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582화 (582/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82화

어두워진 상영관.

빛이 들어오는 스크린에 아직 눈이 내리진 않았지만, 차가움이 느껴지는 산들이 보였다. 천천히 풍경을 보여주는 중, 스피커에서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나는 영원히.]

민한의 목소리였다.

담담한 그 목소리가 관객들의 귀에 쏙쏙 박혔다.

[그 몇 달 동안의 일을 잊지 못할 거다.]

스크린에 텅 빈 밭들과 그 사이의 길이 비쳤다.

조금 울퉁불퉁한 길로 아주 옛날에나 있었을 법한 자동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겨울이라 작물들을 모두 수확한 밭을 돌아보고 있던 남자, 민한이 코를 킁, 들이마시며 그 자동차를 바라보았다.

말 없이 움직이는 마차.

몇 번 봐서 놀라진 않았지만, 여전히 신기한 기물이었다.

그 자동차를 따라 고개를 돌리는데, 자동차 창문으로 창백한 얼굴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몇 살이나 됐을까, 알아보기도 전에 쌩하고 자동차가 움직였다. 민한은 눈을 끔벅이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민한이 한 초가집으로 들어섰다.

“저택에 또 손님이 왔나 봐요.”

“……그래?”

평상에 앉아 있던 노인이 민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온다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오늘 온 모양이구나.”

“어디서 온 손님이에요?”

민한이 장작을 패며 말했다. 이제 곧 겨울. 부지런히 장작을 준비해야 했다.

“한양에서 올 거라고 하던데.”

“와! 한양! 멀리서도 오셨네요. 뭐 하시는 분인데요?”

“화가인데 손을 다쳐서 요양하러 온 거라고 하더구나.”

아.

그건 안타까운 일이다.

“얼른 나으시면 좋겠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노인이 멀리, 산 너머를 바라보았다.

화면이 새까맣게 변했다가 밝아졌다.

“민한아.”

“네?”

“이번 겨울은 저택에서 일하지 않으련?”

오늘도 노인의 집에서 일하던 민한이 눈을 끔벅였다.

“……저택이요? 저기, 서양식 저택이요?”

“그래. 일손이 필요하다고 하더구나. 돈도 많이 줄 거고…….”

노인이 조용조용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나, 민한의 귀에 들어오는 건 저택과 돈뿐.

“당연히 가야죠!”

일거리가 없는 겨울에 돈도 벌 수 있는 데다가 금지나 다름없었던 서양식 저택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민한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저택으로 향하는 길목, 머리를 짧게 자른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이씨 아저씨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래. 아픈 곳은 없고?”

“저야 뭐, 건강 빼면 시체죠.”

환하게 웃는 민한에 이씨 아저씨도 빙그레 웃었다.

“얼마 전에 새로 손님이 오셨던데…… 화가라고 들었어요. 손을 다쳤다고요.”

“아…….”

이씨 아저씨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 얼굴에 민한은 화가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저택에 오는 상인의 지인들 중에는 놀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파서 요양을 오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 몸 상태가 나아지면 민한이 살고 있는 마을까지 마실 나오기도 했는데, 무서운 사람도 있었고 착한 사람도 있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이도 천차만별이라 민한은 서양 상인의 인맥을 신기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 아직 어리지만 한양에서는 유명한 화가였다고 하더라. 근데 한양에서 마차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크게 다쳤어. 서양인 의사한테 치료도 받아 봤다던데…… 일상생활도 조금 힘들 정도인 것 같더라고.”

민한과 이씨 아저씨는 이야기를 나누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 저택엔 처음 들어오는 거지?”

“네. 들어오려고 하면 아저씨가 맨날 막았잖아요.”

정신이 팔린 듯, 저택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민한의 말에 이씨 아저씨가 픽, 웃었다.

“내가 여기서 얼마나 지냈는데, 담벼락에 개구멍 만드는 놈은 처음 봤다. 처음 봤어.”

