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48화
나지막한 조지의 목소리에, 누가 들어도 그 ‘아드님’이라는 사람이 한나 와이즈가 보고 있던 묘비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몸이 나아 퇴원을 하게 된다면, 꼭 직접 그레이의 연주를 들어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서준은 조용히 촬영장을 바라보았다.
영화 속 이야기임에도 마음이 울렁이는 것 같았다.
다른 스태프들도 그러했는지 촬영장이 조금 엄숙해진 기분이 들었다.
조연출이 다시 질문했다.
아마 미래의 시청자들이 궁금해할 내용이지 않을까.
“그럼 촬영 내용이 전부 설정이었나요?”
레베카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희가 기획한 건, 사람들의 연주를 그레이에게 들려주는 게 전부였어요. 격식 있는 무대가 아니라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그리고 몸에 딱 맞는 정장이 아니라 편안한 복장으로, 철저하게 악보에 맞춰서 연주하는 게 아니라 틀려도 괜찮은.”
한때, 공원에서 그레이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주고 그레이와 함께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레베카가 빙그레 웃었다.
“그들이 즐겁게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보고 그레이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행복하게 연주하던 자신을 떠올리기를 바랐죠.”
“물론 공동묘지에서의 연주는 저희가 부탁한 겁니다. 연주를 할지 안 할지는, 그레이에게 달렸던 일이었죠.”
뭐, 그레이의 성격을 보면 예상은 했지만.
“그렇다고 두 곡이나 들려줄 줄은 몰랐죠. 그것도 그렇게 멋진 곡을 말입니다.”
조지의 말에 레베카가 작게 웃었다.
“작곡도 그랬어요. 설마 다른 사람들의 연주를 들으며 새로운 곡들을 만들어낼 줄은…… 슬럼프라도 그레이가 여전히 음악을 사랑한다는 걸 알아서 안심이 됐죠.”
조연출이 물었다.
“다운록에서의 장면도 대본인가요? 그래피티나 주민들의 환대 말입니다.”
“…….”
레베카와 조지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긍정이라는 말이 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면 이 침묵이 긍정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격과 감동이 두 사람의 얼굴에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아뇨.”
조금 물기가 서린 듯한 목소리로 레베카가 입을 열었다.
“그건 모두 진짜였어요.”
“저희가 그레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바뀐 다운록의 풍경이었습니다. 음악과 악기로 가득한 다운록 말입니다. 하지만 다운록의 사람들은…… 솔직히 말하면 어떨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른 아침에 찾아갔죠.”
그레이에게 다운록의 바뀐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다운록의 주민들은 어떨지 조지도 레베카도 예상하지 못했다.
레베카와 조지가 기억하는 다운록의 사람들은 날이 서고 삐죽삐죽한 이들이었으니까. 지금도 10년 전과 같은 분위기라면 현재의 그레이에게 오히려 독이 될 터였다.
“그래서 사람이 적은 이른 아침에 그레이에게 다운록의 바뀐 풍경과 옛 기억을 떠올릴 옛집만 보여주고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그건 지금 생각해도 가슴 벅찬 풍경이었다.
다운록의 어둠과 우울을 알고 있던 레베카와 조지는 그레이 못지않게 감격했었다.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그레이에게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다운록의 주민들 사이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반짝반짝 빛나던 그레이의 모습이 떠올라, 두 친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계획만 남았습니다.”
“원래는 이게 가장 중요한 계획이었는데 말이에요.”
레베카와 조지의 계획은 원래 이랬다.
투어 중간중간, 그레이에게 사람들을 연주를 들려주며 좋은 기억을 쌓아두다가 마지막에 펑! 하고 터뜨릴 예정이었는데, 음악에 대한 사랑이 너무 대단했던 나머지 그레이는 벌써 슬럼프를 어느 정도 벗어난 것 같았다.
기특하고 장하다.
우리 그레이.
그래도 완벽하게 슬럼프를 이겨내기 위해, 계획은 그대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꼭 들려주고 싶기도 했다.
“마지막 계획이라면?”
다큐멘터리를 찍어야 했던 이유. 방송국의 힘을 빌려야 했던 이유.
