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71화
삼蔘
인삼人蔘이나 산삼山蔘 같은.
“맞아. 도라지랑은 씁쓸한 맛이 조금 다르달까.”
도라지구이(?)를 한 입 더 먹은 두 중년 배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먹어봐도 보통의 도라지구이랑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어쩌다가 정답을 맞힌 두 중년 배우의 말에 황도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그렇게 귀한 삼을 이렇게 많이 주셨겠어요. 게다가 서준이가 비닐봉지에 달랑달랑 들고 왔는데.”
“……그렇겠지?”
김성식과 정은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정도 크기의 삼이라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우리가 착각했나 봐.”
“그러고 보니 오래된 도라지도 삼만큼 몸에 좋다고 했지. 직접 캐신 거라서 더 맛있나 보네.”
“더 있으니까 많이 드세요. 다른 거 필요한 건 없으세요?”
여기 도라지 맛있네, 다음에는 여기에서 나는 걸 사야겠다, 하고 생각한 김성식과 정은미가 웃으며 황도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팀원들이 잘 보지 않는 마당 구석.
잔뜩 상기된 얼굴로 그릇을 내미는 ‘그것’에게 잘 구워진 고기를 주던 서준이 그 대화에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예상대로.’
거의 천년에 다다르는 시간 동안 주변 산의 기운을 받은 ‘그것’은 오래된 산삼들이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인간들에게 산삼을 선물로 주고 싶다는 ‘그것’에, 잠시 생각하던 서준은 그 산삼들을 조금 캐와 강물에 씻고 잘라, 일부러 가볍게 보이도록 비닐봉지에 담아왔다.
얼마나 오래된 건지 모르는 산삼보다야 흔한 도라지라고 생각하는 편이 팀원들에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뭐, 사실대로 이야기해도 안 믿겠지만.’
냠냠! 언제 젓가락질을 배운 건지, 자그마한 손에 어울리지 않는 긴 젓가락으로 연신 고기를 집어 먹는 ‘그것’의 손이 아주 재빨랐다. 입안 가득 노릇노릇 구워진 고기를 넣고 오물오물 열심히 볼을 움직였다.
마치 겨울잠을 자기 전 잔뜩 먹어두는 곰 같다고 생각하며 서준은 자신의 그릇에서 고기를 한 움큼 옮겨주었다.
비어가는 그릇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던 ‘그것’이 다시 무더기로 쌓이는 고기에 입을 조금 벌리고 서준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나한테 고기를 주다니! 좋은 인간!’ 생각이 그대로 읽혔다.
“많이 먹어.”
응응!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 ‘그것’이 다시 통통한 볼을 움직이며 고기를 먹어댔다.
“채소도 먹고.”
응응!
딱히 가리는 것도 없는 ‘그것’이 서준이 그릇에 올려주는 구운 채소들을 꼭꼭 씹어먹었다.
“근데 오빠. 백구는 어디 갔어요?”
“어? 그러네? 아까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서준과 ‘그것’이 움찔했다.
고기에 정신이 팔려서 분신술을 만드는 것을 잊어버렸다.
“형이 놀려서 삐친 거 아니야?”
“그러게. 그냥 집에 간 것 같은데?”
저절로 꼬랑지를 축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백구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백구를 놀린 팀원이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강아지도 삐쳐?”
“강아지도 알 건 다 알아요. 선배.”
“동물천국 못 봤어요? 걔네도 삐치고 엄살 부리고 잘못하면 딴청 피우고, 다 해요.”
“맞아. 게다가 백구는 엄청 똘똘하잖아.”
그 말에 제일 심하게 놀린 선배들이 숙소 입구까지 나가 눈으로 뒤덮인 허허벌판을 보며 외쳤다.
“백구야!”
“백구야! 어딨어!”
“우리가 잘못했어!”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그것’이 얼른 힘을 썼다. ‘그것’의 바로 옆에 기운이 모여 백구의 모습을 변하려던 그때,
“근데 고기는 진짜 못 줘!”
그 모습을 바라보던 팀원들이 킬킬 웃어댔다. 서준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뾰로통해졌다. 그러나 진짜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 외침 속에 담긴 애정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투명한 모습을 한 분신, 백구가 휙 하고 숙소 밖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멀리서 왕!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구야!”
입구에서 외치던 선배들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밖으로 뛰쳐나가, 길 끝에서 달려오는 백구를 맞았다.
