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584화 (584/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84화

이틀 전에 도착한 편지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나 보다.

도련님은 방에 다시 틀어박히고 이씨 아저씨와 고성댁은 잠시 절망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나머지 방들을 정리하라고 했다.

“읏차.”

침대에 이불을 내려놓은 민한이 뻐근한 허리를 폈다.

“손님이 더 올 모양인가?”

그렇다면 일손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민한은 어쩌면 좀 더 여기서 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부자리를 정리한 민한이 1층으로 내려왔다. 곧 점심시간이라서 방에 틀어박힌 도련님께 점심 식사를 가져다줘야 했다.

“저 왔어요.”

“잠시만 기다리렴. 얼른 준비할게.”

“천천히 하세요.”

민한이 부엌 한쪽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마찬가지로 편지를 보며 눈을 글썽이던 고성댁 아주머니는 어느새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어쩌면 이런 편지가 익숙한 건지도 모른다.

그게 뭔지 자신이 알면 안 되는 건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 멀리서 봤던 서양식 저택은 마냥 신기하고 아름답기만 했는데, 지금은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민한이 도련님의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씨 아저씨가 들어왔다. 그리고 민한의 이름을 지어준 ‘그분’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재작년에 돌아가셨단다.”

……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아. 아니, 머리뿐만이 아니라 심장까지도.

어쩌면 가족을 가지는 것과 더불어 민한의 인생 최대의 목표였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언젠가 만나서 ‘네가 그때 그 꼬마구나! 아주 잘 컸다!’하고 시원하게 웃으면서 칭찬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주 아주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던 사람이.

죽었단다.

“어…… 어……”

민한의 심장이 철렁, 바닥까지 떨어졌다. 삐- 하고 이명도 들리면서 눈앞이 새까맣게 변하는 것 같았다.

이씨 아저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씨 아저씨와 고성댁 아주머니의 표정을 보니 안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이었다.

진실이었다.

“왜…… 왜……. 어떻게…… 돌아가셨대요?”

“……몸이 안 좋으셨대. 외국에서 요양하시다가…… 재작년 이맘때쯤 돌아가셨다고 하더라.”

너무 슬프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던가.

민한은 멍한 표정으로 이씨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고성댁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점심 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었다.

민한이 일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으니, 자신이 대신 옮길 생각이었다.

“제, 제가 갈게요.”

“……괜찮겠어?”

그걸 민한이 제지했다.

멍한 얼굴로 말하는 민한이를 고성댁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민한이 삐그덕 소리가 날 것처럼 굳어져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 괜찮아요.”

쟁반을 든 민한이 걸음을 옮겼다. 2층으로, 도련님이 계시는 곳으로.

이야기해야지.

그분이 외국에 계셨다고, 아프셨다고, 그리고 돌아가셨다고.

재작년…… 조금만 더 일찍 찾았다면 힘이 되어드릴 수 있었을 텐데.

도련님께 이야기를 하면 조용히 들어주실 거다. 착하신 분이니까 위로도 해주시겠지.

안다.

이유는 모르지만, 도련님도 지금 멀쩡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그러니 내 이야기를 하고 도련님의 이야기를 듣자.

전혀 다른 슬픔이지만, 서로를 위로 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 민한이 흐를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똑똑, 노크를 했다.

대답이 없어 문을 열자, 바람결에 날리는 커튼이 보였다.

그리고 텅 빈 침대와.

……찢어진 캔버스도.

와장창!

민한이 들고 있던 쟁반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련님이.

사라졌다.

* * *

무명 화가는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슴의 열기가 몸 전체로 퍼져,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아찔해지고 끝내는 머릿속까지 녹여 버리는 것 같았다.

시원한 바람을 맞아도 답답했고, 차가운 눈을 맨발로 밟아도 도저히 식지를 않았다. 오히려 더 큰불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걷고 또 걸어 도착한 곳은, 마음속 깊이 남아 있던 9년 전 죽어버린 언덕. 꽃이 피지 않는 언덕.

양옆에 우뚝 선 나무들을 보니, 더욱 가련하고 슬프고 안타깝고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장성하는 옆 나라들과 죽어버린 나라.

