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67화
“백구야! 앉아!”
“왕!”
시내에서 사 온 간식에 백구가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눈빛은 초롱초롱했고 꼬리는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엎드려!”
“굴러!”
“점프!”
“빵!”
황도윤과 선배들의 말에 엎드렸다가 굴렀다가 뛰었다가 깨꼬닥 죽은 척까지 하는 백구에 구경하던 팀원들은 저도 모르게 짝짝 박수를 쳤다.
“쟤 진짜 똑똑하다니까. 아까 너 데리고 오라니까 진짜 너 찾아간 것 봐.”
“그러게.”
동기의 말에 서준이 강아지 간식을 먹으며 꼬리를 붕붕 흔들고 있는 백구를 보았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진작 이런 방법을 쓸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팀에도 활기가 돌았다.
일할 스태프가 적은 데다가 식사나 빨래 등 숙소의 일도 돌아가면서 해야 했기 때문에 조금 지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백구 덕분에 다들 힘을 얻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촬영하러 가죠.”
황지윤의 말에 팀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당을 뛰어다니던 백구도 저택으로 향하는 팀원들을 따라 쪼르르 움직였다.
“근데 이번 겨울에는 감기에 한 번도 안 걸렸네.”
“저도 겨울마다 감기 꼭 걸리는데…… 팀원들 중에도 아픈 사람도 없구요. 미끄러져서 다친 사람도 없죠?”
이렇게 눈이 내린 상황이면 누구 하나는 미끄러져서 다칠 만도 한데 서른두 명의 [화]팀 팀원들은 모두 멀쩡했다.
“오! 그러네. 나도 눈만 오면 미끄러지는데 여기서는 한 번도 안 미끄러졌어!”
“그러게. 카메라 부술까 봐 걱정했는데.”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박우진의 말에 촬영팀 4학년이 소름이 돋은 듯 부르르 떨었다.
서준이 촬영팀 4학년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다른 팀원들은 조금 줄어 있는 새하얀 양털이, 촬영팀 4학년 선배는 반이나 줄어 있었다. 촬영팀으로 계속 촬영에 참여한 걸 생각하면 큰 사고는 아닐 거고 기껏해야 감기나 미끄러짐 정도의 불행을 흡수했을 텐데 벌써 저만큼이나 줄어 있었다.
‘그럼 저 선배는 얼마나 넘어진 거지?’
1보 1 미끄러짐이 아닐까.
지금도 그냥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양털이 조금 줄어들었다. 또 미끄러질 뻔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미끄럼 방지 능력이나 하나 드리자.’
저택으로 이동할 때까지 무려 5번이나 넘어질 뻔한 촬영팀 선배의 모습에 서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화]팀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똘똘한 백구는 또 어딘가로 놀러 가고 인간화한 ‘그것’이 뽀르르 달려왔다. 그리고는 백구의 모습일 때 가장 자주 놀았던 팀원들 사이를 신나게 돌아다녔다. 와아아!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슬쩍 본 서준이 작게 웃고는 의상을 갈아입고 분장실로 향했다.
“오른손부터 할게.”
“네.”
서준의 오른손을 테이블에 올려둔 미술팀 팀원이 물감을 사용해 상처와 흉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저번 붕대를 갈았던 장면에서 팔뚝까지 들어냈던 것과 달리, 이번 장면에서 노출되는 부분은 손과 손목까지였다.
미술팀 팀원이 상처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그려나갔다.
“진짜 상처가 났다가 아문 것 같아요.”
“자료를 얼마나 찾아봤는지 몰라. 공부도 많이 했고. 특수분장팀들이 너튜브에 올려놓은 영상도 봤어. 할리우드 미러팀도. 이스케이프 좀비 분장은 지금 봐도 진짜 잘했더라.”
반가운 이름에 서준이 미소를 지었다.
오른손이 내려가고 왼손이 올라왔다. 미술팀 팀원의 붓이 지나갈 때마다 상처와 흉터들이 늘어갔다. 프로에 비해서는 부족하지만 스치듯 보면 누구라도 착각할 만한 분장이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잘 맞는 것 같아. 재밌네.”
회화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한예대 미술과 학생이라고 전부 미술을 하며 살 수는 없는 일이니, 이런 쪽으로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분장이 끝나고 서준이 밖으로 나갔다.
