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566화 (566/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66화

풀샷 촬영 중 갑작스럽게 일어난 눈바람.

황도윤과 함께 몸을 돌려 눈바람을 피하던 서준은 그 안에 깃든 힘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조명 위에 앉아 있던 ‘그것’.

당장에라도 달려가 혼을 내고 싶었지만, 풀샷 촬영이라 거리가 좀 있었다.

‘일단 촬영부터 하자.’

풀샷 촬영이 끝나면 바스트 샷 촬영까지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 그 안에 혼을 내주면 될 거다.

멀리서 황지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바람…… 컷! NG! 다시 찍을게요!”

또 이런 일을 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 서준은 일부러 선기와 마기를 평소보다 많이 내뿜었다. 옆의 황도윤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마나의 몸집을 부풀렸다.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단호한 경고.

그걸 ‘그것’도 느낀 모양이었다.

크게 몸을 움찔하더니 조명에서 내려와 허둥지둥하다가 팀원들 중 리더로 보이는 황지윤의 뒤로 숨는 것이 보였다.

……참.

생존본능은 남아 있는 듯했다.

“컷! 오케이!”

“바스트 샷 촬영 준비하겠습니다!”

팀원들이 분주해졌다.

멀리서 촬영한 풀샷과 달리, 바스트 샷은 걸어가는 ‘민한’과 ‘무명 화가’를 따라 움직여야 했다.

“지윤 누나. 전 전화 좀 하고 올게요.”

“그래.”

서준이 황지윤에게 말하면서 ‘그것’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달랑달랑 매달린 ‘그것’이 눈망울을 글썽거리며 몸을 움츠렸다. 일렁이던 마나는 예전에 사라졌는데 왜 이렇게 무서운지 모르겠다.

간이 천막에서 조금 떨어진 곳.

서준이 전원이 꺼진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입을 열었다. 시선이 우물쭈물대는 ‘그것’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서준을 닮은 눈망울이 눈물로 그렁그렁했다.

“왜 그랬어?”

코를 훌쩍인 ‘그것’이 몸짓으로 최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절박함이 담겼다.

작은 눈바람, 기뻐하는 인간들, 좋아, 밥 먹었어, 눈바람, 또 기뻐해, 좋아.

수빈이와 은수의 어린 시절을 거치면서 는 이해력으로 ‘그것’의 의도를 대충 알아차린 서준이 이마를 매만졌다.

‘뭐, 보통 그렇지…….’

인외人外

인간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들이니 인간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하물며 촬영이나 카메라 같은 건 더 그랬다.

‘방해가 될 거라는 건 몰랐겠지. 게다가…….’

마냥 혼을 내기엔 ‘그것’이 어리기도 했다.

‘실수이기도 하고 다친 사람도 없으니까.’

다시 생각해 보니, 나름대로 힘을 조절한 것이 느껴졌다.

훌쩍이는 ‘그것’을 보던 서준이 ‘그것’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것’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앞으로는 그러면 안 된다?”

응응!

부드러운 서준의 목소리에 ‘그것’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렇게 인간이 좋은 거야?”

응응응!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는 ‘그것’. 눈동자가 초롱초롱하다. 그에 인간들을 좋아했던 전생들이 떠올랐다.

‘지금도 꽤 좋아하기도 하고.’

서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할래?”

서준의 제안에 ‘그것’이 귀를 기울였다.

* * *

그 이후, 바스트 샷 촬영이 이어졌다.

눈바람을 걱정했지만, 다행히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레디, 액션!”

민한은 마당만 산책하던 도련님과 함께 처음으로 저택 밖으로 나왔다.

이곳의 추위에 익숙해 조금 두껍게 입은 민한과 달리, 도련님은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두꺼운 옷을 입히고 그것도 모자라, 저택 안에 있던 겨울용 흰색 두루마기까지 입고 있었다. 모두 고성댁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요양 와서 여기까지 나오는 건 처음이죠?”

“네. 진작에 나와볼 걸 그랬어요.”

민한이 차분히 걷는 도련님을 바라보았다. 항상 서양 옷만 입고 있어서 몰랐는데, 한복도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자신이 서양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으. 얼른 고개를 저은 민한이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가면 마을이 있고요. 저쪽 길로 가면 더 큰 마을이 있어요. 며칠 후면 거기서 장도 선대요.”

눈이 얕게 쌓인 길을 두 사람이 밟을 때마다 사박사박 소리가 났다.

무명 화가는 그 소리에 더욱 집중했다. 이미 정리가 된 마당의 눈을 밟는 것과 달리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눈을 밟는 건 조금 재미있었다. 차가운 바람에 입에서 나온 새하얀 연기가 흩어졌다. 얼굴은 물론이고 몸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추위마저 한양과 다른 것 같았다.

“옆집에서 개를 키우는데…….”

신나게 떠드는 민한은 들뜬 듯 보였다.

무명 화가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까지 얼어붙는 기분이었지만 왠지 상쾌했다.

이곳에 왔던 첫날과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걱정을 내려놓은 듯 어깨가 가벼우면서 마음이 차분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절망스럽던 두 손의 떨림도 점점 잦아드는 것 같았다.

