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640화 (640/1,055)

0살부터 슈퍼스타 640화

“오케이! 컷!”

아빠 역을 맡은 배우가 문을 열기 바로 직전, 컷 소리가 들렸다. 집중하고 있던 배우들이 천천히 배역에서 벗어났다.

“다음 장면까지 잠시 쉬었다 가죠.”

밖의 풍경과 시간을 확인한 사라 로트 감독이 말했다. 앞선 촬영들이 빨리 끝나서 다음 장면을 찍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배우들은 각자 흩어져 대본을 다시 확인하거나 모니터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서준과 캐서린, 폴은 앞서 찍은 장면들을 보며 사라 로트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연주를 잘하시네요.”

“이 한 곡만 계속 연습했거든.”

서준의 말에 사라 로트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오버 더 레인보우2]를 계획하고 서준의 출연이 확정된 것이 작년의 일이었다. 출연할 배우들을 캐스팅한 후 거의 1년 동안 한 곡에 매달려 있었으니, 듣기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사라 로트 감독의 말에 서준은 이전 촬영의 연주자들을 떠올렸다. 클리블랜드의 노인과 시카고의 세 명의 악사들.

“클리블랜드랑 시카고에서 연주했던 분들도 1년 동안 연습하신 거예요, 감독님?”

“아니. 그 네 분은 프로는 아니지만, 꾸준히 연주하신 분들이야. 대사도 하나도 없었고 연기도 따로 할 필요가 없어서 실제로 악기의 연주가 가능한 사람들을 부른 거지.”

아하.

어쩐지 ‘린다 가족’과는 조금 느낌이 다른 것 같긴 했다.

‘린다 가족’의 배우들이 음악을 좋아하는 모습을 연기한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 네 사람은 정말로 음악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어느 쪽도 서준이 좋아하는 분위기의 사람들이었다.

“준! 샌드위치 드실래요?”

“좋아요.”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샌드위치와 음료수 등 간식거리가 준비되었다. 저녁 식사는 다음 촬영이 끝난 후 준비될 예정이었다.

간식을 먹고 잠깐 쉬고 있으니, 촬영하기 딱 좋은 시간이 되었다.

좀 더 좋은 풍경을 촬영하기 위해 사라 로트 감독과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배우들도 다시 배역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준.”

“네.”

사라 로트 감독이 서준을 불렀다.

“부담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번 장면은 최대한 한 번에 찍어줬으면 좋겠어.”

그 말에 연기를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진심인 배우는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한 얼굴로 웃었다.

“걱정 마세요.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그래.”

그것보다 믿음직한 대답도 없어 사라 로트 감독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에밀리 조감독의 말에 집 안과 집 바깥에 있던 카메라들이 모두 집중했다. 모니터로 살펴보고 있던 사라 로트 감독이 외쳤다.

“레디,”

그리고 서준은 언제나처럼 ‘그레이 바이니’가 되었다.

“액션!”

린다의 아빠가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환한 빛이 들어왔다. 무언가 싶어 바라보고 있던 그레이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조지의 카메라에 따뜻한 주황빛이 그레이의 얼굴에 닿는 장면이 그대로 담겼다.

“저희 가족이 가장 사랑하는 풍경입니다.”

“그레이도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자부심이 가득 담긴 린다 가족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레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새파란 하늘의 끝을 천천히 붉은색, 노란색, 주황색으로 바꾸어놓는 태양이 보였다.

노을.

노을이었다.

주황빛 노을이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빛이 황금빛 밀밭에 내려앉아, 주변을 모두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아…….”

경이로운 자연의 풍경에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레이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밀밭으로 다가갔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황금빛 태양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지는 카메라를 천천히 움직여, 주황빛 노을과 황금빛 밀밭과 그 앞에 홀로 서 있는 그레이를 촬영했다. 그것만으로도 고전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레이는 이 풍경에서 눈을 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너무 벅차올라 숨까지 턱 막힌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쩐지 노을을 보는데, 조금 전 들었던 린다 가족의 합주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즐거운 이야기와 미소가 오고 갔던 단란한 저녁 식사도 떠올랐다.

하늘과 땅으로 번지는 온화한 태양의 빛과 따뜻한 가족의 사랑.

그 노을의 빛이, 사랑이 그레이에게도 닿았다. 가슴속과 머릿속이 긴장이 풀린 듯 평온해졌다. 그리고 그 편안해진 마음속을 새로운 악상이 가득 채웠다.