서준이 설명해 준 덕분에 대충 인간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된 ‘그것’이 서준을 발견했다. 동그란 눈동자가 ‘준비 끝났어?’ 하고 묻는 듯했다.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약간의 힘을 발휘해 옆에 있는 황지윤의 옷을 잡아당겼다.
촬영팀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감독 황지윤이 갑작스러운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준비를 끝낸 서준이 나오고 있었다.
“서준아. 준비 끝났어?”
“네.”
“그럼 바로 촬영 시작하자.”
‘그것’이 뿌듯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 * *
“레디, 액션!”
새해가 되고, 1월이 다 끝나가는데 그림 도구는 오지 않았다. 더 많이 쌓인 눈을 쓸어내며 민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이씨 아저씨를 닦달하지도 못하는 것이,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들르던 사람들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열리지 않는 저택 대문을 바라보며 민한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바쁘긴 엄청 바쁜가 봐요.”
“곧 오겠죠.”
민한과 달리, 도련님은 편안한 얼굴로 마당을 산책하고 있었다. 손의 떨림은 여전했지만, 붕대를 풀고 나서는 제법 여유로워진 듯했다.
빗자루로 자잘한 눈을 치우던 민한의 시선이 저절로 도련님의 손을 스쳐 지나갔다. 상처투성이의 손. 새하얀 붕대도 마음에 걸렸지만, 저 상처도 보기만 해도 안타까웠다.
도련님이 마음 쓰지 않게 최대한 담담히 지나치려고 해도 계속 손의 상처들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일이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고 도련님은 아는 사람이니 괜히 원망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그런 민한의 마음을 알았는지 도련님이 빙그레 웃었다.
“도련님! 춥습니다. 이제 들어오세요!”
이씨 아저씨가 저택의 문을 열며 말했다.
그때였다.
쿵! 쿵!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 달리 빠르고 큰 소리였다.
오랜만의 방문이다.
그림 도구가 왔나, 하고 민한이 반색하며 움직이려는데 이씨 아저씨가 빠르게 걸어가며 말했다. 조금 표정이 굳은 것 같기도 했다.
“민한아. 도련님 데리고 들어가 있어.”
“네? 네, 네.”
눈을 끔벅이던 민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도련님을 바라보았다. 도련님은 그대로 얼어붙은 듯 보였다.
“……도련님. 들어가죠.”
“……네.”
뒤를 슬쩍 보던 민한과 도련님이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창문으로 대문의 상황이 보였다.
“저번에 붓하고 벼루 사다 준 보부상이에요.”
“아.”
문을 두드린 사람은 민한에게 붓과 벼루를 사다 주었던 덩치 큰 보부상. 몇 번 봤는데도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말을 못 하는 건지도 몰랐다.
보부상에게서 받은 듯한 종이를 읽는 이씨 아저씨가 몇 번이고 되묻는 듯했다. 보부상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자기로 감싸진 무언가를 건넨다. 민한의 얼굴이 단번에 환해졌다.
“그림 도구가 왔나 봐요!”
기뻐하는 민한과 달리, 도련님의 시선은 이씨 아저씨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 * *
민한은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림 도구가 도착한 그 날.
저택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저택 밖까지 나가 산책하던 도련님은 다시 방에 틀어박혔고, 이씨 아저씨와 고성댁 아주머니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행동은 다르지만 다 같은 마음으로, 생각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분위기.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민한은 그 기류에 끼지 못했다. 평소처럼 도련님께 삼시 세끼 가져다주고 마당을 쓸고 잡일을 도울 뿐이었다.
아홉 살짜리 꼬마가 된 것 같다.
엄마 아빠의 부름에 집으로 돌아가던 형 누나들을 바라보던 그때가.
친절하긴 하지만 약하게나마 외부인 취급을 받던 그때가.
“근데 생각해 보면 이번 겨울에 잠깐 일하러 온 거니까…….”
도련님도 언젠가 한양으로 돌아갈 거고, 자신은 다시 봄이 되면 마을로 돌아가 다시 이 저택에 들어오지 못할 거다.
그럼 또 자신은 혼자 지내겠지.
……조금.
아니, 많이.
아주 많이.
민한은 쓸쓸해졌다.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당을 쓸고 있는데,
쿵! 쿵!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씨 아저씨는 뒷산에 가셨고 고성댁 아주머니도 바쁘셨다. 어떻게 하나, 허둥지둥대고 있는 민한에게 제법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씨! 거 이씨 없소?!”
