것 같지만.

진짜 가벼운 마음으로 대본을 써서 줬다가는 ‘아, 아니, 준. 그게 아니라……’ 하며 하루 종일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휴대폰만 붙들고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아니지. 준이라면 당장 LA로 오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게다가 조금 전 왔던 [진 나트라 시리즈(가제)]의 담당자가 마린사에서 이번 프로젝트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지 설명했던 것을 떠올리니, 어깨가 한없이 무거워졌다.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뒤늦게 찾아온 이마의 아픔에 붉어진 이마를 문지르며 조나단 윌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고민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맑은 푸른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조나단 윌은 오래전, 한 작품을 위해, 연기를 위해 몇 개월 동안이나 고생했던 감독과 어린 배우를 알고 있었다. 직접 그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었다.

감독이 수정했던 대본들이 몇 개이며, 지우고 다시 만들었던 또 지웠던 에피소드가 몇 개였던가.

어린 배우가 연습했던 영상들이 몇 개이며, 사소한 부분까지도 고민했던 감정들이 몇 개였던가.

“거기에 비하면 나는 행운인 거지.”

전적으로 밀어주는 제작사에, 훌륭한 연기를 보여줄 믿음직한 배우가 있었다.

짝!

하고 두 손으로 양 볼을 친 조나단 윌 감독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책꽂이로 향했다. 프린트된 종이들이 꽂혀 있는 곳이었다.

“일단 이거랑…… 이거…….”

‘만약 내가 연출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낄낄 웃으며 재미 삼아 만들었던 [쉐도우맨 시리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이야기들.

[쉐도우맨1]와 [쉐도우맨2] 사이, 튤 나트라의 양아들이 된 진 나트라가 지구와 전혀 다른 나트라행성에서 어떻게 지냈으며 친구들은 있었을지, 아니면 아무도 진 나트라와 함께 하지 않았는지 등.

조나단 윌 나름대로 상상했던 이야기가 거기에 있었다.

[쉐도우맨3] 이후의 이야기도 있었다. 왕의 자리에서 물러난 튤 나트라의 이야기, 얼떨결에 왕이 되어버린 벨 나트라의 이야기, 그리고 지구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는 쉐도우맨, 맥(뮐 나트라)의 이야기.

그리고 일반인이 된 진 나트라, 윌리엄 리에 대한 이야기도.

물론, 자신이 재미 삼아 (어쩌면 훗날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상상한 이야기들일 뿐이었지만. 이제 그 팬픽이 공식이 될 예정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가득한 종이들이 책상 위에 놓였다.

‘여기서 뺄 건 빼고 남길 건 남기고.’

기승전결 없이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적었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제대로 된 시놉시스와 대본을 만들어야 하니 할 일이 많았다.

“시리즈물이니까 복선도 좀 넣어야겠지?”

[어셈블]과 같은, 2세대 히어로들이 모이는 영화도 만들 예정이라고 하니, 그것도 생각하는 편이 좋을까.

복잡해진 머리에 조나단 윌이 고개를 저었다.

“하나씩 하자. 하나씩.”

일단 바로 앞에 놓인 것부터 해결하자.

조나단 윌 감독이 텅 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까만색 커서만 깜빡깜빡 움직이고 있었다.

따닥따닥.

조나단 감독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JIN NATRA]

그러고 보니 임시로 붙은 제목인 [진 나트라 시리즈]라는 이름도 바꿔야 했다.

“진 나트라는 빌런의 이름이니까.”

그리고…….

똑똑-

조나단 감독이 생각을 이어 나가려던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집에 있는 건 자신과 라이언 삼촌뿐이니, 노크를 한 사람은 삼촌일 터였다.

“도와주러 오셨……!……진 않겠지.”

라이언 윌은 조카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생떼를 부려도 한 번 뱉은 말은 되돌리지 않을 성격이었다. 그 조카가 어린애도 아니고 이제 삼십 대라면 말이다.

‘준한텐 좀 약한 면이 있으시지만.’

차별입니다. 삼촌.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조나단은 문 쪽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노크를 한 건 라이언 윌 감독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따라와 봐.”

“네? 네.”

라이언 감독을 따라간 곳은 라이언 감독이 사용하는 서재였다. 이곳에서 [쉐도우맨] 등 많은 작품들의 대본이 쓰여졌다.

꽂혀 있는 책들, 쓰이다 만 대본들, 완성되었지만 만들어지지 않은 작품들.

