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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653화 (653/1,055)

0살부터 슈퍼스타 653화

“그럼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 거니?”

잭 스미스의 어머니, 마리아 박의 물음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요리를 식탁으로 옮기고 있던 서준이 대답했다.

“아뇨. 아직 후시녹음이 남아서 이틀쯤 있다가 귀국할 것 같아요. 원래는 촬영했던 걸 그대로 쓰려고 했는데, 제가 녹음하자고 했거든요.”

배우가 더 완벽한 영화를 위해 촬영을 하자는데 반대할 감독은 없었다. 사라 로트 감독은 활짝 웃으며 단번에 승낙하고는 바로 스케줄을 잡았다.

“그래? 얼마나 멋진 영화가 나올지 기대되는걸?”

요리를 하던 에릭 스미스가 아들의 친구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곳은 서준의 소꿉친구, 잭 스미스의 집.

잭 스미스는 현재 다른 주에서 열리는 경기로 LA에 없었고 서준의 부모님도 한국에 있어서, 친구 부모님과 서준만 있는 자리였다.

보통이라면 조금 불편한 자리이기도 할 테지만, 워낙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라서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제2의 아들과 제2의 부모님 같은 사이랄까.

바로 옆집에 살았던 어렸을 때는 서로의 집에서 자고 먹고 노는 게 일상이었다. 서로의 부모님이 바쁠 때면 걱정 없이 맡기기도 했고.

“많이 먹어. 준.”

“네. 잘 먹겠습니다.”

마리아와 에릭이 웃으며 앞접시로 갈비찜을 옮기는 서준을 바라보았다.

잭과 서준이 꺄르르 웃으며 같이 밥을 먹던 것(바닥에 흘리는 게 반이었지만)이 엊그제 같은데, 아들인 잭도 그렇고 서준도 그렇고.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라는 것 같았다.

“은혜랑 민준한테는 연락했어?”

“네. 만족할 만큼 촬영하고 오라고 하셨어요.”

서은혜와 이민준도 군 생활을 하던 서준이 얼마나 촬영을 하고 싶었는지 알기에 귀국이 늦어지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그동안 쌓였던 답답함이 사라질 만큼 만족하는 촬영이 되었으면 했다.

물론, 매니저 안다호, 최태우와 LA에 있을 지인들을 믿고 있기도 했다.

“학교생활은 어때?”

“재미있어요. 여러 사람들도 만나고 배우는 것도 다양해서 좋아요. 아, 화도 학교 선배님들이랑 찍은 거예요. 보셨어요?”

“잭이랑 다 같이 봤어. 감동적이더라.”

“마리아가 엄청 울었지.”

“그때도 말했지만 화는 한국인이라면 안 울 수가 없는 영화라니까.”

“맞아요. 제가 찍었지만 저도 보다가 조금 울었다니까요.”

“봐. 준도 울었다잖아.”

아하하하.

웃음이 오고 가는 따뜻한 저녁 식사였다.

* * *

다음 날.

웨일 스튜디오의 녹음실에 [오버 더 레인보우2] 팀이 모였다.

감독 사라 로트와 조감독 에밀리 이스.

음악 자문의 벤자민 모튼 교수와 제이슨 무어.

연주자 서준 리.

그리고 구경하러 온 캐서린 밀러와 폴 오든.

“구경해도 괜찮지?”

“당연하지. 편하게 있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서준에 캐서린과 폴이 히히 웃었다.

본격적으로 후시녹음 준비가 시작되었다.

마린사의 자회사로 음악영화를 담당하고 있는 웨일 스튜디오이다 보니, 녹음실도 넓었고 녹음 장비들도 가장 최신 기계들만 있었다. 엔지니어들과 사라 로트 감독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서준도 바이올린을 점검했다.

“바이올린은 그걸로 연주할 거야?”

제이슨 무어의 물음에 바이올린의 현을 조이고 풀며 음정을 맞추던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촬영 때 썼던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게 장면에 더 어울리니까요.”

음.

후시녹음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빌려주려고 했던 제이슨 무어가 설득하려던 걸 단번에 포기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음색이 더 좋다고 말해도, ‘장면에 더 어울린다’고 말하는 배우로서의 서준의 의견을 꺾을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제이슨 무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녹음 시작할까?”

“네.”

서준이 바이올린을 들고 녹음 부스 안으로 향했다.

투명한 유리 벽 건너 녹음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친구들과 벤자민 교수님, 제이슨 무어와 두 매니저가 있었다.

-준. 연습 조금 하고 시작하는 게 좋겠지?