그게 다 민한과 저택에 있는 두 사람 덕분이라, 감사하는 마음뿐이었다.

“이러다가 눈 다 녹으면 올 것 같다니까요.”

수다의 끝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그림 도구에 대한 것이었다.

한양에, 아니면 상단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여전히 사람들은 오고 가는데 그림 도구만 영 도착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하. 천천히 와도 괜찮아요.”

도련님의 말에 민한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도 도련님 그림을 보고 싶단 말입니다.”

도련님이 요양을 끝내고 다시 돌아가기 전에.

지금 상태를 보면 한양에 가서도 충분히 재활 치료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시간이 예상보다 이를 것 같아 민한은 조금 초조해졌다.

‘아니, 도련님한테는 좋은 소식이긴 한데…….’

마을에 또래는 없고, 어렸을 적 어울리며 놀던 이들은 모두 마을을 떠나 밖으로 나갔다. 마을 어른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지만 역시 또래와는 조금 다른 느낌.

정도 많이 들어, 도련님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동생 같고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기대하는 만큼 잘 그리진 못할 거예요.”

도련님이 두 손을 쥐었다 폈다. 여전히 손가락 끝까지 붕대로 감싸져 있었다.

“뭘 그리든 제 눈엔 멋져 보일걸요. 어…… 그러니까 캔, 버스에 점 하나만 찍어도요.”

자신에게 배운 단어를 사용하며 말하는 민한의 진심이 가득 담긴 말에 도련님이 작게 웃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작은 언덕 같은 곳에 다다랐다.

“여기서 돌아갈까요?”

저택에서 그다지 멀지는 않지만, 첫날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걸어와도 힘들 텐데 눈이 쌓인 길이라 힘은 두 배로 떨어졌을 거다.

민한의 말에도 도련님은 답이 없었다. 도련님은 멍하니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들이 서 있는 언덕 가운데, 텅 비어 눈만 쌓인 곳.

아.

토박이라면 토박이인 민한이 입을 열었다.

“10년 전인가 9년 전에 산불이 났었는데 다행히 저기만 홀라당 타 버렸어요.”

“……9년 전이요?”

무명 화가가 작은 나무 하나 보이지 않는 빈 곳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는 나무들과 대비돼 완전히 죽은 공간처럼 보였다.

“근데 왜…… 나무가 없죠?”

9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면 어느 정도 자란 나무들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공간에 아무것도 없었다. 쓰러진 죽은 나무 기둥들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게 이상한 일이에요. 나무를 옮겨 심어도, 꽃을 옮겨 심어도, 꽃씨를 뿌려도 다 죽어버렸거든요. 산신이 노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제사도 지냈는데 안 되더라구요. 그 이후로는 그냥 내버려 두고 있어요. 다른 곳은 다 괜찮아서요.”

민한이 별것 아닌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예전엔 꽃이 많이 피던 곳이었는데,”

무명 화가의 시선이 그곳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앞으로 다시 꽃이 필 일은 없겠죠.”

* * *

“컷, 오케이!”

오늘 촬영이 모두 끝났다.

초반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조금 걱정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 잠잠해서 무사히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럼 우리 먼저 갈게.”

“네!”

이동 수단이 9인승 승합차뿐이라, 저녁 식사 당번이 가장 먼저 출발하기로 했다.

“바람이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야.”

황도윤의 말에 서준의 무릎에 앉아 발을 동당거리고 있던 ‘그것’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러려고 그랬던 게 아니었다.

서준이 웃으며 스치듯 시무룩한 ‘그것’의 어깨를 토닥였다.

시간은 흘러, 모두 저녁을 먹고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언제 사 왔는지 킬킬거리며 눈오리 집게로 눈오리를 공장처럼 생산하고 있는 황도윤과 팀원들, 촬영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황지윤, 김세연과 미술팀, 김성식 정은미에게서 촬영장 이야기를 듣는 학생들.

서준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산책 좀 다녀올게요.”

“해 벌써 졌는데?”

연기과 2학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 그대로 밖은 깜깜했다.

“가로등도 있으니까 괜찮아요. 요 앞에만 잠시 다녀올게요.”

“그래. 알았어. 휴대폰 꼭 챙겨가.”

“네.”

하고 나갔던 후배가,

왕왕!

개와 함께 돌아왔다.

……?

밖에 있던 학생들과 개 짖는 소리에 방에서 나온 학생들이 대문 앞에 서 있는 서준과 신이 나서 방방 날뛰는 새하얀 진돗개를 바라보았다.

“……서준아. 그 개는 뭐야?”

“그게 산책하다가 마을 어르신을 만났는데…… 그 집에서 키우는 진돗개예요. 얘가 절 잘 따라서 잠시만 놀아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놔두면 알아서 집에 돌아간대요.”

학생들의 눈이 진돗개에게로 향했다.

진돗개는 시선을 받으니 더욱 신이 난 듯 보였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 위에 ‘알아서 집에 옵니다.’ 하고 적혀 있는 종이도 붙어 있었다.

“오! 나 이런 개 TV에서 본 적 있어.”

“저도요.”

밖에서 뛰어놀다가 알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시골 개.

