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52화
벤자민 모튼 교수가 작곡한 [For My Friend].
[오버 더 레인보우]가 그레이가 처음 바이올린을 만나면서부터 느꼈던 격정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면 [For My Friend]는 보다 정적이었다. 느릿하고 차분했다. 그렇지만 평범한 곡은 아니었다.
스포트라이트 아래.
그레이는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연주했다.
수백 년 동안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를 만나며 아름다운 음을 들려줬을 바이올린은 그레이의 손안에서도 훌륭한 선율을 들려주었다.
♪
홀로 있는 이가 보였다.
쓸쓸하고 지치고 서럽고 외로운 이였다.
그건 그레이 바이니.
자신이었다.
눈을 감고 바이올린의 현을 누르고 활을 내리그으며, 그레이는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슬픔과 눈물을 곡을 통해 흘려보냈다.
마치 늪에 빠진 듯, 아주 천천히 그레이를 잠식해 나가던 우울은 깨닫고 나서는 너무 늦은 상태였었다.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우울의 늪에서 그레이는 마지막 힘을 짜내 손을 내밀었다.
얼굴 끝까지 묻힌 무거운 진흙에 숨이 턱 막히고 눈까지 가려져서 그저 아무도 없는 위로, 의미 없는 손을 간절히 내밀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감정이, 그레이의 숨죽인 울음이 가득 담긴 음은 듣는 이의 마음을 울렸다.
구해줘.
누군가.
나를…… 구해줘.
관객들은 저마다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외로움을 겪어보지 않은 이는 없으리라.
희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마지막 발악처럼, 고독이 진득하게 묻은 손을 의미 없이 내젓던 그때.
♬
무언가 닿았다.
따뜻하다.
그에 손에 묻었던 진흙 같은 고독이 하나둘 떨어져 나간다.
잡힌 손에 이끌려 ‘나’는 천천히, 위로 끌어당겨져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간다.
♪-
따뜻한 손의 주인이 묻는다.
‘괜찮아?’ 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 ♬-
곡의 흐름이 바뀌었다.
길게 이어지는 음 하나하나마다 따뜻하고 황홀한 다정이 흘러넘쳤다.
마음속에 있는 감정의 그릇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흘러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가득 채웠다. 너무나도 충만한 감정에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가슴이 벅차다.
[For My Friend 나의 친구를 위해]
아름답고 순수한 선율에 온몸의 긴장을 풀리고 저절로 눈이 감겼다.
친구란 단어에
관객석에 앉아 있던 후원자들과 후원받은 이들은 ‘그레이 바이니’를 떠올렸고,
조지와 레베카는 ‘그레이’를,
그레이는 ‘조지와 레베카’, 그리고 ‘관객석에 앉아 있는 이들’을 떠올렸다.
손을 마주 잡고 인사를 하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직접 친분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크라우드 펀딩과 후원이라는 ‘특별한 인연’을 통해 이어진 ‘친구’를 위한 선율이 스트라디바리우스에서 흘러나와 브레드홀을 가득 채웠다.
♪-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고요 속.
그 누구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어린아이들마저도 조용히 듣고만 있을 정도로 ‘그레이 바이니’의 감정이 듬뿍 담겨있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선율은 정말로 환상적이었다.
그 선율을 따라 하늘에서 황금색 빛무리가 오로라처럼 번져 나갔다. 서준만이 볼 수 있는 [(선)이름 없는 신관의 찬가]의 효과였다.
부디, 여기 모인 사람들의, 그리고 [오버 더 레인보우2]를 볼 사람들에게 축복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서준, 아니, 그레이 바이니는 연주에 더욱 집중했다.
브레드홀의 초대석.
벤자민 모튼 교수는 자신이 작곡한 [For My Friend]를 100%, 아니, 200%로 표현하는 그레이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G.B.로 참여했던 재작년 여름의 연주회 때보다 더 실력이 는 것 같았다.
‘아, 그건 오케스트라였지.’
서준은 오케스트라의 제1 바이올린으로, 자신의 실력보다 다른 연주자들과의 합이 중요했던 자리였다. 제 실력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전에 만났을 때.
연습하는 걸 봤었는데 이렇게 대단하지는 않았다.
‘물론 준은 진심을 다해 열심히 연습했겠지만…….’
원래 실력도 출중한데다가, 촬영 중이라 ‘그레이 바이니’의 연기에 몰입한 것과 조금 전 ‘브레드홀의 관객들의 정체’를 알게 되어 받게 된 감동과 감격까지 겹쳐서 연습 때보다 훨씬 큰 시너지를 일으킨 것 같았다.