“음악이라도 깔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 TV는 사랑을 담고 BGM.”
“아하하핳.”
음향팀 팀장이 빠르게 휴대폰을 두드렸다. 마당에 설치해 놓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예전에 방영했던 [TV는 사랑을 담고]의 BGM이 흘러나왔다.
“어디 갔었어! 백구야!”
그에 맞춰 달려온 백구를 번쩍 들어 올려 안은 선배가 빙글빙글 돌았다. 음악과 어우러지는 감동적인 모습에 아하하핰. 서준과 팀원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술을 마신 팀원들도, 술을 마시지 않은 팀원들도 한껏 분위기에 취해, 얼굴에 즐거운 웃음이 가득했다.
“살코기 조금 주는 건 괜찮대요. 삶아서요.”
“그럼 조금만 삶아올까?”
금세 살코기 조금을 삶아온 팀원이 백구에게 한 입 주었다. 백구가 냠냠 살코기를 먹었다. 물론 간 하나 되어 있지 않은 삶은 고기였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본체인 ‘그것’이 상추쌈을 입 안 가득 넣고 오물거리고 있기도 했고.
그렇게 뒤풀이 겸 고기 파티가 점점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지윤 누나.”
“너도 고생 많았어. 서준아.”
서준과 황지윤이 나란히 앉아 팀원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들 홀가분한 표정이라 서준과 황지윤의 표정까지 풀어졌다.
“처음에는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말이야.”
표절 시비가 붙었던 게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지면서도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느껴졌다.
“저도요. 출연하고 싶다고 했더니, 설마 감독님이 거절할 줄이야.”
“윽. 그건…….”
장난기 가득한 서준의 말에 괜히 찔린 황지윤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무슨 배짱이었나 싶다. 결국 이렇게 될 거, 괜히 일을 어렵게 만들어 오디션까지 보게 만들다니.
“……그건 미안.”
“아뇨.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감독님이면 그 정도 고집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설득하는 건 배우의 몫이죠.”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서준에 황지윤의 마음이 가벼워졌다.
“고마워, 서준아.”
황지윤이 말을 이었다.
서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던 순간이, 연기과 연습실에서 서준의 연기를 봤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네 연기를 보여주지 않았으면…… 이렇게 멋진 촬영은 못 했을 거야.”
서준이 미소를 지었다.
“저야말로 이렇게 멋진 작품에 출연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야. 내가 더 고마워. 덕분에 표절도 알 수 있었고 키드 100도 쓸 수 있게 됐고, 마테오라는 대단한 화가의 도움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생각하면 할수록 서준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어찌저찌 영화를 만들기는 했겠지만, 지금만큼 만족스러울까.
황지윤은 결단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다른 도움은 다 차치하고,
“진짜…… 내가 생각하던 무명 화가, 그 이상이었어.”
서준의 연기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서준이 아니라면 그 누가 그런 연기를 보여줄까 싶었다.
황지윤 감독의 진심 가득한 말에 서준이 쑥스러운 듯 그러나 기쁜 얼굴로 웃었다. 배우에게 그 이상의 칭찬은 없었다.
“그럼 민한은 어땠냐?”
황도윤이 불쑥 끼어들어 사이다가 든 잔을 서준과 황지윤에게 나눠주었다. 황지윤이 크게 한숨을 내뱉듯 말했다.
“……ㅆ어.”
“뭐라고? 안 들리는데?”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신 서준이 작게 웃었다. 황도윤의 말에 장난기가 가득한 건 누가 들어도 알 것 같았다.
황지윤이 이를 갈 듯 말했다.
“즈알했다고…….”
“즈알이 무슨 말인지 모르……악! 악! 알았어! 알았다고!”
황지윤이 있는 힘껏 옆구리를 쑤시자, 황도윤이 몸을 비틀어댔다. 그 모습을 본 팀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몇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난장판이 된 걸 보면 남매는 남매인가 보다.
“자!”
음향팀 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블루투스 마이크 있는데 노래 부를 사람! 탬버린도 있어!”
“오! 나!”
촬영팀 4학년이 번쩍 손을 들었다. 불콰해진 얼굴이 술을 좀 잡수셨나 보다.
“뭐 부르실 거예요?”
“잠만 기다려 봐.”
히죽히죽 웃으며 마이크를 잡고 번호를 누르던 촬영팀 4학년이 시작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따다다단!
