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69화
정면에서 촬영하는 카메라 두 대와 언덕 위, 왼쪽에서 촬영하는 카메라 한 대가 액션이라는 외침과 함께 움직이는 서준을 촬영했다.
사박. 사박.
서준이 눈 위를 내디딜 때마다 팀원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카메라도 뒤쫓았다.
서준이 눈 위를 밟자, 흘러나온 붉은 피가 눈을 물들였다. 새하얀 두루마기와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박우진과 촬영팀이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까지의 촬영 때도 강렬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특히 화면 장악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눈빛이 보이는 클로즈업 샷도 아닌데, 풀 샷이라 자그맣게 보이는데도 그저 걸음 하나, 비틀거림 하나, 움직임 하나가 이렇게 강렬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일부러 힘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연기에 집중하고 있을 뿐.
온전히 ‘무명 화가’가 되어 그림을 그리는 배우 이서준.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박우진과 촬영팀은 자신도 모르게 넋 놓고 감상을 하느라 촬영을 잊을까 봐 정신을 차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정된 카메라를 빼고, 다른 두 카메라가 서준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였다.
자신의 말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서준을 보던 황지윤 감독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번개가 정수리에 내리꽂힌 것처럼 정신이 아찔했다. 상상했던 그대로, 아니, 상상했던 것보다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이건 정말로, 정말로 대단한 장면이 될 거야……!’
아직 바스트 샷도 클로즈업 샷도 멀었지만, 여기 있는 팀원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유서영과 미술팀 팀원들, 카메라 너머 마테오가 말없이 서준의 움직임을 쫓았다. 동그랗게 뜬 눈은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듯 보였다.
유서영과 미술팀은 지금 저기서 그려지고 있는 그림이 정말 자신들이 그린 스케치인가 싶었다.
서준과 함께 회의를 하고 구상을 하긴 했지만, 대부분 자신들이 그린 스케치였다. 그래서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 위에 그려지고 있는 그림의 느낌은 전혀 달랐다.
‘전체적인 모양은 스케치랑 같지만…….’
그러나 같은 대상을 두고 그려도 붓을 쥔 화가가 다르다면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들이 나오는 것처럼, 서준의 발아래에 그려지는 그림도 미술팀이 그렸던 것과는 달랐다.
꽃잎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듯 생생하고 애절하며 강렬하고 서글프다.
아마 지금 그리고 있는 서준, 아니, ‘무명 화가’의 움직임 때문이리라.
때로는 직접 발에 상처를 내 피를 만들어낼 정도로 강렬하면서도 겨우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흔들릴 정도로 연약한 움직임이, 발자국마다 그 느낌을 더하고 있었다.
‘물감도 달라진 것 같아…….’
미술팀과 유서영이 열심히 만들었던 빨간색 물감.
새하얀 눈에 번져서 그런지 예상보다 더 붉게 반짝이고 있는 듯 보였다.
아니. 아니다.
저건 정말로 서준의 생명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서준이 연기하는 ‘무명 화가’가 영화 속에서 정말로 온 생명을 쏟아붓듯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와…….’
소리 없는 탄성과 함께 온몸의 털이 삐죽삐죽 서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기대는 가지고 있었다.
눈 위에 그리는 연습을 하면서도 팀원들과 웃으면서 멋지게 나오겠다고 떠들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분명 그림을 보면 감탄할 거라고.
그런데 이건 상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모두 저곳에 서 있는 화가, 아니, 배우 때문이었다.
그림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평범한 빨간색 물감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도…… 지금 느껴지는 이 차가운 바람과 묵직한 분위기마저…… 서준이 있어서, 아니, 서준이 연기하는 ‘무명 화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서준의 연기가 그림을 더욱 빛내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눈을 떼지 못하게, ‘무명 화가’가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유서영과 미술팀이 넋 놓고 보고 있는 것처럼 다른 팀원들도 모두 입을 쩌억 벌리고 서준의 연기를 바라보았다. 배우 김성식과 정은미도, 권세아와 ‘그것’도 같은 모습이었다.
특히 ‘그것’은 어느새 실체화와 둔갑술을 풀고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갔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인간이 볼 수 없는, 이 그림에 남아 있는 선기를 알아본 것이었다.
반짝이는 생명력에 붉은 꽃들도 반짝반짝 빛났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그것’의 영혼 깊은 곳까지 깊게 남을 정도로 경이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마침내, 모든 꽃을 완성한 서준이 풀썩 쓰러졌다. 쓰러져 웅크려 있는 서준의 뒤로 보기 좋게 두루마기가 펼쳐졌다. 마치 흰나비의 날개처럼.
적막이 흘렀다.
