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46화
LA의 숙소.
그레이와 레베카, 조지가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운록에 가자고?”
“응! 오랜만에 가보는 것도 괜찮지 않아? 모레 있을 자선 연주회까지 시간도 남았고. 할 일도 없으니까!”
레베카의 말에 그레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운록.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알려진 ‘그레이 바이니’가 태어나고 자란 곳.
크라우드 펀딩으로 돈을 모으고 지원을 받아 바이올린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하고, 제대로 연주회를 하기 시작하며 돈을 모아 떠날 때까지 살았던 동네로, 추억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고향이라기엔 슬프고 힘든 기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또 엄마와 함께 살았던 작고 낡은 집과 레베카와 조지와 만났던 공원 덕분에 행복한 기억도 남아있어서 뭐라고 말하기 애매한 곳.
고민하는 그레이에 카메라 너머에 있던 조지가 입을 열었다.
“다큐멘터리에도 그런 장면이 하나쯤은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네가 어떤 동네에서 자랐는지 말이야.”
보통 유명인의 다큐멘터리에서는 유명인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 한 번쯤은 찍기 마련이었다. 더불어 ‘어릴 때부터 특별한 아이였지!’ 같은 말이나 ‘저랑 얼마나 친했다고요!’ 같은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이웃의 인터뷰도 넣어주면서 말이다.
“아. 그러네.”
그제야 카메라를 인식한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반짝이는 렌즈가 달린 카메라들이 세 사람을 촬영하고 있었다. 이제 한 달 가까이 되어가는 촬영에다가 조지와 스태프들이 편하게 배려해 줘서 다큐멘터리 촬영 중이라는 것도 잊혀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면 한번 가 보는 것도 괜찮겠다.”
특별한 것은 없겠지만 다큐멘터리를 찍는 조지에게 필요하다면.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선 연주회는 어떻게 할 거야? 무대에서 연주할 생각이야?”
조지의 물음에 그레이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너무 자연스럽게 지어진 표정이라 그레이 자신은 모르는 듯했다.
“아직…… 고민 중이야.”
“편하게 생각해. 그레이. 그냥 관객으로 참여해도 된다니까.”
레베카의 말에 그레이가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박힌 손가락의 굳은살이 느껴졌다. 이렇게 까지고 굳은 손가락의 상처 때문에 찔끔 눈물을 흘리며 아파했던 적도 있지만 그것보다 노력과 성장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에 더 기쁜 감정이 강렬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슬럼프에 빠지면서, 그레이는 그런 감정들이 모래 위에 그린 그림이 파도에 쓸려 지워지는 것처럼 깊이 남을 새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매일같이 느꼈었다.
이겨내려고 노력해도 언제나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니, 아니, 그전의 상태보다 더욱 악화되니, 그레이는 더 이상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됐다.
그리고 그저 밀려 들어오는 파도가 자신의 발을 삼키고 무릎에 닿고 허리, 가슴, 어깨, 그리고 마침내 얼굴 위까지 올라와,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 손을 뻗어주는 느낌이다.
이제 물 밖으로 나오라며.
“……조금만 더…… 생각하고 결정하려고.”
그레이의 말에 레베카와 조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미소를 지었다.
* * *
“어쩐지 10년 전이랑 별로 안 변한 것 같네요.”
서준의 말에 캐서린과 폴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금이 간 건물의 벽, 깨진 유리를 테이프로 붙여놓은 창문, 제법 훌륭한 그래피티와 그냥저냥한 낙서, 여기저기 버려진 쓰레기들, 움푹 파인 도로와 인도, 녹이 슨 계단과 간판 등. 그럴듯한 건물들이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오버 더 레인보우1] 속, ‘다운록’이라는 마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물론 10년 전의 세트장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건 아니었고, 서준이 군대에 있는 1년 사이 만든 곳이었다.
사라 로트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10년은 긴 시간이기도 하지만 짧은 시간이기도 하니까. 건물들 주위의 배경은 CG 처리를 할 예정이야.”
조금 빈약해 보이는 틈 사이는 가리키며 사라 로트 감독이 말했다. 그 설명을 들으며 동선도 확인할 겸, 삼총사는 마치 과거를 여행하는 것처럼 세트장을 구경했다.
“그래피티는 바뀌었네요?”
“10년이나 같은 그래피티가 남아 있긴 힘들지.”
폴의 말에 사라 로트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피티.
