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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639화 (639/1,055)

0살부터 슈퍼스타 639화

캔자스시티에서의 촬영이 끝나고 [오버 더 레인보우2]팀은 교외로 향했다.

“와아!”

도시를 빠져나오자마자 보이는 드넓은 평야에 서준과 캐서린, 폴이 감탄했다.

“엄청 넓네!”

미국 중부의 곡창지대라고 불리는 캔자스시티의 넓은 들판이 마치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삐죽삐죽하고 푸르른 산들이 보이는 한국과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이었다.

“근데 밀이 없네요?”

“보통 6월에 수확해서 그래.”

아하.

안다호의 말에 아이들이 수확이 끝난 밀밭들을 바라보았다.

벌써 8월 중순. 수확 시기가 2달이나 지난 상태였으니, 밀들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여기에 밀들이 남아 있었으면 진짜 예뻤겠다.”

“그러게.”

수확하면서 바싹 잘린 줄기들을 보던 캐서린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하자 서준과 폴이 동의했다. 남은 줄기들로도 이렇게 멋진데 밀들이 남아 있었다면 더 멋졌을 것 같았다.

‘그럼 촬영은 어떻게 하지?’

여기서 촬영해야 할 장면은 황금빛 밀밭이 펼쳐진 풍경이었는데 수확 시기가 지났다면 힘들지 않을까.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든 서준이었지만, 의문은 곧 풀렸다. 앞쪽에서부터 바람에 흔들리는 노란빛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기가 촬영장소야.”

안다호의 설명에 오! 하고 감탄하며 아이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운전하고 있던 최태우도 처음 보는 풍경에 눈을 크게 뜨고 탄성을 흘렸다.

밀밭.

황금빛 밀밭이었다.

밀밭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어느새 차를 둘러싼 사방에 드넓은 황금색 밀밭이 펼쳐져 있었다. 무거운 이삭 때문에 고개를 숙인 밀들이 바람에 물결치듯 밀려오는 모습이 정말 멋졌다.

“근데 밀 수확기는 지났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의아해하는 폴에 안다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웨일 스튜디오에서 샀대.”

세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작년에 밭 전체를 사서 열심히 길러 달라고 했다더라고. 수확 시기가 조금 늦어도 밀알 상태는 괜찮을 테니까 촬영 끝나면 모두 수확해서 기부할 예정이고.”

“와아.”

역시 할리우드 스케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눈 앞에 펼쳐진 황금빛 밀밭 풍경이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촬영장소에 도착한 후, 가까이서 본 밀밭도 대단했다.

서준의 무릎까지 오는, 마치 갈대 같기도 했고, 갈색 강아지풀 같기도 한 잘 자란 밀들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었다. 숨길 수도 없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진짜 멋지다!”

“그러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바람에 흔들리는 밀밭을 바라보고 있던 세 배우들을 에밀리 조감독이 불렀다.

“여기가 촬영장소야.”

에밀리 조감독의 말에 서준과 캐서린, 폴은 눈앞에 있는 이층집을 올려다보았다. 먼저 도착한 스태프들이 들락날락하고 있는 이 이층집은, 일반인 가족이 실사용하던 집을 촬영 동안에만 빌렸다고 들었는데 정말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 같았다.

직접 손으로 만든 장식들이며 창문 앞에 놓인 흔들의자와 작은 테이블이며. (물론 사진 같은 소품들은 배우들의 사진들로 바꿔놓았다) 정말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층집을 감탄하며 둘러본 서준과 캐서린, 폴이 주변을 바라보았다. 주위에 펼쳐진 밀밭과 아주 잘 어울리는 집이었다.

“그럼 분장하고 촬영 시작하자.”

“네.”

서준과 두 배우는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된 트레일러로 향했다.

커다란 트레일러의 안은 완벽한 분장실이었다. 그동안의 촬영으로 능숙해진 분장팀 스태프들이 빠르게 가발을 씌우고 화장을 했다.

화장을 하던 중, 새로운 배우들이 나타났다. 이번 장면에서 함께 촬영할 배우들이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서준과 캐서린, 폴이 다섯 명의 배우를 반갑게 맞았다. 그중 린다 역을 맡은,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역 배우가 서준과 캐서린과 폴을 번갈아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딱 봐도 [오버 더 레인보우]를 좋아하는 게 보였다.

“오늘 촬영 잘 부탁할게요.”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

씩씩한 아역 배우의 대답에, 몇 년 전까지 아역 배우였던 세 배우가 빙그레 웃었다.