“하하하. 근데 얼마 못 가서 아저씨가 바로 달려왔잖아요.”

마치 남의 일인 양 뻔뻔하게 웃는 민한의 뒤에서, 저택의 관리자인 이씨 아저씨가 활짝 열린 대문을 닫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쿵, 쿵.

들려오는 소리에 민한이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뭐 하세요?”

“대문 닫고 있지. 뭐 하겠어.”

커다란 대문을 닫은 이씨 아저씨가 그것보다 작은 대문을 또 닫고 있었다. 그리고 이중으로 닫힌 문에 나무 문이 쓰러지지 말라고 지지대들까지 세워놓는 중이었다.

“……대문 닫는 거라기에는 너무…….”

철저하지 않나?

민한과 관객들이 같은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의아한 민한의 눈빛에 이씨 아저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무 틈 사이로 지지대를 박아넣었다.

“너 여기 비싼 게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저기 유리창만 떼어가도 몇 달은 놀아도 돼. 아, 마을 사람들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 세상이 흉흉하니, 도둑놈들이 가끔 오거든.”

“아…….”

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저택의 손님이 아니면, 외지 사람들은 거의 오지 않는 시골인데, 가끔 낯선 사람들이 나타날 때가 있었다. 근처 산에 숨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며,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 나누는 것도 들었고 민한도 본 적이 있었다.

그런 외지인들이 탐탁지는 않지만,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모르니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고 있었다.

민한이 다시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서양식 저택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런 곳이라면 도둑질 하러 올지도 모르겠네요.”

“가끔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놈들이 와서 들어오려고 하기도 하고 말이야.”

“하하하.”

고삐 풀린 망아지5였던 민한이 뻔뻔한 얼굴로 다시 웃어댔다.

“그게 놀 거 없는 이 마을에서 제일 재미있던 일이었어요.”

“그건 나도 알지.”

꺄하하하 웃으며 달아나던 어린아이들을 떠올리며 이씨 아저씨가 부드럽게 웃었다.

쿵!

마지막 지지대까지 받치고, 대문을 굳게 닫은 이씨 아저씨가 민한의 옆에 서서 저택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마당 청소도 좀 도와주고. 아, 저기 보이지? 2층에 커튼이 쳐져 있는 곳. 거기가 도련님 방이야.”

이씨 아저씨의 말에 민한이 고개를 들었다.

“거기가 제일 풍경이 좋거든. 이런 촌에서 무슨 풍경이겠냐고 하겠지만…….”

“……아저씨.”

“응?”

민한의 부름에 저택 입구로 향하던 이씨 아저씨가 뒤를 돌아보았다. 2층을 올려다보고 있는 민한의 눈동자가 묘하게 갈 곳을 잃은 듯 보였다.

“……코튼이 뭐예요?”

어설픈 민한의 발음에 관객들이 작게 웃음을 뱉어냈다. 이후 괘종시계를 보고 놀라는 민한에 또 한 번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고성댁에게 인사한 민한과 이씨 아저씨가 2층으로 오르던 중, 희미하게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창백하게 질린 이씨 아저씨가 달려가고 민한도 얼른 뒤따라갔다.

쿵! 쿵!

2층 방으로 가까워질수록 소리가 커졌다. 무언가 내려치는 듯한 소리였다. 이씨 아저씨가 벌컥 문을 열고 외쳤다. 다급한 얼굴이다.

“들어올 때 문 꼭 닫아!”

서양식 저택에서 일어나는 서양알못 민한과 요양하러 온 화가 도련님의 좌충우돌 힐링물이라고 생각했던 영화객과 관객들이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눈을 끔벅였다.

어둠으로 물든 방.

쿵! 쿵! 소리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움직이는 인영이 보였다.

어둠 너머에서도 충분히 느껴지는 분위기에,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 영화가 앞으로 어떤 내용으로 이어갈지, 제각기 추측하던 영화객과 관객들의 생각이 멈추었다.