건물의 벽이나 지하의 벽 같은 곳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
예술품으로 취급되어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그래피티들도 있지만, 보통은 건물 소유주의 허락 없이 그려지다 보니 불법일 때가 많았다.
다운록도 그랬다.
페인트로 새롭게 벽을 칠해 깨끗하게 만들어도 밤새 스프레이를 가져와 그림을 그려대는 통에, 주변 환경 관리가 어려운 동네인 다운록의 건물 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바뀐 그림들이…… 정말 좋네요. 마음에 쏙 들어요.”
“그렇지?”
건물 벽에 그려진 그래피티들을 보며 서준이 웃자 사라 로트 감독 또한 미소를 지었다. 캐서린과 폴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이제 촬영 준비할까?”
“네!”
가발을 씌우는 건, 이제는 서준도 분장팀 스태프들도 익숙해져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 스태프들이 서준의 머리 스타일을 정돈하는 사이 캐서린과 폴도 그 옆에 앉아 촬영 준비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오버 더 레인보우1]을 찍었던 스태프들도, 촬영하지는 않았지만 [오버 더 레인보우1]을 재미있게 봤던 스태프들도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다운록 거리 한편에 서 있는 ‘그레이 바이니’를 바라보았다.
스태프들이 그러할진대, ‘그레이 바이니’를 제 손으로 탄생시킨 사라 로트 감독과 그 과정을 모두 함께했던 에밀리 조감독의 심정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묘한 감정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레디,”
서준도 그랬다.
마치, 뜻하지 않게 전생의 삶의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이 잠시 들었다.
원래부터 시리즈물로 계획되어 있던 [쉐도우맨 시리즈]와는 달리 [오버 더 레인보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더욱 반갑고 기뻤다.
하지만 그건 서준의 감정이었다.
‘그레이 바이니는 달라야지.’
후우.
서준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액션!”
그리고 그레이 바이니가 되었다.
* * *
그레이와 레베카, 조지와 다큐멘터리 촬영팀은 다운록으로 향했다. 아직 아침이라서 그런지 거리는 일찍 출근하는 몇몇 사람들만 돌아다닐 뿐, 한산했다. 조용히 둘러보기 좋았다.
“다운록은 그대로네.”
“그러게.”
레베카의 말에 그레이가 동의했다. 무언가 변할 법도 한데, 다운록은 그대로였다.
물론 그레이가 다운록을 떠난 게 6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 그런지도 몰랐다. 이사 갈 돈을 모으려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레이는 왠지 다운록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뭐랄까. 조금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옛날 집 보러 갈까?”
“응. 그러자.”
그레이의 옛집. 작고 낡은 아파트.
그곳을 떠올리니 문득 같은 건물에 살았던 이웃들이 천천히 물감이 번지듯 떠올랐다.
점점 출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거리를 걸으며, 그레이와 레베카, 조지는 그레이의 옛날 집으로 향했다. 길거리의 변함없는 지저분함과 혼란함, 그리고 마구잡이로 그려진 그래피티들이 익숙하게 세 아이를 반겼다.
“그래피티 잘 그렸다!”
“응? 그러-”
-게.
하고 대답하려던 그레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언제나 같은 풍경이라서.
그리는 이들의 심볼이나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라서.
그저 언제나와 같은 그림이려니, 하고 지나갔던 그래피티들이 레베카의 감탄을 듣고 나서야 그레이의 눈에 들어왔다.
“바이올린이지? 저건 첼로고!”
“피아노랑 플루트도 있네.”
그건 악기였다.
“그레이! 이건 오버 더 레인보우 악보야!”
“클래식 악보도 있네. 저 곡 알아, 레베카?”
“비발디의 사계 중에 봄이야.”
그건 음악이었다.
아……!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쉰 그레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엇이 변했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다운록 여기저기에 악기가 있었다. 음악이 있었다.
중고 상점이기는 하지만 악기상점이, 회원을 모집하는 음악 교실의 안내문이, 벽은 어울리는 색으로 연주를 하는 악사들이 그려져 있었다. 악사들의 표정이 익살맞다. 가볍게 트라이앵글이나 탬버린을 치는 아이들의 그림도 있었다.
이전의 다운록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에, 그레이의 가슴이 저도 모르게 벅차올랐다.
“……왜……왜 이렇게 됐지……?”
별천지에 온 것 같아, 눈이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꿈에서도 상상도 못 해본 풍경이었다.
