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629화 (629/1,055)

0살부터 슈퍼스타 629화

그레이가 식은 커피와 빵을 치우는 사이, 테이블 위에 음식들이 차려졌다. 방금 사 온 모양인지 뚜껑을 연 음식들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얼른 먹자. 나 배고파!”

“여기 맛있다고 하더라.”

테이블에 둘러앉은 세 사람이 웃으며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따뜻한 음식이 입속으로 들어오니 몸까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 그레이 바이니가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야? LA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어?”

“나 휴가 냈어.”

레베카가 에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레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또 상사가 문제야?”

“그게 뉴욕 간 김에 자기 심부름을 하라고 하잖아. 내가 자기 심부름하려고 뉴욕에 왔냐고. 그것도 그냥 사다 줄 수 있는 거면 사다 줄 수도 있겠지. 근데 한정판이래! 하루 전부터 줄 서서 사야 하는 거!”

와. 심했다.

스태프 사이에서 음향 기계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아주 작은 혼잣말이 들려온 것 같았다. 그걸 들은 최태우가 전 직장을 떠올리고는 크윽, 하고 레베카의 울분에 공감했다.

“그래서 그냥 잘릴 생각으로 휴가 냈어. 그동안 바빠서 휴가도 한참이나 못 썼거든. 여기 더 있다가는 아주 미쳐 버릴 것 같아.”

입 안의 고기가 마치 상사라도 되는 양, 레베카가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그레이와 조지가 걱정스럽게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그런 친구들의 눈빛에 레베카가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이번 기회에 푹 쉬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지 고민 좀 해보려고. 패션 디자이너라니, 나한테 안 맞는 것 같긴 했어.”

“……그래.”

‘한 번 더 바이올린을 해보는 건 어때?’라는 말을 삼킨 그레이가 애써 표정을 폈다.

당사자가 그렇다니, 자신이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조금 전만 해도 편안했던 속이 답답해지는 것 같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세 배우의 모습을 스태프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대본을 미리 봤던 스태프들은 알고 있었다.

10년.

한국에서는 강산도 변할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 긴 시간 동안, 정작 그레이 바이니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주었던 레베카는 바이올린을 그만두고 패션 디자이너(아직 말단이지만)로 일을 시작했다는 걸.

[오버 더 레인보우1]에서는 마냥 밝았던(물론 고난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어느새 어른이 되어 현실에 치이는 모습을 보니 공감도 되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난 일이 생겨서 말이야.”

침울해지려는 분위기에 조지가 입을 열었다.

그레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이번에 새 기획이 나왔는데, 그 에피소드 중 하나를 내가 맡게 됐거든.”

“정말?”

그레이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레베카도 오, 감탄하며 기뻐했다.

“뭐, 정식으로 결정이 난 건 아니고 땜빵이랄까. 하다가 엎어질 수도 있어.”

“그래도 기회가 생긴 게 어디야!”

기뻐하는 그레이의 모습에 조지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

“문제?”

“음…… 그레이 네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조지의 말에 그레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줄게.”

“이번 기획이 연주자들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거거든. 거기에 출연해줬으면 하는데…… 물론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레이.”

“나야 괜찮지만…….”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의 시작점인 크라우드 펀딩 이야기는 클래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고, 그레이 바이니의 두 친구에 대해서도 알음알음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아마도 조지가 자신의 친구라는 게, 이번 일에 크게 작용했을지도 몰랐다.

어쩐지 친구들에게 짐만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지가 그레이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상이나 연주회 준비 과정을 주로 찍을 건데…… 방해 안 되게 조심할게.”

조지가 괜찮다면.

다큐멘터리 촬영은 해본 적이 없지만 조지가 담당자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레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 언제부터 촬영해, 조지? 나 내일부터 스케줄이 있어서 일정 맞춰야 할 것 같은데.”

앞으로의 촬영을 위해 매니저 연락처를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내일.”

조지의 목소리에 휴대폰을 꺼내던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응?”

“내일부터 할 거야.”

씨익 웃으면서 말하는 조지에 그레이가 눈을 끔벅였다.

“컷! 오케이!”

사라 로트 감독의 목소리에 몰입에서 벗어난 세 배우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 첫 촬영 하고 이제 두 번짼데 벌써 딱딱 맞네.”

