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27화
“그럼 우리도 준비하러 갈게.”
“그래.”
이야기를 나누던 캐서린과 폴이 촬영 준비를 하러 떠나고, 곧 촬영이 있는 서준도 검은색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분장팀 스태프들의 손길에 화장과 머리 손질까지 끝내자, 어엿한 한 사람의 바이올리니스트가 그곳에 서 있었다.
“잘 컸네. 그레이.”
에반 블록의 말에, [오버 더 레인보우]를 감명 깊게 봤던 스태프들이 우와, 감탄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조금 쑥스러운 듯 웃던 서준이 거울을 잠깐 살펴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태프가 의아한 듯 물었다.
“벌써 나가려고요? 아직 촬영 준비 중일 텐데?”
“밖에서 기다리려고요. 괜찮죠?”
“그럼요.”
구경꾼들을 통제해야 하는 야외 촬영도 아니고 관계자밖에 없는 실내 촬영이었다. 대기실이든 밖이든, 어디서 기다려도 준비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괜찮았다. 베테랑인 서준 리가 방해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당연히 괜찮죠.”
스태프의 말에 활짝 웃는 서준을 보며 에반 블록이 웃었다. 아무래도 점점 촬영 시간이 가까워지니 들뜨는 모양이었다.
“첫 촬영은 어떤 장면이야?”
서준과 함께 배우 대기실을 나온 에반 블록이 물었다.
“제일 처음으로 나오는 장면인데, 연주자 대기실에서 무대까지 걸어가는 장면이에요. 롱테이크로 한 번에 갈 예정이고요.”
“쉬우면서도 어렵겠네.”
영화의 시작 부분인 만큼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을 만한 장면을 보여줘야 했는데, 그저 걷는 장면이라면 배우의 역량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날 게 뻔했다.
‘물론 준이라면 잘하겠지만.’
에반 블록의 생각대로, 서준은 진심으로 즐거운 듯 설레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래서 좋아요.”
그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에반 블록도 웃고 말았다.
* * *
시끌벅적한 촬영 준비 현장.
스태프들은 컷 없이 한 번에 촬영하는 롱테이크 장면이라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준은 조금 떨어진 곳에 그 모습을 둘러보았다.
뭐랄까. 비슷한 시끌벅적함인데도 군대나 코코아엔터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여기저기 설치되는 조명들과 카메라들, 길게 이어진 전선들, 크고 작은 소품들, 동선을 살펴보는 스태프들과 엑스트라들.
저곳에 자신이 선다고 생각하면, 카메라에 자신의 모습이 담긴다고 생각하면 기분 좋은 긴장감이 돌며 들뜨게 된다.
좋다.
여기가 좋다.
채 2년도 되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이곳이, 이 공기가, 이 분위기가, 이 떠들썩함이 그리고 곧 있을 적막함이…… 굉장히 그리웠다.
당장에라도 저곳에 서서 연기하고 싶어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서준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숨을 후우 내쉬었다. 마치 처음 촬영하는 신인배우가 된 기분이 들어 조금 웃음도 나왔다.
기다리자.
멋진 연기를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가 필요한 법이니까.
모든 준비가 끝나고 촬영이 시작되면, 그때 열심히 연기하자!
그렇게 촬영을 준비하는 스태프들의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열의에 불타오르고 있는 서준을 에반 블록이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기쁘고 설레는지.
벅찬 표정을 짓고 있는 서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주 어릴 때부터 서준은 그랬다.
마치 커다랗고 멋진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설레고 들뜬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러고는 ‘액션!’이라는 소리에 순식간에 표정이 변하고는 했다.
‘그 갭이 멋지지.’
자신도 가끔 지칠 때가 있는데, 이렇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연기를 사랑하는 배우라니.
아마 자신이 알고 있는 배우 중 가장 연기를 사랑하는 배우가 서준이지 않을까, 싶었다.
촬영 준비 현장을 돌아보며, 주의해야 할 점이나 살펴봐야 할 곳을 둘러본 두 매니저가 서준과 에반 블록을 발견했다.
“아직 촬영 시간 아닐 텐데…….”
의아한 듯 서준에게로 시선을 돌린 안다호가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배우 대기실에서 기다리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어릴 때부터 변함없는 서준의 모습.
저런 표정을 지으면 항상 열심히 서포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제는 예전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줄 수는 없겠지만 멀리서나마 있는 힘껏 도와주고 싶었다.
