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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650화 (650/1,055)

0살부터 슈퍼스타 650화

서준 리의 연기는 대단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메소드 연기라고 칭할 만큼 언제나 캐릭터 그 자체가 된 것처럼 연기한다. 저게 진짜 연기인가? 캐릭터 본인인 거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게 만든다. 항상 곁에 붙어 있는 매니저도, 서준에 대해 잘 알면서도 가끔 걱정할 만큼.

‘레디, 액션’을 외치면 서준 리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작품 속 캐릭터가 남는다. 그리고 ‘컷!’ 사인이 들리면 캐릭터에서 벗어나 서준 리로 돌아온다. 마치 스위치를 켰다 끄는 것처럼.

언제나 그랬다.

그러나 지금.

‘컷’ 사인이 들리지 않음에도 ‘그레이 바이니’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 틈새 사이로 감격한 ‘서준 리’의 맨얼굴이 보였다. 그 어떠한 꾸밈도 없고 연기도 아닌 순수한 감동과 벅참.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가 연기하던 배역을 자신도 모르게 부숴 버리고 감동하는 모습이 어찌나 짜릿한지.

이번 서프라이즈를 기획한 사라 로트 감독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서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정말?”

“그래. 준 네가 10년 전부터 후원하던 분들이야.”

캐서린이 웃으며 말했다.

10년 전.

서준은 [오버 더 레인보우1]의 수익금을 ‘세계 어디에나 있을 그레이 바이니들’에게 기부했다. 한 번의 기부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현재까지 서준에게 들어오는 [오버 더 레인보우1]의 수익금은 전부 기부금으로 사용됐다.

막대한 기부금(+[새싹부터]의 기부금)을 받은 단체는 처음에는 꿈을 꾸는 아이들을 지원하는 데 기부금을 사용하다가 점점 범위를 넓혀갔다.

청소년, 청년, 중년인, 노인.

노숙자, 마약중독자, 알코올중독자.

심리치료가 필요한 환자, 폭력의 피해자.

‘그레이 바이니’처럼 꼭 꿈을 위해서가 아니라도 괜찮았다. 음악이 필요한 곳이라면, 도움을 요청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사용해도 괜찮다는 서준 리의 허락 아래, 미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사람들에게 단체는 손을 뻗었다.

물론,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을 돕지는 못했다.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영화라도 돈은 한정적이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

그렇게.

서준도 모르는 사이 오랜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아져 가던 ‘인연’들이 이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었다.

캐서린의 입에서 ‘준’이라는 이름이 나온 후부터 촬영은 잠정적으로 중지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상상도 못 했던 상황에, ‘그레이 바이니’와 ‘서준 리’ 사이를 오고 가던 서준도 이내 후우, 숨을 내쉬며 차곡차곡 ‘그레이 바이니’의 감정과 생각을 정리해 집어넣었다.

지금은 ‘서준 리’의 시간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감독님?”

떨리는 서준의 목소리에 사라 로트 감독이 웃으며 대답했다.

“준이 군대에 가는 바람에 준비 기간이 1년이나 됐잖아. 길어진 김에 이런 이벤트를 기획해 봤어.”

서준이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기 앉아 있는 모든 분들이…… 그런 분들이에요?”

“아니. 전부는 아니고. 오고 싶어 하셨지만 못 오시는 분들도 계셨으니까. 그래도 대부분은 준이 후원한 사람들이야.”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르게 느껴졌다.

서준의 팬카페 [새싹부터]에도 감사의 글이 종종 올라오고는 했었다. 그걸로도 충분히 기뻤던 서준이었지만, 직접 만나게 되니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레이 바이니’가 만난 사람들도.”

“……네?”

서준이 사라 로트 감독을 바라보았다.

사라 로트 감독이 웃으며 설명했다.

“노인 음악가분은 원래 노숙자였는데 네가 준 기부금으로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대. 그리고 세 악사분은 알코올중독자였는데 음악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하더라.”