배우 이서준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상태에서도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 공기, 분위기. 모든 것이 서준의 연기에 장악된 것 같았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컷! 오케이!”
황지윤 감독이 그 어느 때보다 큰 목소리로 외쳤다.
……와아……!
하고 소리 없이 흘러나오던 탄성에 소리가 생겨났다. 저절로 두 손바닥이 마주쳤다.
짝짝짝!!
감탄과 함께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몸을 일으켜 옷에 묻은 눈을 털고 있던 서준이 환하게 웃었다.
“서준아! 얼른 내려와! 발 시리겠다!”
“네!”
황도윤의 외침에 서준이 눈 위에 그려진 그림을 잘 피해서 아래로 내려왔다.
“여기 앉아. 여기!”
“난로 켜줄게!”
팀원들에 의해 난로 앞으로 이동된 서준이 자리에 앉고 신발을 벗고 몸과 발을 녹이자, 눈만 반짝이며 기다리고 있던 팀원들이 열렬히 감상을 내뱉었다.
“서준아! 너 진짜 잘하더라!”
“그림도 잘 그리다니!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야!”
“나 진짜 보다가 울 뻔했어!”
“하하. 감사합니다.”
어느새 실체화를 푼 ‘그것’도 눈을 반짝이며 두 팔을 열심히 움직이며 제 생각을 표현했다. 아직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주위에 풀풀 날리는 기운에 얼마나 감명 깊게 봤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 그만하고 클로즈업 샷 촬영 준비하자!”
서준이 몸을 녹이고 있는 동안, 한바탕 감상을 쏟아낸 팀원들은 클로즈업 샷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큰일이네.”
카메라를 옮기고 있던 박우진의 혼잣말에 영화과 4학년이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뭐가? 뭐 잘못 찍었어?”
그 말에 촬영 기구를 옮기고 있던 팀원들과 김세연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마치 절규를 할 것처럼 변했다. 박우진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런 연기를 찍으면 다른 배우들 연기는 어떻게 찍나 싶어서 말이야. 연기력 있는 배우 찍으려면, 우리 아직 한참 경력 쌓아야 하잖아.”
“……그러네?”
“그리고 연기력 좋다는 배우들 중에서도 서준이만큼 하는 배우를 찾기도 어려울 것 같고. 이러다 눈만 높아질 것 같은데…….”
박우진의 말에 영화과 학생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클로즈업 샷 촬영 전, 서준이 미술팀이 준비한 빨간색 물감에 손을 댔다. 어느새 백구로 둔갑한 ‘그것’이 신기한 눈으로 물결처럼 번지는 선기를 바라보았다.
[(선/제작) 라리오디 꽃의 이슬-중하급-이 발동됩니다.]
[(선/제작) 라리오디 꽃의 이슬-중하급-]
높은 산꼭대기에서 피는 라리오디 꽃의 이슬입니다.
태양 빛을 가득 담은 라리오디 꽃의 이슬에는 생명력이 가득합니다.
사용법 : 액체가 담긴 통을 터치합니다.
보통은 포션의 재료로 사용되는 이슬이지만, 서준이 물감에 쓰기로 했다.
조금 전 촬영에서 썼던 물감에도 이 능력을 사용했다. 팀원들이 그림에서 받은 강렬한 느낌의 원인 중 하나였다.
‘효과가 좋아.’
제작이 완료된 물감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그려진 그림을 떠올린 서준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무명 화가’의 생명이 담긴 것처럼 강렬한 그림이었다.
그사이 능력이 깃든 물감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백구가 잠시 서준의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분홍색 혀를 낼름-
“먹으면 안 돼.”
“끼잉.”
물감도 천연 물감이고, ‘그것’도 진짜 백구가 아니지만.
서준은 단호하게 선기가 섞인 물감을 맛보려고 하는 ‘그것’을 막아섰다.
* * *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클로즈업 샷 촬영이 시작되었다. 클로즈업 샷에서는 표정은 물론이고 손과 발, 옷자락 등 세세한 것까지 찍을 예정이었다.
발을 찍을 때는 신발을 벗고 진짜로 눈에 맨발(발바닥에 얇은 밑창을 붙이긴 했다)을 디뎠다. 차가운 눈에 서준이 동상이라도 걸릴까, 싶어 팀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촬영에 집중했다.
파삭-
하고 서준의 발아래, 소품팀이 만든 나뭇가지가 부서졌다. 동시에 넣어둔 물감이 흘러나왔다. 서준이 능력이 담긴 붉은 물감은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눈 위를 걷기 시작하는 서준의 맨발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조급하게 걷다가 힘이 빠진 듯 비틀거리기도 하고, 핏줄이 보일 정도로 힘껏 힘을 주기도 했다. 그 아래 차가운 눈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보기만 해도 얼어버릴 것같이 시리게 보이는 모습이었다.
