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25화
뉴욕.
[오버 더 레인보우2] 제작회의실.
“이제 곧 공항에 도착할 시간입니다. 도착하자마자 연락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배우 서준 리를 담당하고 있는 직원의 말에 넬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배우들의 위치도 확인했다.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 중요한 역을 맡은 두 배우, 레베카 역의 캐서린 밀러는 내일 뉴욕에 도착할 예정이었고 조지 역의 폴 오든은 벌써 도착한 상태였다.
“그럼 준이 시차 적응하고 바로 촬영 들어가면 되겠군. 계획대로 8월 1일부터 촬영 시작하자고. 다른 촬영지들도 스케줄에 어긋나지 않게 관리해.”
뉴욕에서부터 LA까지.
각 촬영마다 다른 주로 이동할 계획이라 한 곳에서 삐끗하면 도미노가 쓰러지는 것처럼 뒤쪽의 일정까지 영향을 받게 될 터였다.
물론, 날씨나 배우 컨디션 등 영화 촬영을 하는 도중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에 여유 있게 잡긴 했지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돌아갈지는 아무도 모르니 주의해야 했다.
게다가 모회사인 마린사에서 최대한 [유니버스]의 출시일인 11월에 맞춰 완성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더 신경을 써야 했다.
“11월 공개가 아니더라도 10주년인 올해 안에는 완성해서 공개해야지.”
“예. 알겠습니다.”
이런저런 보고와 지시가 오가고 회의가 끝났다.
회의실 밖으로 나온 넬슨은 곧바로 옆 회의실로 향했다.
“조금 늦었습니다. 감독님. 조감독님.”
“아뇨. 저희가 일찍 왔는걸요.”
그곳에서는 [오버 더 레인보우]의 감독 사라 로트와 조감독 에밀리 이스가 앉아 있었다. 촬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테이블 위에는 펜으로 이것저것 필기된 콘티들로 가득했다.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넬슨의 이야기에 사라 로트 감독과 조감독이 귀를 기울였다. 이제 며칠밖에 남지 않은 크랭크인에 촬영진의 회의는 하루 종일 끊이질 않았다.
“11월 공개 가능할까요?”
넬슨이 가장 염려하고 있는 것을 물었다. 사라 로트 감독이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고생은 좀 하겠지만…… 11월 말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CG 작업이 오래 걸리는데, 이번 촬영에선 CG는 거의 안 쓰니까요.”
세트장이나 촬영장은 서준이 출연을 결정한 이후인 작년부터 쭉 만들고 있었고, 연출도 작년부터 쭉 고민해왔다. 음악도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고.
[오버 더 레인보우2] 촬영은 배우만 있으면 바로 촬영을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가 끝난 상황이었다.
사라 로트 감독의 말에 넬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어떻게 되나 했는데…….”
사라 로트 감독과 에밀리 조감독이 웃고 말았다. 작년 한국에 갔던 넬슨의 이야기는 두 사람도 잘 알고 있었다.
“설마 그게 군대 문제였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는 조금 알고 있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어요.”
에밀리 조감독의 말에 사라 로트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빨리 간 만큼 제시간에 맞춰서 제대해서 다행이죠.”
서준이 몇 달만 더 늦게 입대했으면 10주년 기념이라는 말은 붙이지 못할 뻔했다. 넬슨도 같은 생각이었다.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른다.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웨일 스튜디오의 직원이었다.
“서준 리 배우, 공항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 * *
“여기가 뉴욕……!”
해외여행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최태우는 한국과는 다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풍경에 나지막한 탄성을 멈추지 못했다. 그 모습에 뒷좌석에 앉은 서준과 안다호, 운전석에 앉은 킹스 에이전시 직원이 작게 웃었다.
공항을 나와 마중 나온 차에 짐을 옮기고 올라탈 때까지만 해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는데, 긴장이 풀리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앗, 죄송합니다.”
작은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린 최태우가 민망한 듯 말했다. 자신은 지금 놀러 온 게 아니라 일하러 온 거였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서준의 말에도 죄송하다는 듯한 최태우의 표정에 안다호 이사가 화제를 돌렸다.
“태우 씨. 웨일 스튜디오에 도착했다고 연락해 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휴대폰을 꺼내는 최태우에게서 시선을 돌린 안다호가 서준에게 말했다.
