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85화
민한의 내레이션을 끝으로 스크린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하아…….
영화객과 관객들이 온몸의 힘이 풀린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가벼운 마음으로 개막작을 보러 왔는데 이런 폭풍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잔잔하지만 밝은 배경음악이 들려오는 상영관은 눈물을 닦는 소리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닦아내는 사람들도 있었고, 소리 없이 대성통곡을 했던 탓에 벌써 소매가 축축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어두웠던 스크린에 새하얀 글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관객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쿠키 영상인가?!
그게 아니라, [화]의 엔딩 스크롤이었다.
쿠키 영상이 아니라 아쉬웠지만, 관객들은 멋진 영화를 보여준 [화]팀에게 박수를 보냈다.
[감독 황지윤]
짝짝짝!
관객들은 바로 직전,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던 여학생을 떠올렸다. 마음에 오래도록 남길 바란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건 정말로 오래 남을 거다.
황지윤.
차기작도 기대된다.
[민한 역 황도윤]
짝짝짝!
민한도 좋았지.
아무것도 모르고 일하러 왔다가 도련님을 만나고 진실을 알고 변해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연기도 잘했다. 담담하게 흘러가던 내레이션도 사람을 마음을 울리는 것이 있었다.
황도윤.
다음 작품에서도 멋진 연기를 보여줬으면 한다.
[무명 화가(도련님) 역 나 진]
짝짝짝!
도련님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첫 등장부터 충격적이었고 달빛 아래 울던 모습도 인상적이었고, 기미독립선언서를 읽는 장면과 눈 위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였다.
아니, 도련님이 나오던 모든 장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도련님 본인이 출연한 것만 같은 연기력에 감탄만 나왔다.
역시 나 진.
……나 진?
슬픔과 감동에 휩싸여, 다른 것은 다 잊고 영화에만 집중하고 있던 관객들이 하나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억?!
관객석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소리만 못 냈지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영혼이 가출한 것 같아 보였다.
나 진이라는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이름에, 나 진이라는 이름은 잊었지만 영화에 등장했던 도련님을 떠올린 사람들은 그 얼굴에.
[화]에 등장한 배우가 누구인지 다시금 깨달은 것이었다.
이서준.
이서준이었다.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믿기지 않는 모양인지 옆에 앉은 사람과 대화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초면인데도 그랬다. 저기, 맞죠? 이서준. 네. 맞아요. 맞는 것 같아요. 이서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 얼굴이, 그 연기력이 배우 이서준이 아닐 리가 없지만, 그래도 긴가민가했다. 너무 갑작스럽고 놀라운 상황이라 뇌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탓이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초대석에 앉은 배우들이 놀란 얼굴로, 친분이 있는 이서준 사단의 배우들에게 묻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훈 씨. 이서준 배우…… 맞아요?”
초대석 가까이에 앉은 일반인 관객들이 고개를 쭉 빼고 귀를 기울였다. 박도훈의 대답에 집중한 듯, 묘한 정적이 흐르는 것 같았다. 박도훈과 세 배우가 작게 웃었다.
“네. 맞습니다. 이서준 배우.”
상영관이 폭발했다.
* * *
“와…….”
김수한이 연신 감탄하며 상영관 밖으로 나왔다.
“내 작품 때문에 행사일 늘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어디서 근자감?”
“진짜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역시 김수한.”
김수한과 함께 개막식을 보러온 친구들이 킬킬 놀려댔다. 한국 독립영화제의 폐막식에서 영화를 상영하게 된 김수한 감독이 민망한 듯 목덜미를 매만졌다.
“아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번 작품은 잘 만들었다고. 너희도 좋다고 했잖아. 근데 서준이가 나올 줄은 몰랐지.”
“맞아. 이서준은 너무 강했어.”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이 나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중 하나, 그 말에 동의하지 않고 볼을 긁적이는 남자가 있었다.
“으음. 물론 배우들의 연기력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긴 했겠지만…… 이서준 배우를 빼더라도 작품이 좋던데?”
크윽.
자신의 영화(폐막작)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배우이자 친구의 말에 김수한이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크리티컬 떴다.”
“HP 1 남음.”
친구인지 원수인지.
킬킬 놀리는 친구들에 김수한이 씩씩거리다 말았다. 자기가 보기에도 기본 작품이 좋았던 것이었다.
“맞는 말이야. 작품도 좋았어. 감독이 대학생이라고 했던가?”
“스태프들도 다 대학생이었을걸. 서른 명 정도 됐지?”
“대단한데?”
감독과 배우의 대화에 친구들이 어깨를 으쓱였다.
예전에는 아르바이트 겸 김수한을 도울 겸 잠깐 영화계 일을 하긴 했지만, 이제 서른. 다들 제 직업을 찾은 터라, 영화계에 남은 이는 저 둘뿐이었다.
