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90화
후덥지근한 8월 중순.
손님들로 가득한 고깃집은 테이블마다 각자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이 테이블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며칠 남았냐?”
“165일.”
킬킬거리는 친구들의 웃음소리에 유난히 짧은 머리의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소주를 들이켰다.
“그래도 많이 줄었네.”
“그러니까. 300일이 엊그제 같은데. 날짜가 훅훅 가지 않냐?”
“아니지. 군대에 있을 때랑 밖에 있을 때랑은 시계가 다르잖아. 저긴 X나 느리고 여긴 X나 빠르고.”
군필들이 와하하하 웃어댔다.
“그래도 이제 병장이면…… 아, 아니야?”
“이 새X 아직 상병임.”
“어휴, 고생이 많다.”
휴가 나오면 필수코스랄까.
전역한 친구들이 아직 군인인 남자를 놀려댔다.
“근데 여전히 때깔이 좋다?”
“난 진짜 구란 줄 알았는데…… 요즘도 밥 맛있게 나오냐?”
“컨디션만 보면 여기 있을 때보다 좋지 않아? 그냥 말뚝 박는 건 어때?”
“……죽을?”
남자가 젓가락 한 짝을 찌를 듯 들자, 친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밥 맛있고 잠 잘 자고 규칙적으로 생활해서 건강해지고 스트레스도 없…… 시X. 내가 말하고도 안 믿기네.”
“그러니까! 진짜 구라 아니냐고!”
“난 이 이야기 처음 들었을 때, 이 새X 미친 줄 알았다니까.”
“여튼, 그렇다고 해도 말뚝은 안 박는다. 이 새X들아!”
불판 위로 새로운 고기가 올라갔다. 뜨거운 열기와 에어컨 바람이 뒤섞였다. 시원한 소주와 맥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크으. 요새 성적 좋더라. 바르샤B!”
“어. 박지오 잘하던데?”
“2부 리그라서 승격은 못 할 테니까 바르샤로 가는 수밖에 없는데, 갈 수 있으려나?”
“못 갈 것 같은데.”
“가지! 박지오는!”
“월드컵 출전은 안 하려나?”
“걔 군대 면제 아니지?”
일상에서 축구로, 축구에서 다시 군대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 이등병 이야기해 봐. 요즘은 뭐 없고?”
“아, 그 경력직 같은 이등병?”
경력직이란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걘 어때? 지금 일병이지?”
“여전하지 뭐. 착하고 일 잘하고.”
남자가 이제 일병이 된 후임을 떠올렸다. 그러다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들이 의아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뭔데?”
“아니, 걔가 좀 희한한 일을 맡아서.”
“뭔 일?”
“관심병사 케어.”
남자의 말에 친구들이 눈을 끔벅였다.
“……X나 명복을 빌어주고 싶은 일이네. 걔…… 찍혔냐?”
“아니, 근데 그런 거 보통 일병한테 안 맡기지 않냐?”
“그러게?”
친구들의 반응에 남자가 웃었다.
이해한다. 보통 이렇게 들으면 비슷한 반응을 보일 거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남자가 기억을 떠올렸다.
“전에 말했듯이 얘가 진짜 잘생겼거든.”
“……그랬나?”
“몰라. 남자 잘생긴 걸 왜 기억해.”
“동의.”
불판 위 고기를 주워 먹으며 친구들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야기하지 말라고?”
“아니. 해. 해.”
“입 다물고 있음.”
“……여튼 걔가 X나 잘생겼어. 배우 해도 될 정도로. 근데 전에 내가 욕했던 것 같은데 그 병장 놈 있잖아.”
“오. 그건 기억나.”
“그러네. 오늘은 그 새X 욕 안 했네?”
“전역한 거 아님?”
“아직 안 했어.”
그럼 왜?
휴가 나와서 만나기만 하면 그 병장을 향해 쌍욕을 하던 남자가 오늘은 얌전했던 것을 떠올리며, 친구들이 나름 추측했다.
“말년이라 조심한다고 얌전해진 거 아니야?”
“……그런 정상적인 사고를 할 새X로는 안 보였는데?”
한 친구의 말에 다른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상쾌하다는 듯 웃었다.
“완전 얌전해졌거든. X나 조용해. 완전 천국이야.”
“오. 맞았네!”
“근데 말년 때문은 아님.”
“……틀렸네.”
“근데 그게 이등병이랑 무슨 상관이야?”
“그러게.”
“아. 이등병이 진짜 잘생겼거든.”
“시X. 벌써 3번이나 말했다고! X나 잘생긴 거 알았다고!!”
“그러니까 병장 그놈도 이렇게 반응했다는 거지.”
……오.
남자의 스토리텔링에 친구들이 감탄했다.
