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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649화 (649/1,055)

0살부터 슈퍼스타 649화

“관객들 모두 들어왔다고 합니다!”

엑스트라들을 관리하고 있는 스태프의 무전이 전해졌다. 안 그래도 바쁘던 스태프들의 움직임이 더욱 분주해졌다.

“그럼 간단하게 브리핑할게.”

아무래도 가장 힘을 준 장면이라서 그런지 사라 로트 감독이 전체적으로 둘러보는 사이, 에밀리 조감독이 서준과 캐서린, 폴에게 대신 설명하게 되었다.

“이번 연주회 장면의 첫 촬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갈 거야.”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서준과 캐서린, 폴은 귀를 기울였다.

“아까 만났던 연주자분들의 연주도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거니까 집중해 주면 좋겠어. 그래도 중간중간 쉬는 시간이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네. 걱정 안 해요.”

“연주회 왔다고 생각하면 되죠.”

“저 연주회 좋아해요!”

에밀리 조감독의 말에 세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훌쩍 자란 모습이지만 어쩐지 어렸던 그때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에밀리 조감독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이외에도 촬영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이 오고 갔다.

“그럼 대기실로 이동합시다!”

점검을 끝낸 사라 로트 감독의 말에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첫 번째 촬영 장소인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은 미리 설치된 카메라와 조명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었다.

검은색 정장이 아닌 평상복을 입은 서준과 캐서린, 그리고 언제나처럼 다큐멘터리 촬영팀과 함께 있을 폴이 이제 곧 다가올 촬영에 마지막으로 합을 맞추었다.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에밀리 조감독의 외침이 들렸다.

이 목소리를 듣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옷매무새를 정돈한 서준은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갔다.

“레디,”

사라 로트 감독이 외쳤다.

“액션!”

브레드홀의 한 대기실.

그레이는 조용히 테이블 위에 놓인 바이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더 이상 저 바이올린이 무겁고 슬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만났던 사람들과 추억, 그리고 벅차올랐던 감정들과 제 손에서 나왔던 아름다운 선율들을 떠올리며 밤새 고민했던 그레이는 자선 연주회에서 연주하기로 결정했다.

이제는 바이올린을 즐겁게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레이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무슨 곡을 연주하면 좋을까, 라고 물었다. 그에 매니저와 친구들은 ‘네가 연주하고 싶은 곡을 연주해.’ 하고 대답했다.

끄응.

더욱 고민되는 대답이었다.

그렇게 어떤 곡이 좋을까, 고민하는 사이 자선 연주회 날이 되었다.

“근데 레베카. 나도 관객석에 앉아 있어도 괜찮은 거야?”

그레이가 고개를 돌려 왠지 분주한 레베카를 바라보며 물었다.

보통 무대에 오를 연주자들은 무대 뒤나 대기실에서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대기하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관객석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말이 대기지, 그냥 연주회를 관람하는 것이었다.

“힘들 것 같으면 대기실에 있어도 돼.”

“아니. 힘든 건 아니야. 연주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아.”

자신 빼고는 전부 아마추어인 연주자들이라고 들었지만, 아마추어든 프로든 음악은 언제나 그레이를 즐겁게 했다. 최근 여러 연주자들의 연주를 들어서 더욱 그랬다. 노인 음악가와 세 악사, 린다 가족을 생각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그레이였다.

“근데 무대에는 이렇게 입고 올라가는 거야?”

그레이는 제 옷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연주회에서 입었던 검은 양복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흔히 볼법한 일상복이었다.

“네 순서는 마지막이니까 괜찮아. 앞서 연주하는 분들이 아마추어잖아. 바로 네 바이올린을 들으면 비교될 테니까 쉬는 시간을 길게 가지기로 했어. 그사이에 옷 갈아입고 준비하면 된대.”

레베카는 마치 매니저가 된 듯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갈아입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곧 연주회 시작합니다!”