실제로 보니 굉장히 똘똘해 보였다.

개를 좋아하는 황도윤이 반색하며 진돗개를 쓰다듬었다. ‘그것’은 인간의 손길에 인외 존재의 체면은 어디다 버려뒀는지 열심히 꼬리를 흔들어댔다.

“이름은 뭐야?”

“백구래요.”

“진짜 시골 개네.”

직관적인 이름부터 시골 개다웠다.

황도윤이 웃음을 터뜨리며 백구를 만져댔다. 그 손길에도 짖지도 않고 얌전한 백구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몰려왔다.

“옷 입히신 거 보니까 되게 좋으신 분인가 봐요. 보통은 안 입히시잖아요.”

“지금도 산책하던 중이었던 것 같고.”

자연스럽게 지팡이를 짚고 걷는 노인과 방방 날뛰는 강아지가 떠올랐다. 배경이 눈밭만 아니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질 풍경이었다.

“사방이 눈이라 고생 많으시겠어.”

“그러게요.”

서준이 팀원들을 살폈다.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는 팀원이 있다면, 저렇게 좋아하는 ‘그것’ 아니 백구에게는 미안하지만, 만남은 오늘이 끝이었다.

“다음엔 강아지 간식도 사 와야겠다.”

“장난감도 사요! 돈은 제가 낼게요!”

다행히 개를 싫어하는 팀원은 없었다.

시끌벅적해진 팀원들과 그 가운데에서 잔뜩 귀여움 받고 있는 백구를 보던 서준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실체화하는 바람에 내 마나가 빨리 줄어들어서…… 우리가 돌아갈 때쯤이면 다시 잠이 들겠지만.’

희고 긴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리며 기뻐하는 백구, 아니, ‘그것’을 보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 ‘그것’이 실체화하고 둔갑한 모습인 ‘백구’는 [화]팀의 귀염둥이가 되었다.

* * *

“쟤 완전 똑똑한데요?”

밤이 되자 숙소를 나갔던 백구는 아침이 되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팀원들과 한바탕 놀다가 저택까지 따라왔다.

저택 안까지 들어올까 봐 걱정했는데, 똑똑한 백구는 잠시 문밖을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더니 이내 흥미를 잃은 듯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2층 창문으로 멀어지는 백구를 바라보던 연기과 1학년이 말을 이었다.

“진짜 한두 번 돌아다닌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말이야. 어디로 갔을까?”

백구가 사라진 것을 본 연기과 1학년 형(재수생)의 말에 서준이 작게 웃었다.

‘형 옆에 있어요.’

‘그것’은 어느새 실체화를 풀고 인간의 모습으로 팀원들 사이에서 빨빨빨 돌아다니고 있었다.

* * *

“레디, 액션!”

도련님의 방.

침대에 걸터앉은 도련님이 오른팔을 내밀었다. 이씨 아저씨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도련님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도련님의 두 손은 팔뚝 중간부터 다섯 손가락 끝까지 붕대로 감싸져 있었다. 민한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 답답해 보이던 붕대를 오늘 드디어 푸는 것이었다.

이씨 아저씨는 천천히 붕대를 풀었다. 새하얀 붕대에는 더 이상 피가 묻어나지 않았다.

“상처가 많이 좋아졌어요.”

더 이상 자해를 하지 않아서.

이씨 아저씨가 내뱉지 않은 말을 짐작할 수 있어, 도련님은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네. 세 분 덕분이에요.”

민한에게도, 이씨 아저씨에게도, 고성댁 아주머니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가득했다.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씨 아저씨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붕대를 풀어갔다.

마침내 두 팔의 붕대가 모두 풀어졌다. 도련님이 조용히 맨살을 드러낸 두 팔을 바라보았다. 붕대에 가려져 새하얗긴 했지만,

“많이 좋아졌네요.”

“그렇네요.”

이씨 아저씨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기쁜 것 같은 도련님과 이씨 아저씨와 달리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사람이 있었다. 민한이었다.

……이게……많이 좋아진 거라고?

민한은 도련님의 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붕대를 감는 건 이씨 아저씨의 일이라 민한은 한 번도 붕대 안의 상처를 본 적이 없었다. 첫날 피가 난 걸 보고 많이 다쳤겠거니 생각한 정도였다.

……결코, 이렇게 심한 상처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밖으로 드러난 도련님의 두 팔은 처참했다.

어디 하나 빈 곳 없이, 팔뚝부터 손가락 끝까지 상처로 가득했다. 어떻게 마차 사고가 나야 이런 상처를 남기는 것인지, 좀 더 치료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니, 드러난 팔이 이 정도인데…… 옷에 가려진 몸과 다리는……,

걱정 어린 시선을 느낀 도련님이 고개를 들어 민한을 바라보았다. 민한의 얼굴에 드러나는 안타까움과 걱정. 도련님이 말간 얼굴로 웃으며 상처로 가득한 팔을 매만졌다.

“이제 괜찮아요. 형. 안 아파요.”

그러나 여전히 덜덜 떨리는 두 팔.

민한은 자신이 조금 도련님의 사고를 가볍게 생각했던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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