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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643화 (643/1,055)

0살부터 슈퍼스타 643화

“이런 느낌으로 가려는데 어떠세요?”

서준이 가볍게 이번 촬영에서 연주할 곡을 들려주었다. 그 간단한 멜로디에도 벤자민 교수가 작곡한 곡의 느낌은 물씬 풍겼다. 벤자민 교수가 웃으며 칭찬했다.

“좋구나. 연습을 열심히 한 것 같아.”

히히.

그에 서준이 활짝 웃었다. 그러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에반 블록과 안다호, 최태우와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에 화답하듯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에반과 다호 형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릴 때부터 인연이 이어져서 그런가.

어쩐지 오랜 인연들 앞에서는 여전히 어린아이인 것 같은 기분이다.

‘뭐, 태우 형은 조금 어색한 얼굴이지만.’

그래도 기쁜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 * *

서준은 오늘 함께 연기할 조연 배우와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서준 리입니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한나 와이즈예요.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한나 와이즈가 웃으며 서준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사십 대인 한나 와이즈의 얼굴에 들뜸과 기대감이 보였다. 나이에 상관없이 오스카 남우주연상과 황금종려상을 받고, 할리우드의 스타로 자리매김한 서준 리와 함께 연기하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었다.

떨림이 가득한 한나 와이즈의 눈빛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사라 로트 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페이크 다큐멘터리다 보니까 유명한 배우들보다는 새로운 얼굴을 가진 배우들을 캐스팅했어.’

물론 연기를 잘한다면 유명해도 상관없겠지만,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는 사람이 에반 블록이나 리첼 힐, 데이비스 가렛 같은 유명한 배우라면 아무래도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사라 로트 감독은 [오버 더 레인보우2]가 보다 몰입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가 되길 원했다.

‘그래도 연기력은 확실히 검증했으니까 걱정은 안 해도 돼.’

사라 로트 감독의 말대로 지금까지의 촬영에서 배우들의 연기력이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다. 서준의 앞에 서 있는 한나 와이즈도 유명한 배우는 아니지만, 전작들을 살펴보니 연기력이 좋았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한나 와이즈를 보니 조니 스트럭이 떠올랐다.

한나 와이즈도 조니 스트럭과 비슷한 시기에 배우가 되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을 겸업하면서도 연기를 놓지 않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건 참 신기한 존재야.’

비슷한 인생을 사는데도 이렇게나 그 끝이 달랐다.

‘아니. 아직 끝은 아니지.’

몇 살이 되더라도, 죽을 때까지는 모르는 법이다.

서준의 능력으로 정신을 차린 조니 스트럭도 어쩌면 새롭고 멋진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어렵긴 하겠지만…….’

자신과 엮여 전 세계에 이름과 얼굴을 알리게 되었으니, 열심히 살고 싶어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뭐, 그건 자기 무덤 자기가 판 거니까.’

속으로 어깨를 으쓱인 서준이 빙그레 웃으며 촬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한나 와이즈는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였다. 노트와 펜만 있었다면 그대로 받아적었을 것 같았다.

“와이즈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저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한나 와이즈가 서준의 물음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우리 같이 연기하는 거잖아요.”

같이.

한나 와이즈는 생각했다. 지금까지도 서준 리의 팬이었지만, 앞으로는 더욱더 빅 팬이 될 것 같다고.

“그, 그럼 여기서는 좀 더 이렇게…….”

“그것도 좋네요.”

그렇게 서준은 한나 와이즈와 함께 촬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후.

에밀리 조감독의 목소리가 촬영장을 가득 채웠다.

스태프들이 카메라 앵글 밖으로 나오고 완벽하게 준비를 끝낸 배우들이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갔다. 다큐멘터리 제작 담당자로서 얼굴은 거의 비추지 않는 폴 오든을 제외하고는.

웨일 스튜디오 소유의 세트장이니만큼 정해진 촬영 시간은 없었다. 물론, 끄물끄물한 날씨나 해가 비치는 시간 때문에 한계가 있긴 하지만, 대여한 장소에서 촬영하는 것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그러니까 편하게 찍읍시다! 레디!”

사라 로트 감독이 외쳤다.

서준과 캐서린, 폴이 작게 웃고는 제 안에 있는 그레이 바이니와 레베카, 조지를 불러냈다.

“액션!”

LA에서 머물게 된 호텔 정문 앞.

“으음. 내가 가도 괜찮을까?”

뒷목을 매만지던 그레이가 말했다.

레베카의 말에 여기까지 나오긴 했지만, 정말로 가도 되는 곳인지 모르겠다.

“괜찮다니까. 걔도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애라서 엄청 좋아할걸!”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레베카에 그레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레베카의 뒤를 따라갔다.

