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91화
8월 15일.
광복절을 기념해 전국 곳곳에서 행사가 열렸다. TV에서도 광복절 기념 행사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잔잔한 음악이 들려왔다.
행사장에 간 사람들과 TV로 보고 있던 사람들이 눈을 감고 나라를 위해 노력하셨던 분들을 떠올리며 묵념했다. 대한민국 전체가 조용해진 것 같았다.
[다음은 기미독립선언문의 낭독이 있겠습니다.]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 앞에 나와 현대어로 풀이된 기미독립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차례차례로 광복절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푸른 하늘을 화려하게 날아다니는 에어쇼가 나오자, 부모님과 함께 TV를 보고 있던 송유정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나 만나러 가니?”
“응. 같이 영화 보기로 했어.”
“조심해서 다녀와.”
고개를 끄덕인 송유정은 밖으로 나와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군데군데 태극기를 게양한 집들이 보였다. 당연히 송유정의 집에도 깨끗한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송유정은 영화관으로 향했다. 평소에 자주 가던 영화관보다 조금 더 먼 곳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
도로를 따라 쭉 늘어선 가로등에 게양된 태극기들이 보였다.
* * *
<나 도착했는데, 어디야?
>임예나 : 티켓발권기 옆이야!
송유정이 고개를 쭉 빼 들었다.
티켓을 구매하려고 기계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 옆에 서 있는 친구, 임예나가 보였다.
“예나야! 여기!”
임예나도 송유정을 발견한 듯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송유정이 얼른 임예나에게 달려갔다. 두 사람은 와아아! 반가워하고 진정했다.
“티켓은 뽑았어?”
“아니. 아직.”
금손 임예나가 피켓팅을 통해 구해낸 독립영화 [화] 예매표. 그것도 두 자리다.
“아까 보니까 화는 전부 매진이더라.”
티켓발권기 앞에 선 임예나가 신중하게 예매번호를 누르며 말했다. 송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지. 우리가 매번 보던 곳은 아예 상영하지도 않잖아.”
갑작스러운 개봉 탓에 확보된 상영관이 많지 않은 탓이었다. 송유정과 임예나는 여기 영화관까지 와야 했던 이유기도 했다.
“상영관을 점점 늘린다고 했지만, 누가 스포하기 전에 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지!”
“근데 스포할 만한 게 있을까? 서준이가 출연한 게 가장 큰 반전이잖아.”
“후기 보니까 그것 말고도 되게 큰 반전이 있대.”
“그래?”
티켓을 뽑은 임예나와 송유정은 [화]의 포스터도 하나씩 들었다.
[화]의 포스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예고편에서 나왔던 서양식 저택.
나머지 하나는 누군가의 방.
활짝 열린 커튼 사이로 노을빛이 비친다. 그 빛이 비치는 곳에 테이블이 있다. 테이블의 오른쪽에는 캔버스와 서양식 붓, 물감이 짜인 팔레트가, 왼쪽에는 한지와 동양식 붓, 벼루가 놓여 있다.
“동서양의 조합인가. 그림 배우는 거 맞나 봐.”
“그러게.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다. 아, 이것 봐.”
포스터 아래, 출연한 배우들과 제작에 힘쓴 [화] 촬영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강원도에 간 32명의 이름과 강원도에 가진 않았지만 연주해 준 음악팀, 미술자문 마테오, 곳곳에 CG를 넣어준 CG팀 등의 이름도 함께.
“나 진이래.”
‘나 진(이서준)’이라고 적힌 부분에 송유정과 임예나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렇게 [화]의 포스터를 보면서 아직 보지도 않은 [화]를 몇 번이나 볼지 이야기하던 임예나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그것도 개봉한다고 하던데, 나 진 첫 팬 감독님 영화.”
“보려고?”
“응. 재밌대. 근데 그건 독립영화관에서 개봉한다고 하더라.”
“으음. 나도 볼까?”
“그리고 나중에 김종호 배우랑 이지석 배우 나오는 영화도 볼 건데, 같이 볼래?”
“개봉했어? 기사는 하나도 없던데?”
송유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아직 개봉은 안 했는데 촬영은 끝난 것 같더라. 며칠 전에 귀국했다고 기사 떴어.”
“아, 봤어. 엄청 떴었지.”
“김종호 배우랑 이지석 배우도 작품 보는 눈이 좋아. ONE도 재미있었잖아.”
“그래! 같이 보러 가자.”
그때, 입장을 알리는 영화관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3관! 제3관 화를 관람하실 분은 지금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들어가자.”
임예나와 송유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 말고도 [화]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 3관으로 향했다.