그저 바라만 보게 만드는 완전한 몰입.

그 몰입에 강제적으로 빠져들려던 영화객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이성이 말했다. 저 배우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 어마어마한 배우가 될 것이라고.

이씨 아저씨가 그 인영에게 달려들고, 민한 또한 앞에서 인영을 붙잡았다.

……그래.

그 둔탁한 소리는 망치 따위가 탁자와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연약한 피부와 근육만이 아무런 보호도 없이 무자비한 힘으로 탁자에 부딪히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몸뚱이의 주인으로 인해.

아프지도 않은가, 생각했지만 잡고 있는 두 팔이, 두 손이 고통으로 덜덜 떨리고 있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고통스러운 듯한, 지친 듯한 아니면…… 울분에 찬 듯한 거친 숨소리도 느껴졌다.

그 순간.

민한과 도련님의 눈이 마주쳤다.

관객들과 도련님의 눈도 마주쳤다.

……????

영화객과 관객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숨 쉬는 것까지 잊고, 완전히 돌이 된 것처럼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과 눈이 천천히 벌어졌다.

짙은 어둠 속에서 도련님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건 민한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고통스러운 눈빛이었다. 또한 민한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이 스며든 것 같기도 했다.

……!!

관객석에서의 소리 없는 비명이 초대석까지 전해졌다. 물론 초대석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들을 빼면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서준 사단의 네 배우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작게 웃었다.

물론 서준의 연기가 완벽하게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는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얼굴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못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분장도 거의 하지 않은 상태니 더욱 그랬다.

?!?!?

그런 혼란 사이에도 영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관객들의 두 자아가 싸우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한 자아1이 말한다.

저 배우 이서준이지? 이서준이잖아! 이서준이 여기 왜 나와!? 미쳤나 봐! 얼른 소리를 지르고 바깥에 알려야 돼! 아아악!

영화에 푹 빠진 자아2가 말한다.

닥치고 영화나 봐. 저런 쩌는 연기를 안 볼 거야?!

도련님의 눈빛이 확 죽어버렸다.

조금 전 그 강렬했던 눈빛과 표정이 마치 꿈같이 느껴질 정도로 지금의 도련님의 모습은 아무런 생기도 없었다. 그저 죽음이 바로 앞에 있는 듯, 가만히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에 몰입한 자아1이 말한다.

……일단 영화부터 보자.

* * *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툭.

희미한 소리에 자기 방 침대에 누워있던 민한이 번쩍 눈을 떴다.

툭. 툭.

또다시 들려오는 소리에 민한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왔다.

다른 방들보다 커다란 창들과 커튼이 있는 곳.

커튼이 걷어져 창밖의 달빛이 들어오는 그 아래에 서양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주 고요히 서 있었다.

민한의 시선으로, 관객들도 목에 핏줄이 보일 정도로 힘을 주고 있는데도 떨리는 두 팔을 보았다. 이제야 어째서 도련님이 그림을 그릴 수 없는지를 깨달았다. 안타까움이 관객석에 퍼졌다.

“……흐으…….”

민한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련님이 울고 있었다.

떨리는 두 손을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소중히 감싸 쥐고, 마치 기도하듯 이마에 맞댄 채,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흐으, 흐느끼듯 울고 있었다.

얼굴이 일그러지며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그 눈물 한 방울 한 방울마다 놓지 못한, 놓치고 싶지 않은 그림에 대한 미련이 가득한 것 같았다.

그런 처절한 슬픔 사이에도 두 손과 팔은 볼품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게 서럽고 서러워서 도련님은 결국 두 손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몸을 웅크린 채 조용히 어깨를 떨며 서글프게, 그러나 조용히 울었다.

손을 보호하듯 몸을 둥글게 만 도련님의 뒷모습에, 민한은 어쩐지 봐서는 안 되는 모습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 모습을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화면이 바뀌고, 김장하는 세 사람이 보였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민한이 물었다.