“네! 갈게요!”

씩씩하게 대답하는 레베카에 그레이와 조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 * *

“오! 왔다!”

서준 리와 캐서린 밀러, 폴 오든의 등장에 관객석이 술렁였다. 최유성과 나탈리,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너흰 재작년에도 봤잖아.”

“그래. 같이 연주도 하고.”

친구들의 말에 최유성과 나탈리가 작게 웃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다. 그 여름의 그 연주회는. 완성된 퍼즐처럼 완벽하게 맞춰졌던 오케스트라 연주는 지금도 꿈에 나올 듯 생생했다.

“그래도 이렇게 듣는 건 다르지.”

“맞아. 맞아.”

최유성의 말에 나탈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배우들의 등장에, 잠시 술렁이던 관객석은 이내 촬영을 시작한다는 방송에 천천히 차분해졌다.

“그러니까 진짜 연주회처럼 촬영한다는 거지?”

“그렇대. 쉬는 시간이 더 길고 연주자들이 아마추어인 걸 빼면 말이야.”

배우들에게도 알려준 것과 같이, 함께 오랜 시간을 촬영해야 하는 엑스트라들에게도 촬영 내용이 대략적으로 알려준 상태였다.

“그레이도 연주하겠지?”

“아까 물어보니까 마지막에 한다더라.”

작게 속삭이고 있으니,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하는 방송이 들려왔다.

그에 엑스트라들은 스태프들이 지시한 대로 촬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레디, 액션!”

이렇게 관객석에 앉는 것도 오랜만이다.

라고 그레이는 생각했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그레이를 보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레이도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기뻐하는 사람들에 그레이의 표정도 밝아졌다.

그레이의 양옆에 레베카와 조지가 앉았다. 초대석을 넓게 활용해 다큐멘터리 촬영팀도 자리를 잡았다. 카메라의 반은 그레이를, 나머지 반은 무대를 향하고 있었다.

“음. 이것도 찍는 거야?”

“편집할 때 조금 넣으려고.”

음. 조지가 알아서 하겠지.

고개를 끄덕인 그레이는 오랜만에 보는 연주회에 눈을 빛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연주를 하느라, 다른 음악가들의 연주회에 참석하는 것은 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곧 관객석이 어두워졌다.

삐---

하고 알림음이 들리고, 설레는 고요가 연주홀에 내려앉았다.

자선 연주회의 첫 무대는 이십 대로 보이는 사람들의 연주로 시작되었다.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로 이루어진 피아노 4중주였다.

바이올린이 있어서 그런지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됐다. 그레이의 또래로 보이는 바이올리니스트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애정을 가득 담아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뿐만이 아니었다. 피아노도 비올라도 첼로도 무엇이 그리 즐겁고 행복한지 미소 가득한 얼굴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다.

관객들로 가득한 무대라 긴장해서 그런지 간간이 실수가 나왔다. 그 실수를 자연스럽게 커버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라 티가 나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 실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연주자도, 관객들도 미소를 띠고 귀를 기울였다.

그 모습이 그레이에겐 겨울을 지우는 봄처럼 다가왔다. 끝나지 않을 추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꽃이 피는 봄이 된 것이었다.

‘물론 프로와 아마추어에게 기대하는 건 다르겠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똑같을 터였다.

등으로 푹신한 의자의 등받이가 느껴졌다. 그레이는 온몸의 힘이 풀렸다는 걸 깨달았다.

관객석에 앉아 있어도 ‘연주홀’이라는 장소였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들려오는 음악이 새롭게 들렸다.

그레이도 어느 연주회에서 연주했던 클래식 곡인데 느낌이 새로웠다.

그레이의 왼손 손가락이 바이올린의 선율에 맞춰 까딱까딱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레베카와 조지가 작게 웃었다. 무대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레이는 전혀 깨닫지 못한 표정이라 더욱 그랬다.

짝짝짝짝!!