* * *

“레디, 액션!”

그레이 바이니는 감탄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창밖으로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지만, 매번 도시만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풍경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때, 그레이? 엄청 멋지지?”

“응. 이런 건 처음 봐.”

운전대를 잡은 레베카의 말에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뒤따라오는 다큐멘터리 촬영팀 대신 그레이의 옆에 앉은 조지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 말 속에 가득한 감탄에 레베카가 환하게 웃었다.

“이제 곧 도착할 거야!”

“근데…… 정말 가도 될까?”

“괜찮다니까!”

신이 난 레베카는 그레이의 걱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걱정을 가볍게 날려 버리는 친구의 모습에 이내 웃어버리고만 그레이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과 황금빛 밀밭의 물결.

조지의 말처럼 영감이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걱정과 암담함, 두려움으로 뻥 터져 버릴 것만 같았던 마음은 조금 편안해진 기분이었다.

“어서 오세요. 바이니.”

“그레이라고 불러주세요.”

“반가워요! 그레이! 정말 팬이에요!”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린다.”

그레이와 두 친구가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층집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었던 다섯 가족이 들뜬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그리고 딸, 린다까지.

3대가 모인 풍경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제가 다큐멘터리 촬영 중인데, 괜찮을까요?”

뒤이어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탄 차들이 도착했다. 그레이의 말에 린다 가족은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친구들한테 자랑할 게 생겨서 좋죠! 나중에 사인 한 장만…… 아니, 사진도 한 장 찍어주시면……!”

입꼬리가 찢어져라 웃는 아빠에 린다가 ‘저도요!’ 하고 번쩍 손을 들었다. 할아버지도 크흠, 헛기침을 하며 작게 손을 드는 모습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유쾌한 가족이었다.

“그럼 저녁 식사 때까지 편하게 쉬세요. 우리 집 요리가 얼마나 맛있는지 꼭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저도 도와드릴게요.”

“아뇨! 괜찮아요. 린다랑 구경하시면 돼요. 손님이시잖아요.”

엄마의 말에 린다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어색하게 웃던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와 아빠도 요리를 돕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붙였다.

“바비큐 그릴 준비할게요.”

“스태프가 몇 명이라고?”

아무래도 다큐멘터리 스태프들까지 든든히 먹이시려는 것 같았다.

“간만에 포식하겠는데.”

“그러게.”

조지의 말에 그레이가 웃고 말았다.

사람이 사는 집이니만큼 카메라는 최소한만 들어가기로 했다. 조지가 카메라 하나를 챙겨 린다와 그레이의 뒤를 따랐다.

“여긴 거실이구요. 이쪽은 할머니랑 할아버지 방이에요. 2층은 저희 가족이 놀러 올 때마다 쓰고 있구요.”

“여기서 사는 게 아니었어요?”

“아뇨. 엄마 아빠랑 저는 캔자스시티에서 살아요. 그래도 가까우니까 자주 와요.”

린다가 상기된 얼굴로 집을 소개했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집 안은 따뜻했다. 기온이 아니라 분위기가.

작은 소품부터 큰 장식품까지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은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어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벽과 벽난로 위에 있는 액자들에 가족들의 사진이 가득했다.

“이건 할머니가 어렸을 때 샀던 도자기 인형인데…….”

물건 하나하나마다 소중한 추억들이 가득했다.

그레이와 린다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거실과 린다의 방, 엄마 아빠의 방이 있었다.

“여기서 보니까 느낌이 다르네요.”

“그쵸?”

2층 창문에서 내려다보는 황금빛 밀밭은 또 다른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그레이가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어쩐지 밀들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음악 소리 같았다.

2층 거실에도 여러 가지 사진들이 잔뜩 붙여져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미소가 가득한 가족들의 사진. 의아한 점이 눈에 띄었다.

“린다가 어렸을 때 사진은 없네요?”

연도별로 붙여놓은 것 같은 사진들이었는데,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린다가 가장 어려 보였고, 그보다 어렸을 때의 사진은 없었다. 아기 때나 유치원생 같은 나이의.

“아. 그땐 할아버지랑 아빠 사이가 안 좋았거든요.”

그레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리고는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마당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바비큐를 준비하고 있는 부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불이 너무 세요!”

“이 정도 화력은 돼야지!”

“고기 올리자마자 다 타버릴걸요!”

저렇게 친한 모습에, 사이가 안 좋았다는 이야기가 믿기지 않았다.