“오늘 내일은 쉬고, 모레 감독님이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거야.”
“모레요? 내일도 괜찮은데…….”
“그래도 좀 쉬어야지. 8월 내내 촬영만 할 거잖아.”
물론, 촬영 시간과 휴식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는 할리우드인 만큼 휴식 시간이 있긴 하겠지만, 안다호가 걱정하는 건 서준이었다.
“오랜만의 촬영이니까.”
재작년 11월 [화] 촬영 이후, 거의 2년 만의 촬영이었다.
“신나서 에너지를 다 써버릴까 봐 그러지.”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폭주해 버릴까 봐 그렇다.
음.
하긴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아니, 한국에서도, 점점 촬영 날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들뜨긴 했다. 몇 번이고 대본을 보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고, 가끔 히히 저도 모르게 웃기도 하고.
자신을 돌아본 서준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네. 진정할게요.”
안다호가 작게 웃었다.
“내일 배우들하고 만나는 건 어때?”
“폴이랑 캐서린이요?”
“그 두 사람도 좋고. 마침 에반 씨가 뉴욕에 있다고 들었거든.”
오.
연락은 많이 했지만 만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럴까? 하던 서준이 웃고 말았다.
“어쩐지 리첼도 올 것 같네요.”
“그러네.”
‘왜 나만 빼놓고 만나?!’ 하고 단번에 날아올 것 같았다.
서준을 따라 웃던 안다호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수빈이랑 만나도 괜찮을 거고. 제이슨 무어 씨랑 벤자민 교수님도 함께 말이야.”
“며칠 후면 결선인데, 연습에 방해되지 않을까요?”
“식사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그레이스랑 만나도 괜찮고.”
생각보다 뉴욕에 많은 지인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면 아침 점심 저녁 돌아가면서 만나야겠네요.”
서준의 농담에 안다호가 작게 웃었다.
* * *
촬영하는 동안 머물 호텔에 도착했다.
작년부터 기다려왔던 촬영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저절로 함박웃음이 지어지는 얼굴을 진정시키며 서준은 자신의 캐리어를 들고 방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발걸음이 경쾌하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안다호가 최태우를 불렀다.
“태우 씨.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 역시 아까 너무 들떴나!’
제 발 저린 최태우가 얼른 안다호 이사를 뒤따라갔다.
서준의 방 바로 옆, 안다호 이사의 방.
“저도 확인하긴 하겠지만…….”
하고 말문을 여는 안다호 이사는 평소보다 진중한 얼굴이었다. 저절로 긴장감이 들었다.
“촬영하는 동안 서준이 좀 잘 살펴봐 주세요. 태우 씨.”
“……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해할 수 없는 안다호의 말에 최태우가 눈을 끔벅였다.
안다호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서준이가 연기하는 모습 본 적 있죠?”
“네. 회사에서 몇 번…….”
“어떻던가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최태우는 안다호의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정말 잘하던데요. 옷도 일상복이고 배경도 어디에나 있을 법한 연습실인데, 서준이가 연기하면 주변까지 변해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몰입도 대단해서 캐릭터 그 자체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메소드 연기처럼 말입니다.”
그래.
안다호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그게 마음에 걸려서 말입니다.”
“그거라면…….”
최태우는 자신이 했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메소드 연기 말입니까?”
“네.”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태우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서준이는 지금까지 계속 그런 식으로 연기를 해온 거 아닌가요?”
그런데 갑자기 그게 문제가 된다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번에는 준비 기간이 보통 때보다 많이 길어졌습니다. 보통 서준이의 촬영 전 준비 기간은 몇 달 정도로 1년이 넘지 않는데, 이번에는 군대 때문에 1년이 넘게 되었죠.”
최태우가 안다호 이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군 생활도 있으니 온전히 캐릭터 분석이나 몰입하는 데만 집중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레이 바이니의 입장에서 세 곡이나 작곡을 한 시간과 휴가 나올 때마다 연기 연습에 몰입한 시간을 무시할 수는 없겠죠.”
서준이라면 출연을 결정하고 대본을 받았을 때부터 계속 ‘그레이 바이니’를 생각했을 거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순도 100%로 몰입했을 거고.
안다호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번 작품은 페이크 다큐멘터리입니다. 그레이 바이니의 일상을 그대로 담은. 현실과 영화를 혼동하기 딱 좋은 장르죠.”