언제 봐도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곳이었다.

언젠가 자신의 서재도 이런 모습이 되길 바라는 조나단이 라이언 감독을 뒤따라간 곳은 서재의 한쪽, 종이상자 두 개가 놓여 있는 곳이었다.

“이거 가지고 가면 된다.”

“이게 뭔데요?”

쭈그려 앉은 조나단이 박스 하나를 열어보았다. 박스 안에는 종이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꺼내 표지를 넘겨 살피는데, 저도 모르게 입이 쩌억 벌어졌다.

라이언 감독이 말했다.

“쉐도우맨을 만들 때, 적었던 캐릭터 설정들. 폐기한 것들도 있고 영화에는 담지 못한 설정도 있다. 다 적용하라는 건 아니고 쓸 만한 게 있으면 참고해.”

아마도 [쉐도우맨1]을 제작하기 전부터 구상했을 아주 오래된 자료부터 [쉐도우맨3]을 만들 때까지 썼던 자료들까지. 두 상자 가득 그런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팔랑팔랑 넘기며 살펴보던 조나단이 라이언 감독의 설명에 울먹울먹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삼촌……!”

차별이라고 생각해서 죄송해요……!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감격한 표정의 조카에 라이언 감독이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됐어. 다른 감독으로 결정됐어도 줄 생각이었다. 내가 만들진 않아도 진 나트라의 영화를 망치는 꼴은 못 보니까.”

파사삭-

진심이 가득 담긴 라이언 감독의 말에, 조나단의 감동은 새하얗게 타버린 재처럼 날아가 버렸다.

* * *

-라는 거 있지!!

“아하하하.”

조나단의 한탄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 나트라 시리즈(가제)]의 감독으로 조나단 윌 감독이 결정된 후로, 연락하는 빈도가 잦아졌다. 감독과 주연배우가 합이 좋으면 촬영도 잘 될 테니 서준도 괜찮게 생각했다.

“라이언 감독님이 주신 자료는 어땠어요?”

서준도 완성된 대본만 봤지, 그런 설정들은 본 적이 없었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으니 분석할 필요가 없기도 하니까 말이다.

-확실히 영화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그런지 설명 못한 설정이 꽤 있더라고. 근데 그걸 우리 영화에서 다 담아내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더라.

그렇겠지.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 감독님이 [쉐도우맨 시리즈]에서 해당 설정들을 배제한 이유도 있을 터였다. 관객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어렵고 복잡하거나, 영화에 담기에는 너무 방대하거나 너무 사소하거나.

-일단 삼촌 말대로 참고만 하려고.

“제 생각에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번 영화는 조나단의 영화니까요.”

-으헤헤헤. 그렇지?

자신의 영화.

그 한마디에 실없이 좋아하는 조나단의 모습에 서준의 기분도 좋아졌다. 시리즈물인데도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신선한 기분이랄까.

“시놉시스는 어느 정도 완성됐어요?”

-이제 반쯤 적었어.

감독이 결정되고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반이라니, 꽤 속도가 빨랐다. 그렇다면 예전부터 생각해 둔 에피소드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조나단은 옛날부터 [진 나트라 시리즈(가제)]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꿈을 이뤄나가는 사람의 활기찬 모습은 보는 사람까지 행복하게 만들었다.

-근데 대본을 쓰기 시작하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죠. 촬영 중에도 바뀌긴 하니까요.”

-으으. 그래도 막 생존자들처럼은 안 되겠지?

“하하하.”

몇 년이 지났지만 할리우드에서도 [생존자들], 정확히는 [생존자들]이 촬영된 방식(배우들의 애드리브와 감독의 즉석 대본 제작)은 화제인 것 같았다.

“네. 그때는 데이비스가 있어서 그랬던 거고, 저는 대본대로 연기하는 스타일이니까 걱정 마세요.”

하고, [생존자들] 촬영 당시, 데이비스 가렛 못지않게 날뛰었던 배우 서준 리가 말했다.

두 배우에게 맞췄던 배우 밀란 첼런과 바네사 올슨, 그리고 [생존자들]의 담당자가 들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거다.

감독인 제프리 로덕스는 같이 날뛰었고, 아역인 앤드류 워커는 서준을 좋아해서 무엇을 하든 다 좋아했으니, 예외고.

-휴.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조나단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 대본대로 연기하는 것도 대본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조건 하에지만.

