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36화
[굿모닝]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작곡한 곡이지만 [오버 더 레인보우2]에서는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곡.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3: Good afternoon]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즐거운 공원의 풍경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 곡을 연주하며, 서준은 미리 찾아두었던 능력을 사용했다.
[굿 애프터눈]과 앞으로 촬영할 곡들이 듣는 사람들에게 많은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득 담아, 왼손 손가락으로 반듯하게 현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활을 깊게 내리그었다.
[(선)모드잇의 빛 가루-중하급이 발동됩니다.]
[(선)모드잇의 빛 가루-중하급]
천계의 꽃, 모드잇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만든 가루입니다.
빛 가루에 닿은 존재에게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마음속 부정적인 감정을 잠재우고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
바이올린에서 흘러나오는 선율과 함께, 서준에게만 보이는 빛의 가루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하얀색의 빛 가루는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있던 존재들에게 내려앉아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고는 아주 깊은 곳까지 다다라, 부정적인 감정을 잠시 잠재우고 행복과 즐거움 등의 긍정적인 감정을 일깨웠다. 그와 함께 행복했던 기억들이 샘솟았다.
활을 한 번 그으면,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한 공원의 풍경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또다시 활을 그으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이 떠오른다. 한 번 더 활을 긋는다. 당장에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 할 것처럼 심장이 뛴다.
대본상으로도 ‘그레이 바이’의 연주에 놀라 모두 말없이 그레이를 주목하는 장면이었지만, 그런 지시문이 없어도 다들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그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굿 애프터눈]은 곡 자체로도 굉장히 좋은 곡이었지만 거기에 서준의 능력까지 더해지니 모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게 되는 곡이었다.
사라 로트 감독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촬영 현장을 바라보았다. 미리 들어보았던 [굿 애프터눈]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밖이라서 그런가?’
주변이 탁 트여있는 공원이라, 녹음실에서 녹음한 것과 느낌이 다른 걸까.
후시녹음이 듣기에는 더 깔끔할 것 같았지만 이대로 이 생생함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 더 좋지는 않을까, 하고 사라 로트 감독은 음향기기 쪽을 흘깃 바라보며 생각했다.
마침내, 가슴을 뛰게 만들던 [굿 애프터눈]의 끝이 다가왔다.
---!
마지막 음표를 따라 활이 내리그어졌다.
온 힘을 다하듯 연주하던 그레이가 조금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주변은 그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지저귀던 새들마저도 부리를 다문 듯 조용해진 공원.
무의미한 침묵이 아니었다.
모두 [굿 애프터눈]의 여운을 느끼는 듯했다. 이 여운을 느끼는 시간이, 이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오래 이어지길 바랐다.
그러나 지금은 촬영 중이었다.
“……컷, 오케이!!”
고요를 깬 것은 사라 로트 감독의 외침이었다.
아……!
흩어져 버리고 만 여운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멈췄던 숨을 들이마시며 감탄을 토해냈다. 그리고 곧바로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중에는 오늘 처음 [굿 애프터눈]을 들어본 사람들이 많아 그 반응은 더욱 격렬했다.
‘그레이 바이니’에서 벗어난 서준이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그 정중한 인사에 웃음과 함께 커다란 함성이 쏟아졌다.
“진짜…… 진짜 대단하네요.”
“연주회 때랑은 전혀 다른 느낌이더라.”
그 말에 다들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흔들어댔다. 연주회도 물론 대단했지만, 지금의 연주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좀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이랄까. 그레이 바이니다운 연주랄까.”
“물론 연주회도 그런 느낌이긴 했는데…… 으. 전 전문가가 아니라서 말로 표현 못 하겠어요.”
어느 쪽도 그레이 바이니의 느낌이 가득 담긴 연주였지만, 조금 전의 연주가 훨씬 심장이 떨리게 하는 것 같았다.
“바스트샷 촬영 준비하겠습니다!”
에밀리 조감독의 말에 [굿 애프터눈]에 대해 열심히 떠들어대던 스태프들이 얼른 걸음을 옮겼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촬영을 준비하느라 점점 지쳐가고 있었는데, 어쩐지 힘이 듬뿍 생겨난 것 같았다. 스태프들의 근처에 아직 흡수되지 못한 빛의 가루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활기가 넘치는 촬영장 풍경에 서준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런 서준에게 슬금슬금 다가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연, 연주 정말 잘 들었습니다. 준!”
