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647화 (647/1,055)

0살부터 슈퍼스타 647화

다운록에서의 촬영 후, 다음으로 진행할 장면의 촬영 장소는 딱히 큰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카페.

[오버 더 레인보우2]의 스태프들이 카메라와 조명들을 설치하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테이블과 함께 두 사람이 앉을 두 개의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저도 왠지 준비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에요.”

가발을 쓰지 않아 조금 어색한 짧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서준의 말에 안다호와 최태우가 작게 웃었다.

오늘 촬영 장면은 ‘레베카’와 ‘조지’만 출연하는 장면으로 ‘그레이 바이니’는 출연하지 않았다. 그러니 가발도 쓸 필요도 없었고 대본을 보며 대사나 지문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왔어, 준?”

들려오는 밝은 목소리에 서준이 고개를 돌려 분장실에서 나오는 두 친구를 바라보았다.

이것저것 많이 분장해야 하는 판타지나 액션 영화와는 다르게, 다큐멘터리라 평소와 다름없는 복장을 하고 있는 캐서린과 폴이었다.

“그레이가 본다고 생각하니까 좀 긴장되는데?”

폴의 말에 캐서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번 촬영은 지금까지의 ‘그레이 바이니’의 촬영분처럼 캐릭터의 고민과 감정이 확연히 드러나는 장면이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감동적인 장면 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다큐멘터리 촬영에서는 빠질 수 없는 평범한 인터뷰 장면.

그래서 더 어려운 장면이었다.

“둘 다 잘할 거야.”

서준의 말에 캐서린과 폴이 빙그레 웃었다.

“준비 다 됐니?”

“네!”

카메라와 세트장을 확인하고 온 사라 로트 감독이 묻자, 캐서린과 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촬영을 위해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 촬영을 자주 보긴 했지만, 오늘은 좀 떨리네요.”

“그 감정은 나중을 위해서 묻어둬야지.”

안다호의 말에 서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인터뷰 장면은 ‘그레이 바이니’는 아직 알지 못하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는 장면이니까 말이다.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에밀리 조감독의 말에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캐서린이 비어 있던 두 의자 중 하나에 앉았다. [오버 더 레인보우]의 촬영팀 카메라가 그런 캐서린을 비춘다.

캐서린의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 아직 비어 있는 자리에도 커피잔이 하나 놓였다.

조지는 언제나처럼 다큐멘터리 촬영팀 스태프들 사이에 서 있었다.

“레디,”

사라 로트 감독이 모니터를 확인하고 외쳤다.

“액션!”

“안녕하세요. 그레이 바이니의 친구, 레베카 리스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레베카가 자신을 찍는 다큐멘터리 카메라의 뒤쪽을 바라본다.

그러자 다큐멘터리 카메라의 뒤쪽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부스럭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그 그림자가 비어 있던 레베카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그레이 바이니의 친구이자 이번 다큐멘터리의 담당피디, 조지 패트릭입니다.”

서준이 그런 두 친구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긴장된다더니,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언제나 그렇듯 ‘레베카 리스’와 ‘조지 패트릭’이 된 것처럼 자연스럽다. 자신이 다 뿌듯해졌다.

사라 로트 감독의 생각도 그러한 듯, NG 없이 촬영은 계속되었다.

“이번 다큐멘터리를 찍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이번 인터뷰는 질문과 응답으로 이루어진 인터뷰였다. 담당피디가 인터뷰이로 나가 있으니 다큐멘터리 촬영팀의 조연출이 그 질문을 대신했다.

조지가 그레이와 레베카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삐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뚱한 기분이 아주 확연히 드러난다.

“원래는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다큐멘터리 촬영.”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레베카가 작게 웃었다.

그레이가 들었다면 눈을 크게 뜨고 놀랐을 만한 이야기였다.

조지가 그레이에게 설명했던 것 중에 거짓은 없었다.

방송국의 상사들이 지인이라는 이유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라고 했던 건 사실이니까.

단지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 있을 뿐.

조지가 단박에 그 다큐멘터리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피디의 모습에 조연출이 쓰게 웃으며 물었다.

뭐, 조연출도, 여기 있는 스태프들도 알고 있던 사실이라서 딱히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런 솔직함이 다큐멘터리의 묘미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레이라면 착해서 당연히 들어줄 테니까요.”

이번 촬영만 해도 그렇다.

내가 필요하다고 하니, 들어주는 모습을 봐라. 저렇게 순해서야.

저절로 쯧, 하고 혀를 차게 된다.

“그리고 친구라는 이유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공연과 바이올린 이외의 것에는 신경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다큐멘터리가 없어도 그레이는…… 잘하고 있었으니까요.”

잠시 멈칫했지만, 끝까지 대답한 조지의 모습에, 조연출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음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럼 마음을 바꿔서 촬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잠시 내려다보던 조지가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건 카메라였지만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뉴욕에서의 공연이 끝난 후의 그레이였다.

“뉴욕에서의 공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그레이의 표정.

“그 공연은 아주 훌륭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조지와 레베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이 조금 팔불출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주 훌륭했죠. 저희도 그저 감탄만 하고 있었을 정도로요.”

레베카가 말을 이었다. 슬프고 씁쓸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연주가 너무 훌륭해서 그레이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그저 무대 위에서의 모습을 보면서 멍청하게 기뻐하기만 했죠.”

축하의 꽃다발을 들고 웃으며 찾아갔던 무대 뒤.

