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10화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과거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꿈꾸던 아이들이 훌쩍 자라 현실을 알아가며 타협해 나가는 그런 긴 시간.
[오버 더 레인보우2]는 그런 긴 시간이 지난 후의 그레이 바이니와 친구들의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그레이 바이니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여전히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을까.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지지해 준 사람들을 위해 월드 투어를 떠났을까.
‘아니면…….’
현실과 타협하여 바이올린에서 손을 떼고 새로운 일을 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 일은 그레이 바이니의 새로운 꿈인가, 현실의 고난에 떠밀려 눈물을 머금고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인가.
사람의 인생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어 예상하기 어렵지만,
‘이건 영화니까.’
이미 대본으로 십여 년 후의 그레이 바이니의 이야기가 만들어져 있었다.
비록 영화 속 캐릭터일 뿐이지만, 그레이 바이니를 응원하는 서준에게(그리고 많은 팬들에게) 다행스럽게도 [오버 더 레인보우1]과 이어지는 [오버 더 레인보우2]에서도 그레이 바이니는 여전히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주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세계 여기저기서 초청을 받아 여러 사람들에게 멋진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런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를 촬영하는 다큐멘터리가 바로 [오버 더 레인보우2]였다.
‘그러니까 연주도 ‘그레이’가 해야겠지.’
시작하라는 엔지니어의 손짓을 본 서준, 아니, ‘이십 대의 그레이 바이니’는 바이올린 현에 활을 올리고 첫 음을 길게 내렸다. 잠결에도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것만 같은 가느다랗고 잔잔한, 부드러운 음으로 연주가 시작되었다.
* * *
“……와…….”
“……미친…….”
녹음실 유리 벽 건너.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있던 블루문과 엔지니어, 최태우가 저도 모르게 나지막이 감탄을 내뱉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서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서준이 맞나?
블루문과 엔지니어는 매일같이 음악을 듣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최태우도 예전 아이돌그룹의 매니저로서 일한 적이 있어 듣는 귀는 확실했다.
저기 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이는 서준이 아닌 것 같았다.
조금 전, 이들의 놀라게 한 즉흥곡과는 연주 스타일도, 연주하고 있는 분위기도 달랐다.
“……연기?”
“그런 것 같은데…….”
바이올린 소리에 방해되지 않도록, 서준과 동갑인 박이든과 정은성이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미리내 예고에서 서준과 함께 연기과 합동 수업을 들었던 경험이 있었다.
!
그제야 나머지 사람들도 서준이 누군가를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소라면 달라진 분위기에 단박에 연기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테지만.
‘……설마 연주 스타일까지 변할 줄은 몰랐지.’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서준의 연기력은 알고 있지만 역시 볼 때마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서준이 연기하는 건 누구일까.
처음 보는 사람인 듯하지만, 어쩐지 익숙한 느낌.
블루문과 엔지니어, 최태우는 [오버 더 레인보우2]의 이십 대 그레이 바이니의 연주를 몰랐다. 그래서 지금의 연주가 낯설었다.
하지만 지금 흘러나오는 연주의 기초가 되는 [오버 더 레인보우1]의 십 대 그레이 바이니의 연주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낯섦 속 익숙함, 바이올린과 어디서 본 것 같은 온오프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증거물들을 추적해 그 정체를 밝혀내려고 했지만, 단번에 떠올리지 못했다. 방해하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곡 진짜 좋네.”
바이올린 연주가 너무 좋아서 도저히 생각이 이어지질 않았다.
어느새 서준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무엇인가, 하는 추리는 내던져 버리고 눈을 감고 연주를 감상하고 있는 블루문과 엔지니어, 최태우였다. 사무실에서 먼저 들었던 안다호도 미소 띤 얼굴로 연주를 감상했다.
---!
강렬하고 씩씩한 선율로 연주가 끝났다.
“후우.”
서준이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스트레칭하듯 고개와 손목을 이쪽저쪽 돌리며 풀고 있을 때, 유리 벽 건너에 있던 블루문 멤버들이 상기된 얼굴로 짝짝짝, 두 손이 안 보일 정도로 박수를 치며 무어라 무어라 외쳐댔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입 모양은 읽을 수 있었다. 대충 대단하다!, 미쳤다! 그 곡 우리 줘!(?) 등의 내용이었다.