기타와 전자피아노,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세 사람이었다. 리더의 말에 서준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야말로 연주 정말 잘 들었어요. 연주를 하면서 얼마나 행복해하시는지 정말 눈에 훤히 보이던데요? 연주를 좋아하시나 봐요.”
“네, 네. 정말로 좋아합니다.”
“이번 곡, 준이 작곡한 곡이라고 하던데, 정말 눈물이 나올 정도로 좋았습니다!”
나이도 인종도 성별도 다른 세 사람인데, 마치 세쌍둥이처럼 붉어진 눈시울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서준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그럼 남은 촬영도 잘 부탁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준이 웃으며 자리를 떠나자,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대답하던 세 사람이 헤벌쭉 웃으며 벅찬 감정을 참지 못한 듯 온몸을 비틀어댔다. 마치 지렁이 세 마리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저분들 어디 아프신 거 아닙니까?”
스태프의 말에 에밀리 조감독이 힐긋 보는 듯하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내버려 둬도 돼요. 준을 워낙 좋아하는 분들이라.”
아하.
주변에서 듣던 스태프들이 납득했다.
그렇게 바스트샷 촬영을 준비하는 촬영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
영화 촬영으로 통제된 구역 근처에서, 먼발치에서나마 서준 리나 다른 배우들을 볼 수 있을까, 영화의 한 장면을 볼 수 있을까, 기웃기웃거리고 있던 사람들이 죽이고 있던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 숨결을 따라 반짝이는 빛의 가루가 둥실둥실 움직였다. 이곳까지 희미하게나마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었다.
“미쳤다. 진짜…….”
“그러니까……!”
사람들이 빠르게 뛰는 심장을 내리눌렀다.
이렇게 멀리서, 희미하게나마 들었던 선율인데도 이렇게 황홀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데, 완벽하게 녹음된 곡을 들으면 어떨지……!
이 근질근질한 마음을 도저히 표현하지 않고는 못 참을 것 같았다.
-오버 더 레인보우2는 미침. 진짜 미침!!
-촬영장 근처에서 그레이 바이올린 연주 들었는데, 이번 곡도 명곡 예약.
-도움! 11월까지 못 기다릴 것 같아!!!
-녹음했는데 올리면 X될 것 같아서 나만 들을 거야!
그런 반응들에, SNS를 보고 있던 사람들도 높아지는 기대감을 멈추지 못했다.
-궁금해 뒤지겠다. 웨일 스튜디오오오!!
-다음은 캔자스시티던데, 누구 나한테 엑스트라역할 넘기실 분!!!
=ㄴㄴ 그거 안됨. 개인정보 확인하더라.
=아. 아쉽네:(
* * *
시카고에서의 모든 촬영을 끝내고 배우들과 촬영진은 다음 촬영지인 캔자스시티로 향했다.
비행기로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아 바로 내일부터 촬영을 이어 나갈 예정이었다.
“LA에 도착하면 이틀을 쉴 예정이니까, 그때까지만 조금 고생하자. 서준아.”
안다호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LA에서의 촬영은 웨일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세트장 촬영이 많을 예정이었다. 장소를 대여하고 정해진 시간 내에 찍어야 하는 야외촬영보다 훨씬 쉽고 편할 것은 분명했다.
“걱정 마세요. 체력 생각하면서 촬영하고 있으니까요.”
“그래.”
“근데 태우 형은요?”
“일정 정리하고 있어. 웨일 스튜디오하고 연락도 하고 있을걸.”
어쩐지.
다호 형이 너무 여유가 넘친다고 했더니, 최태우에게 대부분의 일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편하죠, 다호 형?”
“그러게. 왜 진작 후임을 안 뒀을까 싶다.”
안다호도 웃고 말았다.
“태우 형은 잘하고 있어요?”
“그래. 배우는 건 확실하게 습득하고 있고 영어 실력도 많이 늘었어. 촬영 현장을 살펴보는 눈도 좋고 널 계속 체크하는 것도 마음에 들어.”
“정말 뚫어질 것처럼 바라보더라구요.”
서준의 말에 안다호가 웃었다.
이 정도 촬영했으면 조금 긴장감을 풀고 딴짓을 할 만도 한데, 원래 성실한 성격인 최태우는 그런 기미가 전혀 안 보였다.
‘뭐, 과한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쉬는 날에 회사에 출근하는 최태우를 봤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긴 했다.