“네.”

사라 로트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서준이 바이올린에 턱을 괬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풀기 위해 연주했다.

“처음 듣는 곡인데?”

제이슨 무어의 혼잣말에 안다호가 대답했다.

“준이 작곡한 곡입니다. 저번에 보내드렸던 굿모닝을 녹음하기 전에 손을 푼다면서 즉흥적으로 연주한 곡이죠.”

즉흥곡?!

놀라는 엔지니어들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아하,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공동묘지 촬영에서 [자장가]를 듣고 즉흥적으로 [굿나잇]을 작곡한 서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굳이 비교를 하자면 지금 연주하는 즉흥곡보다 [굿나잇]이 더 훌륭하기도 했고.

짧은 연주로 손을 푼 서준이 입을 열었다.

“녹음 시작해도 될 것 같아요.”

-알았어. 그럼 뭐부터 할까?

사라 로트 감독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서준이 대답했다.

“굿 애프터눈부터 연주할게요.”

아무래도 영화 속의 감정을 따라가면서 녹음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 준비되면 바로 시작하면 돼, 준.

“네.”

서준이 작게 숨을 내쉬고는 ‘그레이 바이니’가 되었다.

그리고는 기억을 천천히 지워나갔다.

브레드홀에서의 자선 연주회도, 레베카와 조지가 준비했던 페이크 다큐멘터리도, 다운록에서의 가슴 벅찼던 만남도, 공동묘지에서의 슬프지만 사랑이 가득했던 연주도, 캔자스시티의 밀밭을 물들이던 노을도.

그렇게 다 지우고 남은 기억은, 몸을 잠식하는 우울함과 좌절감. 그리고 클리블랜드의 노인 음악가의 행복한 표정, 뛰어가는 레베카의 발걸음, 세 악사의 즐거운 얼굴.

서준은 그때의 ‘그레이 바이니’가 되어 연주를 시작했다.

[(선)티아프의 빛 가루가 발동됩니다.]

[(선)이름 없는 신관의 찬가가 발동됩니다.]

능력을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래는 [(선)티아프의 빛 가루]만 썼는데, 아무래도 연주회의 관객들이 인상 깊게 남았던 터라, [(선)이름 없는 신관의 찬가]도 사용하게 되었다. 물론 연기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사라 로트 감독이 촬영했던 장면과 녹음 중인 연주를 겹쳐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잘 어울리네.’

역시 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딱 적당한 연주였다.

[굿 애프터눈]의 녹음이 끝나고 한차례 박수가 쏟아졌다.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던 연주였다. 그에 녹음 부스 안에 서 있던 ‘그레이’는 장난스럽게 꾸벅 인사를 했다. 다들 가볍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다음은 굿 이브닝이지?

“네. 시작할게요.”

그레이는 정겨운 저녁 식사와 황금빛 밀밭, 그리고 따스한 노을이 떠오르는 [굿 이브닝], 서로가 좋은 꿈을 꾸길 바라는 마음과 애정, 그리움이 가득한 [자장가]와 [굿나잇]을 연이어 연주했다.

“몇 번을 들어도 좋다.”

“그러게.”

어느새 연주에 푹 빠진 캐서린과 폴이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활기찬 다운록의 사람들을 보며 떠올렸던 [굿모닝]을 연주할 차례가 되었다.

♬♪

아침을 여는 선율이 들려왔다.

[(선)이름 없는 신관의 찬가가 발동됩니다.]

[(선)디테마스의 울음소리-중하급이 발동됩니다.]

[(선)디테마스의 울음소리-중하급]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내는 새, 디테마스입니다.

듣는 이에게 활기찬 기운을 불어넣어 줍니다.

아침에 들으면 작은 행운이 따릅니다.

한국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이야기가 있듯, 전생의 세계에서는 ‘디테마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하루가 행복해진다.’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저 미신일 뿐이었던 이야기였지만 오래도록 전해 내려오며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인생을 바꾸는 큰 행복은 아니지만, 하루를 충분히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새소리와 함께 ‘그레이’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선율이 녹음실을 가득 채웠다.

* * *

웨일스튜디오의 모회사, 마린사.

탁 트인 풍경이 훤히 보이는 높은 사무실. 그러나 사무실의 주인은 그 풍경을 즐길만한 여유가 없었다.

“나쁘지 않아.”

“예. 그렇죠.”

“나쁘진 않다고.”

“제작비도 다 회수했고 수익도 나쁘지 않습니다.”

“……나쁘지만 않으면 안 된다고!”

