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28화
클래식 기자 쿠퍼가 이제 며칠 남지 않은 뉴욕 현악기 콩쿠르 결선에 대해 기사를 쓰고 있을 때였다.
“쿠퍼. 이거 봤어?”
“뭐?”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동료 기자가 쿠퍼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작은 몸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강렬한……’이라고 이번 콩쿠르에서 가장 특별한 바이올리니스트에 대해 써 내려가고 있던 글을 멈춘 쿠퍼가 휴대폰 화면을 보았다.
[그레이 바이니, 빈센트홀에서 성공적인 독주회 개최!]
쿠퍼가 눈을 끔벅였다.
그레이 바이니, 빈센트홀, 성공, 독주회, 개최.
다 알고 있는 단어들인데 어째서인지 문장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빈센트홀이라면 뉴욕에 있는 공연장 중 하나였다. 쿠퍼도 자주 취재차, 취미활동 차 가는 곳이기도 했다. 거기에 붙는 성공적인 독주회 개최라는 문장도 특별한 것은 없었다. 쿠퍼도 종종 그런 기사를 쓰고는 했으니까.
그런데,
그레이 바이니라니.
그건 정말이지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왜 이름이 아니라 단어라고 칭하냐면, ‘그레이 바이니’란 사람은 현실의 인물이 아니니까, 였다.
“뭐야, 이게?”
그 얼빠진 모습에 동료 기자가 으하하하 웃었다.
“뭐긴 뭐야. 오버 더 레인보우2 홍보지.”
웃음소리에 반쯤 정신을 차린 쿠퍼가 되물었다.
“홍보?”
“그래. 오늘 크랭크인했다고 하더라. 첫 장면이 연주회 장면이라서 이런 식으로 홍보 중이래. 기사 뜬 지 얼마 안 됐어.”
동료 기자의 말을 듣고 쿠퍼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려 기사들을 찾아보았다.
동료 기자의 말대로 [오버 더 레인보우2]에 대한 홍보 기사인지, [그레이 바이니, 빈센트홀에서 성공적인 독주회 개최!] 등의 기사들은 클래식 파트가 아닌 연예 파트에 업로드되어 있었다.
쿠퍼는 기사들을 클릭해 보았다.
<오늘 오후, 월드 투어를 끝내고 돌아온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의 뉴욕 공연이 빈센트홀에서 열렸다.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는 여전히 관객들을 감동하게 만드는 연주를 보여주었고 빈센트홀에서는 박수 소리가 끊이질 않았……>
<익히 알고 있듯,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의 시작은 10년 전 크라우드 펀딩……>
홍보 기사의 내용은 오늘 열렸다는 그레이 바이니의 연주회(?)에 관련한 내용과 [오버 더 레인보우1]을 요약해 놓은 듯한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의 과거에 관한 내용, 두 가지였는데 진짜 기사를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제작사도 진짜 홍보에 진심이라니까. 딱 보면 클래식 파트인 줄 알겠어. 그래도 사진은 없네.”
보통 기사라면 연주회의 주인공인 바이올리니스트의 사진 한 두 장은 들어가 있을 텐데, 아무래도 영화라서 그런지 ‘그레이 바이니’의 사진은 없었다.
그러니 웨일 스튜디오의 기사를 그대로 복사+붙여넣기하고 꿀 빨려던 연예 파트 기자들도 아쉬운 얼굴로 빈센트홀의 사진 정도만 붙여넣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홍보 기사가 묘하게 현실적이니 댓글들도 변해가고 있었다.
-그레이 바이니? 그런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던가?
=그러게. 어? 여기 연예 파튼데?
=이거 오버 더 레인보우2 홍보 기사야:)
라고 설명해 주던 댓글들이,
-다음 연주회 일정 아시는 분?
-예매 사이트가 어디야. 못 찾겠어!
-나도 연주회 가고 싶다고:(
-사이트 열어줄 때까지 기다림. 계속 기다림.
-월드투어 한 번 더 해줘.
“댓글도 완전 과몰입했네.”
그때 가만히 기사를 보고 있던 쿠퍼가 갑자기 마우스를 연신 클릭했다. 따닥따닥. 시끄러운 클릭 소리에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키킥 웃으며 보고 있던 동료기사가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쿠퍼?”
“……어.”
