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12화
미국, LA.
따뜻하고 즐거운 저녁 식사를 끝냈을 시간.
마찬가지로 웃음이 가득한 저녁 식사를 끝낸 벤자민 모튼 교수의 저택에서는 한창 바이올린 연주가 들려오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벤자민 교수의 애제자, 제이슨 무어의 연주였겠지만 요즘은 다른 바이올리니스트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로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김수빈이었다.
---!
수빈이의 오른손에 들린 활이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이 현 저 현을 넘나들었다.
기다란 활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네 개의 현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니, 바로 위아래에 붙어 있는 전혀 다른 소리를 내는 현들과 한 번쯤 겹쳐질 법도 했지만, 그런 잡음 없이 오직 의도한 한 음만 깔끔하고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게다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선율에 자신의 감정을 듬뿍 담아내는 연주는, 아직 초등학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실력이었다.
---!
상기된 얼굴의 수빈이는 저번에 지적받았던 부분인 마지막 음까지 어물쩍 넘기지 않고 확실히 마무리한 후, 현에서 활을 떼어냈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소파에 앉아있는 두 명의 청중을 바라보았다.
소파에 앉아 수빈이의 바이올린 연주를 감상하고 있던 벤자민 교수와 제이슨 무어가 짝짝 박수를 보냈다. 수빈이가 헤헤 웃으며 바이올린을 내렸다.
“연주 어땠어요?”
“잘했단다. 빈 너다운 개성적인 연주였어.”
벤자민 교수는 웃으며 말하자, 수빈이가 활짝 웃었다.
“중간에 좀 틀렸지만.”
“에이.”
픽 웃는 제이슨 무어와 입을 삐죽이는 김수빈의 모습에 벤자민 교수가 빙그레 웃었다.
작년, 김수빈의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세 사람이 함께 보내고 올해는 요 며칠 같이 지낸 김수빈과 제이슨 무어는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그전에도 영상통화로 많이 연락했지만.’
벤자민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콩쿠르, 이제 한 달 반 정도 남았지?”
“네!”
콩쿠르.
한 달 후, 뉴욕에서 열리는 뉴욕 현악기 콩쿠르에 수빈이가 나가게 되었다.
3월 1차 비디오 예선을 통과하고 7월 2차 본선, 8월 3차 결승을 치를 때까지 벤자민 교수의 저택에 머물며 벤자민 교수에게 배우기로 한 김수빈이었다.
“저 상 받을 수 있을까요?”
김수빈의 물음에 벤자민 교수와 제이슨 무어가 생각에 잠겼다.
뉴욕 현악기 콩쿠르의 지원 나이는 카테고리1(13세 이하), 카테고리2(18세 이하), 카테고리3(19세 이상)으로 나뉜다.
김수빈의 나이라면 카테고리1에 지원해야 했지만, 이번에는 카데고리2, 한국이라면 중고등학생들이 출전할 부문에 나가기로 했다.
중고등학생들 사이에 끼어 있는 초등학생이라니.
그것도 보통 중고등학생들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재능 있는 학생들이 모인 것이었다.
‘1차 예선을 통과한 걸 보면 가능성 있긴 하지만…….’
“왜 상 받고 싶어?”
제이슨의 물음에 김수빈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카테고리1에 지원하지 그랬어.”
“그건 너무…….”
“쉬울 것 같다고?”
헤헤.
김수빈이 웃음으로 대답을 피했다.
그 모습에 벤자민 교수와 제이슨 무어가 웃고 말았다. 두 사람이 아주 객관적으로 봐도 또래 중 김수빈보다 잘하는 아이는 없었다.
‘카테고리1에 지원했다면 분명 상을 받았겠지.’
콩쿠르에서 받는 상.
물론 중요하다.
수상 이력이 바이올리니스트의 실력을 전부 대변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마에스트로들과 청중들이 ‘이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듣고 싶다.’고 생각하게 할 기준이 되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벤자민 모튼 교수와 제이슨 무어는 김수빈이 좀 더 넓은 세계를 보기를 바랐다. 그리고 벌써부터 상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했다.
벤자민 교수가 인자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빈. 상을 받아도 좋겠지만,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게 더 좋지 않니? 네 연주를 들을 사람들이 가득 앉아 있는 무대 말이야.”
무대. 나의 연주. 듣는 사람들.
가슴을 콩닥거리게 만드는 단어들에 김수빈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맞아요! 그게 더 좋아요!”
“다른 실력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연주도 많이 들을 수 있고.”