3관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기대감이 가득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들려왔다. 간간이 언급되는 ‘이서준’이라는 이름에 새싹, 송유정과 임예나의 어깨가 다 으쓱해졌다.
무더운 바깥과 달리, 에어컨 바람으로 딱 적당한 온도의 상영관이 이내 어두워지고 광고가 흘러나왔다.
[이 상영관의 비상구는…….]
버릇처럼 비상구 안내 장면을 확인하고 (어디선가 나 진의 이름이 들려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휴대폰 불빛들이 사라졌다. 송유정도 휴대폰을 끄고 가방에 넣었다.
마찬가지로 전원을 끈 휴대폰을 넣기 위해, 가방을 연 임예나의 얼굴에 씨익 미소가 생겨났다. 가방 안에 자리를 잡은 여행용 티슈가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었다.
모두 ‘꼭 휴지 챙겨 가세요ㅠㅠ’라고 후기를 쓰신 새싹(독립영화제에서 본 행운아) 덕분이었다.
‘유정이는 스포일러를 싫어하니까.’
그래서 눈물을 흘릴 만한 내용이라고 말은 안 했지만, 송유정의 것도 챙겨왔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임예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곧 개봉할 영화들의 예고편을 보여주던 스크린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보통 영화를 시작할 때는 제작사의 인트로 영상(포효하는 사자나 불꽃놀이 같은)이 붙게 마련인데, [화]는 독립영화라서 그런지 아무 영상도 보이지 않고 곧바로 시작되었다.
빛이 들어오는 스크린.
아직 눈이 내리진 않았지만, 차가움이 느껴지는 산들이 보였다.
[나는 영원히.]
담담한 내레이션이 귀에 쏙쏙 박혔다.
[그 몇 달 동안의 일을 잊지 못할 거다.]
서준이는 아니구나.
생각하며 송유정과 임예나, 관객들은 [화]에 집중했다.
* * *
가끔 웃음도 나오고 안쓰러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던 관객들의 분위기가 바뀐 것은 그때였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우리는 오늘,]
상영관의 공기가 멈춘 것 같았다.
학생 때 수업 시간이든, 취직 준비로 한국사를 공부할 때든.
방송에서든, 책에서든.
……오늘 광복절 기념행사에서도 나왔던.
한국인이라면 한 번은 봤을 문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송유정과 임예나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지고 심장이 쿵쿵쿵 빠르게 뛰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헐…… 미친……! 하고 호들갑을 떨며 옆에 앉은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편지를 읽는 무명 화가의 표정에 기쁨과 안도가 스며든다. 이씨 아저씨의 얼굴에도, 고성댁 아주머니의 얼굴에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느껴졌던 그 표정과 감정들이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엾던 도련님이, 유쾌한 이씨 아저씨가, 상냥한 고성댁이 전혀 다른 인물들처럼 느껴졌다.
세 사람이 민한을 밖으로 내보낸다.
“……이건 초안이고…….”
어찌 보면 서운하다고 생각했을 행동이었지만, 이 세 사람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는 송유정과 임예나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 이후, 서운한 표정을 짓는 민한과 그걸 알고도 말 못 하는 무명 화가의 모습에 안타까움이 쌓여갔다.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다 끝나면…… 다 끝나면 말해줄게요. 민한 형.”
그날이 오면.
역사를 아는 송유정과 임예나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 * *
비가 내리던 밤의 위기가 지나가고 그날이 오면 말해주기로 약속했으나, 실패를 알리는 편지로 흐지부지된 약속에 한숨 쉬고 있는 민한에게 은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낙담하는 민한의 눈에 찢어진 캔버스와 텅 빈 방 안이 보였다.
덜컥.
민한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이 죽지 않길 바랐다.
송유정과 임예나도 불안한 눈으로 터벅터벅 맨발로 걸어가는 무명 화가를 바라보았다. 이런 소재의 이야기는 그 끝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민한이 도련님을 발견하자 격렬하던 음악이 일순 사라졌다. 하지만 그걸 알아차린 관객은 없었다. 다들 멍하니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하얀 눈 위, 붉은 꽃이 보였다.
그리고 붉은 꽃잎을 맨발로 밟고 있는 새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바람에 두루마기가 펄럭이고, 마치 딴 세상 사람 같아 보이는 남자가, 하아, 하고 숨을 뱉었다.
무명 화가가 움직였다.
걸음걸음마다 꽃잎이 생겨나고 넓어졌다.
모두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볼품없이 쓰러져 있는 타버린 나무 기둥을 따라서 꽃들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풀샷일 때는 아름다운 장면이나, 가까이 다가가 눈을 짓밟고 있는 무명 화가를 보면 숨이 턱하고 막혔다.
