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583화 (583/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83화

관객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저 화가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역사를 공부했다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기미독립선언문이라니…….’

무명 화가가 기미독립선언문을 읽는, 이 한 장면만으로 앞서 나왔던 모든 장면들이 가지는 의미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럼 앞에 나왔던 장면들도 그냥 나왔던 게 아니란 거지…….’

영화객의 눈이 빛났다. 감독이 작품 속에 숨겨놓은 이야기들을 알아내는 것보다 리뷰어를 흥분하게 만드는 건 없었다.

‘어디서부터 분석해야 할까.’

아마도 작품 속 시대에는 흔치 않은 ‘자동차’가 등장했을 때부터 시작해야 할 터였다.

‘그래도 일단…….’

스크린 속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영화부터 보자.’

영화객과 관객들이 소리를 죽이며,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선보이는 영화 [화]를 바라보았다.

* * *

“일본에서 지난주 선언이 있었고 경성, 아니, 한양에서도 곧…….”

이씨 아저씨가 누가 들을 듯 조용히 말하다 민한과 눈을 마주쳤다.

“아.”

당황하는 얼굴이었다. 그 표정에 민한은 괜히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민한아.”

고성댁이 민한을 불렀다. 변함없이 다정한 표정이나 묘하게 선을 긋는 느낌이 나는 듯했다.

“부엌에서 물 좀 가져다줄래?”

잠깐. 침묵이 흘렀다.

눈치 빠른 민한은 이씨 아저씨의 당황한 얼굴을 봤을 때부터, 아니, 도련님의 입에서 전혀 모르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방에서 나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일부러 뭉그적댔다.

무슨 일인지 가르쳐 주지는 않을까, 하고.

하지만 도련님도, 이씨 아저씨도, 고성댁 아주머니도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네. 그럴게요.”

볼 안쪽 살을 가볍게 깨문 민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한 사람이라도 잡아주길 바랐건만 문이 닫힐 때까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건 초안이고…….”

탁.

방문이 닫히고 이씨 아저씨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1층 부엌으로 향하는 민한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졌지만, 익숙한 일인 듯 금방 떨쳐냈다.

* * *

다행이었다.

그 편지 이후로 도련님이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민한아. 도련님 좀 부탁할게!”

“네. 아저씨.”

이씨 아저씨와 고성댁 아주머니는 뭐가 그렇게 바쁜지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녔다. 저택에 들렀다 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다들 바쁜 듯 눈이 가득 쌓인 이 추운 날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표정만은 밝았다.

“…….”

다시 밝아진 방.

도련님은 그 모습을 창문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팔과 무릎을 주무르며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건 어때요, 도련님?”

뭐가 그렇게 아쉬운지는 모르겠으나, 민한은 도련님이 좀 더 밝아졌으면 했다. 마침 기다리고 있던 그림 도구도 왔고. 물론 벌써 한 달 넘게 손도 안 대고 있었지만.

“아뇨. 괜찮아요. 형.”

무명 화가의 관심은 오로지 저택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민한은 또다시 홀로 떨어진 외딴 섬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어라 물어보고 싶어도 단호한 세 사람의 눈빛에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알았어요. 아, 저 점심 가지고 올게요.”

조금 기운이 빠진 민한의 목소리에 무명 화가는 아차, 싶어 돌아보았지만 이미 문은 닫힌 상태였다. 무명 화가의 얼굴에 슬픔과 안타까움이 드리웠다.

* * *

탁, 데구르르.

낯선 소리에 민한이 눈을 떴다. 요즘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런지 선잠을 자고는 했다. 또 한 번. 탁, 데구르르. 무언가 구르는 소리가 났다.

문득, 울고 있던 도련님이 떠올랐다.

또 혼자 울고 있을까.

민한은 도련님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조용히 방 밖으로 나온 민한은 2층 거실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탁, 데구르르.

소리가 들리는 곳은 도련님의 방. 잠시 고민하던 민한이 방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안 주무세요?”

잠시 조용하다가 스르륵 방문이 열렸다.

도련님이 쓰게 웃고 있었다.