제이슨 무어의 말에 김수빈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아요!”
“이번 콩쿠르에서는 그걸 경험해 보자꾸나.”
“네!”
무대와 바이올린 연주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는 김수빈을 보며 벤자민 교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제이슨 무어가 픽 웃었다. 혈연이 아니라고 들었는데도, 저절로 누군가가 생각나는 아이였다.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에, 화면을 본 벤자민 교수가 웃고 말았다. 자기 이야기하는 건 어떻게 알고…….
“준이구나.”
“형이요?!”
벤자민 교수의 한마디에 수빈이가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얼른 벤자민 교수 옆으로 달려갔고, 제이슨 무어도 눈을 빛내며 몸을 기울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흐릿하게 들려오는 서준의 목소리에 김수빈이 눈을 반짝이며 벤자민 교수를 바라보았다. 벤자민 교수가 웃으며 스피커폰으로 바꿨다.
“그래. 준.”
-잘 지내고 계세요?
“나야 편하게 지내고 있지. 준 너야말로 이제 전역 얼마 안 남았다고 들었는데, 어디 다친 곳은 없고?”
벤자민 교수와 제이슨 무어는 입대 전 이야기를 들어, 이번에 밝혀졌을 때 놀라지 않았다. 군대라는 말에 걱정은 많이 했지만 말이다.
-네. 건강해요. 7월 14일에 전역이고 지금은 휴가 나왔어요.
“휴가……!”
휴가 나올 때마다 서준을 만났던 수빈이가 안타까운 듯 외쳤다. 하필 자신이 미국에 있을 때! 그 절망적인 표정에 벤자민 교수와 제이슨 무어가 웃고 말았다.
-수빈이도 있어요?
“그래. 제이슨도 있단다.”
-수빈아, 재밌게 지내고 있어?
“응응! 완전 재밌어! 교수님도 제이슨도 엄청 좋아!”
-다행이네. 제이슨도 잘 지내고 있죠?
“그래.”
잠시 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서준이 본론을 이야기했다.
-이번에 들어갈 곡, 작곡이 끝나서요. 아직 한 곡뿐인 데다가 정식 녹음이 아니고 샘플이지만요.
휴대폰 건너 서준이 웃었다.
여느 때처럼 밝은 목소리에 벤자민 교수와 제이슨 무어, 김수빈이 따라 미소를 지었다.
-들어보시고 어떠신지 이야기해 주세요.
“나도 해도 돼? 서준이 형?”
-그럼 더 좋지! 제이슨도 부탁할게요.
“그래. 냉정하게 평가해 주지.”
-하하. 고마워요.
짧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준이 말했다.
-이제 점심을 먹어야 해서 끊어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 다시 통화해요, 교수님. 아, 수빈아. 8월 촬영이라서 결승 때 갈 수 있을 것 같아.
“와아아!”
서준이 온다는 소리에 수빈이가 두 팔을 번쩍 들며 기뻐할 때, 벤자민 교수가 물었다.
“콩쿠르는 뉴욕에서 열리는데 괜찮겠니?”
-네. 첫 촬영이 뉴욕이라서요. 그럼 그때 봬요. 교수님. 제이슨.
“그래.”
통화가 끝날 때까지 만세 하며 기쁨을 주체 못 하는 김수빈을 보며 제이슨이 말했다.
“너, 2차 본선 통과 해야 결승이야.”
“앗! 그랬지!”
아직 7월 본선이 남아 있다는 걸 깨달은 김수빈이 눈을 빛냈다.
“열심히 연습해서 갈 거예요! 결승!”
의욕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수빈이를 보며 웃던 벤자민 교수가 휴대폰 화면을 눌러 서준에게서 온 파일을 열었다.
>서준: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2 : Good morning)
“제목은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2’고 부제는 ‘Good morning’이구나.”
“……왠지 아침에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서준이 작곡한 곡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아는 제이슨 무어가 중얼거리자, 벤자민 교수가 농담처럼 말했다.
“그럼 아침에 들을까?”
“아뇨.”
“아니요! 지금 들어요!”
단번에 거부하는 제이슨 무어와 김수빈이에 벤자민 교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새로운 바이올린 곡을 내일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들을 정도로, (자신을 포함하여) 세 명의 바이올리니스트는 인내심이 크지 않았다.
“그럼 들어보자꾸나.”
