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35화
“조니 스트럭?”
“아닌 것 같아.”
고개를 저으며 말하는 서준에 20여 년 전 단역 배우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사진을 보여주던 폴 오든이 아쉬운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껐다. 캐서린 밀러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알고 싶었는데 아쉽네. 준이 봤다던 무명 배우.”
“그러게.”
글쎄. 알아내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서준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봤던 거니까 기억 못 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목록 중에 있었을지도 몰라.”
서준의 말에 폴 오든이 다시 휴대폰 화면을 켰다.
거기에는 배우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는데, 서준 리의 라디오 방송을 듣고 ‘그 무명 배우’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사람들이 조사한 목록이었다.
지금 슈퍼스타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배우도 있었고, 빠질 수 없는 감초 역으로 사랑받는 배우도 있었고, 아예 사라져 버린 배우들도 있었다.
“근데 생각보다 후보들이 많네?”
어렸던 서준이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라디오, TV 등에서 인터뷰를 한 번이라도 했던 적이 있는 무명 배우가 그 목록에 오를 수 있는 조건이었는데, 그 인원이 생각보다 많았다. 보통 무명 배우나 단역 배우의 인터뷰는 그다지 주목받지 않는데 말이다.
캐서린 밀러의 물음에 서준이 대답했다.
“그 당시에 단역에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배우가 있어서 단역 배우들이 주목을 잠깐 받았었대.”
TV나 라디오 방송도 유행이 있었는데, 어린 서준이 미국에 살던 당시에는 ‘배우’라는 직업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슈퍼스타가 된 배우를 보여주기도 하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무명 배우들의 삶을 보여주기도 했다.
“스왈린의 다큐도 그때 나온 거고.”
“오호.”
서준의 말에 폴 오든과 캐서린 밀러가 흥미로운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할리우드의 대배우, 스왈린 애넘의 다큐멘터리는 두 배우도 본 적이 있었다.
“그건 지금 봐도 좋은 것 같아.”
“맞아.”
잠시 스왈린 애넘의 다큐멘터리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던 캐서린 밀러가 SNS를 살펴보았다.
-서준 리. 20년 전 내 인터뷰 본 듯.
-내가 서준 리의 스승.
-한번 만나고 싶네. 서준 리. 여전히 연기를 사랑하는 배우가.
그 이외에도 ‘서준 리의 롤모델 목록’에 언급된 사람들이 화제에 편승하기 위해 은근슬쩍 발을 쭉 내밀어 끼어들고 있었다.
“그럼 여기 있는 건 다 거짓말이겠네.”
“뭐…….”
서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말이라기보다는 확인할 수가 없으니까 다들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러다가 준이 ‘이 사람 같다’고 이야기해 주면 난리 나는 거고.”
폴 오든의 말에 서준이 저절로 떠오르는 광경을 말했다.
“감격스러운 만남이라면서 함께 토크쇼에 나가거나 같은 작품에 출연해 연기하게 될지도 모르겠네.”
“진짜 그럴지도.”
세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나쁜 일은 아니라서 다행이야. 원래 이 세계가 온갖 루머가 만들어지는 곳이잖아.”
캐서린 밀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한 장, 대화 몇 초만으로도 온갖 루머가 생겨나는 곳이었다. 특히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는 할리우드는 더욱 그랬다.
“나도 이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어.”
그저 배우가 된 계기에 대해서 말한 것뿐인데 말이다.
어렸을 때 봐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는데, 이렇게 목록까지 만들어가며 찾아내려고 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별 반응이 없으면 곧 잠잠해질 거라고 하더라.”
안다호와 킹즈 에이전시의 의견을 말해주는 서준에 캐서린과 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쁜 일도 아니고. 화제성이 다 떨어지면 조용해질 거야.”
“사진 자료 같은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온전히 서준의 기억에 의지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벌써 20년 전, 그것도 4살 무렵의 일이었다. 기억하고 있는 게 대단한 일이었다.
“그럼 이제 내일 촬영 연습할까?”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던 서준이 대본을 들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여기에 모인 이유이기도 했다.
* * *
다음 날.