편지를 배달해 주는 남자였다.
“아저씨 뒷산에 가셨어요!”
“민한이냐? 그래? 그럼 이것만 주고 가마.”
“어, 저기 문, 문 열어…….”
드리고 싶은데, 이씨 아저씨가 단단히 주의를 주던 것이 떠올렸다. 자기가 없을 때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던. 머뭇거리는 민한의 고민을 안 듯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됐다! 위로 던지마! 며칠 후에 또 올 거니까 이씨한테 저택에 붙어 있으라고 해라!”
민한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휙 하고 위에서 편지가 떨어졌다.
“아저씨?!”
“난 이만 가 보마!”
삭삭삭!
진짜로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눈에 편지가 젖지 않게 얼른 주운 민한이 어안이벙벙한 얼굴로 대문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눈을 끔벅이던 민한의 시선이 편지로 향했다. 가벼운 편지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듯했다.
여기에도…… 있을까.
세 사람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민한의 손은 편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날.
그림 도구와 함께 전해진 편지를 보지 못했던 게 민한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았다. 자신도 세 사람이 아는 것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도움이 되고 싶었다.
도련님께 한글도 배운 지금.
민한은 편지를 읽을 자신이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킨 민한이 편지 봉투를 열었다. 얇은 종이 몇 장이 나왔다. 가장 긴 글이 적혀 있는 종이를 살펴보았다.
“……은……에……의……임과…….”
중얼거리던 민한이 혀를 깨물었다.
한자, 한자 그리고 한자!
배우지 않은 한자가 가득한 편지에, 조사밖에 읽을 수 없었던 민한이 대문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컷! 오케이!”
* * *
오랜만의 저녁 촬영이었다.
“우리 야식으로 고구마 먹어요!”
“오오오!”
촬영보다는 야식에 진심인 것 같은 의견에 얼른 시내에서 고구마를 상자째로 사 온 팀원들. 고구마와 함께 먹을 김치도 사 왔다. 김장했던 김치는 벌써 다 먹어버린 상태였다.
“백구, 고구마 줘도 되려나?”
“괜찮지 않을까요? 강아지들 고구마 많이 주잖아요.”
“그래도 고구마가 몸에 안 맞는 강아지도 있다던데…….”
저택으로 향하는 길.
팀원들의 이야기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백구가 열심히 꼬리를 흔들었다. 얼마나 격한지 엉덩이까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르신이 그러던데, 백구 고구마 좋아한대요.”
한 번도 안 먹어봤겠지만, 달달한 고구마를 좋아할 것 같았다. 사람이 먹는 밥과 반찬도 잘 먹는 인외의 존재니 배탈 날 일도 없을 거고.
“오! 그래?”
서준의 말에 팀원들이 반색했다. 왕왕! 백구가 신나게 짖어댔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어디 가면 안 된다?”
왕왕!
날씨가 추우니 저택 안으로 백구를 데리고 들어왔다. 물론 출입구까지만이었다.
오늘 촬영에 필요한 팀원들은 곧바로 촬영 준비를 시작하고 배우들은 의상을 갈아입었고, 손이 남는 팀원들은 저택 내 현대식 부엌으로 가 고구마를 쪘다.
“호스! 호스 본 사람?”
오늘 촬영할 장면의 배경은 비 오는 날.
진짜 비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날씨를 보면 비가 아니라 눈이 내릴 것 같아서 호스를 이용해 비처럼 뿌릴 생각이었다.
“호스 어딨…… 여깄네.”
발밑에 있는 호스에, 민망한 듯 소품팀 팀원이 턱을 긁적였다. 아니, 진짜 없었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긴 한데, 또 집에서 엄마가 물건을 찾는 걸 보면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여기 있잖아. 여기! 잘 좀 찾아보라니까!’
‘……아니, 진짜 내가 찾을 땐 없었는데…….’
어쩐지 굉장히 리얼하게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합숙에 필요한 짐을 쌀 때 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 같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호스를 챙겨 이동하는 소품팀 팀원과 그 옆에서 어깨를 으쓱이며 뿌듯하게 웃는 ‘그것’.
서준이 픽, 웃고 말았다.
입구에 엎드려 있는 백구,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그것’.
어느새 분신술까지 터득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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