“컷! 오케이!”
뒤를 이어 표정을 촬영했다.
카메라가 서준의 가까이에 다가갔다. 서준이 풀 샷을 찍을 때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대로 복사한 것처럼 보였다. 풀 샷도 인상 깊었지만 표정 연기도 그 못지않았다.
황지윤과 김세연, 그리고 팀원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모니터에 선명한 ‘무명 화가’의 표정이 보였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눈썹, 불안한 듯 떨리다가 다시 강렬해져 빛나는 눈동자, 저도 모르게 깨문 입술과 희미한 미소. 떨리는 근육과 악다문 턱. 분노로 가득한 표정과 즐거운 듯 웃는 표정, 그리고 묵직한 슬픔이 내려앉는 표정까지.
마지막으로 오른쪽 얼굴이 눈에 파묻힌 서준의 얼굴이 확대된다.
창백한 얼굴에 나비의 날개처럼 나풀 내려앉는 속눈썹, 그리고 그 아래로 흐르는 눈물. 슬픔이 가득하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맴돈다.
“……컷! 오케이!”
일련의 감정 연기를 모니터로 보고 있던 황지윤이 외쳤다. 동시에 숨도 안 쉬고 구경하고 있던 팀원들이 으아아,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얼굴 근육이 그렇게 움직이는 거지? 난 경련 일어날 것 같은데.”
“저도요.”
가장 열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말대로 배우들과 연기과 학생들이었다. 휴대폰 카메라를 보며 서준의 연기를 따라 얼굴 근육을 움직여보지만 영 자신의 몸이 아닌 듯 말을 듣지 않았다.
이래서 이서준 이서준 하나 보다.
다른 학생들도 다르지 않았다.
“하…… 진짜 다른 영화는 어떻게 찍냐.”
“그러게요.”
그러면서도 모니터에 찍힌 서준의 연기를 보며 저도 모르게 히죽히죽 웃는 영화과 학생들과 연신 감탄을 내뱉는 미술과, 무대미술과 학생들.
“다음 촬영 준비할게요!”
그렇게 NG 한번 없이 클라이맥스의 촬영이 모두 끝났다.
* * *
숙소로 돌아온 [화]팀은 언제나처럼 식당에 모여 커다란 스크린으로 그날 촬영했던 오케이 컷을 돌려보았다. 피곤한 사람은 빠져도 된다고 해서 식당이 가득 찬 적이 없었는데 오늘만큼은 그 누구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와아…….”
“스크린으로 보니까 또 다르네요.”
여운에 잠겨 감상하듯 서준의 연기를 보고 있던 팀원들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것 같았다.
“마테오가 그러던데 이대로 어디 행위예술제 같은 곳에 내도 될 것 같다고 하더라.”
“진짜 상 받을 것 같긴 해.”
서준도 화면에 나오는 자신을 보며 만족했다.
열심히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어디 한구석 아쉬운 부분 없이 최대한 떠올렸던 그대로 찍을 수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연기한 후에는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이제 남은 건…….’
서준과 팀원들의 시선이 감독에게로 향했다.
“이제 편집만 잘하면 되겠네.”
“파이팅! 황지윤!”
저거 망치면 큰일, 이라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팀원들에 황지윤은 좋으면서도 걱정 가득한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방으로 돌아온 권세아가 고민에 빠졌다.
‘……어쩌지…….’
영화 [화]의 음악을 맡고 있는 권세아는 처음으로 막막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촬영할 때마다 장면과 어울리는 분위기의 음악을 순조롭게 떠올렸는데, 이번만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강렬하고 연약한 분위기를 오가는 음악이 없는 건 아니었고 만들 수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여기에 어울리는 음악이 생각이 나질 않아.’
이 굳셈과 가녀림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권세아의 머릿속에 수많은 곡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눈앞에 서준이 연기하는 모습이 저절로 펼쳐졌다. 너무 강한 음악은 장면의 집중을 망칠 거고 너무 약한 음악은 감상에 방해가 될 거다.
‘그렇다면 차라리…….’
음악을 넣지 않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온전히.
서준이 연기하는 ‘무명 화가’와 ‘무명 화가’가 온 힘을 다해 그려내는 그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음악이 없어도 아무런 부족함도 느끼지 않고 감상했던 자신처럼 말이다.
‘감독님하고 이야기해 봐야겠다.’
고 생각하던 권세아가 웃고 말았다.
영화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고 싶어서 진로를 바꿨는데, 정작 정말로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고 싶은 가장 멋진 장면에서 음악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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