“형은요? 아직 안 잤어요?”

“아, 목이 말라서 일어났는데 소리가 들려서요.”

데굴 눈동자를 굴리는 민한의 모습에 도련님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잠시 고민하던 도련님이 문을 열었다.

“들어와요. 형.”

민한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달빛이 비치는 창 앞에 도련님이 ‘캔버스’라고 설명했던 것이 놓여 있었고 그 옆 테이블에는 물감이 짜인 팔레트와 붓이 놓여 있었다. 새하얀 캔버스에는 주황색 반점들이 불규칙하게 찍혀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도 그 주황색 반점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민한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하자 무명 화가가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주황색 물감이 묻어 있는 손을 주물렀다. 무명 화가의 두 팔은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다.

“손에 힘이 빠져서 붓이 자꾸 떨어지더라구요. 시끄러웠으면 미안해요.”

“아, 아뇨. 어…… 그림 그리고 계셨어요?”

민한의 물음에 무명 화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았다. 그 자연스러운 모습에 민한은 도련님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형이 제 그림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아…….

그걸 기억할 줄은 몰랐다. 울컥하는 마음에 민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노을을 그리고 있어요. 형이랑 봤던 노을이 참 예뻐서요.”

무명 화가가 붓을 들었다.

손이 덜덜 떨리듯, 손에 잡힌 붓 또한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무명 화가는 아랑곳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새하얀 캔버스로 붓을 뻗었다.

투둑, 예상했던 지점이 아니라 다른 곳에 찍히는 주황색 반점에 무명 화가가 깊은숨을 내뱉고는 입을 열었다.

“……완성할 때까지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탁, 데구르르.

또다시 바닥에 떨어진 붓에 무명 화가의 표정이 흐려졌다.

“어쩌면 완성 못…….”

“기다릴게요.”

민한이 바닥에 떨어진 붓을 들어 엉거주춤 일어나려던 무명 화가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기다리는 거 잘해요. 그러니까 완성할 때까지 기다릴게요.”

“……네.”

무명 화가가 붓을 쥐었다. 다시 새하얀 캔버스로 시선을 돌렸다.

“……있잖아요. 형.”

“네.”

붓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명 화가의 머릿속에 쓸쓸해 보이던 민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은 말씀 못 드려요.”

민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위험하니까…… 위험한 때니까…….”

무명 화가가 다시 캔버스에 주황색 반점을 찍었다. 이번엔 제대로 찍혔다. 민한과 무명 화가가 함께 봤던 노을빛 한 조각이 캔버스에 담겼다.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다 끝나면…… 다 끝나면 말해줄게요. 민한 형.”

그 말에 담긴 걱정과 진심이 절절히 느껴졌다. 민한이 코를 킁, 들이마셨다. 무명 화가의 코끝도 붉게 변했다.

“알았어요. 말해줄 때까지 기다릴게요. 말했잖아요. 저 기다리는 거 잘한다고.”

민한의 말에 무명 화가가 울 듯 웃었다.

“정말로…… 얼마 안 걸릴 거예요. 형.”

* * *

쏴아아, 하고 비가 내리는 늦은 밤이었다.

“민한아!”

도련님과의 대화 덕분에 마음 편하게 자고 있던 민한이 고성댁의 부름에 번쩍 눈을 떴다. 벌써 아침인가? 늦잠 잤나? 하고 살펴보는데 여전히 밤이었다.

“무슨 일…….”

“어서 이쪽으로……!”

고성댁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불빛 하나 없는 저택 안.

고성댁이 민한의 데리고 도련님의 방으로 향했다. 도련님도 깨어 있었는데, 창밖을 내다보는 얼굴이 창백했다.

후둑. 후두둑.

창문에 두꺼운 빗방울들이 부딪혔다.

비 내리고 어두운 창밖에 뭐가 보일까.

민한도 슬쩍 아래를 내다보았다. 저택 대문 쪽 아른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사람인 듯했다. 이 늦은 밤에? 그리고 그 앞을 이씨 아저씨가 가로막은 듯 서 있었다. 우산도 없이 그렇게 우뚝 서 있었다.