인도를 걷는 사람들을 지나쳐 레베카는 한 가게 앞에 섰다. 레베카와 함께 걷던 그레이와 다큐멘터리 촬영팀도 걸음을 멈추었다. 여러 가지 향기가 물씬 풍기는 꽃집 앞이었다.

“어떤 꽃으로 드릴까요?”

“노란색 꽃 있어요? 그걸로 꽃다발 하나 만들어주세요!”

꽃집 주인의 물음에 레베카가 웃으며 노란색 꽃다발을 주문했다.

“그레이. 너도 하나 사.”

“나도?”

“응! 네가 주면 좋아할 거야!”

볼을 긁적이던 그레이가 잠시 고민하다가 하얀색 꽃다발을 주문했다. 꽃집 주인은 솜씨 좋게 풍성한 꽃다발 두 개를 금세 만들어주었다.

새하얀 꽃다발을 든 그레이는 조금 기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꽃다발을 쥔 손에 약간 땀이 차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긴장도 되었다.

“……근데 레베카. 누구라고 했지?”

레베카와 함께 걷던 그레이가 입을 열었다.

“아는 분 아들. 열다섯 살이야.”

열다섯.

크라우드 펀딩으로 여러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은 그레이가 한참 바이올린을 배웠던 나이였다.

“하아…….”

무거운 한숨이 저도 모르게 나왔다.

그런 그레이의 모습에 레베카가 쓰게 웃었다.

“도착했다. 여기야.”

레베카의 말에 그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녹슨 철제 울타리로 둘러싸인 담과 정문. 햇빛에 하얗게 변색된 날개 달린 천사의 석상. 그와 반대로 잘 관리된 잔디밭과 예쁘게 장식한 화단. 드문드문 심어진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마른 꽃잎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생화의 흐릿한 향기.

데엥-데엥-

멀리서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들고 있던 새하얀 꽃다발의 무게가 더욱 무거워진 것 같다고, 그레이는 생각했다.

“가자.”

“……응.”

이곳은 공동묘지였다.

* * *

“컷, 오케이!”

그 소리에 서준은 곧장 그레이에게서 벗어났다. 서준에게는 가뿐한 일이었다.

“근데 진짜 공동묘지 같다.”

분명 세트장일 텐데도 흙 한 줌, 나무 한 그루까지 모두 무겁고 고요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묘비 하나하나에도 사람들의 이름과 살았던 기간, 글이 새겨져 있어서 더욱 그랬다.

무덤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날 성묘를 하러 갔을 때밖에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낯설었다. 주변에 돌아가신 분이 없기도 했고.

잠시 공동묘지를 둘러보던 서준의 귀에 에밀리 조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바로 바스트샷 촬영 가겠습니다!”

“네!”

촬영을 재개할 시간이었다.

* * *

그레이는 레베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규칙적으로 정렬된 묘비들 중에는, 오래전 다녀갔는지 바싹 마른 꽃다발이 놓여 있는 묘비도 있었고 다녀간 지 며칠 되지 않았는지 아직 향기가 남아 있는 생화가 놓여 있는 묘비도 있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묘비는 잘 관리되어 있었다.

“여기야.”

레베카가 한 묘비 앞에 섰다.

묘비는 누군가 자주 들르는 듯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레베카가 그 앞에 노란색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이 조심스럽고 신중해 자신까지 전염되는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레베카가 아는 아이라면 좋은 아이였을 거다.

열다섯. 그 나이에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그레이가 막 새하얀 꽃다발을 묘비 앞에 놓으려던 찰나, 레베카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 미안!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그러고서는 얼른 달려가 버린다.

꽃다발을 묘비 앞에 놓으려고 움츠린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선 그레이가 눈을 끔벅였다. 어쩐지 뻘쭘해졌다.

“으음. 안녕. 난 그레이라고 해. 알지는 모르겠지만……바이올리니스트고. 바이올린 좋아한다며? 내 연주 들어본 적 있는지 모르겠네.”

이게 뭐 하는 건지.

꽃다발을 묘비 앞에 내려놓은 그레이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어머!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씨죠?”

꽃다발을 든 중년 여성이 그레이를 보며 놀라 물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연주 잘 듣고 있어요. 우리 아들도 엄청 좋아했어요.”

여성이 그렇게 말하며 노란 꽃다발과 하얀 꽃다발이 놓여있는 묘비 앞에 작은 꽃다발을 놓았다.

“아…….”

그레이는 단번에 그 아들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여성이 그리움 가득한 표정으로 웃으며 묘비를 바라보았다. 묘비에 새겨진 차가운 이름을 볼 때면 언제나 슬픔이 밀려왔다.