능숙하게 휴대폰을 조작해, 음원 파일을 거실에 설치된 최고급 스피커와 연결한 벤자민 교수의 말에 제이슨 무어와 김수빈이 소파에 바로 앉았다.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2 : Good morning]
잠깐의 고요가 지나가고.
곧, 잠을 깨우는 선율이 들렸다.
귀와 정신을 시끄럽게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푹 잠을 자고 난 후, 따사로운 햇빛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연주였다. 여기서 저절로 눈을 뜨는 사람도 있을 터였고 아니면, 이 아늑함이 너무 마음에 들어 포근한 이불 속에서 ‘조금만 더……’ 하고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 아침이다.
일어날 시간이었다.
어느새 눈을 감고 있던 세 바이올리니스트가 눈과 손가락을 움찔 떨었다. 그 누구보다도 많이, 그리고 자주 ‘서준’의 연주를 들었던 세 사람은 알 수 있었다. 이건 서준의 연주가 아니었다.
과거의 느낌은 희미하고 한층 더 성숙해진 선율이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레이 바이니…….”
거실을 가득 채운 음악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그러나 세 사람에게는 충분히 들릴 정도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이슨이 읊조렸다.
그와 동시에, [오버 더 레인보우]가 인생 영화인 세 바이올리니스트의 머릿속에 저절로 훌쩍 자란 그레이 바이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훌쩍 자란 ‘그레이 바이니’는 현을 짚은 왼손과 활을 잡은 오른손을 조금 빠르게 움직였다. 잔잔하고 평온하던 연주가 조금씩 밝아졌다.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밝아지는 듯한 선율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사랑하는 이가 작게 웃으며 듣는 이를 가볍게 흔들어 깨우는 듯한 아주 다정한 연주였다.
이러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듣는 이마저 부스스 웃으며 일어나게 만드는 연주가 이어졌다.
마음까지 따스하게 만드는 밝은 선율은 이내, ‘그레이 바이니’의 빠른 손짓에 따라 경쾌해졌다.
몸 안을 맴돌던 잠기운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듯, 정신을 번쩍 차리게 만드는 상쾌함이었다.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보내지……’ 하는 걱정을 일시에 날려 버리고 행복과 즐거움이 가득할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역시 아침에 들었어야 했다.’ 하고 제이슨 무어는 생각했다.
벤자민 교수도 훌쩍 날아가 버린 잠기운에 난감해하면서도 웃고 말았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기운 넘치는 수빈이는 선율에 맞춰 몸을 가볍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좋다.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좋았다.
세 음악가 모두 이 선율이 끊기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그 어떤 곡에도 끝은 있는 법.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아침 시간을 보내는 듯 경쾌하게 이어지던 연주는 오늘 어떤 하루를 보낼지, 기대감에 부푼 듯한 듣는 이가 ‘좋아! 오늘도 즐겁게 보내자!’ 하고 외치는 것처럼 강렬하고 씩씩한 선율로 끝이 났다.
따단!
하고 끝나버린 곡과 함께 세 사람의 번쩍 눈이 떠졌다.
여운을 즐기고 싶었지만, 씩씩하고 힘찬 곡은 ‘자! 이제 출발하자!’라고 말하는 듯 아주 깔끔하게 끝났다.
“하하.”
온몸에 힘이 가득 찬 것처럼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굿모닝!
오늘 하루를 아주 멋지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
“……는데 벌써 밤이구나.”
조금 전, 음악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햇볕이 비치는 아침인 것만 같았는데, 창밖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역시 아침에 들을 걸 그랬습니다.”
허허롭게 웃는 스승에 제이슨 무어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내일까지 기다렸으면 밤새 궁금해서 잠도 못 잤을 거다.
“내일 아침에도 들으면 되죠! 지금도 이렇게 좋은데, 아침에 들으면 더 좋을 것 같지 않아요? 교수님, 제이슨?”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김수빈에 벤자민 교수와 제이슨 무어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려면 얼른 자야겠는걸.”
“미리 시간 설정을 해둘까요. 스승님?”
“그거 좋구나.”
곡을 가장 잘 감상하기 위해서 잠을 잔다니.
웃긴 일이었지만 세 사람은 진지했다.
“운동을 하면 피곤해서 잠이 오지 않겠니?”
“그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우유! 따뜻한 우유도 마셔요!”
게다가 날아가 버린 잠기운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열심히 회의도 했다.
이런저런 시도 끝에 소풍 가기 전날 밤처럼 조금 뒤척거리기는 했지만, 세 사람 모두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세 사람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2 : Good morning]를 들으며 아주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