‘이래서 음악이 좋지.’
그때그때의 연주자가 느끼는 감정으로 달라지는 생생한 연주.
연주자의 깊은 마음속까지 알 수 있는 음악이, 듣는 이들의 마음까지 홀려 버리고 마는 그 느낌이 벤자민 교수는 참 좋았다.
“으음…….”
옆자리에서 들리는 소리에 벤자민 교수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제자, 제이슨 무어였다.
상체를 앞으로 당기고 앉아 그대로 멈춘 듯한 제이슨 무어의 모습은 가끔 위아래로 움직이는 눈썹과 저도 모르게 뱉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동상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움직임이 없었다.
그 정도로 ‘그레이 바이니’의 연주에 푹 빠진 듯한 제자의 모습에 벤자민 교수가 작게 웃었다.
일선에서 물러나 가끔 취미로만 가볍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벤자민 교수와는 달리, 현역으로 그것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로 활동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제이슨 무어에게도 ‘그레이 바이니’의 연주는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나 보다.
듣는 사람들과 주변 분위기마저 느긋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For My Friend]인데, 제이슨 무어만은 불이 붙은 것처럼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단 한 순간의 움직임도, 선율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의지가 보였다.
‘라이벌이라…… 좋을 때지.’
뭐, 나이 차이가 나는 데다가 한 사람은 바이올리니스트고 한 사람은 배우이라는 건 제쳐두자.
벤자민 교수는 웃으며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벤자민 교수가 작곡한 [For My Friend]의 우울의 파트는 짧았고 다정의 파트는 길었다.
아무래도 서준의 실력이면 우울의 파트가 길어지면 오히려 그쪽에 감정이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작곡했다.
이 정도의 연주라니.
추측이 제대로 들어맞은 것 같았다.
♩♬-
넘치는 다정과 애정과 사랑에도 끝은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연주한 듯,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그레이의 숨이 가빠졌다. 뜨거운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들을 적절히 선율로 표현하느라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럼에도 그레이 바이니의 표정만큼은 아주 행복해 보였다.
마치 클리블랜드의 노인 음악가처럼, 시카고의 세 악사처럼, 캔자스시티의 린다 가족처럼.
그리고 10년 전의 ‘어린 그레이 바이니’처럼.
♪-!
길다란 활이 마지막 현을 내리그었다.
하아- 하아-
그레이 바이니의 거칠지만 만족한 듯한 숨소리만이 울리는 고요 속.
짝짝!
하고 무대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웃으면서 울고 있는 레베카였다. 그 뒤를 이어 코를 훌쩍이는 조지의 박수 소리도 들려왔지만,
짝짝짝짝!!
와아아아!!
관객석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와 환호성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스태프들이 미리 지시한 환호성과 박수이기는 했지만, 관객들 중 그 누구도 그 지시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 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멋진 연주를 보여준 그레이에게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다.
커다란 박수와 환호성 속.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는 그레이 바이니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 * *
[이것으로 촬영을 끝내겠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잦아지고 방송으로 [오버 더 레인보우2]팀은 관객들에게 촬영이 끝났음을 알렸다.
“아, 아쉽다.”
“그러게.”
겨우(라고 말하기엔 너무 대단했지만) 두 곡.
바이올린 전공자로서 그냥 넋을 놓고 감상했던 최유성과 나탈리는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친구들도, 주변에 앉아 있던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음원 빨리 나왔으면!”
“유니버스가 11월에 나온다니까 그때 나오겠지?”
“악보도 궁금한데.”
“난 악보가 나와도 연주할 자신이 없어.”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정답지를 직접 봤는데 그 이상은커녕 비슷하게도 연주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준이 전공자가 아닌 게 믿겨지지가 않음.”
“그냥 투잡 뛴다고 생각하자.”
“나 진까지 합치면 쓰리잡 아니야?”
최유성의 말에 다들 웃으며 일어날 준비를 했다. 관객들이 많으니 차례차례로 브레드홀을 벗어나야 할 텐데 어쩐지 안내가 없었다.
[잠시 후.]
마침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바이올리니스트 서준 리의 연주회가 있겠습니다.]
……? 바이올리니스트……누구요?
[이후 일정이 있으신 분들은 스태프들의 안내를 따라 이동해 주십시오.]
라는 안내방송이 이어졌지만 누구의 귀에도 입력되지 않았다.