“그럴 때면 그레이 씨의 연주를 들어요. 아들과 함께 들을 때의 기억이 떠오르거든요.”

“……감사합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기꾼 탓에 바이올린을 잃었던 날. 그리고 슬럼프 때문에 바이올린을 잃을 것 같은 지금. 아들을 잃은 슬픔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레이의 가장 큰 슬픔을 떠올려보면 여성의 심정이 어떨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괜찮으시면 연주를 부탁해도 될까요?”

여성의 말에 그레이가 멈칫했다.

여성은 죄송한 표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들이 그동안 병원에만 계속 있어서 그레이 씨의 연주회를 한 번도 못 갔거든요. 꼭 가고 싶어했는데…… 간단한 곡이라도 좋아요. 한 곡만이라도 부탁드립니다.”

평생 병원에 있으면서 아픈 하루하루를 보냈던, 그러나 언제나 부모를 위로해 줄 만큼 밝았던 아들을 위한 마음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엄마의 진심이 그레이의 마음까지 물들였다. 전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레베카와 아는 사이기도 했다.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그게 지금 바이올린이 없…….”

“여기 있어.”

카메라 뒤에 서 있던 조지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건넸다. 그레이의 것이다.

얼떨결에 바이올린을 받아 든 그레이가 눈을 끔벅였다.

“이게 왜 너한테 있어?”

“뭐가 필요할지 몰라서 다 들고 다녀.”

“……그래.”

오선지도 들고 다니는데 바이올린쯤이야.

애써 납득한 그레이가 공동묘지에 있는 벤치에 케이스를 올려두었다.

“어떤 곡이 좋을까요?”

“그레이 씨가 편한 곡으로 연주해 주세요.”

그렇게 말한 여성이 조금 주저하다 말했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자장가로 부탁해도 될까요?”

“자장가요?”

바이올린과 활을 꺼내 든 그레이가 여성을 바라보았다.

“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엄마가 부드럽게 웃었다. 슬픔이 가득한 미소였다. 이 슬픔은 언제까지고 엄마의 옆에 남아 있을 터였다..

“악몽을 꾸지 않고, 좋은 꿈을 꾸면서 편하게 잘 수 있게 말이에요.”

아.

그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이올린에 턱을 괬다.

눈을 감고 머릿속에 가득한 악보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많은 자장가들 중 어울리는 곡을 찾았다.

데엥-데엥-

멀리서 교회의 종소리가 들렸다. 잔디의 풀 냄새와 꽃의 향기가 느껴졌다. 일전의 공원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냄새였다. 그레이는 눈을 떴다. 차가운 돌들에 소중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 6피트 아래.

소중한 이들이 잠들어 있을 터였다.

아주 오랫동안. 깨어날 수 없는 잠을 청하고 있을 거다.

아아.

그레이 바이니는 평소처럼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폭발적으로 다가왔던 [굿 애프터눈]과 [굿 이브닝]의 악상과 달리, 그것은 마치 안개처럼, 슬픔처럼. 그러나 따뜻한 온기처럼. 천천히 그레이의 머릿속을 스며들었다.

천천히. 고요하게.

차분하게. 평온하게.

그레이는 느릿하게 활을 내리그었다.

벤자민 모튼 교수가 작곡하고 그레이 바이니가 연주하는 [자장가]였다.

* * *

“컷! 오케이!”

사라 로트 감독의 외침에 조용히 [자장가]를 감상하고 있던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와아아, 감탄이 튀어나왔다.

“이번 곡도 정말 좋은 것 같지 않아?”

“굿 애프터눈이랑 굿 이브닝이랑 느낌은 다른데, 어떻게 한 사람이 작곡한 느낌이 나는 거죠? 진짜 그레이가 작곡한 것 같아요!”

“진짜 대단하다니까. 준도, 벤자민 교수님도.”

‘맞아. 맞아.’

스태프들의 감탄 가득한 대화에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고 있던 최태우가 서준을 바라보았다. [자장가]가 아무리 좋았어도 본업을 잊지 않는 매니저였다. 그래도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처럼 서준은 ‘그레이 바이니’에게서 벗어나…….

“……어?”

최태우가 서준을 보며 눈을 끔벅였다.

보통 때라면 사라 로트 감독의 곁으로 가서 함께 모니터링을 했을 서준이 이번에는 어쩐지 연주하던 그 장소에서 손에 든 바이올린을 내려다보며 그대로 서 있었다.

게다가 느껴지는 분위기도 조금 이상했다.

이도 저도 아닌, 조금 혼란스러운 느낌.

“……서준아……?”

저기에 서 있는 건.

이서준인가, 그레이 바이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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