시카고의 한 구역이 통제되었다.
“빨리 준비합시다!”
그 외침에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오고 가는 거리에서의 촬영이라서 정해진 시간 내에 촬영해야 했다.
“그래도 배우들이 믿음직해서 촬영은 무사히 끝날 것 같네.”
“그러게.”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던 스태프들이 촬영을 준비하는 서준 리와 캐서린 밀러, 폴 오든을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촬영에서 NG를 거의 내지 않은 대단한 배우들이었다.
“뭐, 다른 쪽은 걱정이지만.”
“으음.”
스태프들이 이번 장면에 출연하는 단역 배우들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긴장한 모습이 안타까웠다.
“조명!”
“넵!”
뭐, 그 시간도 길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조명 스태프들이 불려간 빈자리에 준비를 끝낸 서준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서준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의 촬영 당시, 거의 노숙자처럼 보였던 노인의 차림새와는 달리, 조금 낡았지만 자유분방한 옷차림의 세 사람이 파드득 놀라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심히 옷에 손을 닦은 리더가 서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바, 바, 반갑습니다! 준!”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악!”
“……립니다!”
마지막 사람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덜덜 떨리고 있는, 마주 잡은 손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촬영 시간은 넉넉하니까 편하게 연주해 주세요.”
“네, 넵!”
“아, 아, 알겠습니다!”
많이 긴장하고 있는 모습에 서준은 웃으며 선기를 몽실몽실 흘려보냈다. 따뜻한 선기가 바짝 얼어붙은 긴장감을 녹이면서 세 사람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떨리던 목소리도 진정한 듯 부드러워졌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들어주세요. 준.”
“네. 그럴게요.”
진지한 세 사람의 표정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잠시 후.
모든 준비가 끝나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레디, 액션!”
카메라 앵글로 거리를 걷는 그레이 바이니와 레베카의 모습이 비쳤다.
“점심 맛있더라. 그치?”
“응. 가격도 괜찮았고.”
그레이와 친구들은 시카고에서의 연주회를 마치고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갖는 중이었다.
보통 때라면 곧바로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을 시간이지만, 어째선지 이렇게 휴식 시간이 생겨 버렸다.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함께 있어서 생긴 여유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레이는 오랜만의 여유를 느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즐기지는 못했다. 같이 걸어가며 열심히 떠들고 있던 레베카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겼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 시카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패션도 다양했고 다양한 디자인의 옷들이 걸린 가게도 많았다. 레베카는 그 옷들을 힐긋힐긋 바라보며 신경 쓰고 있었다.
패션 디자이너는 이제 그만두겠다더니.
솔직한 마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궁금하면 가봐도 돼.”
그레이의 말에 레베카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괜찮아! 너 다큐 촬영 중이잖아. 내가 방해하면 안 되지!”
“마침 좀 쉬었다 갈 생각이었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부드러운 그레이의 목소리에 으으, 신음을 뱉으며 고민하던 레베카가 카메라 너머에 서 있는 조지의 손짓에 얼른 그쪽으로 향했다. 그레이가 의아한 눈빛으로 레베카와 귓속말을 하는 조지를 바라보았다.
레베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럼 갔다 올게!”
“그래.”
그레이가 빙그레 웃었다. 그런 그레이에게 레베카가 조지에게서 받아온 듯한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응?
그레이가 눈을 끔벅이며 종이와 펜을 받아들었다. 텅 빈 오선지였다.
“그레이 넌 여기서 작곡하고 있어.”
“……작곡?”
“조지가 편집해 주겠대. 하는 척만 하래. 하는 척만.”
……와.
“조지 너…….”
세상의 진실을 본 것 같은, 그레이의 짜게 식은 눈빛에 카메라 건너에 있던 조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왜. 길거리에서 영감 얻고 작곡하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괜찮잖아.”
“……그래. 알았어.”
뻔뻔한 조지의 모습에 그레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레베카가 편하게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려면 이 방법이 제일 좋을 것 같긴 했다.
“나 작곡하는 데 오래 걸리니까 천천히 구경하고 와.”
“그래!”