배우 이서준의 출연으로 시끌벅적한 상영관을 벗어나 걷고 있던 친구들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어? 저 사람들…… 그 사람들 아냐?”
“뭐?”
[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열심히 의견을 나누고 있던 김수한과 친구가 고개를 들었다.
“영화 만든 대학생들.”
“그러네? 집에 가는 건가?”
사람 수는 적었지만, 개막식 단상에 올랐던 황지윤 감독과 황도윤 배우가 있었다. 김수한이 눈을 반짝였다.
“가자.”
“응?”
“인사하러 가자!”
……뭐요?
친구들이 눈을 끔벅였다.
“아니. 언제 같이 영화에 출연할지도 모르잖아. 너도 황지윤 감독이랑 작업할 수도 있고.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저렇게 재능 넘치는 감독이랑 배우하고 이야기를 해보겠어!”
아…….
얘, 나 진 사인 받으려고 극장 직원한테 부탁한 애지.
역시 김수한.
추진력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 * *
서준에 대해 질문할 게 분명한 기자들을 피해, 잠시 영화관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온 [화]팀은 오늘을 이만 헤어지고 나중에 만나기로 했다. 오늘부터 꽤 시달릴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니까 선발대네?”
“그러게요.”
서른 명이 다 같이 다니면 눈에 띌까 봐, 집에 가는 방향으로 나눴는데 어쩌다 보니 황지윤, 황도윤, 박우진, 무대 미술과 두 명, 미술팀 한 명의 선발대가 모이게 됐다.
“아쉽네. 서준이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황도윤의 말에 선발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영화관에서 보니까 또 다른 느낌이더라.”
“저도요. 몇 번이나 봤는데도……매번 처음 보는 느낌이에요.”
다들 상기된 얼굴이, 아직도 벅찬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넌 어때?”
“……말해 뭐해.”
황도윤의 물음에 히죽히죽대던 황지윤이 참던 웃음을 뱉어냈다. 아하하하, 웃음이 계속 나왔다.
여전히 가슴이 뛴다. 관객석에 앉아 관객들의 반응을 느끼며 보는 자신의 영화는 정말 최고였다. 관객들이 흘리는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입으로 내뱉는 탄성 하나하나가 찬사나 다름없었다.
“저기…….”
재잘재잘 떠들고 있던 선발대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이번 폐막식에 작품을 올리게 된 영화감독 김수한이라고 합니다.”
폐막식? 영화감독? 김수한!
영화과 황지윤과 박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진의 첫 팬인 데다가, 연출 실력도 뛰어나 학생 때부터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타 온 김수한은 보통의 감독들보다 유명세가 있는 편이었다. [수려]의 조감독으로 칸 영화제에 다녀오기도 하지 않았나.
“영화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황지윤 감독님. 황도윤 배우님의 연기도 정말 멋졌습니다.”
“아, 네.”
그렇게 얼떨결에 인사를 나누게 된 [화]의 선발대와 김수한과 친구들이었다.
* * *
“네!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많이 늦었는데?
-영화가 길었어요? 꽤 오래 걸렸네요?
-근데 되게 신나 보이네요. 영화객 님.
-22 입으로는 죄송하다는데 표정은 신남ㅋㅋㅋ
그 말 그대로 한껏 들뜬 듯, 상기된 모습의 영화객이었다.
시청자들의 지적에 영화객이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알 것 같았다. 상영관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다들 한껏 들뜬 표정으로 입은 간질간질한 표정이었다.
-영화 재미있었음?
-볼만해요?
“네. 영화. 영화 말이죠.”
영화객이 [화]를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영화의 감동이 되살아나 표정이 저절로 아련해졌다.
-오. 재미있었나 봄.
-표정이 찐이다.
-22 이건 숨길 수 없는 찐……
-얼른 표 사러 가야지.
애청자들은 금세 영화객의 표정을 읽었다.
“네. 그렇습니다. 영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추천해 드립니다. 여러분들도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문득 이걸 말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케이프] 때처럼 숨겨야 하지 않나? 근데 카메오가 아니라 주연 중 하나라서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헐?! 미친 이서준?!”
-뭐야? 이서준 왔어요!?
-거기 이서준 있음?!
-지금 간다!!
영화객이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어딘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반쯤 들키고 말았다. 지금 압구정으로 가겠다는 댓글들이 파도처럼 쏟아지자, 영화객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이서준 배우가 온 게 아니라…….”
-개막작에 이서준 나왔대!!
-[한국 독립영화제 개막작, 배우 이서준 출연!]
-기사 떴음!!
-헐! 진짜예요? 영화객 님?!
-진짜 서준이 나와요!?
-이서준 차기작임?!
……빠르네.
영화객이 볼을 긁적였다.
하긴 초대석에 기자들도 있었으니 기사가 안 나오는 게 이상했다. 영화제 측에서 막지 않은 걸 보면 이야기해도 되는 듯하고 말이다.