엔지니어와 최태우도 비슷하게 감동받은 얼굴로 연신 박수를 치고 있었다. 엄청난 공연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안다호도 웃으며 가볍게 박수를 치다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서준아. 녹음 잘 된 것 같은데, 이걸로 보낼까?”
-한번 들어보고 괜찮으면요.
서준의 말에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엔지니어가 곡을 재생했다.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 2]에 귀를 기울인 블루문 멤버들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직접 연주한 게 더 좋네.”
“그러게요. 그래도 이것도 좋아요.”
왠지 상쾌한 아침이 떠오르는 곡이었다.
“근데 어디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는데……아, 곡이 아니라 분위기요.”
“그쵸?”
엔지니어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하자, 블루문 멤버들과 최태우도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생각에 잠겼다.
“아……!”
다들 ‘뭐랑 비슷하더라……’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최태우가 무언가 알아차린 듯 탄성을 내뱉었다. 다들 최태우를 바라보았다. 쏠리는 시선에 당황하던 최태우가 입을 열었다.
“그, 그게 그레이 바이니가 생각나서 말입니다. 오버 더 레인보우의.”
……아아!
그 말에 단번에 모든 게 이어졌다.
“맞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바이올린에 서준이면, 그레이 바이니뿐인데 말이야.”
“연주 스타일 변화도 버스킹 영상으로 봤었고.”
“온오프도 그렇죠.”
예전에 너튜브에 업로드했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처럼, 개인적으로 작곡한 곡을 녹음할 줄 알았지, [오버 더 레인보우]라니…… 10년 전의 작품이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레이 바이니라니까 단번에 알겠네.”
엔지니어의 말에 다들 조금 전 연주하던 서준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 만에 만난 친구를 살펴보다가 옛날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근데 갑자기 그레이로 녹음하는 걸까요?”
정은성의 의문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안다호 이사에게 향했다. 그 시선에 안다호가 웃으며 말했다.
“비밀인 거 알지?”
“옙!”
블루문 멤버들은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고 엔지니어와 최태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버 더 레인보우 속편을 준비 중이야. 지금 이 곡도 영화에 삽입될 예정이고.”
“……헐!”
[오버 더 레인보우]의 속편이라니!
음악 영화 시리즈물은 거의 없어 상상도 못 했다.
다들 입을 틀어막고 놀라는 사이, 곡이 끝났다. 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호 형. 녹음 한 번 더 할게요.
“그래. 알았어.”
그 말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숨도 쉬지 않고 놀라고 있던 엔지니어가 반사적으로 한 손을 내려 녹음을 준비했다.
역시, 프로다웠다.
* * *
녹음이 끝났다.
휴식 시간이 끝난 블루문은 두 번째 녹음 중에 1 녹음실로 돌아갔다. 녹음실에 있던 프로듀서부터 매니저까지 미어캣처럼 머리를 들고 눈을 번쩍이며 블루문을 바라보았다.
“이서준 배우랑 뭐 했어? 녹음실에서 오는 것 같던데?”
“비밀이래요.”
“에이, 우리 사이에 비밀은……”
“안 이사님이.”
“철저하게 지켜야지. 암. 녹음 시작합시다아!”
짝짝! 박수를 치는 프로듀서에 블루문 멤버들이 킥킥 웃었다.
블루문 멤버들이 녹음을 하는 사이, 서준과 안다호는 다시 이사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저…… 저도 말입니까?’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최태우도 함께였다.
“녹음한 거 바로 보낼 거에요, 다호 형?”
“따로 편집할 건 없지 않아? 영화에 들어가는 음원도 아니고 샘플이잖아. 그리고 녹음도 잘 됐고.”
“그건 그렇죠.”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했다.
“아, 벤자민 교수님께는 제가 보낼게요.”
같은 영화에 삽입될 곡이니, 이질감이 생기지 않도록 적당히 톤을 맞춰야 했다.
“그래. 알았어.”
서준과 안다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최태우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사실이라니……
점점 10층에 가까워지는 붉은 숫자에 어쩐지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2년 차 직원이 오기엔 이르지 않나 싶었다.