익숙하면서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구성진 트로트 가락에, 서준과 팀원들이 숨이 넘어갈 듯 으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쳤고, 백구도 신이 나서 왕왕! 짖어댔다.
본체인 ‘그것’도 어느새 기운으로 탬버린을 만들어내 짤랑짤랑 흔들어대고 있었다. 김세연을 따라 탬버린을 흔드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걸 혼자만 볼 수 있는 서준이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웃어댔다.
“얘들 체력은 못 따라가겠는데요.”
“그러게요.”
그러면서도 활짝 웃으며 트로트 박자에 맞춰서 짝짝 박수를 치는 두 중년 배우였다.
그렇게 [화]팀의 뒤풀이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 * *
아침부터 숙소가 시끌벅적했다.
“버스 몇 시에 온다고?”
“2시 반이요!”
“그럼 그전에 저택 다 치우고 오자.”
“넵!”
아침 식사를 끝낸 [화]팀 팀원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저택과 숙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택 정리팀은 먼저 가구들을 분해한 다음 트럭에 옮기고 조명이나 음향 도구 등 촬영 도구까지 모두 옮겼다.
“미리 치워놔서 그런지 금방 끝나겠는데.”
“그러게요.”
촬영이 점차 마무리되면서 꾸며놓았던 저택을 원상 복귀하고 있던 소품팀 덕분에, 마지막 날인 오늘은 어제 촬영했던 방만 치우면 저택은 처음 봤던 그 상태 그대로 돌아갈 것 같았다.
한참 짐을 옮기고 있는데, 서준과 황도윤, 유서영이 백구와 함께 저택으로 오고 있었다. 손에는 박스가 들려 있었다.
“점심 드세요.”
“샌드위치예요.”
중간에 휴게소에 들를 예정이라 점심은 가볍게 먹기로 했다.
“벌써 점심시간이야?”
“시간 훌쩍 가네.”
저택 거실에 둘러앉은 팀원들이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먹기 시작했다. 서준은 한 달 전 모습으로 돌아간 거실을 둘러보았다.
“얼마나 남았어요?”
“이제 별로 안 남았어. 한 30분만 더하면 돼. 숙소는?”
“숙소도 점심 먹고 부엌 정리만 하면 돼요.”
활짝 열어놓은 문 너머, 눈 쌓인 마당에 백구가 뛰어다녔다.
“백구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네.”
“그러게.”
헤어진다는 건 아는지 모르는지 여느 때처럼 신나기만 백구와 달리, 팀원들의 눈이 촉촉해졌다.
* * *
이별의 시간은 금세 다가왔다.
커다란 버스가 숙소 주차장에 도착했다. 팀원들의 짐가방이 하나둘 버스에 실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백구가 꼬리를 팽팽 돌리며 숙소에서 숙소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팀원들의 뒤를 왔다 갔다 쫓아다녔다.
“으아아! 백구야!”
“백구 놔두고 어떻게 가지?!”
왕?
고개를 갸웃하며 귀를 쫑긋 세우는 백구의 귀여운 모습에 가방을 멘 팀원들이 백구를 품에 안거나 마구 쓰다듬거나 사진을 찍어댔다.
“……백구도 데려갈까?”
“여기 개 도둑 있어요!”
“농담이야! 농담!”
“아니, 진심 같았는데…….”
잠시 위험한 생각한 팀원들이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백구를 바라보았다.
“백구야. 잘 있어.”
“왕!”
“건강하고.”
“왕!”
“우리가 준 장난감 잘 가지고 놀아.”
“왕왕!”
“막 돌아다니다 다치지 말고. 차 조심해.”
“왕!”
울먹울먹하던 김세연이 소리쳤다.
“백구가 우리 말 다 알아듣나 봐!”
김세연의 말대로 백구는 정말 대답하고 있었다.
‘잘 가!’
‘응응!’
‘그럴게! 장난감 좋아!’
‘걱정 마!’
꼬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짖어대는 백구 대신, 서준이 입을 열었다.
“진짜로 대답하는 거 같은데요. 잘 가라고.”
“그치?!”
“백구야아!”
팀원들이 백구를 부둥부둥 안아댔다. 팀원들 사이에 끼인 백구가 싫어하는 기색 없이 환하게 웃는 듯한 표정으로 왕왕! 짖었다.
“이제 버스 타야 해.”