“바이올린…….”

을 연주하고 싶었다.

“여기!”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레베카가 얼른 들고 있던 바이올린을 내밀었다. 어쩐지 그레이보다 더욱 떨리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레이는 눈치채지 못했다.

“고마워.”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든 그레이가 바이올린에 턱을 괬다. 그리고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활을 내리그었다.

느릿하면서도 다정한 선율이 그레이의 손끝에서 뻗어 나왔다.

어디 하나 닿지 않는 곳이 없는 노을의 빛처럼 땅을 물들이고 밀밭을 물들이고 하늘을 물들이고 듣고 있던 레베카와 조지, 린다 가족까지 조용히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그레이가 움직이는 활과 누르는 현에 따라 하늘을 가득 채운 따뜻한 노을빛이, 드넓은 황금빛 밀밭의 지평선이, 즐거웠던 린다 가족과의 저녁 식사 시간이, 서로 눈을 맞추며 어설프지만 인상 깊었던 연주가 선율로 바뀌어 흘러나왔다.

감탄마저 방해가 될까 봐 삼키게 되는 순간이었다.

평범하지만 그래도 평범하지 않은.

매일 해가 질 때면 언제나 볼 수 있지만 직접 겪어보면 경이로운 노을 같은.

있을 때는 모르나 없으면 느껴지는 가족의 사랑 같은.

그런 곡이었는데,

[(선)플록스의 불꽃-중하급이 발동됩니다.]

[(선)플록스의 불꽃-중하급-]

불과 사랑의 정령, 플록스입니다.

대상의 마음 속에 있는 애정과 사랑을 2배로 증폭시킵니다.

생명체의 감정 속에서 태어나는 정령, 플록스.

사랑의 묘약의 재료로도 쓰이는 이 다정하고 따뜻한 불꽃이 바이올린의 선율을 따라, 노을처럼 번져 나갔다.

서준의 능력까지 더해지니 배우들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그건 연기가 아니었다. 다들 어느샌가 그레이의 연주에 푹 빠져 있었다.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조용히 귀만 기울였다.

♪♪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 또는 좋아하는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 때의 훈훈하고 정겨운 분위기가 떠오르는 곡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가족이 떠오른 이들은 찔끔 눈물도 흘렸다.

일이 끝나면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자.

이 포근한 선율을 들으며 사람들은 그런 마음을 가슴 속에 가득 채워 넣었다.

그렇게 다정한 곡이었다.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4: Good evening]은.

노을이 지는 풍경과 함께 [굿 이브닝]의 연주는 계속 이어졌다.

샘플로 듣긴 했지만 역시 이렇게 직접 들어보니 역시 느낌이 다르다고, 사라 로트 감독은 생각했다. 이래서 사라 로트 감독은 음악이 좋았다. 이런 곡을 작곡한 서준도 참 대단해 보였다.

사라 로트 감독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감동과 감격을 영화를 볼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음악에 쏠리는 신경을 애써 모니터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모니터 화면이 보였다.

서쪽으로 지는 노을,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밀밭에 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그레이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

마지막 음까지 완벽하게!

크게 활을 내리그으며 [굿 이브닝]을 마무리한 그레이였다. 즉흥곡으로 연주를 하던 당사자마저도 음악에 완전히 빠져들었던 모양인지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과 함께 가볍게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비쳤다.

바이올린 연주는 끝났지만 아직 남아있는 노을의 빛을 타고 희미하게 [굿 이브닝]의 선율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여운을 즐기는 듯, 주변이 고요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아무래도 ‘그레이’에게 익숙한 ‘레베카’와 ‘조지’였다.

“그레이! 대단하다!”

짝짝짝!

레베카의 박수 소리에 ‘린다 가족’도 정신을 차렸다. 금세 다음 대사들을 떠올리며 ‘미쳤어! 이건!’ 하고 레베카에게 격렬한 칭찬을 듣고 있는 그레이에게 다가갔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연주라니!”

“즉흥곡이에요?!”

“대단합니다! 정말로!”

대본에 있는 대사를 말하는 건지, 진심을 말하는 건지.

하여튼 붉게 상기된 배우들의 표정을 보면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는 마음만큼은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컷! 오케이!”

사라 로트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짝짝짝! 박수가 터져 나왔다. 촬영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참고 있던 스태프들의 반응이었다.