뭐? 뭐?! 방금 뭐라고 했어?! 그 소리만 들렸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잠시 후. 바이올리니스트 서준 리의 연주회가 있겠……]
뭐어어억?!!
관객석 한 곳에서 터진 비명은 안내방송을 가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 비명에 정신을 차린 관객들의 함성이 불이 번지듯 브레드홀 안으로 번져 나갔다.
“/미친! 미친! 서준이가 연주한다고?! 미쳤다!!!/”
“유성! 너 한국어로 말하고 있어!”
“그럴 만도 하지이!! 으아아악!!!”
어느새 주섬주섬 챙기던 짐을 내려놓은 최유성과 나탈리, 친구들이 자리에 앉았다. 각 잡고 앉은 모습에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다른 관객들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서준 리의 기부금을 받으면서 서준의 작품을 보게 되었고, 어느새 팬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반짝반짝 기대로 가득한 눈빛들이 무대로 쏟아졌다.
* * *
“인기가 많네. 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하하하.”
무대 뒤에서 화장을 수정하며 모니터로 살펴보고 있던 서준이 에밀리 조감독의 말에 쑥스러운 듯 웃었다. 다들 좋아해 줘서 기뻤다.
“근데 서준 리로 연주하려고?”
폴 오든의 물음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충분히 감사의 연주를 했으니까. 그리고 여기 모인 분들은 나를 보러와 주신 분들이잖아.”
바이올리니스트 서준 리라는 명칭이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아이돌 블루문의 제6의 멤버, 이서준도 해봤으니까.
“크흠. 준. 잠시 괜찮을까요?”
헛기침 소리에 서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담당자 넬슨이 서 있었다.
“네. 무슨 일이세요?”
“괜찮으면 이번 연주회도 유니버스에 업로드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서준이 안다호와 최태우를 바라보았다. 둘 다 미리 이야기를 나눈 듯 웃고 있는 모습이 서준이 알아서 결정하라는 듯했다.
“촬영은 끝났는데, 괜찮을까요?”
“그래. 아직 카메라랑 장비는 안 치웠거든. 관객들 다 나가면 치울 예정이야.”
따로 준비해야 하는 게 없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준!”
넬슨이 희희낙락 웃으며 휴대폰을 들고 자리를 떴다. 정말로 신난 뒷모습에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작게 웃었다.
“그럼 연주회 시작해 볼까, 바이올리니스트 준?”
“하하. 네.”
사라 로트 감독의 말에 웃음을 터뜨린 서준이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들고 무대로 나가는 입구에 섰다.
촬영이 끝난 후라 가져갔어야 할 이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미리 이야기를 들은 제이슨 무어가 빌려준 것이었다. 지금은 벤자민 교수님과 함께 초대석에 앉아 있을 거다.
“준! 힘내!”
“/서준아. 화이팅!/”
친구들과 매니저, 스태프들의 응원을 받으며 서준이 무대로 발을 내디뎠다.
와아아아!!
환호성이 들렸다.
연극이든, 연주든 무대에 섰을 때 보이는 관객들의 기대 가득한 눈빛과 함성은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무대 중앙에 선 서준이 마이크를 든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연주회지만 아무래도 촬영 이후의 행사 같은 분위기에 형식은 자유로웠다.
“안녕하세요. 배우 겸 바이올리니스트 서준 리입니다.”
박수와 함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준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촬영 전에 여러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후원을 받은 이들은 서준의 말을 이해하고 씨익 웃었고, 최유성이나 나탈리처럼 모르는 이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시는 분들은 나중에 영화를 보면 아실 테니, 유니버스가 출시될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르고 보시는 게 더 재미있을 테니까요.”
그 말에 ‘알았어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웃음을 터뜨렸고 서준도 하하, 웃고는 말을 이었다.
“갑자기 정해진 연주회라서 짧겠지만 재미있게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연주할 곡은 이번 영화에 삽입할 곡들입니다. 그러니까 영화가 업로드될 때까지는 모두 비밀로 해주세요.”
네에에-!
하고 대답하는 소리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서준의 눈도 둥글게 휘었다. 어쩐지 팬미팅을 하는 느낌도 들었다.
“첫 곡은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 2 : Good morning입니다. 제가 직접 작곡한 곡이죠.”
무대 위에 준비된 테이블에 마이크를 내려놓은 서준이 스트라디바리우스에 턱을 괬다. 그리고 왼손가락으로 현을 짚고 활을 그었다.
* * *
그렇게 서준의 연주회를 끝으로 [오버 더 레인보우2]의 촬영이 모두 끝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