“근데 도련님은 어쩌다 마차 사고가 난 거예요?”

민한의 물음에 무를 탁, 탁, 자르고 있던 이씨 아저씨와 고성댁이 손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성댁의 눈빛에 이씨 아저씨가 으음, 침음성을 흘리다 입을 열었다.

“그게…… 사람을 구하려다가 사고가 났다더라고.”

“아……”

“……대단한 분이셔. 나이도 어린데…….”

“……팔은 이제 계속……그러시는 거예요?”

“……그래. 재활을 한다면 떨림을 줄일 수 있다고 하지만…… 그림처럼 섬세한 일은 어렵다고 하더라.”

이씨 아저씨의 말에 어째서 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건지 모르겠다.

민한은 조용히 2층, 커튼이 닫혀 있는 방을 올려다보았다.

도련님은 지금.

그때 그 사람을 구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까.

[도련님은 그때.]

[후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 *

“……그!……제일 싼 걸로요!”

보부상에게 그림 도구를 부탁하는 민한의 모습에 감동하던 관객들이 그 외침에 희미한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후.

보부상이 도착했다.

똑똑.

민한은 오른쪽 세 번째 방의 문을 두드리고 불빛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꼭 닫았다.

밝은 밖과 어두운 안.

두 팔을 내려치던 도련님의 모습이 생생했다. 이어, 한밤중 숨죽여 울고 있던 모습도 떠올랐다. 보자기를 든 손이 묵직해졌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점심 식사 가져왔어요. 그리고…….”

민한이 쟁반 옆에 보자기를 올려놓았다.

“제가 그림에 대해서 잘 몰라서…… 방 안을 살펴보니까 없길래…… 아니, 아주머니가 도련님이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셨다고 하셔서요.”

대답은 없었다.

허둥지둥 말하던 민한이 조금 민망한 듯 목덜미를 만졌다.

“붓하고 재료하고…… 좀 준비해 봤어요.”

어쩐지.

어둠 속에서 도련님의 몸이 움찔한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전 동전을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거든요. 돈을 안 써도요. 그래서 도련님도 이걸 보면 기분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마치 그 움찔했던 것이 착각이라는 듯, 도련님은 조용했다. 민한이 입을 달싹거리다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달칵.

하고 문이 닫혔다.

카메라가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도련님을 비췄다.

붓, 재료.

그 단어들에 천천히 어둠에 잠식해가던 무명 화가의 의식이 깨어났다.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희미한 마음이 자신도 그렇다고 수긍했다.

그래. 무명 화가도 그랬다.

새하얀 종이와 붓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이 백지를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지, 비어 있는 부분에는 어떤 의미를 담을 것인지 생각할 때의 들뜸. 붓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새하얀 백지를 물들이며 자신이 상상한 것을 그대로 담아낼 때의 벅참. 완성된 그림을 보며 느끼는 만족감.

무명 화가는 그 모든 것이 그리워졌다.

더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지금까지도.

그 마음이 눈을 감고 있는 무명 화가의 얼굴에 드러났다.

온기 하나 없이 죽어가던 얼굴에 천천히 그리움과 슬픔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희미하던 감정이 천천히 세를 불려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금방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표정이 흐려졌다.

무명 화가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리움을 참지 못했다.

부스럭.

애써 부들부들대는 손을 무시하고 일어난 무명 화가가 천천히 테이블 쪽으로 걸어 나갔다.

익숙한 쟁반 옆에, 처음 보는 나무 상자가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조금 목이 타는 것 같기도 했고 붕 떠 있는 기분이기도 했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았다.

숨까지 멈춘 것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나무 상자의 뚜껑을 잡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열었다.

“……하하!”

상자 안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종이와 붓, 그리고 먹과 벼루를 보며 무명 화가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웃고 말았다.

그 웃음소리에 관객들이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저, 서양화 그려요.”

아앗.

“그래서 벼루랑 먹은 안 써요.”