“음원 나오면 꼭 사야겠어요!”

“나도. 가족들 보고 싶을 때마다 집에서 들을 거야.”

“그럼 울음바다 되는 거 아니에요?”

코를 훌쩍이며 말하면서도 마주치는 두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스태프들에게 서준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짐짓 무대 위에 선 그레이처럼 꾸벅 인사를 했다. 박수 소리가 더욱 커졌다.

“저 어땠어요, 감독님?”

“정말 잘했어. 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촬영을 끝낸 서준을 보며 사라 로트 감독이 활짝 웃었다.

* * *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저녁 식사 후.

나머지 촬영이 이어졌다.

“레디, 액션!”

레베카는 린다와 함께 린다의 방에서, 그레이와 조지는 2층 손님방에 자게 됐다. 다큐멘터리 스태프들은 다시 캔자스시티로 돌아가 내일 아침에 오기로 했다.

“오. 별이다.”

캔자스시티에서 조금 떨어진 교외인데, 밤하늘의 별들이 아주 잘 보였다. 그레이와 조지는 창가에 앉아 린다의 할머니가 끓여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렇게 같이 지내는 것도 오랜만이네.”

“그러게.”

몇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레베카와 조지의 집이 있던 스타필에서, 자신의 집이 있던 다운록에서.

서로의 집을 오가며 자고 놀고 웃으며 지냈던 게 마치 오랜 옛날의 일이었던 것 같다.

조용히 밤하늘을 보고 있던 조지가 입을 열었다.

“그레이.”

“응?”

“……후회 안 해?”

“후회?”

그레이가 조지를 바라보았다. 조지는 여전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후회?”

“……크라우드 펀딩 말이야.”

어렸던 자신이 제안했던 그 일.

조지는 조금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네 이야기가 전 세계에 알려지고.”

어쩐지 목소리가 먹먹하게 잠긴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거 말이야.”

“후회 안 해.”

단번에 들려온 시원스러운 대답에, 조지가 고개를 돌려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레이는 보기 드물게 단단한 표정이었다.

아니, 보기 드문 건 아닌가.

이 착하고 순한 녀석은 바이올린에 관해서만큼은 저렇게 단단하고 올곧은 표정을 짓고는 했다.

“조지와 레베카가 없었으면, 크라우드 펀딩이 아니었으면 나는 바이올린을 만나지도 못했을 거고 이렇게 연주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래.”

진심이 가득 담긴 그레이의 말에 조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잘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조지가 먼저 씻으러 떠난 자리.

그레이는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따뜻한 주황빛으로 물들었던 하늘과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족해지던 황금빛 밀밭은 어둡고 고요해져 있었다.

그레이의 얼굴에 그 어둠이 번져갔다.

걱정시켜 버리고 말았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던 걸까. 역시 다큐멘터리 촬영은 승낙하지 않았던 편이 좋았을까. 하지만 그렇다면 더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찻잔을 잡은 두 손이 떨려왔다. 찻잔은 따뜻할 텐데도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조지가 슬럼프를 알게 됐다면 곧 레베카도, 엄마도, 스승님도, 관객들도 알아차릴 거다.

무섭다.

언제나 좋은 모습, 성공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당신들의 도움이 실수가 아니었다고, 이렇게나 많은 도움이 됐다고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어두운 유리창에 비친 그레이의 얼굴이 슬픔과 서글픔으로 물들어갔다.

* * *

다음 날.

“안녕히 가세요! 그레이!”

“재미있었단다.”

“다음 연주회에는 꼭 티켓팅 성공할게요!”

린다 가족의 활기찬 배웅을 받으며 그레이와 레베카, 다큐멘터리 촬영팀은 다시 캔자스시티로 향했다. 캔자스시티에서 비행기를 타고 (영화 설정상) 스타필과 다운록이 있는 LA로 향할 예정이었다.

“컷, 오케이!”

[오버 더 레인보우2] 촬영팀도 마찬가지였다.

사라 로트 감독의 오케이 사인에, 스태프들은 곧장 촬영 장비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점심 먹고 2시간 뒤에 LA로 출발할 예정이래.”

“네. 알았어요.”

분장을 지우고 있던 서준이 최태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LA, 로스앤젤레스.

몇 년 만에 가는 제2의 고향에 서준의 마음이 들썩였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