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32화
“레디, 액션!”
화장과 머리 손질까지 끝내고 스태프들이 하나둘 대기실을 나갔다. 그레이 바이니가 모든 준비를 끝낸 후, 연주회 직전까지 혼자 시간을 갖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대기실을 나가는 스태프들을 보며 웃던 그레이는 이내 명상을 하듯 눈을 감았다.
남아 있던 다큐멘터리 촬영진, 조지와 스태프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죽이며 조용히 그런 그레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시끌벅적하던 대기실이 조용해지자, 그레이 바이니는 조금 전까지 신경 쓰던 카메라는 모두 잊은 듯, 이제 곧 있을 연주회의 곡들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되새겼다.
이전 연주회 때의 아쉬운 부분을 다시 생각하고 좀 더 멋진 연주를 하기 위해서.
바이올린을 처음 잡았을 때부터, 그레이 바이니는 항상 그렇게 진심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요즘은…….
그레이 바이니가 눈을 떴다. 미세하게 금이 간 미간과 낮게 가라앉은 검은색 눈동자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선)흑백카멜레온의 흑백화(중하급)이 발동됩니다.]
[[(선)흑백카멜레온의 흑백화(중하급)]의 등급이 일시적으로 낮아집니다.]
[(선)흑백카멜레온의 흑백화(최하급)이 발동됩니다.]
어렸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조용히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그레이 바이니는 찬란하게 빛나던 색이 천천히 바래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레이의 모습을 보고 있던 조지의 진지한 표정이 또 다른 카메라에 찍혔다.
후우.
하고 가볍게 숨을 내쉰 그레이는 잡념을 떨쳐버리고 앞에 놓여 있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었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꺼내 마지막으로 연습 겸 점검을 했다.
길다란 활을 움직여 현 하나하나를 그으면서 알맞은 세기로 팽팽하게 당기거나 풀어 조절했다. 섬세하고 다정한 그 손길에 맞춰 그레이의 마음도 점점 차분해졌다.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시계를 살펴보니 연주회의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곧 무대에 오를 시간이라며, 스태프가 알리러 올 것이었다.
언제나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가볍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
자신을 찍는 카메라들과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조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다큐멘터리 촬영이 한두 번이 아닌지, 존재감을 줄이는 게 아주 수준급이었다.
아.
이제야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 낸 그레이 바이니가 커다란 카메라 렌즈를 보며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오케이, 컷!”
어색하게 웃고 있던 서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편안하게 바뀌었다. 그러고는 조지와 함께 모니터링을 하러 사라 로트 감독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 서준의 모습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보고 있던 최태우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순간부터 저도 모르게 ‘그레이 바이니’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면 안 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매니저가 배우도 살피지 않고 넋을 놓다니.
‘근데 연기를 너무 잘하잖아.’
정말로 눈앞에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가 있는 줄 알았다.
‘서준의 연기에 언제쯤 익숙해질까…….’
안다호가 들었다면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라며 웃었을 생각을 하며, 최태우는 사라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서준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이서준.’
그래도 ‘그레이 바이니’와 ‘이서준’의 차이가 눈에 뻔히 보일 정도로 크니, 구분하는 것은 쉬워서 다행이었다.
“다음 장면 촬영 준비하겠습니다!”
에밀리 조감독의 외침에 스태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서준도 다음 촬영을 준비했다.
다음 장면은 뉴욕 촬영 장면과 같은, 대기실에서 무대까지로 걸어가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뒷모습이 아니라 그레이 바이니의 표정이 찍힐 예정이었다.
“레디, 액션!”
스태프의 부름에 그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손에 바이올린을 들고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그레이! 오늘도 멋진 연주 부탁드릴게요!”
바쁘게 이곳저곳 뛰어다니던 스태프들이 그레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레이와 함께 일하는 스태프 중 그의 친절함을 모르는 스태프는 없었다.
“네. 열심히 할게요.”
그레이도 웃으며 그 미소를 받아주었다.
그레이 바이니와 함께 대기실을 나온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그 모습을 촬영하며 현장의 생생함이 담고 있었다. 카메라 중 하나는 그레이 바이니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무대와 가까워질수록 스태프들이 줄어들며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과 함께 묻어두었던 무언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빙그레 웃고 있던 그레이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손에 든 바이올린이 묵직하다. 언제나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던 바이올린이, 전에 없이 힘겨워졌다. 팔이 떨어질 것 같았다. 놓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레이는 테이블 위에 바이올린 케이스를 올려두었다. 언제나 함께했던 바이올린이 보였다. 그레이의 손이 다정히 바이올린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레이 바이니는 언제나처럼 바이올린과 활을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다정했다.
바이올린을 손에든 그레이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빛이 보였다.
무대다.
빛으로 향하는 길, 빛과 어둠의 경계선 바로 앞에서 그레이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겁이 났다.
지금의 상태가 나빠지고 나빠져,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될까 봐.
지금의 두려움이 커지고 커져, 다시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게 되지 못하게 될까 봐.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놓아버리면 영원히 바이올린을 잡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그레이는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는 멈추지 않는다.