“저 태어나기 전부터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는 전혀 안 만났었거든요. 할아버지는 아빠가 밀 농사를 이어받기를 바랐고 아빠는 다른 일을 하고 싶어 해서요. 지금은 아빠가 얼마나 지금의 일을 좋아하는지 할아버지가 이해해 주셔서 이렇게 지내고 있는 거예요.”

“그렇구나. 계기가 있어요?”

“계기라면…….”

린다가 그레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음악.

가슴이 뛰는 그 단어에 그레이는 거실 한편에 놓여 있던 피아노를 떠올렸다.

“거실에 피아노가……?”

“할머니의 피아노예요. 할아버지는 색소폰을 연주하고 엄마는 기타, 아빠는 캐스터네츠, 전 플루트를 불어요. 사이가 좋아진 다음부터 같이 연주를 하기 시작했죠.”

조금 중구난방인 악기들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음악을 즐기는 가족이라는 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레이가 온다고 연주도 준비했어요. 괜찮으면 저녁 식사 후에 들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린다의 말에 그레이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조지가 그런 그레이의 얼굴을 조용히 카메라에 담았다.

* * *

저녁 식사는 시끌벅적했다.

사람이 많은 다큐멘터리 촬영팀은 야외에서, 린다 가족과 그레이, 레베카는 집 안에서 식사를 했다.

“부족한 게 있으면 말해주세요!”

“예!”

아빠의 말에 스태프들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식탁 위는 여러 가지 요리들로 가득했다. 여기저기 설치된 카메라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린다 가족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 나갔다. 그레이와 레베카, 조지도 웃으며 식사했다.

즐거운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는 거실에서 작은 연주회가 열렸다.

“그레이가 듣기에는 부족할지도 모르겠지만, 잘 들어주셨으면 좋겠네요.”

피아노 앞에 앉은 할머니의 온화한 목소리에 그레이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기대하고 있어요. 정말로.”

쑥스러워하는 린다 가족의 얼굴이 똑 닮아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할머니, 밀 빛을 닮은 금색 색소폰을 든 할아버지, 두툼한 손보다 작은 캐스터네츠를 들고 있는 아빠, 익숙한 듯 앉아 기타를 칠 준비를 할 엄마, 그리고 은색 플루트를 들어 올린 린다까지.

“그럼 시작해요!”

딱딱-!

린다의 말에 맞춰 아빠의 캐스터네츠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클래식은 아니었고 조금 오래된 가요였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하고 잔잔한 곡. 가족의 사랑을 노래했던 곡이었다.

♩♬

물론 어설픈 곳은 많았지만, 그래서 더욱 듣기 좋은 것 같았다. 악기를 연주하며 서로 눈을 마주치고 웃고 코를 찡긋거리는 린다 가족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연주를 들던 그레이는 LA에 있을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회를 하다 보니 정작 엄마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드렸던 날은 까마득한 것 같았다.

연주가 이어질수록 무언가 가슴께까지 차올라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 생소하지만 어쩐지 낯설지 않은 느낌에 기억을 더듬어 생각에 빠지려던 찰나, 린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레이! 어땠어요?”

어느새 연주가 끝난 모양이었다.

그레이가 빙그레 웃으며 진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정말 좋았어요. 정말로.”

린다 가족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진정으로 기뻐하는 모습에 보고 있던 사람까지도 미소를 짓게 되었다.

“너도 연주 들려드리는 건 어때?”

조지의 말에 그레이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연주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들려준 연주만큼 보답해 주고 싶었다.

“근데 바이올린이 없는데…….”

“차에 있어.”

“내가 가져올게!”

레베카가 얼른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런 그레이와 친구들을 보고 있던 린다 가족이 들떠 이야기했다.

“그레이의 연주를 진짜로 듣게 되다니……!”

“꼭 들어보고 싶었어.”

“연주회도 가 보고 싶었는데 표 사는 것도 쉽지 않더라구요!”

잔뜩 기대한 린다 가족에, 그레이는 초조해진 마음을 숨기며 겉으로나마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레이. 바깥 좀 보실래요?”

“바깥이요?”

레베카가 가져올 바이올린을 기다리고 있던 중, 린다가 말했다. 그레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침 우리 가족이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거든요!”

린다 가족이 ‘맞아요. 맞아’, 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자, 의아해하던 그레이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조지도 촬영 중인 카메라를 들고 그레이를 쫓았다.

“그레이도 보면 좋아할 겁니다.”

아빠가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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