박우진의 말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도 하나둘 백구와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백구도 하나둘 버스에 탈 때마다 작별 인사를 하듯 왕왕 짖었다.
“백구 같은 개는 앞으로 없을 거야…….”
“그러게 말이에요…….”
버스 기사는 저게 웬 청승인가 하고 창문에 달라붙어 있는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버스에 팀원들이 오르고, 트럭에도 무대미술과 학생들이 탑승했다. 마지막으로 9인승 승합차에 하나둘 올랐다.
“다음에…… 으음…….”
백구의 앞, ‘그것’의 앞에 쪼그려 앉아 말을 하던 서준이 볼을 긁적였다. ‘그것’이 언제 힘을 다 모아 온전히 태어날지 모르니, 다음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60년 이내면 가능할 것 같은데…… 그 이상 넘어가면 힘들지 않을까?’
아무래도 인간의 수명은 100년 정도니, 서준이 건강하게 살아도 그쯤일 거다.
“뭐, 또 볼 수 있으면 보자.”
응응!
‘그것’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이 웃으며 백구 한 번, ‘그것’ 한 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의 속에 있는 자신의 마나가 느껴졌다. 한 사흘쯤 후에 ‘그것’이 잠들 듯싶었다.
‘백구로 변하는 바람에 마나가 많이 사라졌네.’
‘그것’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인지, 미련 없이 활짝 웃었다. 서준도 마주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준이 승합차에 오르고 마지막으로 숙소를 둘러보고 온 황지윤과 황도윤이 백구에게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
버스가 먼저 출발하고 그 뒤를 트럭이 따랐다. 서준이 탄 승합차가 맨 마지막으로 출발했다.
“백구. 뒤에 앉아 있네.”
소품팀 팀장의 말에 승합차에 타고 있던 서준과 팀원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천천히 멀어지는 [화]팀을, 백구가 길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아 보고 있었다.
버스에 탄 팀원들에게 보여줘야겠다고 미술팀 팀원이 사진을 찍었다. 눈동자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어. 백구 일어났다.”
“똑똑한 녀석이니까, 이제 집에 갈 모양이네.”
왕왕!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 잘 가! 즐거웠어!
바람결에 그런 목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다.
눈 때문에 천천히 이동하던 승합차가 순간 덜컹거렸다. 운전대를 잡은 무대미술과 4학년이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방금 전에…… 그거…… 나만 들었어?”
승합차 안도 조용했다. 팀원들의 눈이 크게 요동쳤다. 그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윤아! 조금 전에! 애들이! 이상한 목소리를 들었대! 나도 들었고!
-선배! 선배도 들었어요?!
서준이 이마를 짚었다. 마지막에 방심하고 말았다.
‘지금 와서 혼내기에는…….’
아마 ‘그것’은 남아 있던 서준의 마나를 다 써, 슬슬 잠에 빠지고 있을 터였다. 만날 수가 없으니 혼낼 수도 없었다. 알고 한 일이라면 참 대단한 것이겠지만,
‘……그렇게 똑똑할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신나서 작별 인사를 한 것 같았다.
“다 들었다고?!”
“이 대낮에 귀신이라니!”
“서준아! 너도 들었지?!”
아무래도 이번 촬영은 귀신 소동으로 끝날 것 같았다.
* * *
서준의 생각대로, 아무 생각 없이 작별 인사를 한 ‘그것’은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땅을 두 번 접어 장난감을 묻어둔 언덕으로 향했다. 눈이 조금 내려 흐려졌지만, 여전히 붉은 꽃 그림들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팔랑팔랑 나비처럼 꽃 그림 위를 걸어갔다. 발자국은 남지 않았다.
말을 하는 데 대부분의 힘을 쓴 터라, 이제 눈을 뜨고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작별 인사는 꼭 하고 싶었으니까!
히히 웃은 ‘그것’이 ‘무명 화가’가 쓰러졌던 자리, 그러니까 장난감을 묻어놓은 땅 위에 몸을 눕혔다. 그러자 땅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듯 ‘그것’의 모습이 흐려졌다. ‘그것’이 눈을 감았다.
함께 놀았던 인간들의 모습과 무시무시했지만 이제는 안 무시무시한 인간의 모습, 그리고 언덕의 눈 위에 그려지던 꽃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재미있었어…….
천천히 잠에 빠지고 있는 ‘그것’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마치 꿈 같은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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