급발진하는 사장님에 페일런 박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느새 마린사의 사장 자리에 오른 리처드 보윈이 서류들을 살펴보았다. 그건 슈퍼히어로 시리즈 시즌1이 끝난 이후, 시작한 시즌2의 슈퍼히어로 영화들의 성적이었다. 올해 상반기에 개봉했던 기대작도 있었다.

[레드본]이나 [쉐도우맨], [어셈블] 같은 시즌1을 재미있게 본 관객들이 차세대 슈퍼히어로들이 어떤 캐릭터들일지 기대하며 봐준 덕분에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반응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러나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개봉할 때마다 기록을 세우고 전 세계의 화제성 1위가 되고 무수한 팬들이 생기며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이던 마린사의 슈퍼히어로 영화였는데, 시즌 2의 히어로 영화들은 그 정도까지는 되지 못했다.

“원래 세대교체가 어려운 일이기도 한 데다가, 시즌1이 워낙 대단했으니까요.”

리처드 보윈도 페일런 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좋은 캐릭터를 만들려면 그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했고, 그렇게 서사를 쌓으려면 조금 지루해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물론, 그런 것들을 모두 담아내면서 흥행하게 만드는 것이 프로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놔둘 수는 없지.”

“그건 그렇죠.”

시즌1의 마지막 영화 [어셈블4]가 4년 전 영화였다.

겨우 4년의 침체라고는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면 5년이 되고 10년이 되는 건 금방이었다.

“게다가 어셈블 같은 영화를 찍을 계획도 벌써 준비 중이고요.”

슈퍼히어로 영화의 꽃이라고 해도 좋을, 개성 넘치는 히어로들이 한자리에 모여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

마린사의 영화 중 가장 성공하고 인기가 많은 시리즈이기도 했으며, 이 영화가 흥행한다면 등장하는 히어로들의 솔로 무비도 탄력을 받을 수도 있어서 더욱 좋은 기획이기도 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시즌2의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리처드 보윈이 입을 열었다.

“역시 그 방법이 제일 좋겠지?”

시즌 2를 흥행시킬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관객들이 모든 과거를 알고 인기도 여전히 어마어마하며 시즌 2의 다른 캐릭터들과도 나잇대가 비슷한 캐릭터를 등장시키면 되는 일이었다.

마침 조건에 딱 맞는 캐릭터가 마린사에 있었다.

리처드 보윈의 말에 페일런 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진 나트라만큼 딱 맞는 캐릭터도 없죠.”

진 나트라.

6년 전, [쉐도우맨3]을 마지막으로 사라진,

“비록 악역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악역이었다.

“그래. 악역이었지. 과거에는.”

[쉐도우맨3]에 나왔던 쿠키 영상을 끝으로 지금은 그저 평범한 일반인이 된 진 나트라, 아니, 윌리엄 리.

“빌런이었다가 히어로가 된 캐릭터가 매력적이긴 하죠. 나트라 행성에서 살았던 과거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도 많을 거고, 기억을 잃고 있다는 캐릭터의 상황도 흥미로운 소재가 될 테고 말입니다.”

쓸모가 아주 많은, 정말로 좋은 캐릭터였다.

그래서 더욱 손대기가 어려웠다. 잘못 만들었다가는 인기가 어마어마한 만큼 반발도 심할 테니까 말이다.

다행히도 그걸 해결해 줄 적임자가 있었지만,

“라이언 윌 감독은?”

“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쉐도우맨3로 자신이 만들고 싶은 건 전부 만들었다고 하시더군요.”

하지 않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끄응.

리처드 보윈이 앓는 소리를 냈다.

“진 나트라면 다 해결되는 건데…….”

“그것도 그렇지만, 배우도 문제입니다.”

……그렇지.

리처드 보윈이 한숨을 쉬듯 말했다.

“……아무래도 준밖에 없겠지?”

페일런 박이 아주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 나트라 = 서준 리>는 불변의 진리가 아닌가.

“그렇죠. 배우 활동을 하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활발히 활동 중인 데다가 이번에 출연하는 작품도 저희 자회사 작품이잖습니까. 다른 배우를 캐스팅했다가는 뭐…….”

-이게 뭔 개소리야???

-??진 나트라가 서준 리가 아니라고??

-미쳤냐. 마린??

상상하지 않아도 끔찍한 미래가 훤히 보이는 것 같은 리처드 보윈과 페일런 박이었다.

“준은 지금 후시녹음 중이라고?”

“예. 지금 웨일 스튜디오의 녹음실에 있다고 합니다.”

마침 미국에 있으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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