작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종이랑 붓은 쓰는데, 전혀 다른 거예요.”

민한이 저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렸다. 이내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래도…….”

어쩐지.

도련님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웃음이 나오면서도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 * *

도련님의 상태는 조금씩 나아졌다.

“그림 도구는 눈 올 때쯤 도착하지 않을까, 싶대요. 이씨 아저씨가요.”

“눈이라…….”

“한양에도 눈 내리죠?”

“……네. 그런데…… 여기랑은 풍경이 많이 다를 것 같아요.”

잠시 멈칫한 도련님이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커튼 사이, 유리창 너머 우뚝 솟은 산들이 보였다.

잠깐 저 산들을 뒤덮는 눈들을 떠올려보았다.

온전히 새하얗기만 할까, 아니면 그 사이사이에 색이 섞여 있을까. 그 색은 무슨 색일까. 햇빛을 받으면 어떤 식으로 빛날까. 새벽에 보면 어떤 느낌이며 달빛을 받으면 어떤 느낌일까. 달빛 한 점 없이 어두울 때는? 주황빛 노을이 질 때는?

“……빨리…….”

수많은 상상과 색과 풍경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벅찬 것 같기도 했고 조금 두렵기도 했다.

무명 화가는 떨리는 두 손을 쥐었다 폈다. 여전히 자신의 마음과 상관없이 떨리는 손이지만.

“그려보고 싶네요.”

어쩐지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 * *

눈이 내려도 그림 도구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사이 민한은 도련님에게 글을 배우게 되었다.

필기구는 자신이 샀던 동양화 그림 도구. 이걸 쓰게 될 줄 몰랐던 민한이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열의를 불태웠다.

“글자는 다 외운 것 같으니까 이제 단어를 써볼까요? 형 이름부터 적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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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한은 한 글자 한 글자 떨리는 손으로 신중하게 적어나갔다.

“틀린 곳은 없죠?”

“어, 없는데…… 형 성이 민이었어요?”

지금까지 그를 민한이라고 불러온 도련님이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아, 이름이 민한 맞아요.”

아, 다행이다.

“성이 없거든요.”

……큰일인데?

안도했다가 울상이 된 도련님의 표정에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민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원래는 이름도 없었어요.”

민한이 다시 자신이 적은 이름을 보며 이야기했다.

“요 근처 산에서 혼자 발견됐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일을 겪었는지 옷은 다 너덜너덜하고 몸 상태도 안 좋았대요. 그대로 산속에서 죽을 뻔했는데, 마을 사람들 덕분에 살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이 마을에서 살게 됐고요.”

도련님은 조용히 민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나이도 이름도 알아낼 수가 없었대요. 키를 보니, 대강 일고여덟 살이겠거니, 해서 여덟 살이 됐고, 이름도…….”

민한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민한이라는 이름도 이 저택에 머물렀던 손님이 지어주신 거고요.”

아…….

“나중에 꼭 만나서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그때 저한테 주신 이름, 정말 마음에 든다고, 잘 쓰고 있다고. 그리고……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잘 살겠다고.”

뭐, 가족이 있는 마을 사람들과 도련님을 질투하기도 했지만.

멋쩍게 웃은 민한이 말을 이었다.

“그분이 그러셨대요. 성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성을 따르라고.”

존경하는 사람.

그건 분명 그분밖에 없을 거다.

“그냥 여기서 그분의 소식을 기다릴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도련님 말대로 나중에 한양에 큰 가게를 세우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민한이라는 이름이 알려지면 그분도 알 수 있을 테고, 언젠가 찾아올 수도 있을 테니까요.”

도련님은 멍하니 민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족도 만들고 싶어요. 배를 곯지 않게, 어디 아파도 고칠 수 있게,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게 돈도 많이 벌고 싶고요. 그분을 만나면 당신이 이름을 준 고아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보여드리고 싶어요.”