“도련님. 아셨지요? 뒷문으로 나가면 바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민한이가 여기 산들은 아주 잘 알고 있으니, 며칠만 버티세요.”

“예. 알겠습니다.”

고성댁이 짐을 챙기며 도련님에게 말했다.

도련님은 조금 굳은 얼굴이었지만 익숙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같이 봐왔던 연약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민한이 눈을 끔벅였다.

고성댁이 민한을 불렀다.

“민한아. 저기 동굴 있는 곳 알지? 일단 도련님이랑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돼. 며칠이 걸릴지 모르니까, 안에 식량이 있거든? 다 떨어진다 싶거나 누가 쫓아온다 싶으면…… 저쪽 산 움집 알지? 거기로 가서 기다리고 있어. 그럼 이씨가 데리러 갈 거야.”

민한의 팔에 짐꾸러미를 쥐여준 고성댁의 손에 힘이 단단히 들어갔다. 눈빛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만은, 도련님이 위험하다는 것만은 잘 알 수 있었다. 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

그때, 창밖을 살펴보던 무명 화가의 입이 열렸다.

어두운 방 안.

비가 내려 달빛도 하나 없는 밤인데, 무명 화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번뜩이고 있었다. 그림을 그릴 때와는 전혀 다른 날카로운 모습이었다.

“저들이 떠납니다.”

“떠난다고요?”

고성댁이 얼른 창문에 붙었다. 민한도 마찬가지였다. 도련님의 말대로 대문 앞에서 아른거리던 불빛 두 개가 멀어져가고 있었다.

쿵! 쿵! 홀딱 젖은 이씨 아저씨가 대문을 닫는 모습과 함께 들릴 리가 없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절대 들어오지 말라는 외침인 것 같기도 했다.

아……!

숨을 죽이고 살펴보고 있던 도련님과 고성댁은 긴장이 풀린 듯, 조금 전의 냉철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얼굴로 동시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민한 또한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성댁이 민한을 깨울 때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상황을 살폈던 영화객과 관객들도 힘이 풀린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폭탄이 터지거나 눈앞에 총을 들이민 것도 아닌데, 긴장감이 장난 아니었다.

아마도 배우들의 열연 덕분이리라.

‘그리고 음악도 잘 어울려.’

처음 듣는 곡인데 묵직한 선율이 빗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긴장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앞선 장면들에서도 장면보다 튀지 않게, 그러나 장면과 잘 어울리는 음악들을 들려주었다.

천천히 배경음악이 가벼워졌다.

비에 흠뻑 젖은 이씨 아저씨가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수건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고성댁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이 저택 주인이 서양인이라는데, 자기들 마음대로 들어올 수가 있나! 사장님이 높으신 분들하고 잘 안다고 이야기하니까 깨갱하고 물러가야지, 뭐.”

빗물을 닦아내며 킬킬 웃는 이씨 아저씨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고성댁과 도련님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훤해졌다.

“저 치들도 애가 타긴 타나 봐요. 이제 며칠 안 남았잖아요.”

“그러게요. 이번엔 정말로…….”

고성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무명 화가가 뒷말을 삼켰다. 민한으로서는 알 수 없는 무언의 말이 세 사람에게 전해진 것 같았다.

“민한이 너도 수고했다.”

한 것도 없지만.

쓰게 웃은 민한이 입을 열었다.

“……아직……제가 알면 안 되는 거죠?”

그 말에 세 사람의 눈이 잠시 놀란 듯 커졌다가 빙그레 휘어졌다.

“짜식!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그래. 조금만 더 기다리렴.”

“진짜 며칠 안 남았어요. 형.”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날을 말하는 세 사람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그에 민한도 환하게 웃었다.

배경음악마저도 찬란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웃지 못하는 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아는 관객들뿐이었다. 스크린 속 인물들의 얼굴이 밝으면 밝을수록 관객들의 안타까움이 커졌다.

그 예상대로, 스크린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적막 속 민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담담하지만 그래서 더욱 슬픈 목소리였다.

[그리고 3월.]

[편지가 도착했다.]

[실패를 알리는 편지였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