최태우가 연기하기 직전의 배우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 회사에서 아이돌을 담당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배우 매니저 지망이었고, 코코아엔터에 들어와서도 계속 이 배우 저 배우를 서포트했었다. 그렇게 간 촬영 현장에서 많은 배우들을 보았다.
하지만 지금의 서준처럼 들뜬 표정을 짓고 있는 배우는 없었던 것 같다. 신인 배우라면 비슷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서준처럼 경력이 있고 유명세가 있는 배우 중에는 없었다.
벌써 배우 경력만 17년.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그 정도면 조금은 익숙해지고 질릴 만도 하지 않을까 싶은데, 촬영이 준비되고 있는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서준의 모습에는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연기라는 게 뭐길래 저렇게 좋을까.’
문득 라디오 방송이 떠올랐다.
서준이 배우와 연기에 처음 관심 갖게 된 계기가 연기를 아주 사랑하는 무명 배우 때문이었다고 말했던 방송을.
그때는 도대체 그 무명 배우가 어땠었길래 어린아이에게 그런 꿈을 심어줄 수 있었을까, 생각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겠지.’
서준이 그 무명 배우를 보며 연기가 무엇인지 궁금해했던 것처럼, 아마 지금의 서준의 모습을 보면 누군가가 연기가 무엇인지 궁금해하지 않을까, 싶었다.
* * *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오버 더 레인보우2]의 막이 올랐다.
에밀리 조감독의 목소리에 스태프들이 카메라 화면 밖으로 나오고 엑스트라들이 카메라 화면 안으로 이동했다. 조명과 음향 장비의 체크가 이어졌고 카메라 확인도 끝이 났다.
곧 촬영장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침묵, 침묵, 그리고 침묵.
촬영 직전의 이 고요함이 얼마나 반가운지, 행복한지 모른다.
조명과 카메라, 사람들의 시선이 서준을 향해 있었다.
서준은 후우, 깊은숨을 내쉬었다. 괜스레 떨려와 작게 웃음이 나왔다.
“레디-”
그곳에 배우 이서준이 있었다.
“액션!”
아니.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가 있었다.
* * *
카메라가 대기실 문을 비춘다. 카메라는 손잡이 근처를 비추고 있다. 똑똑, 반대편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올라갈 시간입니다!”
“예.”
대기실 안쪽.
몸에 딱 알맞은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을 보며 입고 있던 정장을 바로 하고 테이블에 놓여 있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고는 대기실 밖으로 나선다.
카메라를 든 카메라 감독이 남자의 뒤를 쫓았다. 남자의 뒷모습만이 보였다.
무대로 향하는 길.
일하고 있던 스태프들이 ‘저번 연주회 잘 들었어요!’, ‘이번에도 멋진 연주 부탁드립니다!’ 하고 한마디씩 응원을 보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남자는 뒷모습만 보이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뚜벅뚜벅.
단정한 발소리가 복도를 지나쳐 무대 뒤쪽으로 향한다.
남자는 무대 뒤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바이올린 케이스를 올려두고, 그 안에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바이올린을 꺼냈다.
남자의 곱고 단정한 손이 바이올린 위로 향했다. 익숙하게 왼손으로 바이올린을 잡고 들어 올린다. 그리고 기다란 활도 겹쳐 잡는다.
바이올린을 든 남자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카메라가 뚜벅뚜벅 걷는 남자의 뒤를 쫓았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빛이 보였다.
무대다.
빛으로 향하는 길 바로 앞에서 남자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마음을 가다듬는 것 같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는 멈추지 않는다.
계속, 계속 걸어가 빛나는 무대 중앙에 남자는 홀로 섰다.
커다란 박수 소리와 함께, 남자의 뒤만 쫓고 있던 카메라가 빙글 돌아 천천히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온다. 바이올린을 몸 앞에 들고 있던 남자가 꾸벅 인사를 하고 바이올린을 목 쪽으로 가져가는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드디어,
얼굴이 보였다.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였다.
* * *
“……컷! 오케이!”
허억!
하고 어디선가 멈춰 있던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최태우가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자신이 소리를 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몇몇 스태프들이 손으로 입을 꾹 막고 눈을 데굴 굴리는 모습이 보였다.
다 같은 마음인가 보다.
안도한 최태우가 다시 서준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그저 대기실에서부터 무대까지 걸어가는 모습이 이렇게나 흥미진진한 일일 수가 있나. 그것도 뒷모습이.