“자선 연주회가 남았죠. 정확히 말하자면,”
조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레이 바이니를 위한 연주회가 말입니다.”
* * *
-그레이 연주회 또 안 하나? 어디 연주회 엑스트라 모집글 없어?
=ㄴㄴ SNS에 올라올 법도 한데 없는 듯.
=조니 스트럭 사건 때문에 이제 대대적인 연주회는 안 하는 것 같은데?
-계속 촬영은 하고 있는 건 맞지???
=ㅇㅇ 기사 났음. 촬영은 계속하고 있대. 스튜디오 촬영이라 딱히 눈에 띄지 않을 뿐.
=다행이다ㅠ
-그럼 연주회 장면 촬영은 다 끝난 거겠네.
=영화 촬영 순서랑 영화 스토리 순서랑은 다르니까 어떤 내용일지 되게 궁금함.
-이번에도 좋은 곡 많이 나오겠지ㅠ 빨리 들어봤으면ㅠㅠ
=222 굿모닝 뒷부분도 빨리 좀ㅠㅠ
=333 다른 자작곡들도 이 정도면 이서준은 그냥 음악의 길을 걸어도…….
=안 되지(정색)
=서준이는 연기가 천직임(궁서체)
=새싹들 대댓 빨라ㅋㅋ
LA에서 촬영이 시작한 후로 연예란을 도배했던 [오버 더 레인보우2]의 홍보기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조니 스트럭 사건의 영향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마지막 공연 장소가 LA음대의 브레드홀이라는 사실이 더욱 컸다.
아무래도 [오버 더 레인보우1]의 공연 장소이기도 했으니까. 일종의 스포일러 방지인 셈이었다.
“그럼 계속 홍보 안 하는 거예요?”
한국과 미국 등의 여러 사이트들을 돌아보며 [오버 더 레인보우2]에 관한 사람들의 기대를 살펴보던 서준의 물음에 최태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촬영이 완전히 끝나면 다시 시작할 거래. 어차피 11월에 유니버스 출시도 해야 하니까 같이 홍보할 생각이라더라고.”
안다호가 한걸음 물러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버 더 레인보우2]의 촬영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안다호는 최태우의 일을 조금씩 늘려가고 있었다.
아쉽기도 하지만 안심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판단하건대, 조금 과한 느낌만 뺀다면 최태우는 좋은 매니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은 자신도 서준의 매니저였다.
“서준아. 수강 신청 오늘이지?”
“네. 어제 플랜C까지 만들어놨어요.”
안다호의 물음에 서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하는 수강 신청이다 보니 한국 인터넷 상황과 많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어떤 학교는 PC방까지 가서 수강 신청을 한다고 하던데, 한예대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인기 있는 강의의 인원이 순식간에 차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가장 좋은 플랜A부터 그나마 수용할 수 있는 플랜C까지의 시간표를 만들어놓은 서준이었다.
“어중간하게 2학기부터 다니는 것보다 내년에 1학기부터 시작하는 게 낫지 않아?”
최태우의 말에 서준이 눈을 빛냈다.
“얼른 졸업하고 작품활동에 집중해야죠!”
“그리고 촬영 일정이 생기면 휴학할 수도 있으니까요. 최대한 학기 내의 촬영은 피할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서준과 안다호의 말에 최태우는 연기와 학업을 동시에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서준은 학교 성적도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잠시 후.
한국 시각으로 오전 10시. LA 시각으로 오후 5시.
한국예술대학교의 수강 신청 사이트가 열렸다.
>양주희: 다했다!
>양주희: 다들 어떻게 됐어?
>김주경: 나도 전부 신청함!
>박시영: 아, 하나 못 했어ㅠ
아무래도 남자애들은 전부 군대에 가 있으니 여자애들의 메시지만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3학년이겠네.”
서준만 2학년, 그것도 2학기 수업을 듣게 되었다.
“아는 사람이 있으려나?”
자신을 아는 학생들은 많겠지만 말이다.
>양주희: 서준이 넌?
<나도 다 성공했어.
>박시영: 대단하네! 미국 인터넷 느리지 않아?