서준의 말에 캐서린과 폴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첫 테이크부터 오케이라니!”

“촬영이라기보단 그냥 이야기 나누는 것 같아서 편하더라.”

친구들과의 촬영이 10년 만이라서 그런지, 매 순간 재미있었다.

“모니터링하러 갈까?”

“그래.”

세 배우가 모니터링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고, 테이블 위 음식은 다음 촬영을 위해 다시 준비되었다.

“클로즈업샷 촬영할 건데 음식은 먹을 수 있는 만큼만 먹으면 돼.”

사라 로트 감독이 촬영분을 살펴보는 세 배우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밥 먹는 장면을 여러 번 찍으니 배가 부를 것을 염려하는 것이었다.

“저는 괜찮아요. 아직 더 먹을 수 있어요.”

“맞아요. 아침을 안 먹고 와서.”

“저도요.”

씨익 웃는 삼총사에 사라 로트 감독도 그저 웃고 말았다.

* * *

8월 4일.

뉴욕 현악기 콩쿠르 결선 날.

세계 3대 콩쿠르같이 아주 유명한 콩쿠르는 아니었지만 제법 이름 높은 콩쿠르라서 그런지, 결선을 구경하기 위해 클래식에 관심 많은 사람들이 대회장에 모여있었다.

결선은 카테고리1부터 3까지 각 6명, 총 18명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참가하며, 13세 이하의 카테고리 1의 결선부터 시작해 중간중간마다 쉬는 시간이 배정되어 있었다.

지금은 카테고리 1의 결선이 끝난 후의 쉬는 시간이었다.

“기사 봤어? 12살이 결선에 오른 거. 이름이 수……빈 킴이었던가?”

얼마 남지 않은 카테고리2 결선에서 사람들의 관심 제1순위는 12살의 동양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수빈이었다.

“어. 완전 그레이 바이니 같던데?”

어린 나이와 훌륭한 바이올린 실력 그리고 동양인이라는 사실에, [오버 더 레인보우2]의 촬영과 홍보가 겹치면서 [현실판 그레이 바이니 등장?]하고 기사가 났을 정도였다. 별 관심이 없었던 한국에서도 그때야 조금 관심을 갖는 듯 기사가 조금 났었다.

“쿠퍼가 주목할 만한 신인이라고 말한 걸 보면 나중에 크게 되겠어.”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클래식 기자 쿠퍼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파인패드에 떠 있는 결선에 오른 바이올리니스트의 정보를 다시금 읽어 내려갔다.

‘수상은 3등까지.’

연주자들의 컨디션이 나쁘지 않다면 쿠퍼가 짐작하는 대로 수상자가 결정될 거다. 카테고리1도 쿠퍼의 예상대로였다. 뭐, 관계자 간의 커넥션이 없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킴도 그렇겠지.’

자신이 예상하기로는 수빈 킴은 아마도 2위 이상. 그러니까 1위 아니면 2위에 오를 것 같았다.

쿠퍼가 턱을 긁적였다.

이제 곧 시작할 카테고리 2 결선.

만 18세 이하의 바이올리니스트 중에서 제법 오래 봐왔던 아이들이 있었다. 다들 어린 나이에 두각을 드러내 출신국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연주회를 가지며 경험을 쌓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력 면에서도, 경험 면에서도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이었다.

‘그런데 그 연주자들을 제치고 킴이 받을 것 같다니…….’

참.

스승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정말 기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퍼!”

“어?”

“봤어? 벤자민 교수님이 오셨어.”

“벤자민 교수님이?”

동료 기자의 말에 쿠퍼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바이올리니스트에서는 은퇴했지만, 작곡과 가르침은 여전히 이어가고 있는 벤자민 모튼 교수는 여전히 바이올린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애제자가 ‘그’ 제이슨 무어라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제이슨 무어는?”

제이슨 무어.

현재 활동 중인 바이올리니스트 중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연주자였다. 할리우드 스타 서준 리와 친분이 있는 것도 유명했다.

“있었어. 같이 온 것 같더라.”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물론 콩쿠르에 참석하는 마에스트로나 프로 연주자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LA에 머물고 있는 두 바이올리니스트가 뉴욕까지 오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것도 지금.’

곧 있을 결선은 카테고리2다.