꼭 우리와 같지 않은가.

하하.

새하얀 눈을 뒤덮인 언덕을 바라보며, 무명 화가가 마른 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표정은 일그러져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꽃 한 송이 피우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운 건지…….”

무명 화가가 덜덜 떨리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데, 너무 많이 울었던 모양인지 나오질 않았다.

아아.

그림을 그리고 싶다.

대의적인 생각 끄트머리에 소소한 자신의 욕망이 샘솟았다. 이 망가진 손으로는 그릴 수 없는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망가진 손.

울컥, 무명 화가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또 한 번 저도 모르게 과거를 원망하고, 또 한 번 그런 자신에게 실망하며, 또 한 번 민한을 떠올린다.

이씨 아저씨를 떠올린다. 고성댁 아주머니를 떠올린다. 마을 사람들을 떠올린다. 한양 사람들을 떠올린다. 사람들을 떠올린다.

엉망이 된 머릿속.

무명 화가의 시선이 문득,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무명 화가를 따라온 발자국이 붉었다. 꽃잎처럼, 물감처럼 붉었다.

무명 화가가 다시 고개를 돌려 새하얀 언덕을 바라보았다.

꽃이 피지 않는 언덕.

봄이 오지 않는 나라.

무명 화가는 꽃이 그리고 싶어졌다.

* * *

도련님이.

사라졌다.

텅 비어버린 방을 본 민한이 저택을 뒤지다 못해 저택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디, 어디로 가신 거지?

주변을 둘러보는 눈빛에 불안함이 맴돌았다.

바로 직전 소중한 사람의 부고를 들은 민한의 몸이 덜덜 떨렸다.

도련님을 처음 봤던 날, 자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흘러나오던 뜨거운 피와 덜덜 떨리던 팔.

이후 나아졌으나 두 번의 편지로 다시 나빠진 상태. 어쩌면…… 어쩌면 극단적인 생각을…… 아니, 아니다.

사람을 구하려고 했던 도련님이다. 다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던 도련님이다.

그렇게나 강한 분이…… 그런 생각을 할 리가…….

민한이 이를 악물었다.

……강하긴 개뿔.

자기보다 어린 녀석이 아닌가.

아니, 나이를 떠나서 사람이라면 언제나 강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도와줘야 했다.

“도련님! 어디 계세요! 도련님!”

또 한 명, 중요한 사람을 잃을까 두려워진 민한이 눈물을 삼키고 목소리를 높였다.

“도련님! 도련님! ……야! 어디 있냐고!”

생각해 보니 아직 이름도 몰랐다.

“야! 도련님!”

소리를 지르며 사방을 돌아다니는 민한의 눈에, 발자국이 보였다. 사람의 발 모양이 그대로 찍힌 자국이었다.

“신발도 안 신고 갔냐…….”

그래도 희망이 보였다.

입을 악다문 민한이 발자국을 따라 달렸다. 발자국이 옅어졌다 짙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발자국 위로 새빨간 것이 보였다. 붉은 꽃잎 같은 그것.

피였다.

나뭇가지에라도 찔린 듯, 발자국마다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욕설을 내뱉은 민한이 다시 달렸다. 직감적으로 점점 목적지가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이다. 9년 동안 죽어 있던 언덕.

이 추운 날씨에 땀이 흥건할 정도로 뛰어가던 민한의 발걸음이 어느 순간부터 느려졌다. 밤사이 내린 눈으로 새하얗게 뒤덮여 있어야 하는 언덕에 붉은 꽃이 피고 있었다.

언덕 앞.

어느새 걸음을 멈춘 민한이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 새하얀 눈과 붉은 꽃 사이에 도련님이 있었다.

관객들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한 민한과 무명 화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이, 폭풍처럼 몰아치던 음악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이었다.

그저 무명 화가가 눈을 밟는 소리, 피를 더 내기 위해 일부러 나뭇가지를 짓밟는 소리, 거칠어져 가는 숨소리, 비틀거리면서 옷과 옷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마치, 자신들이 민한과 함께 저곳에 서 있는 듯했다.