서준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유난히 자신을 만나 기뻐하던 노인과 세 악사가 떠올랐다. 그저 유명한 배우를 만나서 기뻐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마주 잡았던 노인의 거친 손.

‘정말로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준 리 배우.’

덜덜 떨리던 세 사람의 손.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들어주세요. 준.’

그 말 안에는 감사함이 가득했었던 것이었다.

사라 로트 감독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린다 가족의 이야기도 그래. 네 기부금 덕분에 아이가 음악을 배우게 된 이후로 가족 전체가 행복해졌다는 사연을 에피소드로 각색한 거야. 그 가족을 직접 섭외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연기력이 필요한 장면이라서 배우들을 대신 쓸 수밖에 없었지.”

“노인 음악가분이랑 세 악사분은 대사 없이 그냥 연주만 하면 되는 거라서 직접 출연할 수 있었거든.”

에밀리 조감독이 찡긋 웃으며 말했다.

아…….

서준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문득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럼…… 공동묘지도……?”

“……맞아.”

사라 로트 감독과 에밀리 조감독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맴돌았다.

“그것도 비슷한 사연을 각색한 거야.”

“가족분들이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고 전해달래. 그리고 앞으로도 열심히 활동해 달라고 하셨어.”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충분했다.

울컥, 하고 많은 감정들이 밀어닥친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감정들에 넘쳐흐른 감정들이 서준의 몸과 마음을 가득 채웠다. 속절없이 휩쓸릴 것 같았다.

많은 생을 겪었던 베테랑답게 서준은 천천히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했지만, ‘이번 생’에서는 처음인지라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의자에 앉은 서준이 아래를 바라본다. 자잘하게 떨리는 속눈썹과 처연한 검은색 눈동자, 그리고 붉어진 눈시울이 서준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동과 슬픔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얼굴이 흠뻑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던 ‘그레이 바이니’와 달리,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 그 강인함이 오히려 ‘서준 리’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늘,”

먹먹한 목소리에 서준이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 무대에서 연주하신 분들도…….”

“맞아. 너한테 들려주고 싶다고 열심히 연습하셨어.”

이십 대의 첫 번째 팀, 중노년의 두 번째 팀, 어린아이들의 세 번째 팀 그리고 이어진 연주자들의 모습과 그들이 연주한 곡들이 떠올랐다.

“하아…….”

서준은 두 손을 모아 입 근처에 댔다. 마음이 너무 벅차올라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서준을 빼고 모두 알고 있었던 듯, 다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서준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진정한 서준이 히히 웃고 있는 두 친구를 보았다.

“너희도 알고 있었어?”

“며칠 전에 들었어.”

“깜짝 놀랐다니까!”

바로 직전까지 연기했던 폴과 캐서린의 말에 서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연기 진짜 잘하더라…… 전혀 몰랐어.”

“헤헷!”

서준의 말에 캐서린이 웃었다. 폴도 흐뭇한 표정이었다.

서준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다호 형이랑 태우 형도 알고 있었어요?”

“응. 딱히 나쁜 일도 아니고 괜찮을 것 같아서.”

“미, 미안. 서준아.”

뻔뻔한 안다호와 달리 최태우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뇨. 미안할 건 아니지만…… 배우 해보실래요?”

서준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뭐, 친구들과 매니저 형들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공범이었다.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더니…….”

서준이 한숨처럼 말했다.

영화 장르가 페이크 다큐멘터리였는데, 영화 내용은 ‘그레이 바이니’를 속이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였고, 끝내는 자신까지 속고 말았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좋았다.

기뻤다.

결국 웃고만 서준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아직도 돌아가는 카메라가 보고는 이마를 짚고 말았다. 촬영 중이라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충격이었나 보다.

서준은 조금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근데 이건 왜 촬영하시는 거예요, 감독님?”

“준만 괜찮으면 쿠키 영상으로 넣으려고.”

완벽한 몰입과 배역의 온오프로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던 배우가, 감동과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배역에서 벗어나는 장면은, 보는 사람들을 짜릿하고 설레게 만들 터였다.