첫 번째 무대가 끝났다.

사라 로트 감독의 오케이 사인 없이, 연주자들은 상기된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하고 무대를 떠났다. 정말로 영화 촬영이 아니라 연주회에 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두 번째 연주자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중노년의 연주자들이었다. 동네 어디에서나 볼법한 사람들이 단정히 차려입은 모습에서 멋짐이 흘러나왔다.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색소폰, 트럼펫, 드럼.

그들은 재즈를 연주했다.

클래식 곡만 나올 줄 알았는데!

그레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재즈 특유의 분위기로 연주홀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고개가 그 박자에 맞춰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앞선 연주팀과 마찬가지로 간간이 틀린 부분이 나왔지만, 이번 재즈팀의 연주자들도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주름진 얼굴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 미소에 그레이의 마음도 술렁였다.

짝짝짝!!

두 번째 연주가 끝났다.

“컷! 오케이!”

오케이 사인과 함께 쉬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다들 엄청 잘하시더라!”

“그러게! 진짜 연주회에 온 것 같았어.”

화장을 수정하는 사이에도 서준과 캐서린, 폴이 들뜬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감독님. 다들 배우분들이세요?”

“첫 팀은 전공자도 있지만 대부분 배우는 아니고 본업은 따로 있어. 어렸을 때 음악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동안 여건이 되지 않아서 못 하셨던 분들이야.”

“그렇구나. 혹시 전공자분, 피아니스트세요?”

“어? 어떻게 알았어?”

“잘하셔서요.”

“역시, 준이네!”

서준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에밀리 조감독이 크으, 감탄했다. 그 반응에 세 아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라 로트 감독도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 촬영 이어서 할까?”

“네!”

* * *

세 번째 연주팀은 그레이보다 어린아이들의 연주였다. 나비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입고 어색한 걸음으로 무대 위로 나왔지만, 악기를 들고 있을 때는 즐거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어린 그레이가 속삭였다.

‘나도 연주하고 싶어.’

……나도 그래.

그레이도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두 손을 조물락거렸다.

그렇게 이어지던 자선 연주회는 마지막 연주만을 남겨두고 20분간의 쉬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준비하러 가자. 그레이!”

“그래.”

그레이의 대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레베카와 조지가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도 충분한 것 같지만 아직 남은 것이 있었다.

* * *

그레이 바이니의 대기실.

쉬는 시간이 20분이나 됐는데, 그레이가 검은색 정장으로 갈아입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습하면서 기다릴까, 고민하는 그레이의 앞에 조지가 모니터를 설치했다.

“? 이건 뭐야?”

“오래 안 걸릴 테니까 보면 돼.”

고개를 갸웃하던 그레이가 알았다고 대답했다. 친구들이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할 리가 없으니까. 그레이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거기에서는,

소중한 친구들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다.

레베카와 조지의 이야기에 그레이의 눈이 점점 커졌다. 숨겼다고 숨겼는데,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촬영 동안 만났던 사람들이 모두 친구들이 부른 사람들이었다니.

하지만 그 이후의 말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분들은 그레이를 후원해 주셨던 분들입니다.]

노인 음악가가 떠올랐다. 세 악사가 떠올랐다. 린다 가족이 떠올랐다. 어머니와 이제는 만나지 못할 아이가 떠올랐다.

숨이 턱 하고 막히며,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그레이의 마음속에서 휘몰아쳤다.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제대로 인사를 할걸. 고맙다고 하고 싶었는데. 여러분 덕분에 바이올린을 계속 연주할 수 있었다고.

모니터 속 친구들은 오히려 후원자들이 그레이의 연주에, 노력에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연주하던 후원자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연주를 들으며 미소를 짓던 어머님과 다운록의 사람들도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잘하고 있었나 보다.

그들의 기대에 부족하지 않게, 잘한 모양이었다.