그냥 미래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궁금했던 걸까.

“인터뷰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동료 기자가 고개를 저었다.

“지인이랑 온 것 같던데?”

“그래…….”

아쉽지만 할 수 없지.

막무가내로 찾아가 인터뷰를 딸 수도 있지만, 안 그래도 좁은 곳이 아닌가.

괜히 찍혔다가는 벤자민 교수나 제이슨 무어와 친분이 있는 연주자들에게까지도 악명이 퍼질지도 몰랐다.

“일단 콩쿠르에 집중하자고.”

“그래.”

* * *

“두 분은 어디 앉아 계시니?”

“저쪽에서 보신대요.”

벤자민 교수의 물음에 모자를 쓰고 꽃다발을 세 개나 든(큰 걸 사고 싶었지만 방해가 될까 봐 작은 걸로 샀다.) 서준이 관객석 한 곳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꽃다발을 든 동양인 부부가 있었다. 서준과 벤자민 교수, 제이슨과 눈이 마주친 김희상과 최수희가 활짝 웃으며 꽃다발을 흔들었다.

“같이 봐도 되지 않아?”

제이슨 무어의 말에 서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교수님이랑 제이슨이랑 같이 있으면 제자라는 게 금방 퍼질 테니까요. 그럼 저도 엮일 거고. 미국에서만 지내면 모르겠는데, 한국에서도 지내야 하잖아요. 아직 어리니까 유명세는 덜 퍼지는 쪽이 좋죠.”

“넌 안 그랬잖아?”

제이슨의 물음에 무려 생후 7개월 때부터 유명했던 서준이 볼을 긁적였다.

“전 예외라고 할까. 관심받는 쪽이 더 좋았던 특별 케이스죠.”

“빈도 그렇게 약할 것 같지는 않은데…….”

몇 달 같이 지내보니, 김수빈이 왜 서준과 친한지 알 것 같았던 제이슨 무어였다. 겁이 없달까, 씩씩하달까.

“뭐, 수빈이가 괜찮다고 하면 그때 알릴 생각이에요.”

적당한 능력을 이미 준비해 놓은 상태라 언제든지 알려져도 괜찮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카테고리2의 결선이 시작되었다.

결선 순서는 2차 본선 성적순이었는데, 아무래도 수빈이는 맨 마지막 순서인 것 같았다.

“다들 잘하네요.”

“그러게.”

대회라서 박수를 보낼 수는 없지만, 서준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연주를 주의 깊게 들었다. 벤자민 교수와 제이슨 무어도 마찬가지였다.

곧 다섯 번째 연주자가 내려가고 마지막 결선진출자가 올라왔다.

수빈이였다.

확실히 앞서 나왔던 진출자들보다 작은 체구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것 같았다. 중요한 순간,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의젓하게 서 있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관객석을 살펴볼 틈도 없이, 꾸벅 인사를 한 수빈이 바이올린에 턱을 괴고 연주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연습했던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 음 한 음 집중했다.

벤자민 교수님과 제이슨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악보에 담긴 작곡자의 생각을 이해하고 자신의 감정까지 담으려고 노력했다.

길다란 활이 바이올린의 현을 매끄럽게 스쳐 내려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갔다. 그에 맞춰 바이올린의 현을 집고 있는 왼손 손가락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심사위원들이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진출자의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콩쿠르지만 이번 순서만큼은 온전히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진출자들을 응원하러 왔던 가족, 지인들도, 취재하러 왔던 기자들도, 호기심에 와본 관객들도 어느새 모두 수빈의 연주에 푹 빠져 있었다.

벤자민 교수와 제이슨 무어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긴장하지 않고 충분히 연습한 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 멋진 연주를 보여주고 있었다.

서준도 함박웃음을 지은 채 수빈이의 연주를 들었다.

‘그레이 바이니’를 연기하면서 몸에 새긴 [(선)고블린 바이올리니스트의 선율]과 [(선)바이올린 꿈요정의 기초 연습], 그리고 그 상위급 능력들이 즐거워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함께 연주하고 싶어 두 손이 조금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정말 멋지네. 우리 수빈이.’

마지막 한 음까지도 허투루 연주하지 않는 수빈이의 집중력에, 서준은 콩쿠르라 박수를 칠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마음속으로 커다란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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