“걔가 익숙해질 때까지는 좀 참는 듯하더니,”
‘이야. 참을 줄도 알았어?’ 친구가 내뱉은 말에 남자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어느 날부터 갈궈대기 시작한 거야. 우리가 보는 데서 그 정도면 안 보는 데서는 얼마나 갈궜겠냐?”
“……제물이 생겨서 편해진 건가?”
“이 새X X나 나쁜 새끼네……!”
“아! 끝까지 들어보라고!”
친구들의 비난에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우리도 뭐라도 하려고 했는데, 행동하기도 전에 끝나버렸어.”
“……뭐?”
“이틀 괴롭혔거든.”
이틀?
물론 당사자야 하루든 이틀이든 괴롭겠지만,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친구들이 눈을 끔벅였다.
“3일째부터 이상하게 축 처지더니, 계속 걔를 괴롭히는 것 같긴 한데 묘하게 힘이 빠진 느낌이 들더라?”
“……뭐야, 그게?”
“그리고 5일째부터는 완전 평범해졌어.”
“……이등병이?”
“그 병장 놈이.”
……???
“무슨 이야긴지 1도 못 알아듣겠는데?”
“그러니까 이등병 괴롭힌 지 이틀, 아니, 닷새 만에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원래대로라면…… 그냥 꼰대로?”
남자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평범해졌다고! 꼰대질 안 하고! 자기가 할 일 자기가 하고! 남 안 괴롭히고! 부딪히면 사과하고!”
“……그런 정상적인 사고를 할 새X로는 안 보였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네! 내가 그 새X한테 사과를 듣다니!!”
남자가 벌컥벌컥 맥주를 마셨다.
“그래서 우리 분대 난리 났었어. 저놈 아주 돌아버려서 평범해진 거 아니냐고. 이거 더 크게 터지는 거 아니냐고.”
“그럴 만도 하네.”
“여튼, 병장 놈은 얌전해졌고 우리는 덜덜 떨고, 이 이등병은 평화로운, 그런 시간이 흘러갔지.”
“……걔는 왜 혼자 평화롭냐?”
“그게 좀 있다 나온다. 기다려 봐.”
굉장히 이상한 이야기인데 재미있다.
친구들이 고기를 집어 먹으며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며칠 후에 우리 분대에 새로운 놈이 전입해 왔어. 전 부대에서 선임한테 선빵 날리고 싸워서 전출된 놈이었지.”
“……군대 생활 괜찮은 거 맞냐?”
“……얘도 돌아버린 게 아닐까.”
남자가 해탈한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그때 우리 분대원들의 마음이었어. 병장 놈이랑 이 이병 빼고. 근데 전입한 놈이 일병이고 이등병이 얘밖에 없으니까 이 이병이 또 시달리게 된 거지.”
“걘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대…….”
“우리도 그랬어. 착한 이 이병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또 저런 게 붙었는지, 저 미친 일병은 언제 사고를 칠지, 덜덜 떨면서 지켜봤지. 물론 얌전해진 병장 놈이 언제 터질지도 걱정하면서.”
남자의 파란만장한 군 생활에 친구들은 소주잔과 맥주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아무래도 앞에서 말했던 평화로운 군 생활은 다 거짓말, 자기 세뇌인가 보다.
“그 일병은 전입할 때부터 그냥 쎄했어. 병장 놈으로 단련된 레이더가 말했지. 저건 삼 일 안에 터진다고. 그리고 삼 일이 흘렀어.”
누군가 꼴깍 침을 삼켰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 일병이 우리한테 잘 지내보자면서 초코파이를 나눠주는 거야.”
“……약 들어 있는 거 아니야?”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서 아무도 손 안 대고 있는데, 혼자 태평한 이 이병이 감사하다고 말하고 초코파이를 먹는 거야. 멀쩡하더라고? 그래서 우리도 먹었지. 그냥 초코파이더라.”
“……그 후론?”
“아무 일 없이 지내고 있어. 그 일병도 우리도.”
허무한 결말에 뭐라고 하려던 친구들 중 하나가 말했다.
“그 이 이병이 뭘 한 거야? 병장도 일병도 걔랑 붙어 있었다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둘 다 그렇게 바뀌니까 하도 이상해서 물어봤지, 이 이병한테. 그러니까 걔가 사람 심리를 좀 공부했다고 하더라고.”
“오오…….”
“정식으로 한 건 아닌데, 많은 유형의 성격들을 봐와서 대하는 법도 조금 알고 있다고 하는 거야. 그게 병장 놈이랑 일병한테 통한 거지!”
“그건가? 내 아이가 달라졌어요?”
예전에 방송했던, 문제가 있는 아이를(실제로는 그 부모를) 바꾸었던 프로그램의 이름에 친구들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어른이라서 그렇게 극적으로 바뀌진 않을 텐데?”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서 물어보니까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고. 그냥 자기 말이 다른 사람들한테 잘 통한대.”