무명 화가가 발을 옮겼다. 새하얗고 붉은 발이 차가운 눈을 내리눌렀다. 피부를 에는 듯한 바람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여기에 있었는지 얼굴이 다 창백했다.

펄럭, 바람에 흰색 두루마기가 흔들렸다. 그에 무명 화가도 같이 비틀거린다. 넘어질 듯 보이면서도 그림을 망치기 싫은 듯 자세를 잡는다. 그렇게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눈 위로 붉은색 발자국이 남겨졌다.

하아, 생명 같은 숨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붉은 꽃잎이 다시 눈 위에 새겨졌다. 무명 화가의 눈이 불꽃처럼 빛났다.

그림을 그려서 그런 것인지, 목 끝까지 채워진 감정을 쏟아내서 그런 것인지, 민한은 알 수 없었다.

사박. 사박.

눈을 내리누르는 발은 동상이 걸릴 듯 감각이 없었다. 그러나 무명 화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줄어가는 피에 상처를 내듯 발바닥을 바닥에 강하게 짓눌렀다. 뜨겁고 붉은 피가 다시 눈을 물들였다.

그렇게 하나의 꽃이 완성됐다.

언덕이 마치 도화지가 된 듯하다.

불규칙적으로 쓰러져 있는 나무 기둥을 나뭇가지처럼 이용해, 아래에서부터 왼쪽 끝까지 천천히 크고 작은 붉은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모양으로 보면 동백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었다.

관객들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미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박력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림의 그리고 싶어 하는 화가의 마음과 조국에 봄이 오기를 바라는 독립투사의 마음.

말로는 미쳐 다 표현하지 못할 그 커다랗고 무거운 마음이 그림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눈 위에 그려지는 그림은 피로 그렸다는 것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니, 피가, 생명이, 영혼이 담겼기에 아름다운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런지…… 아름다운 만큼 처절했다.

[그건 꽃(花) 같기도 하며, 불(火)꽃 같기도 한 그림(畫)이었다.]

[가슴 속의 화(忿怒 : 분노)를 그대로 토해낸 것 같기도 했다.]

그 내레이션에, 무명 화가의 마음을 느낀 관객들은 주먹을 꽉 쥐기도 하고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시야가 흐려진 관객들은 얼른 눈가를 닦아냈다.

단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숨이 가빠져온다. 온몸의 근육이 경련한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손과 발에 감각이 없다. 그러나 머리는 맑았다. 오랜만에 그리는 그림에 심장이 뛰었다. 피식피식 웃음도 나온다.

꽃.

여기에도 꽃이 피고 있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머릿속에 떠오른 심상 그대로 그려내던 무명 화가가 마지막 붓 터치를, 아니, 발자국을 남겼다.

그림이 완성됐다.

허억, 하고 숨이 돌아왔다.

“……련님! 도련님!”

그리고 그제야 목소리가 들렸다. 민한이다.

……여기에, 이제는 꽃이 피지 않는다고 했던 민한이다.

붉은 꽃잎에 발을 디디고 선 무명 화가가 창백한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형.”

“도련님 얼른 내려오세요!”

정신은 맑으나, 어쩐지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민한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명 화가는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

“……형. 꽃이…….”

“야! 얼른 내려…… 아니, 내가 올라갈게!”

형은 피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여기에도…… 꽃이 피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언젠가…….

무명 화가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리고 그림에 모든 생명을 불어넣은 듯 풀썩, 쓰러졌다.

새하얀 눈 사이로 쓰러진 무명 화가의 옆얼굴이 보였다. 눈에 고인 눈물이 옆으로 흘러내렸다. 가련하고 슬프고 안타깝고 불쌍하기 짝이 없으나…… 희미한 미소가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무명 화가가 입고 있던 흰색 두루마기가 펄럭, 펼쳐졌다.

마치 붉은 꽃에 내려앉은 흰나비처럼 보였다.

* * *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한 상영관.