“뭐?”
“나도 그레이 바이니 연주회 가고 싶다고! 예매 사이트! 예매 사이트가 어디 있을 거야!”
테이크 마이 머니!
를 외치며 있을 리가 없는 예매 사이트를 찾아 헤매는 쿠퍼의 모습을 동료 기자는 떨떠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여기도 있었네. 과몰입.”
* * *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ㅠㅠ 벌써 이렇게 자라다니ㅠ
=22 진짜 눈물이 앞을 가린다ㅠ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월드 투어라니…… 한국에는 안 왔어?
=왔겠지? 왔는데 우리만 몰랐던 거지?
=ㅠㅠ아니 이야기 좀 하고 오라고요ㅠ
-연주회 간 분들 좋겠다…….
=22 환상 속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직접 본 기분은 어떨까……ㅠ
-월드 투어 또 해줘요ㅠ 한국에 와줘ㅠㅠ
웨일 스튜디오의 홍보 기사는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도 업로드됐고, 한국은 물론이고 [오버 더 레인보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과몰입 상태였다.
“좋네요.”
“네. 홍보는 확실하게 됐습니다.”
사라 로트 감독과 담당자 넬슨이 세계 각국의 반응들을 살펴보며 환하게 웃었다.
[오버 더 레인보우]는 보통의 영화들과는 달리, ‘정말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느낌이라서 이런 방법의 홍보가 아주 잘 먹힐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준이 했던 연주도 한몫했고요.”
[굿모닝]을 연주한 서준의 너튜브 영상도 홍보 기사와 함께 조회 수가 열심히 오르고 있었다. 넬슨의 말에 사라 로트 감독이 웃었다.
“앞부분밖에 없지만요.”
“그거 때문에 연락 많이 옵니다. 뒷부분 좀 들려달라고.”
너튜브 영상 아래의 댓글들도 그랬다.
-당장 올리지 않으면 터뜨린다. 웨일 스튜디오.
-제발…… 제발 좀……ㅠㅠ 더 듣지 못하면 죽어버리는 병에 걸렸어요ㅠㅠ
-누가 음원 좀 살짝 흘려줘라. 나만 들을게.
세계 각국의 언어들로 협박부터 부탁까지, 다양한 댓글들이 올라왔지만, 이런 것들이 모두 [유니버스]와 [오버 더 레인보우2]의 흥행으로 이어지는 것이니만큼, 기쁘기만 한 마린사와 웨일 스튜디오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감독님.”
“네. 조심히 가세요.”
넬슨이 자리를 뜨고, 사라 로트 감독은 스태프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제 막 해가 뜨고 있는 이른 시간.
새벽부터 출근한 스태프들은 촬영 준비로 한창 바빴는데, 장소가 장소인 만큼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뉴욕, 센트럴파트가 내려다보이는 곳 위치한 오성급 호텔.
최상층까지는 아니지만 풍경이 좋고, 물건 하나 인테리어 하나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스위트룸에서 오늘 촬영을 진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준비는 다 됐어?”
“네. 배우들 분장도 끝났고 카메라 설치도 다 끝났어요.”
에밀리 조감독의 말에 사라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 이스가 독립한 지 꽤 돼서 함께 일하는 건 오랜만이었지만 여전히 물 흐르는 듯한 서포트였다.
“확실히 너만 한 조감독도 없는 것 같아.”
“으헤헤헤.”
에밀리 조감독이 방정맞게 웃자, 따라 미소를 지은 사라 감독이 막 들어오는 서준과 캐서린, 폴을 발견했다. 다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음이 가득했다.
“앗. 감독님. 이야기 끝나셨어요? 무슨 일로 오셨대요?”
캐서린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어제 올라간 홍보 기사 반응 때문에.”
“아. 저도 봤어요. 다들 자기만 빼놓고 하는 게 어디 있냐고 울고 계시던데요.”
남색으로 된 잠옷을 입고 있던 서준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었어?”
사라 로트 감독의 말에 폴이 대답했다.
“지금 촬영할 장면이요. 준이 어제 운동했다고 해서요.”
“오…….”
“그래?”
에밀리 조감독의 놀리는 듯한 표정과 사라 로트 감독의 웃음에 서준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음. 기왕이면 멋있게 나오는 편이 좋잖아요.”