안다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평소라면 저도 서준이의 능력을 믿겠지만…… 아무래도 촬영이 거의 2년 만이다 보니 폭주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긴 캐릭터 분석 시간과 현실을 그대로 담을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장르, 그리고 오랜만에 촬영하는 배우의 어마어마한 열정까지.
“딱 문제가 일어나기 좋은 조건이죠.”
“문제라면……?”
“캐릭터와 자신을 혼동하는 것.”
최태우의 눈이 커졌다. 저절로 메소드 연기로 캐릭터에 몰입했다가 불행한 일들을 겪은 배우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같은 생각을 하던 안다호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레이 바이니가 희대의 살인마나 사이코패스 같은 캐릭터가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혼동할 수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비슷한 점이 있다면 오히려 몰입하기 쉬울 테니까 말이다.
“어…… 그럼 영화를 안 찍는 게 좋지 않나요?”
“문제는 제가 이런 걱정을 하게 된 게 최근이라는 겁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통 때와 다름없는 촬영이라고 생각했지만, 말년 휴가 때부터 오늘까지, 계속 들떠 있는 서준을 보니, 갑자기 그런 걱정이 든 안다호였다.
그래서 일부러 ‘이서준’의 친구들을 만나보라고도 했다.
“서준이에게 말해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겠죠. 그 말대로 서준이는 잘할 겁니다.”
안다호도 알고 있었다.
이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서준은 이번 촬영도 언제나처럼 잘할 터였다.
하지만…….
“하지만 매니저라는 일이 만약의 경우까지 생각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러니 저도 확인해 보겠지만 태우 씨도 잘 살펴봐 주셨으면 합니다.”
안다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태우가 잠시 멈칫했다.
“그런데 어떻게 문제가 생긴 걸 알죠?”
“서준이는 촬영이 끝나면 곧바로 몰입에서 깨어납니다. 컷을 외치면 서준이로 돌아오는지 아니면…….”
안다호가 걱정과 한숨을 삼키며 조금 느릿하게 말했다.
“계속 그레이 바이니로 있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그리고…… 시간도 체크하는 게 좋겠군요.”
몰입에서 깨어나는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문제가 커진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최태우가 단단히 각오한 얼굴로 대답했다.
* * *
안다호의 걱정을 알았다면 ‘아니, 왜 그런 걱정을 해요?’ 하고 의아해하면서도 ‘……내가 그 정도로 신이 났었나?’ 하고 생각했을 서준은 짐 정리를 끝낸 후 에반 블록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일은 점심때 그레이스를 만나고, 수빈이랑 제이슨이랑 벤자민 교수님하고 저녁을 먹을 예정이에요. 에반도 올래요?”
-아니. 괜찮아.
저녁 식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이름에 에반 블록이 웃으며 말했다.
-딱 봐도 바이올린 이야기만 할 것 같은데, 내가 바이올린은 전혀 몰라서 말이야.
“뭐어. 그건 그래요.”
서준이 생각하기에도 저녁 식사 자리는 바이올린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할 것 같았다.
-그것보다 촬영장에서 보는 건 어때?
“촬영장요? 제 촬영장요?”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잠깐 놀러 가는 건 괜찮지 않을까? 사라 감독님하고도 아는 사이고.
서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론 허락을 받아야 하긴 하겠지만, 보통 배우도 아니고 모회사인 마린사의 시리즈 영화의 주연이었던 배우가 아닌가.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그럼 연락은 내가 할게.
“알았어요.”
-오랜만에 준이 촬영하는 모습 볼 수 있겠네. 그러고 보니 준도 촬영은 오랜만이지?
“네. 거의 2년 다 돼가요. 빨리 촬영했으면 좋겠어요. 얼른 캐서린이란 폴이랑 맞춰보고 싶고, 카메라에 어떻게 나오는지도 보고 싶고. 엄청 기대돼요. 군대에서 영화 볼 때마다 얼마나 촬영하고 싶었는지 몰라요. 아, 아까 다호 형이 그러는데 제가 엄청 들떠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촬영 들어가면 에너지 다 써버릴 것 같대요.”
-그런 것 같네. 여기까지 신난 게 느껴져.
휴대폰 건너에서도 느껴지는 서준의 들뜸에 에반 블록이 웃음을 터뜨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