“……그레이?”
귀에 익은 목소리에 그레이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레이가 살았던 건물의 입구에서 험악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출근을 하는 듯 단정히 차려입은 모습으로 나오고 있었다. 같은 건물에 살던 형과 시끄럽다며 싸우던 아저씨다.
“아저씨…….”
그리고 그레이를 지지해 준 사람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마주 잡은 아저씨의 손은 여전히 컸다. 아니, 조금 작아진 것 같다. 그레이가 컸기 때문이리라.
“많이 컸어.”
“……벌써 6년이나 지났는걸요.”
“그래. 벌써 그렇게 됐구나.”
아저씨가 빙그레 웃었다.
“이번 연주회도 잘했다는 소식 들었다. 장하다. 장해.”
그레이가 작게 웃었다. 올라간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다운록이…… 많이 달라졌어요. 아저씨.”
“네 덕분이야.”
“……저요?”
“그래. 다운록의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
아저씨는 정말로 당연한 일인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운록에서도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증명됐으니까 다들 희망이 생긴 거지.”
그레이는 얼떨떨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가 떠오르는 아침의 다운록.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언제나 어둡고 힘들며 지친 사람들의 모습이 가득했는데, 눈에 보이는 풍경은 전혀 달랐다.
“그래서 선생님이 오늘부터 다음 레벨로 올라가도 된다고 하셨어!”
“어제 배운 곡 연습했어?”
“으. 엄청 어렵더라.”
“그림 교실이 생겼다고 해서 등록하려고. 무료 수업이래.”
“그래? 나도 한번 가볼까?”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어른들의 대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거기에는 마음을 아리게 하는 울음소리도, 귀를 찢는 날카로운 목소리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커다란 목소리도 없었다.
그저 웃음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이게 다…….”
그레이의 떨리는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저 때문이라고요?”
모르겠다.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바뀐 걸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는 애정과 걱정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 세계를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보지 못했던, 다운록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대화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들린다. 귓가에 맴도는 소리는 태양처럼 따뜻하게 그레이에게 내리쬔다.
행복한 아침이다.
“그레이? 그레이잖아!”
“그레이라고?”
같은 건물에 살았던 형이, 이웃이, 가게 주인이, 다운록의 주민들이 그레이를 알아보았다.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얼굴들이었다.
한 명 한 명 얼굴을 살펴보던 그레이는 기억한다.
이들이 모두 자신을 지지해 줬다는 사실을.
“제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에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다.
“연주를, 해드려도 괜찮을까요?”
흘러나오는 그레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다운록의 주민들이 활짝 웃었다.
“당연하지!”
“뭐, 조금 지각하는 게 대수겠어!”
“얼마나 늘었는지 들어볼까!”
다운록의 주민들도 6년 전, 매일 같이 바이올린을 연습하던 꼬마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어린 녀석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어쩌면 그게 이렇게 변한 계기일 터였다.
그레이가 조지를 바라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조지가 바이올린을 내밀었다. 레베카와 다운록의 주민들이 기대하듯 눈을 빛냈다. 지나가던 이들도 하나둘 걸음을 멈추었다.
그레이가 바이올린에 턱을 괬다.
그리고 햇살이 몸속으로 스며들듯 활을 그으며 연주를 시작했다. 조금 전 봤던 다운록 주민들의 아침 그리고 다운록에서 행복했던 어린 날을 떠올리며 아침을 맞는 선율을 연주했다.
사랑하는 이, 엄마가 어린 그레이를 깨운다. 낡지만 깨끗하게 세탁된 이불에서는 햇살 냄새가 난다. 그래서 더욱 포근해 일어나기가 싫었다.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반쯤 잠들어 있던 어린 그레이도 웃고 말았다.
엄마가 ‘이제 일어나야지.’ 하고 말한다.
그래. 이제 일어나야 한다.
맛있는 아침도 먹고, 소중한 친구들도 만나고, 선생님에게 바이올린도 배워야 했다. 오늘도 정말정말 즐거운 하루가 될 거다.
그런 마음이 가득 담긴,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2 : Good morning]이 그레이의 바이올린에서 흘러나왔다.
* * *
ABS 방송국 막내 피디지만,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의 친구로 다큐멘터리의 담당자가 된, 조지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다들 예상하지 않았냐는 투로, 입을 열었다.
“전부 저희가 기획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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