레베카와 조지가 마주친 건, 무대 위에서처럼 반짝이고 있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던 12살의 그레이였다.

“표정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친구라면 알 수 있는 얼굴이었죠.”

마치, 그 사기꾼 선생의 정체를 알았을 때와 같은.

어찌할 줄 모르는.

절망적인.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던 레베카와 조지였지만, 티 내지 않으려는 그레이의 모습을 보니 그냥 웃으며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바로 고민했어요.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 하고.”

“그레이의 어머니께도 연락했습니다. 짐작 가는 게 없으시냐고요.”

겨우 반나절.

두 사람은 친구를 위해 치열하게 정보를 모으며 고민했다. 그레이의 매니저도 기꺼이 두 사람을 도왔다.

“그렇게 우리는 그레이의 고민을 조금이나마 알게 됐습니다. 크라우드 펀딩이 그 문제 중 하나라는 걸 말입니다.”

어렸던 날.

크라우드 펀딩을 제안했던 조지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레베카는 그런 조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때 세 아이에게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레이는 착해서, 지지해 준 분들이 기뻐할 만큼, 자랑스러워할 만큼 유명해지길 바랐죠. 그래서 공연을 하고 연주를 하고, 세계를 돌며 무대에 섰습니다.”

“자신이 연주하고 싶어 했던 이유도 잊은 채로요.”

그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그레이는, 어느 순간부터 목을 조이는 정장을 입고 격식 있는 차림새의 사람들 앞에서 공연만을 위해 연주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만으로도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답답해지고 우울해지고 외롭고 막막해졌으리라.

자신을 응원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 더 넓은, 더 먼 세상에 닿기 위해 바다를 헤쳐나가던 그레이였지만, 어느새 목적지를 잃고 방향도 잃고 망망대해를 헤매고 있었다.

“우리는 그레이를 도와줄 방법을 찾았어요. 해결하지는 못해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요.”

레베카와 조지는 한시라도 빨리 그레이를 도와주고 싶었다. 친구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꽤 괜찮은 계획도 세웠죠. 하지만 저희 둘만의 힘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방송국의 힘을 빌리게 됐죠. 거절했던 다큐멘터리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그레이를 찾아갔던 것이 떠올랐다.

당황하다가 기뻐하던 그레이의 표정이 생각나 레베카가 작게 웃었다.

“괜찮은 계획이라는 건 뭔가요?”

“클리블랜드의 노인 음악가 기억하시나요? 갑자기 바이올린 연주라니 뜬금없긴 했죠? 시카고의 세 악사도 있었고 가족 전체가 악기를 연주하는 캔자스시티의 린다 가족도 그랬죠. 게다가 갑자기 공동묘지에서의 연주라니…… 우연치고는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ABS 방송국 막내 피디지만,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의 친구로 다큐멘터리의 담당자가 된, 조지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다들 예상하지 않았냐는 투로, 입을 열었다.

“전부 저희가 기획한 겁니다.”

조지와 함께 계획을 세웠던 레베카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레이가 이동할 곳을 미리 알아보거나 제가 그레이를 데리고 돌아다녔죠. 연기하느라 힘들었어요. 그레이가 순진해서 다행이었지…… 린다 가족의 초대장도 그렇고 공동묘지도 그렇고, 잘도 믿고 따라오더라구요.”

‘걔 진짜 사기 안 당하게 조심해야겠어요.’ 하고 말하는 레베카에 조지가 웃고 말았다.

“아, 그레이! 회사는 원래 그만둘 생각이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 오히려 여행으로 기분 전환돼서 좋았어!”

하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걱정하고 있을 그레이에게 한마디 남기는 것도 잊지 않는 레베카였다.

분위기가 조금 환기되자,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을 미래의 시청자들에게 조지는 말했다.

“그분들은,”

느릿하면서도 진지한 목소리였다.

“그레이를 후원해 주셨던 분들입니다.”

* * *

조금의 침묵 후.

조지가 말을 이었다.

“클리블랜드의 노인 음악가는 원래는 노숙자였지만 크라우드 펀딩을 보고 후원하며, 오히려 그레이에게서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바이올린도 그때 배우게 되신 거라고 하더군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그레이의 반짝반짝한 눈동자와 표정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시카고의 세 악사분도 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업은 따로 있지만 그레이를 통해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음악으로 번 돈은 다시 크라우드 펀딩으로 후원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조지의 말을 이어, 레베카가 말했다.

“캔자스시티의 린다 가족은 원래 사이가 나빴다고 해요. 몇 년 전, 린다가 할아버지께 그레이의 크라우드 펀딩 영상을 보여주기 전까지는요.”

레베카가 웃으며 린다 가족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무관심하던 할아버지는 노력하는 그레이의 모습을 보며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겠다는 아빠의 마음을 천천히 이해했다고 해요.”

저절로 ‘……그게 그렇게 하고 싶으냐?’ 하고 묻는 린다의 할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레이만큼, 아니, 그 반만이라도 아들이 행복하다면 허락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을 거다.

“그렇게 그레이를 후원하면서 바이올린 연주를 계속 듣다 보니 가족 전체가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했죠.”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던 조지가 입을 뗐다.

“공동묘지에서 만났던 분은 아드님과 함께 그레이를 후원했다고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동안, 아드님의 행복이 크라우드 펀딩에서 보여주는 그레이의 연주를 듣는 것이라고 하셨죠.”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