말없이 쌓여갔던 부담감이 눈 녹듯, 눈물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자선 연주회가 남았죠. 정확히 말하자면,]

모니터 속 조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레이 바이니를 위한 연주회가 말입니다.]

“……나를 위한 연주회라고?”

먹먹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레이에 조지와 레베카가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이 자선 연주회는 너를 위한 연주회야.”

“무대에 오른 연주자들하고 관객석에 있는 사람들. 누군지 알겠어?”

레베카의 말에 그레이는 멋진 연주를 보여주었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이내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 고개를 저었다.

조지와 레베카가 착하디착한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레이 네가 그랬잖아. 다들 너를 도와준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네가 처음 수익을 얻기 시작하면서부터 후원했던 사람들이야.”

그와 동시에, 모니터에 브레드홀에 가득 앉아 있는 관객들이 비쳤다. 그레이는 떨리는 눈동자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행복 속에서 새로운 감정이 보였다.

감사함.

그레이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이올린 연주로 첫 수익을 얻었던 그날부터 그레이도 크라우드 펀딩에서 도움을 바라는 이들을 후원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음악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지만 도움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널 후원해 주셨던 분들도 계셔. 다들 널 보러 와주셨어.”

그레이를 후원해 준 사람들과 그레이가 후원한 사람들이 브레드홀에 모여 있었다.

방송국의 힘이었다.

“그레이. 네가 이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은 것처럼, 널 후원했던 사람들도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 그저 네가 행복하게 바이올린을 연주하길 바라고 있어.”

안 그래도 눈물로 가득하던 그레이의 얼굴이 더욱 젖어갔다. 그 때문에 그레이는 말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컷! 오케이!”

사라 로트 감독의 오케이 사인에 울고 있던 서준이 눈물을 멈추었다. 수도꼭지처럼 아주 자유자재로 울었다 멈췄다 하는 모습에 최태우가 감탄했다.

서준은 울어서 붉어진 눈시울을 찬 수건으로 진정시키며 캐서린, 폴과 함께 조금 전 찍은 장면을 모니터링했다. 그 옆에 같이 모니터링하던 사라 로트 감독이 입을 열었다.

“음. 여기만 한 번 더 갈까?”

“네. 좋아요.”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컷이지만 한 번 더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엑스트라 분들도 점심을 먹고 있을 거고 시간은 넉넉했다.

눈물로 화장이 지워진 서준만 다시 화장을 하고 촬영을 준비했다.

다시 촬영하는 장면은 ‘……나를 위한 연주회라고?’라고 말하는 서준의 대사부터였다.

“레디, 액션!”

“……나를 위한 연주회라고?”

먹먹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레이에 조지와 레베카가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이 자선 연주회는 너를 위한 연주회야.”

“무대에 오른 연주자들하고 관객석에 있는 사람들. 누군지 알겠어?”

레베카의 말에 그레이는 멋진 연주를 보여주었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이내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이 착하디착한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후원했던 분들이야.”

“……응?”

“네가 10년 전부터 후원하고 있는 분들이라고.”

그레이가 눈을 끔벅였다.

대본에는 없었던 대사다. 애드리브인가? 하지만 맞받아치기에는 내용이 조금 이상했다. 그레이가 바이올린 연주로 수익을 얻기 시작한 건 7년 전이었다.

‘그러니까 후원도 7년 전부터……!’

조지를 바라보았던 그레이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린 채였다.

‘그레이 바이니’의 떨리는 눈동자가 모니터 화면에 비치는 브레드홀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남녀노소, 인종을 가리지 않고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낯선 얼굴.

그렇지만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10년 전.

뛰어난 대사 해석 능력은 그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파삭-!

완벽했던 ‘그레이 바이니’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그 균열 사이로 천천히 ‘진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컷 사인은 들리지 않았고 촬영은 계속되는 중이었음에도.

몸과 마음을 삼켜 버릴 듯한 거대한 감정을 더 이상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그레이 바이니’는,

‘서준 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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