‘뭐, 그런 건 이제부터 천천히 고쳐나가면 될 일이지.’
잠시 열심히 일하고 있을 최태우를 떠올리던 안다호가 서준을 보며 말했다.
“그럼 편하게 쉬어.”
“네.”
* * *
캔자스시티에서의 첫 촬영 날.
다른 주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레이 바이니의 연주회’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레디, 액션!”
무대는 다르다.
관객도 다르다.
그러나 무대 뒤의 어둠은 언제나 같다.
바이올린을 손에든 그레이 바이니는 어둠 속에서 숨을 들이마셨다. 바로 며칠 전, 미친 듯이 작곡했던 [굿 애프터눈]이 어쩐지 희미해졌다.
딴, 따단.
손가락을 까딱이며 음을 되짚으며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러나 새하얀 백지가 되어버린 머리는 그 무엇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레이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 번에 극복해 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기는 될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이나마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렇게 독이 되어버릴 줄은 몰랐다.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레베카의 걸음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미소가 떠올랐다. 거리의 악사의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어떤 표정이지?
나는…… 어떻게 연주를 했지?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는 생각이 드니, 오늘 연주할 곡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레이 바이니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관객석의 가득 채운 사람들의 기대 가득한 눈빛이, 태양보다도 환하게 빛나는 조명의 빛이 온몸을 따갑게 찔러오는 듯했다.
“그레이.”
파드득, 그레이 바이니가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카메라 뒤에 서 있는 친구, 조지와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어둠 때문인지 그레이의 표정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
“……괜찮아.”
친구들의 걱정어린 얼굴을 본 그레이가 말했다.
“나는 괜찮아.”
자신에게 말하는 듯했다.
나는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기에 서 있을 수가 있었다.
자신은 그 지지에 보답해야 했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위로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이번 연주회가 마지막이잖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이런 상태로 다음 투어를 시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투어의 마지막 연주회만큼은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힘내라고 말해줄래?”
“……힘내. 그레이.”
“힘내라.”
레베카와 조지의 말에 그레이가 미소를 지었다.
곧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무대로 발을 내디뎠다.
커다란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레이 바이니, 투어 마지막 연주회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
* * *
“수고하셨습니다!”
공연장에서의 촬영이 끝나고 모두 철수 준비를 시작했다.
“태우 씨.”
“넵!”
웬만하면 영어를 사용하기로 한 후부터 영어로 대화하고 있는 안다호가 스케줄 어플에 촬영이 끝난 시간과 대강의 상황을 적고 있던 최태우를 불렀다.
“뒷문 쪽에 차랑 길 좀 확인해 주세요. 서준이 분장은 호텔 가서 지울 예정이랍니다.”
따로 지하 주차장이 없는 공연장이다 보니, 나가는 길에 사람들이 몰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배우들은 엑스트라들이 나오기 전 관계자 전용 출입구로 먼저 나갈 계획이었다.
“알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최태우가 뒷문을 통해 공연장 밖으로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기다리고 있었던 듯, 익숙한 차량이 보였다. 킹즈 에이전시의 차량이었다.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니 조용히 뒷문 근처로 다가왔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예.”
운전석에 앉은 킹즈 에이전시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태우가 휴대폰을 꺼내 안다호에게 연락했다. 곧 나갈 거라는 답장이 왔다.
휴대폰에서 시선을 뗀 최태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슬금슬금 사람들의 관심이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시선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최태우가 조금 당황하고 있을 때,
“태우 씨.”
안다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금방 나올 거라더니 정말 금방 나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최태우가 차로 이동하는 서준과 캐서린, 폴을 보았다. 같이 타고 갈 모양이었다. 배우들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세 배우가 인사하며 빠르게 이동하는 사이, 최태우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딱히 문제는 없……?
상기된 얼굴의 사람들 속 묘한 분위기의 중년인이 있었다.
지저분한 옷차림에 잔뜩 기름지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초췌한 얼굴. 눈도 퀭해 보였다. 아니, 시퍼렇게 빛나는 것 같았다.
전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남자의 모습에, 문득 불안해지는 마음에 최태우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 섬뜩한 시선의 끝에,
팬들에게 웃으며 인사하는 서준이 서 있었다.
아.
중년인이 움직이자, 생각보다 몸이 먼저 앞섰다.
“억!”
아픔과 함께,
최태우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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