평범해 보이던 민한에게도 그런 사정이 있었다. 영화객과 관객들은 조용히 두 사람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 * *

저택의 담 너머로 나온 첫 산책.

돌아가자는 민한의 말에도 도련님은 멍하니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들이 서있는 언덕 가운데, 텅 비어 눈만 쌓인 곳.

아.

토박이라면 토박이인 민한이 입을 열었다.

“10년 전인가 9년 전에 산불이 났었는데 다행히 저기만 홀라당 타 버렸어요.”

“……9년 전이요?”

무명 화가가 작은 나무 하나 보이지 않는 빈 곳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는 나무들과 대비돼 완전히 죽은 공간처럼 보였다.

“근데 왜…… 나무가 없죠?”

9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면 어느 정도 자란 나무들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공간에 아무것도 없었다. 쓰러진 죽은 나무 기둥들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게 이상한 일이에요. 나무를 옮겨 심어도, 꽃을 옮겨 심어도, 꽃씨를 뿌려도 다 죽어버렸거든요. 산신이 노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제사도 지냈는데 안 되더라구요. 그 이후로는 그냥 내버려 두고 있어요. 다른 곳은 다 괜찮아서요.”

민한이 별것 아닌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예전엔 꽃이 많이 피던 곳이었는데,”

무명 화가의 시선이 그곳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앞으로 다시 꽃이 필 일은 없겠죠.”

[그때 도련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 * *

도련님의 방.

침대에 걸터앉은 도련님이 오른팔을 내밀었다. 이씨 아저씨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도련님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도련님의 두 손은 팔뚝 중간부터 다섯 손가락 끝까지 붕대로 감싸져 있었다. 민한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상처가 많이 좋아졌어요.”

“네. 세 분 덕분이에요.”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아진 상처에 기뻐하는 도련님과 이씨 아저씨와 달리,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사람이 있었다. 민한이었다.

그리고 관객들이었다.

영화객과 관객들은 나올 것 같은 비명을 삼키며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저 가볍게 생각했던 팔의 상처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이게 ……많이 좋아진 거라고?

민한은 도련님의 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붕대를 감는 건 이씨 아저씨의 일이라 민한은 한 번도 붕대 안의 상처를 본 적이 없었다. 첫날 피가 난 걸 보고 많이 다쳤겠거니 생각한 정도였다.

……결코, 이렇게 심한 상처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밖으로 드러난 도련님의 두 팔은 처참했다.

어디 하나 빈 곳 없이, 팔뚝부터 손가락 끝까지 상처로 가득했다. 어떻게 마차 사고가 나야 이런 상처를 남기는 것인지, 좀 더 치료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니, 드러난 팔이 이 정도인데…… 옷에 가려진 몸과 다리는…….

걱정 어린 시선을 느낀 도련님이 고개를 들어 민한을 바라보았다. 민한의 얼굴에 드러나는 안타까움과 걱정. 도련님이 말간 얼굴로 웃으며 상처로 가득한 팔을 매만졌다.

“이제 괜찮아요. 형. 안 아파요.”

그러나 여전히 덜덜 떨리는 두 팔.

민한은 자신이 조금 도련님의 사고를 가볍게 생각했던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 * *

새해가 되고, 1월이 다 끝나가는데 그림 도구는 오지 않았다. 더 많이 쌓인 눈을 쓸어내며 민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이씨 아저씨를 닦달하지도 못하는 것이,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들르던 사람들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쁘긴 엄청 바쁜가 봐요.”

“곧 오겠죠.”

민한과 달리, 도련님은 편안한 얼굴로 마당을 산책하고 있었다. 손의 떨림은 여전했지만, 붕대를 풀고 나서는 제법 여유로워진 듯했다.

빗자루로 자잘한 눈을 치우던 민한의 시선이 저절로 도련님의 손을 스쳐 지나갔다. 상처투성이의 손.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일이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고 도련님은 아는 사람이니 괜히 원망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그런 민한의 마음을 알았는지 도련님이 빙그레 웃었다.