“네. 그렇습니다. 개막작, 화에 이서준 배우가, 정확히는 나 진 배우가 출연했습니다.”
-헐!!! 미친!!!
-갑자기 독립영화라니……! 차기작이라니!!
-이렇게 뜬금없이?! 너무 감사하구요ㅠㅠ
-22 지금 보러 갑니다.(진지)
-근데 나 진이요??ㅋㅋ
-오랜만에 듣는 이름인데ㅋㅋ
-한 걸음 이후로는 처음인가?
-그게 벌써 8년 전……!
-근데 왜 이서준이 아니라 나 진?
-그러게?
“저도 조금 의아하긴 했는데, 아마 독립영화라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객이 엔딩 스크롤에 올라온 이름들을 떠올렸다.
서른 명쯤 되는 이름들.
‘미술자문 마테오’ (누군진 모르나 아마 미술 쪽 전문가가 아닌가 싶다.)와 ‘코코아엔터’를 빼면 정말로 학생들이 만든 영화였다.
“이서준 배우가 작품 보는 눈이 좋잖아요.”
-그렇지.
-흥행 불패ㅋㅋㅋ
-믿고 보는 이서준.
“그런 이서준 배우가 고른 작품이라고 하면 저도 투자하고 싶거든요. 저도 그런데, 영화투자사라면 당연히 투자하고 싶겠죠.”
-그건 그럼.
-22 저도 그래요.
-33 그렇게 믿음이 가는 투자처도 없을 듯.
“일단 투자를 받으면 독립영화가 아니라 상업영화가 되는 거잖습니까. 물론 촬영도구나 소품이나 배경 쪽으로는 좋아질지도 모르지만……투자자가 생기면 흥행을 1순위로 해야 하고 그러면 간섭이 생기거든요.”
-클라이언트 생기면…… 뭐…….
-???: 다시 고쳐오겠습니다×100
-ㅠㅠㅠ
영화객은 [화]를 떠올렸다.
만약 간섭이 있었다면 어떻게 변했을까. 지금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런 의문이 들어, 독립영화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서준 배우가 이름을 숨기지 않았나 싶네요. 온전한 독립영화로 만들고 싶어서요.”
-나 진이라는 이름도 흔한 건 아닌데.
-근데 벌써 8년이나 지나서 잘 기억 못하는 사람도 있음.
-22 애들은 잘 모를걸.
-요즘은 한 걸음 안 보여줌? 그 화재 대피의 교과서적인 작품을?!
-ㄴㄴ 보여주긴 하는데, 이서준이라고 생각함.
-???: 나 진? 그런 배우가 있었어?
-ㅠ나 때는 말이야…… 아역 배우 나 진이 얼마나 대단했는데……!
“맞습니다. 청룡님 목소리에, 한 걸음에…… 대단했죠. 이렇게 오랜만에 독립영화로 만나게 되다니……! 이제 배우는 그만둔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ㅋㅋㅋㅋ
-과몰입ㅋㅋㅋ
영화객과 시청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흠. 하여튼, 지금은 스포일러라서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이서준, 아니 나 진 배우가 출연한 영화 화는 아주 멋진 영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추천합니다. 여러분들도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근데 이제 여섯 번밖에 상영 안 하잖아요ㅠㅠㅠ
-……벌써 티켓 다 팔림. 나도 못 삼.
-아까 티켓 산다고 한 분이 승자. 인생의 승리자ㅠㅠ
상영관에서 본 사람들과 기사로 접한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화]의 티켓을 구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영화객도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곧 OTT 사이트에 업로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플러스나 더하기나 플러스 같은 곳에요.”
-이젠 아예 플러스가 사겠지하고 기다림ㅋㅋ
-ㅋㅋ플러스 이서준 컬렉션 수집 중ㅋㅋ
-업로드되면 리뷰해 주세요!!
“당연히 해야죠! 아, 근데 아쉽네요. 영화가 너무 좋아서 화의 감독님과 배우분들, 스태프분들과 인터뷰를 하고 싶었는데 말이죠. 정신 차리고 보니까 떠나셨더라구요.”
영화객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한예대 학생분들이니까 나중에 학교 쪽으로 연락을 드려서 리뷰 때는 촬영팀의 인터뷰까지 실어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서준 배우도 한예대에 다니고 있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ㅇㅇ같은 학교라서 만났나 봄.
-그렇게 인연이 닿네.
“……어?”
다음 영화를 보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영화객이 덜컥, 고장 난 듯 걸음을 멈추었다.
-뭐야?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음???
-뭐 놓고 옴?
“……아뇨. 그게…….”
영화객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한예대 학생들하고 이서준 배우가 같이 촬영했다면…… 이서준 배우가 워킹맨에 나왔다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영화객이 마른침을 삼켰다.
“터널 사고를 바로 직전에 피했던 사건에도 말입니다.”
!!!!
라이브 채팅창에 느낌표가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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