계속, 계속 걸어가 빛나는 무대 중앙에 홀로 섰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꾸벅 인사한 그레이 바이니는 언제나처럼 바이올린에 턱을 괴고 기다란 활을 움직였다.
바이올린에서는 그레이의 생각대로, 움직임대로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아.
다행이다.
연주할 수 있어서.
찔끔 나오려는 눈물을 삼키고 있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는 지금,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 * *
다음 날.
김수빈의 인터뷰를 도왔던 안다호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도착했다. 안다호는 곧바로 촬영장으로 향했다.
“/안 이사님!/”
겨우 어제 하루지만 잔뜩 긴장해 있던 최태우가 안다호가 도착한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어제 하루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고했다. 마침 서준이 분장 중이라 밖에서 보고를 받게 되었다
“/어제 촬영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오늘은 연주회 장면을 촬영할 예정이고, 서준이 컨디션도 괜찮습니다. 아침 식사도 잘했고요./”
그 이외에도 촬영 시간이나 휴식 시간 등, 마치 안다호가 참고로 보여줬던 스케줄표처럼 시간별로 이야기했다.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네요./”
“/감사합니다!/”
상사의 칭찬에 최태우가 활짝 웃었다.
잠시 후.
분장 스태프들이 나오고 안다호와 최태우가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던 서준이 안다호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다호 형! 언제 왔어요?/”
“/이제 막 도착했어./”
안다호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인터뷰는 잘 끝났어요?/”
“/그래. 수빈이가 잘하더라./”
역시 내 동생.
서준이 팔불출처럼 웃었다.
“/기사는 언제 나온대요?/”
“/최대한 빠르게 업로드해달라고 했어./”
안다호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어려서 여러 가지 말이 나올 테니까, 뉴욕 현악기 콩쿠르에서 1위 한 지금이 가장 타이밍이 좋거든./”
김수빈의 실력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을 해결하는데, 눈에 보이는 수상 이력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게다가 국제 콩쿠르이지 않나.
안다호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도 바로 번역해서 뜨겠죠?/”
“/아마 그렇겠지. 그쪽은 코코아엔터에서 대비할 테니까 걱정 마./”
“/네, 고마워요. 다호 형./”
코코아엔터의 지원에, 수빈이와 헤어지기 전 전해준 능력까지 있으니 수빈이에 대해서는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 * *
“와……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 오버 더 레인보우2 촬영이었어!”
뉴욕에서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했다가 ‘그레이 바이니의 연주’를 듣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기대했는데 정말로 [오버 더 레인보우2]의 촬영일 줄은 몰랐던 사람들이 기대감을 가지고 하나둘 관객석에 착석했다.
엑스트라 지원에 필수였던 정장도 잘 다림질하고 입고 온 상태였다.
“이렇게 입고 오니까 진짜 연주회 온 것 같다.”
“그러게.”
지금 화제의 중심인 [오버 더 레인보우2]의 촬영에 참여하게 되다니, 영화가 나오면 저기에 자신이 있었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촬영 중에는 모두 조용히 해주세요!”
“박수 팻말을 들어 올리면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커다란 연주 홀이다 보니 엑스트라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지만, 스태프들은 능숙하게 해결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관객석이 어두워졌다.
엑스트라로 온 것인지, 관객으로 온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사람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무대에 그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레디, 액션!”
무대 위의 조명이 켜졌다.
그리고 무대 옆에서 바이올린을 든 남자가 나타났다.
모두 저도 모르게 나올 것만 같은 ‘그레이 바이니’와 ‘서준 리’라는 외침을 삼키고 스태프의 지시에 따라 우렁찬 박수를 보냈다. 연주홀이 떠나갈 것 같은 커다란 소리였다.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선 그레이 바이니가 꾸벅 인사를 하고 바이올린에 턱을 괬다. 그리고 곧 감미로운 연주가 시작되었다.
[오버 더 레인보우]나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1], 그리고 새롭게 작곡한 [굿모닝]이 아니라 일반적인 클래식 곡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제부터 클래식을 사랑하게 될 것 같은 연주였다.
스태프들의 신호와는 상관없이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던 관객들은 몰랐다.
‘그레이 바이니’가 현재 슬럼프라는 걸.
그의 천재성이 너무 압도적이라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 * *
“연주는 여전히 훌륭하네. 지금 연기 중이겠지? 슬럼프인 그레이를.”
“그럴걸. 난 전혀 모르겠지만.”
캐서린과 폴의 속닥거림이 안다호의 귀에 들려왔다.
“만약에 준이 저런 상황이라면 알아볼 수 있을까?”
“……힘들 것 같은데.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연기하면 못 알아볼 것 같아.”
안다호가 무대 위 ‘그레이 바이니’를 바라보았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힘듦 속에서도 찬란한 연주를 들려주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건 안다호가 걱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서준의 재능이 너무 대단해서 철저하게 숨기면 고민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면 이해해주지도, 도와줄 방법을 찾지도 못할 터였다.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이 위험한 선택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연기에 대한 서준의 열정을 보면, 슬럼프가 왔을 때 어떤 행동을 보일지 걱정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겠지.’
앞으로도 서준이 즐겁고 행복하게 연기 활동을 해나가길 바라는 안다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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