환하게 웃은 레베카는 마치 신발에 날개라도 달린 듯 가벼운 걸음으로 가장 가까운 옷 가게로 향했다.
“지금까지 본 얼굴 중에 제일 밝네.”
그레이의 말에 조지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선지를 든 그레이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앉을 곳이 없나, 살펴보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벤치 하나가 있었다.
그레이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손에 든 텅 빈 오선지가 어색했다.
“……그러네.”
연주회를 돌아다니고 꽉 채워진 악보만 보며 연습하다 보니, 이렇게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오선지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조지가 편집하기 좋게, 짤막하게나마 멜로디를 적어보려고 했는데,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가 된 것 같았다. 펜을 든 손이 허공만 맴돌았다.
그때, 음악이 들렸다.
그레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레이가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벤치 주위를 찍고 있던 촬영팀도 함께 움직였다.
오선지를 손에 쥔 그레이가 걸음을 옮겼다. 벤치에서 조금 걸어가다 보니 작은 공원 같은 곳이 나왔다. 그곳에 연주자들이 있었다.
♬
전자 피아노, 기타 그리고 바이올린.
수준급은 아니지만 제법 실력 있는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레이 바이니는 걸음도 멈춘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클리블랜드에서 봤던 노인처럼 이 세 연주자도 밝고 행복한 얼굴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조금 전, 레베카의 얼굴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묻혀두었던 마음이 살짝 머리를 내민다.
부럽다.
그 세 글자가 떠오르자, 넥타이도 없는 옷인데 숨통이 턱하고 막혀왔다.
연주자들이 서 있는 곳은 빛이 드는 것 같은데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자신의 자리는 어둠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불쑥, 밀려오는 초조함과 답답함에 그레이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꽉 쥐어버리고 말았다.
부스럭.
들리는 소리에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조금 떨리는 양손에는 텅 빈 악보와 펜이 들려 있었다.
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막막했었는데, 지금은 마구잡이로 악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둡고 진득한 감정이 자신을 악보에 새겨달라는 듯 꿈틀댔다. 듣는 사람도, 연주하는 사람도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을 치게 만드는 그런 악상들이 자신을 꺼내달라며 외치고 있었다.
‘……아니야.’
물론, 그런 감정들도 훌륭한 곡이 될 수 있겠지만, 그레이는 지금 다른 것을 오선지에 담고 싶었다.
그레이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악보에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새겨넣고 싶었다.
누가 쳐다보든 말든 그레이는 바닥에 엎드려 오선지를 채워나갔다. 물론, 좁은 오선지에 모든 것을 넣을 수는 없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선율로 가득했다.
따뜻한 햇볕, 푸르른 잔디밭, 파릇파릇한 초록의 나뭇잎, 나뭇가지에 앉은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가족과 함께 놀러 나온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사이에 들리는 거리 악사들의 연주.
거기에 또 다른 감정을 더했다.
노인의 행복한 표정, 레베카의 날아갈 듯한 발걸음,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 악사들의 유쾌한 표정.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즐거운 얼굴까지.
그레이가 부럽다고 생각했던 모습들이었다.
그 모든 것을 담아 오선지를 채워나갔다.
연주하는 사람도, 연주를 듣는 사람도 모두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자신도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오선지가 채워질수록 전부는 아니지만 답답했던 것이 풀려가는 것 같았다. 조금이나마 자신의 마음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될까.
“자.”
펜을 멈추고 가득 채워진 오선지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레이의 생각을 방해하듯, 그의 앞에 익숙하다 못해 그리운 것이 나타났다. 바이올린이었다.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카메라 뒤에 서 있었을 조지가 웃으며 바이올린을 내밀고 있었다. 살펴보니, 거리의 악사들에게서 빌린 것 같았다.
“연주해 봐야지.”
눈을 끔벅이며 바이올린을 바라보던 그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어쩐지 어렸던 그 날, 처음 바이올린을 잡았던 그 날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겁이 나면서도 기쁜 마음에 손이 조금 떨려왔다.
그레이 바이니가 바이올린에 턱을 괬다. 그리고 활을 크게 내리그었다.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 3 : Good afternoon]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