>김주경: 하다 하다 수강 신청도 잘하는구나ㅋㅋㅋ
>양주희: ㅋㅋㅋㅋ
<ㅋㅋㅋㅋㅋ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정말로 다시 학교에 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양주희: 촬영은 어때? 잘돼가?
<이제 몇 장면만 더 촬영하면 끝남.
>김주경: 으으. 기대된다!
>박시영: 나오자마자 결제한다. 유니버스!
>양주희: 새싹부터에서는 영화관 빌린다고 하더라.
<그래서 회사에서도 이야기하는 중이래.
>김주경: 영화관에서 보면 더 좋아?
<ㅇㅇ스피커 좋은 곳에서 보세요ㅋㅋㅋ
<(홈시어터로 영화 보고 있는 곰 이모티콘)
>양주희: 오……!
>박시영: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기대되잖아ㅋㅋ
>김주경: 그러니까!
그렇게 잠시 친구들과 놀고 있으니, 최태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준아! 저녁 먹자!”
“네!”
* * *
8월 1일부터 미국을 횡단하며 거의 한 달 동안 진행되었던 [오버 더 레인보우2]의 마지막 촬영은 LA음대 브레드홀에서 진행되었다.
“여기도 10년 만에 오네.”
서준의 말에 캐서린과 폴도 신기하다는 듯 변함없는 브레드홀을 둘러보았다.
[오버 더 레인보우1]의 마지막 연주회 장면을 촬영했던 곳이라서 그런지 반가웠다.
“우리도 분장하러 가자.”
“그래.”
촬영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을 지나, 서준과 캐서린, 폴은 분장실로 향했다. 서준은 익숙하게 가발을 쓰고 캐서린과 폴은 옷을 갈아입었다.
서준이 옷을 갈아입고 화장까지 끝냈을 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에밀리 조감독이 들어왔다.
“준비 다 끝났으면 오늘 연주해 주실 분들이랑 인사할래?”
“네. 좋아요.”
서준과 두 배우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무대에 올라 연주 장면을 촬영할 연주자들은 분장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남녀노소, 나이도 성별도 다른 이들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다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서준과 캐서린, 폴을 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와악! 하고 비명 같은 환호성도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세 배우에게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폴! 반가워요!”
“캐서린. 팬이에요!”
“준! 사인 좀 해주시겠어요?”
“리. 정말 팬입니다.”
“바이올린 연주 매일 듣고 있어요.”
들썩이는 분위기가 마치 팬미팅장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특히 서준의 인기가 가장 좋았다. 서준을 바라보는 연주자들에게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그런 모습을 보이니, 서준은 괜히 쑥스러워져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런 서준의 모습에 어른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촬영에 방해되지 않게 열심히 할게요!”
“저희 열심히 연습했어요!”
“잘 들어주세요! 준!”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 서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한 소절도 안 놓치고 잘 들을게.”
“와아아!”
그렇게 잠시 시끌벅적한 인사를 나누고 세 배우는 대기실로 돌아왔다.
“준 엄청 인기 많네.”
“그러게.”
“하하.”
두 친구의 웃음 가득한 말에 서준이 볼을 긁적였다.
민망하기도 하지만, 좋았다.
* * *
비밀 유지서약서에 사인을 한 엑스트라들이 브레드홀의 관객석에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그중에는 최유성과 나탈리, 그리고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10년 전 [오버 더 레인보우1]의 촬영처럼 말이다.
“웨일 스튜디오에서 연락해 올 줄은 몰랐어.”
“그러게 말이야.”
앞서 ‘그레이의 연주회를’ 격식 있는 차림새로 참석했다는 SNS의 후기글들과는 달리, 최유성과 나탈리, 친구들 그리고 주변의 관객들은 모두 편안한 복장으로 앉아 있었다.
관객석 한쪽에는 병원복을 입은 환자 역의 사람들, 그리고 조금 낡은 옷을 입은 사람들(아마도 다운록의 주민들)도 있었다.
관객석을 둘러본 나탈리가 입을 열었다.
“10년 전에도 이랬지?”
“어. 이러니까 꼭…….”
[오버 더 레인보우1]의 마지막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 같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최유성이 탄식했다.
“아, 왠지 스포일러 당한 것 같은 기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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