거기에 악의 도서관의 힘까지 더한 것은 이서준 이병만의 비밀이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고 했는데, 부모님 욕까지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자기만 쏙 빠져나가기에는 꼰대질에 고생할 분대원들이 마음에 걸렸고. 그래서 악의 도서관의 능력을 써서 아예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선의 능력은 잘 안 듣더라.
“그걸 믿었어?”
“그 이후로도 병장 놈이랑 일병이 사고를 안 치니, 아니, 아주 평범해졌으니 믿을 수밖에. 원인이 뭐든 평화롭기만 하면 돼. 군 생활은.”
진심이 가득한 남자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혼자 평화로웠구나. 이 이병.”
“안 터질 걸 알았던 거지.”
“그럼 이 이병이 관심병사 케어를 맡았다는 건 무슨 이야기야?”
아. 그거.
열이 올라온 새 불판에 생삼겹살을 올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우리 분대에 병장 놈 일도 있고, 사고 치고 전출된 일병도 들어와서 간부들의 관심이 좀 쏠린 상태였거든. 근데 예상과 달리 별일 없으니까 분대장한테 물어봤대. 분대장은 이 이병 이야기를 했고.”
아하.
그것만 들어도 알 것 같았다.
“다른 분대 대원들도 맡겼구나.”
“그렇지. 사람이 450명 넘게 모여서 갇혀 있으니, 문제가 될 만한 사람이 한두 명뿐이겠어?”
“관심병사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니…… 간부들한테는 진짜 축복 같은 사람이겠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게 제대로 먹혔지. 지금 우리 부대 완전 평화롭다. 밥 맛있지, 잠 잘 오지, 사람 스트레스 1도 없고.”
“그럼 말뚝?”
“이 새X가?”
급발진하는 남자의 모습에 친구들이 와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말뚝 박으면 큰일 날걸? 걔도 전역할 거 아니야? 그 이후에 들어오는 관심병사들은 못 고치잖아. 이제 일병이면…… 전역이 언제냐?”
“내년 7월 14일이 전역일.”
“이야. 일병 전역일도 기억해?”
친구의 말에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다는 듯 남자가 헛웃음을 뱉어냈다.
“우리 부대 관심이 걔한테 다 쏠려있어. 간부들은 그냥 말뚝 박았으면 싶고. 나야 걔보다 일찍 전역해서 다행이지, 걔 후임들도 걔 전역하고 난 다음에 들어올 관심병사들 걱정하고 있음.”
“그건 그렇겠네.”
“나라도 그럼.”
불콰하게 취한 친구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 이야기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심은 되지만, 뭐, 재미있으니 됐다.
“야. 그러면 다른 부대에서도 관심 가질 것 같은데?”
“그러게. 관심병사 있는 곳 많잖아.”
“이 일병 보내는 거 아님?”
“절대 못 보낸다! 우리 이 일병!”
“얘네 대대장이 놔주겠냐. 저쪽에서 오겠지, 관심병사가. 그리고 이 일병한테 치료받고 돌아가겠지.”
“전출 전입이 그렇게 쉽게 되겠냐?”
“진급에 영향을 주잖아. 안 되면 되게 하라. 몰라?”
“아. 그럼 말이 다르지.”
다들 동시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간부들에게 진급보다 중요한 건 없을 거다.
* * *
실컷 먹고 떠든 남자와 친구들이 가게 밖으로 나왔다. 높은 습도와 후덥지근한 바람에 다들 인상을 썼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집이 쟤 집이지?”
곧바로 2차 장소가 정해지고, 다들 걸음을 옮겼다.
두 친구가 편의점에서 술과 안주를 사는 사이, 남자와 한 친구가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휴대폰을 보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이거 볼까…….”
“영화? 너 영화 관심 없잖아.”
“이 일병이 추천해 준 게 취향에 맞아서 보기 시작했거든. 걔가 영화광이더라. 옛날 영화부터 최신영화까지 모르는 게 없던데.”
“그래? 뭐 볼 건데?”
“이거. 화.”
남자의 휴대폰 화면에 [독립영화 ‘화’, 내일 개봉!]이라는 기사가 떠 있었다.
“아, 이거. 이서준 나오는 거. 그러고 보니 그 이 일병도 비슷한 이름이지 않았나?”
“똑같아. 이서준.”
“이서준…….”
잠시 생각하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
“이름이 이서준이면 다 잘생긴 건가? 나중에 아들 태어나면 이서준이라고 지을까? 잘생겨지게.”
이 씨인 친구의 농담에, 배우 이서준의 얼굴도, 일병 이서준의 얼굴도 알고 있는 남자가 친구의 얼굴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힘들 텐데…….”
으하하핰!!
편의점에서 나오던 두 친구가 그 대화를 듣고 ‘저 새X 진심이얔ㅋ’하며 쓰러질 듯 웃어댔다. 이 씨 친구도 소리쳤다.
“농담이라고! 내 얼굴 보면서 진지하게 대답하지 말라고 이 새X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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