“준의 팬들도 엄청 좋아할 거야!”

에밀리 조감독의 말에 서준은 안다호를 바라보았다. 안다호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서준도 승낙했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도 편집하면 저 먼저 보여주세요. 너무 놀라서 어떻게 찍혔는지 기억도 안 나거든요.”

“하하. 그래. 알았어.”

진심이 가득 담긴 서준의 말에 사라 로트 감독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페이크의 페이크의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찍다 보니 기운이 쭉 빠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입맛이 확 돌았다. 맛난 점심을 먹으며 서준은 진심을 토로했다.

“진짜 깜짝 놀랐어요. 상상도 못 했다니까요.”

“그런 것 같더라.”

제이슨 무어의 말에 함께, 점심을 먹던 벤자민 교수와 캐서린, 폴이 웃음을 터뜨렸다.

제이슨 무어와 벤자민 교수는 서준이 촬영 때 연주할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전해주려고 브레드홀에 도착해 있던 상태였다. 그때가 마침 서준이 ‘관객들의 정체’에 알게 된 시점이었다.

‘그레이 바이니’에서 ‘서준 리’가 되어버린 그 모습은, 한눈에 봐도 서준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 것 같았다.

열심히 그때의 심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서준이 벤자민 교수와 제이슨 무어에게 물었다.

“연주 듣고 가실 거예요?”

“그래. 오전 연주도 듣고 싶었는데 말이야.”

서준이 후원했던 사람들의 연주라니.

벤자민 교수는 아쉬워졌다.

“시간이 안 맞았으니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말하는 제이슨 무어도 조금 아쉬운 얼굴이었다.

폴이 웃으며 말했다.

“전부 촬영했으니까 감독님께 말씀드리면 보여주지 않으실까요?”

“음. 그래도 영화 촬영이니…….”

“무편집으로 보내드릴게요. 교수님.”

방해가 되면 어쩌나 싶어 고민하는 벤자민 교수의 귀에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 들려왔다. 사라 로트 감독이었다.

“오늘 준이 연주하는 영상도요.”

“아. 고맙습니다. 감독님.”

벤자민 교수가 환하게 웃었다.

오늘 서준이, 그러니까 ‘그레이 바이니’가 연주하는 모습을 직접 보겠지만, 이후에도 볼 수 있도록 편집되지 않는 영상이 갖고 싶었던 교수였다. 제이슨 무어의 입꼬리도 조금 올라갔다. 벤자민 교수에게 영상이 있다면 제자인 그도 언제든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아, 감독님.”

서준이 사라 로트 감독을 불렀다.

“응?”

“오늘 연주 장면 있잖아요. 정해진 곡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곡을 더 연주해도 될까요?”

“다른 곡을? 굿모닝이나 굿 애프터눈 같은 곡 말이야?”

“그것도 있고, 다른 곡들도요.”

서준이 쑥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들 저를 보러 오신 분들인데 두 곡만 들려드리기는 아쉬워서요. 다른 곡들도 들려드리고 싶어요.”

그들이 서준에게 고마워하는 만큼 서준도 그들에게 감사했다.

서준이 한 후원이, 기부가 헛된 일이 아니었다는 걸 알려줬으니까.

꿈을 위해 행동한다는 게,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낸다는 게 누군가의 도움이 있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의지가 필요했다.

여기 모인 이들과 여기 오진 못했지만 세계 어디에나 있을 이들은 그런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서준은 그들의 의지에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잠시 생각하던 사라 로트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촬영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준이라면 단번에 오케이 컷을 찍을 테니까 시간은 충분할 거야. 마음대로 써도 돼. 편집은 내가 알아서 할게.”

“감사합니다!”

서준이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

“응? 어디 가려고?”

일이 없으면 촬영 전까지 함께 있던 서준의 이탈에 캐서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에 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촬영할 때 불러줘. 잠깐만 명상하고 올게.”

묘하게 기합이 들어가 있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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