“도련님! 춥습니다. 이제 들어오세요!”

이씨 아저씨가 저택의 문을 열며 말했다.

그때였다.

쿵! 쿵!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 달리 빠르고 큰소리였다.

오랜만의 방문이다.

그림 도구가 왔나, 하고 민한이 반색하며 움직이려는데 이씨 아저씨가 빠르게 걸어가며 말했다. 조금 표정이 굳은 것 같기도 했다.

“민한아. 도련님 데리고 들어가 있어.”

“네? 네, 네.”

눈을 끔벅이던 민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도련님을 바라보았다. 도련님은 그대로 얼어붙은 듯 보였다.

“……도련님. 들어가죠.”

“……네.”

[지금 생각해 보면, 도련님과 이씨 아저씨는 그 두드림에서 불길한 느낌을 받았던 건지도 몰랐다.]

내레이션이 불길했다.

영화객과 관객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뒤를 슬쩍 보던 민한과 도련님이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창문으로 대문의 상황이 보였다.

“저번에 붓하고 벼루 사다 준 보부상이에요.”

“아.”

문을 두드린 사람은 민한에게 붓과 벼루를 사다 주었던 덩치 큰 보부상. 몇 번 봤는데도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말을 못 하는 건지도 몰랐다.

보부상에게서 받은 듯한 종이를 읽는 이씨 아저씨가 몇 번이고 되묻는 듯했다. 보부상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자기로 감싸진 무언가를 건넨다. 민한의 얼굴이 단번에 환해졌다.

“그림 도구가 왔나 봐요!”

기뻐하는 민한과 달리, 도련님의 시선은 이씨 아저씨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곧 이씨 아저씨가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누가 왔어요?”

“보부상이 왔어요. 아저씨! 그림 도구죠?”

“어, 어. 그래.”

조금 얼떨떨한 표정의 이씨 아저씨의 한 손에는 그림 도구가 든 보자기와 다른 한 손에는 편지였던 종이가 구겨져 있는 상태였다.

민한의 시선은 그림 도구에, 세 사람의 시선은 구겨진 종이에 가 있었다.

“……형.”

“오! 이거 꽤 무거운데? ……네?”

도련님이 희미하게 웃으며 민한에게 말했다.

“그 그림 도구…… 방에 정리 좀 해주실래요?”

눈을 끔벅이던 민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2층으로 올라갔다. 카메라는 남아, 구겨진 편지를 바라보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을 비추었다.

무명 화가는 새까맣게 죽은 얼굴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편지를 읽었다.

이씨는 이를 악물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고, 고성댁은 방울방울 눈물을 흘렸다.

몇 번을 읽어봐도 믿기지 않는다.

“……이렇게 ……이렇게 돌아가시다니…….”

[그건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였다.]

* * *

민한은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림 도구가 도착한 그 날.

저택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저택 밖까지 나가 산책하던 도련님은 다시 방에 틀어박혔고, 이씨 아저씨와 고성댁 아주머니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행동은 다르지만 다 같은 마음으로, 생각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분위기.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민한은 그 기류에 끼지 못했다. 평소처럼 도련님께 삼시 세끼 가져다주고 마당을 쓸고 잡일을 도울 뿐이었다.

아홉 살짜리 꼬마가 된 것 같다.

엄마 아빠의 부름에 집으로 돌아가던 형 누나들을 바라보던 그때가.

친절하긴 하지만 약하게나마 외부인 취급을 받던 그때가.

“근데 생각해 보면 이번 겨울에 잠깐 일하러 온 거니까…….”

도련님도 언젠가 한양으로 돌아갈 거고, 자신은 다시 봄이 되면 마을로 돌아가 다시 이 저택에 들어오지 못할 거다.

그럼 또 자신은 혼자 지내겠지.

……조금.

아니, 많이.

아주 많이.