게다가 나중에 편집할, 지금은 아무도 없는 관객석에서 커다란 박수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어마어마한 몰입도며 흡입력이었다.
이 정도의 연기력을 보여주니, 영화 속에서 그런 멋진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것 같다고 최태우는 생각했다. 그리고 안다호 이사님이 메소드 연기의 후유증을 걱정할 법하다고도.
‘……잘 지켜봐야겠다.’
얼른 정신을 차린 최태우가 사라 로트 감독와 함께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서준을 바라보았다.
“한 번 더 가도 괜찮을까요?”
“당연히 괜찮지.”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지만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나 보다. 서준의 말에 사라 로트 감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태프들이 다시 연주자 대기실로 우르르 이동했다.
“준, 힘 팍 들어갔네요. 연주회 장면은 꼭 보고 가야겠습니다.”
에반 블록의 말에 안다호가 작게 웃었다.
곧바로 촬영한 두 번째 테이크도 오케이 사인을 받고 첫 촬영이 끝났다. 그리고 그 소식이 막 준비를 끝내고 서준의 촬영을 구경하러 나오던 캐서린 밀러와 폴 오든에게 전해졌다.
“아니, 벌써 끝났어?”
“뭐, 준이 NG 거의 안 내는 거 알고 있었잖아.”
“그건 그렇지만…… 역시 대단하네.”
여전히 감탄만 나오는 실력이었다.
* * *
오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연주회의 관객 역할을 맡은 엑스트라들이 하나둘 관객석으로 채워갔다.
“와. 이게 오버 더 레인보우2 촬영이었다니…….”
엑스트라를 모집할 때는 비밀로 했었던 웨일 스튜디오였는데, 서준의 라디오 방송 이후 홍보와 함께 엑스트라들에게 알려준 상태였다.
“나 진짜 오버 더 레인보우 좋아하는데…… 오늘 NG 많이 나왔으면!”
배우들과 촬영진에게는 저주나 다름없는 관객들의 바람에 관객석에서 촬영을 준비하던 캐서린과 폴이 작게 웃고 말았다. 지금이야 저렇게 말하지만 실제로 NG의 폭풍우를 겪어보면 ‘빨리 끝났으면……’ 하고 바라게 될 거다.
‘뭐, 준이라 그렇진 않겠지만.’
서준이 주연배우라, 아주 든든했다.
“우리 실수하지 말자.”
“그래.”
캐서린 밀러와 폴 오든이 초대석에 앉고,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연주홀이 어두워지고 무대에 조명이 비쳤다. 그리고 곧 무대 옆에서 바이올린을 든 남자가 나타났다.
미리 지시한 대로 커다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관객들의 설레는 얼굴이 카메라에 담겼다. 하지만 박수도 표정도 연기가 아니었다. 정말로 연주를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라 로트 감독의 옆에서 함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에반 블록이 그걸 알아차리고 조용히 웃고 말았다. 기대하고 있는 관객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관객들에게 인사한 그레이 바이니가 바이올린에 턱을 괬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잡고 있던 기다란 활로 현을 내리그었다.
감미로운 선율이 들려왔다.
뒤를 받쳐주는 피아노 반주와 함께 바이올린의 소리가 연주홀을 가득 채웠다. 도저히 바이올린 한 대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소리였다.
보통이라면 그저 연주하는 척했을 테지만, 배우가 직접 수준급의 연주를 하니 엑스트라들의 몰입도가 달랐다. 다들 정말 연주회에 온 것처럼 귀를 기울이고 감상하고 있었다.
그사이, 초대석에 앉은 캐서린 밀러와 폴 오든은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고 표정 연기를 이어 나갔다.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는 우리의 친구.
어렸을 때의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있었지.
여전히 멋진 연주다.
캐서린 밀러와 폴 오든이 흐뭇하게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컷! OK!”
사라 로트 감독의 외침에 서준이 바이올린 연주를 멈추었다. 동시에,
아…….
하고 여기저기서 진심 어린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각도에서 같은 장면 한 번 더 촬영하겠습니다.”
왁!
사라 로트 감독의 말에 어디선가 그런 환호와 같은 비명이 들려왔다. 무대에서 화장을 체크를 받던 서준은 물론이고 관객석까지 작은 웃음소리가 번져나갔다.
* * *
그날 오후.
[오버 더 레인보우2]의 첫날 촬영이 끝나고 기사가 떴다.
[그레이 바이니, 빈센트홀에서 성공적인 독주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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