붉은 꽃 위에 쓰러진 무명 화가의 모습이 천천히 멀어진다. 다급하게 뛰어가는 민한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어둠에 잠기듯, 스크린이 새까맣게 변했다.

……끝인가?

……이렇게?

숨도 쉬지 않고, 눈도 깜빡하지 않고 무명 화가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던 영화객과 관객들은 아쉬움과 답답함에 이제 빛 한 점 돌지 않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운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하지만…….’

물론, 역사를 알고 있는 만큼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고난과 괴로움, 상실감, 좌절이 있을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힘을 내서 끝까지 견뎌줬으면 하고 바랐다. 이런 영화 속에서나마 해피 엔딩으로 끝나길 바랐다.

그러나 생방송에서 3초의 공백이 생기면 방송 사고라고 하던데, 체감상으로는 벌써 3초를 넘긴 것 같은 어둠이 이어지고 있었다.

끝…… 인가보다.

결국, 무명 화가의 죽음으로 이 영화는 끝이 났나 보다.

훌쩍.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한둘이 아닐 터였다.

‘원래 이렇게 끝내려고 했는데…….’

감독 황지윤이 새까맣게 변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화]의 초안은 여기서 무명 화가가 죽는 것이었다.

독립투사들을 대변하는 무명 화가.

살아남아 광복을 맞이하는 이들보다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들이 더 많은 그들처럼 말이다.

‘근데…….’

황지윤이 미소를 지었다.

‘서준이의 무명 화가는 이렇게 안 죽을 것 같았지.’

서준이 연기하는 무명 화가는 이렇게 죽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빛나는 눈동자와 의지를 보고 있노라면, 그 어떤 어려움과 고난과 좌절이 있어도 끝까지 견디고 이겨내어, 결국 쟁취할 것 같았다.

그래서 바꾸었다.

결말을.

스크린에 다시금 빛이 돌기 시작했다.

잔잔히 들려오는 음악에 관객들이 숨을 들이마셨다.

* * *

침대에 누워 있는 무명 화가가 보였다.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나 죽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옆, 무명 화가를 간호하는 민한과 이씨 아저씨, 고성댁이 보였다.

이씨 아저씨가 민한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관객들에게는 잔잔한 음악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이 모든 일의 진실을 풀어놓는 것이리라.

그리고 얼마 후.

무명 화가가 눈을 떴다.

눈 위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듯, 무명 화가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민한은 덜덜 떨리는 무명 화가의 팔을 주물렀다. 추운 곳에 오래 있었던 탓에 동상을 입은 두 팔과 다리에는 다시 붕대가 감겨 있었다.

“도련님.”

“……”

“이야기 다 들었어요.”

무명 화가의 텅 빈 시선이 민한에게 닿았다. 민한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러나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 아니, 당신이 왜 이름 대신 도련님이라고 불리는지, 어째서 다쳤는지, 왜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지……. 어째서 편지에 울고 웃는지……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흐르는 눈물 탓에 민한의 시야가 흐려지고 말이 점점 늘어졌다.

“한양이 아니라…… 경성이라면서요?”

그에 무명 화가 또한 울컥, 치미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전 전혀 몰랐어요…….”

[한양이 경성이라 불리는 것도. 내 나라 조선이, 이 땅이 일제에 넘어갔다는 것도.]

[나는 그때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고마워요…….”

민한이 몸을 웅크려 무명 화가의 팔에 이마를 댔다.

[나는 그가 얼마나 그림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고.]

[이 팔이 얼마나 상처투성이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그의 슬픔도.]

[달빛이 비치던 밤. 직접 목격했다.]

민한의 눈에서는 눈물이 강물처럼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내레이션이 들려왔다.

[그 어린 몸으로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무서웠을지.]

[얼마나 두려웠을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에.]

울면서도 민한의 손은 무명 화가의 팔을 주무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온기와 생명을 전해주는 것처럼 민한은 주무름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했다.

그 마음이 전해진 것인지.

무명 화가의 손이 움직여 민한의 손을 잡았다. 그에 민한이 고개를 들어 무명 화가를 바라보았다.