당장에라도 버튼을 눌러 내리고 싶은 8층, 9층을 지나 10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안다호 이사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가시죠. 최 매니저님.”
“아! 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서준과 안다호가 익숙하게 이사실로 향했고, 최태우가 우물쭈물하며 그 뒤를 따랐다. 눈알이 저절로 뱅그르르 돌아 10층을 둘러보고 있었다. 가수팀 김상진 이사님의 사무실도 보였다.
‘사장실도 여기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손에 땀이 찼다. 최태우는 얼른 서준과 안다호 이사님의 뒤를 쫓았다.
안다호 이사의 사무실은 2년 동안 오며 가며 겪어본 체계적이고 일 잘하는 안다호 이사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모던하고 깔끔한 분위기였다.
그사이, 냉장고 앞에 선 안다호와 소파에 앉은 서준은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앉으라는 안다호의 말에 최태우는 조심스럽게 서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마실 것 좀 줄까?”
“전 오렌지 주스요.”
“좀 있다 점심 먹잖아. 주스는 밥 먹고 먹어야지. 밥맛 없어져.”
그 다정하고 편안한 어투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평소 보아왔던 안다호 이사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뭐, 안 이사님을 만난 게 드물긴 하지만.’
팀장도 아니고 1팀 직원도 아니니까.
하여튼, 가끔 마주칠 때마다 느꼈던 차분하고 냉철한, 프로페셜함과는 거리가 먼 어투인 건 확실했다.
하지만 이서준 배우는 익숙한 듯 웃으며 말했다.
“형. 저 이제 스물두 살인데요.”
“내 눈엔 아직도 열두 살로 보여. 물 마시자.”
“아니, 그럼 왜 물어본 거예요?”
“그냥?”
투닥거리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배우와 매니저의 유대감이 조금 부럽게 느껴졌다. 자신은 언제 저렇게 이야기를 나눌 배우가 생길까, 싶어 최태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서준을 보며 웃던 안다호가 최태우를 바라보았다. 소파에 엉거주춤 앉아있던 최태우가 일어날 듯 말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최 매니저님은 어떤 걸로? 커피도 있습니다.”
“아, 저도 물 주십시오.”
최태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안다호가 물 세 잔을 들고 서준의 옆에 앉았다. 서준 앞에 하나를 놓고 자신의 앞에 하나를 놓아두고 최태우의 앞에도 잔을 놓으려다가,
“아.”
하고 다시 가져갔다.
……어?
어정쩡한 모습으로 두 손을 뻗어 잔을 받으려던 최태우가 멀어지는 잔에 그대로 멈추었다.
“하하. 물 마시면서 들으시면 사레들리실 것 같아서요.”
“……네?”
안다호의 말에 최태우가 눈을 끔벅였다.
“일단 앉으세요.”
“아. 네네.”
최태우가 엉거주춤했던 몸을 바로 했다.
그런 최태우를 바라보고 있던 안다호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그러나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금 이르지만, 오늘 최 매니저님의 담당 배우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 예!”
어리둥절해하던 최태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담당 배우라니!
이제 자신에게도 ‘내 배우’가 생기는 거였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어떤 배우일까, 어떤 작품을 했을까. 아니, 신인이라도 괜찮았다. 앞으로 같이 필모그래피를 채워나가는 재미가 있을 거다.
처음 만나면 인사를 나누고 좋아하는 작품이나 장르를 물어봐야겠다. 어울리는 배역 이미지를 찾아서 권유도 하고, 이미지 변신을 하고 싶다고 하면 어울리는 배역을 추천하고, 소속사와 의견이 맞지 않으면 나라도 편이 되어 주어야지.
최태우는 안다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여기 있는 이서준 배우입니다.”
……?
안다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최태우는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들이마시던 숨도 그대로 기도에서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그대로 굳어버린 최태우를 보며 안다호는 다시 한번 말했다. 많은 감정이 담긴 묵직한 목소리였다.
“앞으로 최태우 매니저는 이서준 배우를 담당하시면 됩니다.”
……쿨럭!
그제야 이해한 최태우가 쿨럭쿨럭거리며 막혀 있던 숨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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