[그건 꽃(花) 같기도 하며, 불(火)꽃 같기도 한 그림(畫)이었다.]
[가슴 속의 화(忿怒:분노)를 그대로 토해낸 것 같기도 했다.]
그 화의 이유를 알 것만 같아서 관객들까지 울컥, 몸에 힘을 주었다. 모든 걸 불태우고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은, 가슴을 절절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눈물이 맺혔지만 닦아냈다.
단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바삭-
부러 나뭇가지를 밟았다. 옅어져 가던 피가 다시 진해졌다. 무명 화가는 멈추지 않고 꽃을 그려 나갔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지나가고 그림이 완성되었다.
민한이 외친다.
무명 화가가 말한다.
“……여기에도 꽃이 피었어요…….”
털썩.
새하얀 눈 사이로 쓰러진 무명 화가의 옆얼굴이 보였다. 눈에 고인 눈물이 옆으로 흘러내렸다. 가련하고 슬프고 안타깝고 불쌍하기 짝이 없으나…… 희미한 미소가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무명 화가가 입고 있던 흰색 두루마기가 펄럭, 펼쳐졌다.
마치 붉은 꽃에 내려앉은 흰나비처럼 보였다.
* * *
언제부터 흘렀는지 모를 눈물로 송유정과 임예나의 얼굴이 흠뻑 젖어있었다.
무명 화가가 살았다는 걸 알았을 때도 눈물이 나왔고, 희망이 모두 죽은 눈빛을 할 때도 눈물이 나왔다.
민한이 모든 걸 알고 고맙다고 말할 때도, 두 사람이 같이 웃으며 울 때도. 건강해진 무명 화가가 떠날 때도. 하던 일……을 계속하겠다고 할 때도, 그림을 그리겠다고 할 때도 눈물이 나왔다.
민한이 무명 화가의 이름을 묻는 장면에서는 어디선가 끄윽끄윽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필시 울음을 참고 있는 것이리라. 송유정과 임예나도 같은 마음이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스크린이 어두워지며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묵직하고 느릿한 음악과 내레이션이 들려왔다.
[그러나]
[결국]
[그날은 왔다.]
주름진 손과 내레이션에 관객들은 시간의 흐름을 알아차렸다.
[8월.]
[한양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상영관의 모든 소리가 멈추었다.
다음 내레이션까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긴 것처럼 느껴졌다.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을 전해주던 편지와 암울한 시대 상황.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도련님의 편지였다.]
……!
살아 있어……!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송유정과 임예나는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나오는 의미심장한 내레이션까지, 단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집중하던 관객들은 들려오는 음악과 함께 올라가는 엔딩스크롤에 그제야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으허허헝……!”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리자, 송유정과 임예나도 소리를 내며 울었다. 눈물로 범벅된 두 얼굴이 마주쳤다. 웃긴데 영화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어 눈물이 계속 나왔다.
“……진짜 잘 만들었어……킁. 이래서 서준이가 찍었나 봐…….”
“그러니까…… 으헝…….”
‘나 진’의 이름과 함께, 엔딩스크롤에 [화] 촬영팀의 이름이 뜨고, 천천히 상영관이 밝아졌다.
“앞에서 휴지 나눠 드리겠습니다!”
관객들이 하나둘 영화관 직원에게서 휴지를 받고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송유정과 임예나는 여유가 생길 때까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아, 나 휴지 있어.”
엉망이 된 송유정의 얼굴에 임예나가 영화에 집중하느라 까맣게 잊어버린 여행용 휴지 두 개를 꺼냈다. 휴지 하나를 받아 든 송유정이 훌쩍거리며 말했다.
“고마워. 서준이 영화 보려면 휴지는 필수인가 봐.”
“그러게.”
그렇게 잠시 눈물을 닦으며 기다린 송유정과 임예나가 상영관을 나왔다.
출구로 가기 위해 앞사람을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밖으로 나가는 길이 꽉 막힌 듯 사람들이 멈춰 서 있었다.
“앞에서 사고라도 났나?”
송유정이 고개를 쭉 빼서 살펴보고 있는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임예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별일 아닌가 보네.”
그렇게 앞사람을 따라 이동하니 금세 출구가 가까워졌다.
후덥지근한 바깥바람을 느끼려던 찰나, 먼저 나간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송유정과 임예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발끝에서부터 전율이 느껴졌고, 심장이 꽈악 조이는 것 같았다. 목구멍이 불을 삼킨 것처럼 뜨거워졌다.
“……미쳤나봐……!”
길을 따라 태극기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마치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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