“그건 그렇지.”
“준의 팬분들 엄청 좋아하시겠네.”
흐흐흐 웃는 에밀리 조감독에 서준도,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 * *
“레디, 액션!”
호텔 스위트룸의 침실.
♬
맞춰놓은 시간에 울리는 알람과 함께, 빛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스르륵, 자동으로 열렸다. 열린 커튼 사이로 밝은 빛이 들어와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잠버릇도 없는지 누워 있는 모습마저도 단정했다.
밝은 빛과 알람 소리에 움찔대던 눈꺼풀이 스르륵 열리고 두어 번 깜빡이자, 선명한 검은색 눈동자가 보였다.
잠에서 깬 남자는 몸을 일으켜 잠시 침대에 앉아 있다가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남자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차분하고 고요했다.
곧 들리던 물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흰색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으며 나오는 남자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바지는 입고 있지만 위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
여기저기서 음소거된 감탄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뒤돌아서 있어서 보이는 건 대부분 등쪽이었지만, 과하지 않고 보기 좋은 근육이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따라 움직이는 모습에 숨소리마저 잦아들었다. 마치 그린 것 같은 근육이었다.
남자가 놓여 있던 새하얀 셔츠를 들어 올렸다. 한쪽 팔을 넣고 다른 한쪽 팔도 집어넣었다. 약간 뒤로 젖혀진 양어깨에 등에 자리 잡은 근육들이 선명해졌다가 곧 어깨를 덮는 새하얀 셔츠에 가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잔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스태프들의 감탄 섞인 침묵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쇄골 근처의 단추를 잠글 때까지 이어졌다.
아무 말 없이 곧고 단정한 손으로 양쪽 손목의 단추까지 잠근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차분하고 말끔한 표정이었다. 일견 차가운 느낌도 들었다.
“컷! 오케이!”
사라 로트 감독의 목소리에 바짝 조여져 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여기저기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와! 장난 아니다. 뭐 운동이라도 했어, 준?”
“그러게. 어제 하루 만에 만들어질 근육이 아닌데?”
캐서린과 폴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서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나 얼마 전까지 군인이었잖아.”
“아.”
“그랬지.”
“날짜로 따져보면 전역한 지 한 달도 안 지났어.”
씨익 웃으며 말하는 서준.
그에 새삼 서준 리가 군인이었다는 게 실감이 난 캐서린과 폴, 그리고 다음 촬영 현장을 세팅하며 슬쩍 귀를 기울이고 있던 스태프들이었다.
* * *
“레디, 액션!”
옷을 갈아입은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빵을 준비하고 버터와 잼을 꺼내고 따뜻한 커피를 내렸다. 잠시 준비된 아침 식사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의자에 앉았다.
탁 트인 풍경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누군가는 저절로 감탄할 풍경이었지만 남자는 조금 멍한 기분이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던 커피가 점점 식어갈 때까지도 남자는 가만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린 듯 남자의 몸이 움찔 떨렸다.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식어버린 아침 식사에 한숨이 나올 것 같았지만, 남자는 먼저 울리는 초인종을 멈추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게 닫힌 문.
이런 이른 아침부터 찾아올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도 안 되는 터라,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우리야! 그레이!
-아침 먹었어? 같이 먹자.
익숙한 목소리에 남자, 그레이 바이니의 눈이 커졌다.
“레베카? 조지?”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어느새 문을 열고 있던 그레이 바이니였다.
문 앞에 따끈따끈한 음식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활짝 웃고 있는 레베카와 조지가 보였다.
“짜잔! 우리 왔어!”
“벌써 아침 먹은 건 아니지?”
“아, 아직 안 먹긴 했지만…… 둘 다 LA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어?”
어제 연주회에서 만났을 때 그렇게 들었던 것 같은데?
그레이는 당황하면서도 두 사람이 들어올 수 있게 비켜주었다.
“그게 있지. 그냥 휴가 냈어!”
“난 일이 갑자기 생겨서 말이야.”
“자세한 이야기는 아침 먹으면서 해줄게!”
“너 좋아하는 것도 사 왔어.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으니까 빨리 먹자.”
친구들의 말에 그레이가 눈을 끔벅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그러자.”
그레이 바이니는 웃으며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내 무감각하던 표정이 처음으로 밝아지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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