[나보다 어린 그가 눈물에 젖은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다시 빛이 돌아온 무명 화가의 눈동자에, 이대로 무명 화가가 죽어버릴까 걱정했던 민한이 대성통곡을 했다.

무명 화가도 그에 못지않게 울기 시작했다. 민한의 감사만으로도 한 번 더 해볼 용기가, 의지가, 마음이 생겼다.

두 사람은 울음으로, 눈물로 마음속에 있던 모든 감정을 털어버리듯 그렇게 울어댔다.

그와 함께, 관객석에서도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준의 출연은 알았으나, 이런 작품인지 몰랐던 이다진과 박도훈, 이지석과 김종호도 눈시울을 붉혔다.

스크린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짐은 먼저 차에 실어 두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짐가방을 든 이씨 아저씨가 방을 나가고,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무명 화가가 자신이 머물렀던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치 떠나는 사람처럼 방은 정리되어 있었다.

그에 관객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무명 화가의 두 팔로 향했다. 떨림은 여전했지만, 어쩐지 예전보다 덜한 것처럼 보였다.

“한양으로 돌아가시면 뭐 하실 거예요?”

고집스럽게 한양으로 부르는 민한의 모습에 무명 화가가 웃었다. 밝아진 표정이 관객들을 안심하게 만들었다.

“하던 일을, 계속해야죠. 그날이 올 때까지.”

무명 화가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림도 그리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민한이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 저도 여기서 계속 일하게 됐어요.”

무명 화가가 놀란 표정으로 민한을 돌아보았다. 민한이 쑥스러운 듯, 그러나 결심이 선 눈빛으로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지만…… 저도 돕고 싶습니다.”

“고마워요. 형. 그럼 다음에 또 올게요.”

“또 오면 안 되죠.”

이곳은 다친 이들이 오는 장소.

또 한 번 무명 화가가 온다는 이야기는 다쳐서 오겠다는 거였다.

민한이 짐짓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날. 그날이 오면 편지를 보내주세요. 제가 한양으로 가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언제가 될지, 어떤 위험이 닥칠지…… 누군가 죽을지도 모르지만.

무명 화가와 민한은 그렇게 약속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 민한이 데굴 눈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도련님.”

“네.”

“그…… 성이 어떻게 되세요?”

뜬금없는 물음에 무명 화가가 눈을 끔벅였다. 민한이 목덜미를 매만졌다.

“아니, 언제까지 성 없이 살 수는 없잖아요. 이씨 아저씨처럼 이제 이름을 숨겨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말하던 민한이 이내 웃으며 말했다. 이름을 지어주신 그분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제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 도련님이거든요.”

“……하하.”

민한의 말에 잠깐 놀란 무명 화가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뭔가 좋으면서도 쑥스럽네요. 으음. 제 이름은…….”

“이름 말고 성이요. 제가 불어버리면 어떻게 해요.”

“형이요? 형이 그럴 리가요.”

무명 화가는 믿음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제 이름은…….”

화면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그리고 긴 시간의 흐름과 그동안의 무거운 일들을 표현한 듯, 묵직하고 느릿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많은 일이 있었다.]

[도련님이 예상한 어려움보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내가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음악이 멈추고 화면이 천천히 밝아졌다.

[그러나]

[결국]

[그날은 왔다.]

시간을 흐름을 알려주는, 주름진 두 손이 보였다. 아문 상처도 드문드문 보이는 듯했다.

그가 보낸 험난한 세월을 그대로 보여주는 손이 새하얀 종이를 조심스럽게 만지고 있었다. 편지에는 언뜻 눈물 자국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8월.]

[한양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도련님의 편지였다.]

편지를 조심스럽게 넣은 주름진 두 손이 움직였다. 능숙한 손길로 저택의 대문을 굳게 닫고 있는 모습이 스크린에 비쳤다.

그러나 여느 때와는 다르게, 저택 안이 아니라 저택 밖에서 닫고 있었다.

[이제 이 저택의 문이 열릴 일은 없다.]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주름진 오른손이 굳게 닫힌 저택의 대문을 매만졌다.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손짓이었다.

[앞으로도]

[없기를 바란다.]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