민한은 쓸쓸해졌다.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당을 쓸고 있는데,

쿵! 쿵!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씨 아저씨는 뒷산에 가셨고 고성댁 아주머니도 바쁘셨다. 어떻게 하나, 허둥지둥대고 있는 민한에게 제법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씨! 거 이씨 없소?!”

편지를 배달해 주는 남자였다.

“아저씨 뒷산에 가셨어요!”

“민한이냐? 그래? 그럼 이것만 주고 가마.”

“어, 저기 문, 문 열어…….”

드리고 싶은데, 이씨 아저씨가 단단히 주의를 주던 것이 떠올렸다. 자기가 없을 때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던. 머뭇거리는 민한의 고민을 안 듯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됐다! 위로 던지마! 며칠 후에 또 올 거니까 이씨한테 저택에 붙어 있으라고 해라!”

민한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휙 하고 위에서 편지가 떨어졌다.

“아저씨?!”

“난 이만 가 보마!”

삭삭삭!

진짜로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눈에 편지가 젖지 않게 얼른 주운 민한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대문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눈을 끔벅이던 민한의 시선이 편지로 향했다. 가벼운 편지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듯했다.

여기에도…… 있을까.

세 사람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민한의 손은 편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날.

그림 도구와 함께 전해진 편지를 보지 못했던 게 민한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았다. 자신도 세 사람이 아는 것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도움이 되고 싶었다.

도련님께 한글도 배운 지금.

민한은 편지를 읽을 자신이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킨 민한이 편지 봉투를 열었다. 얇은 종이 몇 장이 나왔다. 가장 긴 글이 적혀 있는 종이를 살펴보았다.

“……은……에……의……임과……”

중얼거리던 민한이 혀를 깨물었다.

한자, 한자 그리고 한자!

배우지 않은 한자가 가득한 편지에, 조사밖에 읽을 수 없었던 민한이 대문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잠시 후.

민한은 저택으로 돌아온 이씨 아저씨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뜯어져 있는 봉투에 혼이 날까, 어깨를 움츠린 민한이었지만 이씨 아저씨는 그것보다 편지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편지를 읽는 이씨 아저씨의 눈이 커졌다. 부들부들 편지를 잡은 두 손도 떨렸다.

“고성댁! 도련님!!”

이씨 아저씨가 고성댁을 부르며 2층 도련님의 방으로 향했다. 다급한 목소리지만 일전의 편지 때처럼 불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다.

다시금 어두워진 도련님의 방에 민한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졌다.

“민한아. 커튼 좀 걷어봐. 얼른!”

“아! 네!”

이씨 아저씨의 말에 민한이 급하게 커튼을 걷고 빛이 들어오게 만들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도련님이 소란스러운 상황에 비틀비틀 일어났다. 얼굴도 눈빛도 여전히 생기 없이, 죽어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걱정이 됐다.]

[도련님의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을까.]

[도대체 저 편지가 뭐길래, 일전의 편지로 낙담하던 이씨 아저씨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이거, 이것 좀 읽어보세요.”

이씨 아저씨가 편지를 건넸다. 뒤늦게 들어온 고성댁이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죽은 듯, 빛 하나 들지 않던 도련님의 눈동자가 이씨 아저씨가 들고 있는 편지로 향했다. 짧은 쪽이었다.

도련님이 편지를 읽는 동안, 방 안은 네 사람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부스럭.

아무런 반응도 없던 도련님이 편지로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민한이 조심스럽게 도련님의 얼굴을 살피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편지를 보는 도련님의 눈동자에 빛이 돌기 시작했다.]

[아주, 아름다운 빛이었다.]

짧은 편지를 내려놓은 도련님이 제법 양이 되는 종이들을 들어 올렸다. 민한이 읽으려다 실패한, 한자가 가득한 편지였다.

[그때는 읽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읽을 수 있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무명 화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레이션으로 들려오는 민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목소리에 담긴 마음은 같았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우리는 오늘,]

“我(아) 朝鮮(조선)의……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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