‘조나단이라면야.’

무려 네 살 때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가 아닌가.

그 어느 감독보다(라이언 감독님을 제외하고) 믿음직한 감독이었다.

“그럼 시놉시스 다 쓰고 보여주세요.”

-그래. 알았어.

하하호호.

함께 작품을 만들어 나갈 감독과 배우의 통화가 즐겁게 끝났다.

* * *

중간고사가 끝나고 11월이 되었다.

군대에, 촬영까지 하느라 일상에 적응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열심히 과제도 하고 시험도 치며 대학 생활을 잘하고 있었다.

새로운 학생(배우 지망생들)을 만나고 연기와 관련된 수업을 듣고, 간간이 조나단과 통화도 하고. 그것만으로도 서준의 하루하루는 즐거웠다.

-유니버스 30일에 나온다고 함.

-?……돌으신?

그사이 마린사의 OTT플랫폼 [유니버스]의 출시일도 공개되었다.

모두가 원하지 않았던 추측대로, 11월의 마지막 날.

11월 30일이었다.

-그냥 12월이라고 해.

=그럼 12월 31일에 출시할 듯.

=죄송합니다아!!!(머리 박음)

=ㅋㅋㅋㅋㅋ

-그래요. 나오기만 하면 됐죠. 나오기만 하면……(먼산)

=22 밀리지만 마라.

-영화관 대관한다는 이벤트 신청은 언제예여? 신청하려고 하는데!

=?? 그거 끝났어요.

=22 한참 전에 끝남.

=벌써요????

=새싹들 화력이 워낙 대단해서ㅋㅋ

=근데 또 모집한다는 썰이 도니까 기다리면 또 할 거임.

=그래도 새싹들이 신청하면 이선좌가 될 듯ㅋㅋㅋ

[유니버스]와 함께 함께 업로드될 [오버 더 레인보우2]에 대한 기대감도 커져갔다.

-기사로 홍보했던 연주회 장면도 나오려나?

=뉴욕이랑 시카고? 그럴 것 같은데.

=연주회 장면이 많으면 이야기는 별로 없는 게 아닐까?

=22 연주만 계속 한다거나.

=그것도 좋은데? 틀어놓고 딴 일 하면 되지.

=그레이의 연주인데?? 익숙해지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얼마나 들어야 익숙해질지ㅋㅋㅋ

=22 오버 더 레인보우랑 NO.1 틀어놓고 시험공부 하다가 시험 망친 1인.

=33 (위 댓글과 동일) 2인.

=ㅋㅋㅋㅋㅋ

* * *

“오버 더 레인보우2 홍보도 곧 시작한대.”

코코아엔터 8층, 배우 이서준 전용 연습실.

최태우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오버 더 레인보우2]의 쿠키영상을 보고, 조나단 윌 감독이 보내온 시놉시스를 읽기 위해 코코아엔터에 왔다.

“태우 형. 다호 형도 쿠키영상 봤어요?”

“응. 괜찮다고 하시더라.”

그 말대로 편집이 끝난 [오버 더 레인보우2]의 쿠키영상은 조금 쑥스럽고 민망하긴 했지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이건 진 나트라 영화 시놉시스. 난 나가 있을 테니까 천천히 읽어봐.”

“네. 그럴게요.”

최태우가 연습실을 나가고 푹신한 소파에 앉은 서준은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저번에 반쯤 읽었던 시놉시스는 마음에 들었다. 그 이후로 조금 수정이 있었다는데 어떤 내용일까. 궁금함과 즐거움에 서준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서준은 천천히 자신이 앞으로 몇 년 동안 연기해야 할 캐릭터의 기초를 살펴보았다.

시놉시스를 읽던 눈의 깜빡임이 천천히 느려졌다.

한 글자 한 글자 놓치지 않고 되새김질하듯 천천히 읽어나갔다. 마침표를 바라보던 검은색 눈동자가 다시 윗 문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다시 앞 페이지로 넘어간다.

잘못 읽은 부분은 없는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지. 보다 신중히 읽어보았다.

그러나 시놉시스는 변하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서준은 다 읽은 시놉시스를 내려두고 휴대폰을 들었다. 상대방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태우 형.”

-응?

“지금 바로 LA로 가는 비행기표 좀 예매해 주세요.”

테이블 위에 놓인 시놉시스를 바라보는 서준의 눈이 차분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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