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565화 (565/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65화

“레디, 액션!”

한양에서 그림 도구가 오지 않는다.

기대하고 있는 도련님보다 민한이 더 초조해진 듯 하루에도 몇 번이나 대문 밖, 갈림길까지 나가 보부상이 오나 안 오나 살펴보고 있었다.

“전 괜찮아요. 민한 형.”

어느새 형이라고 부르게 된 도련님의 모습에 으쓱함도 잠시, 민한이 투덜거렸다.

“괜찮긴요. 눈이 오고 벌써 며칠이나 지났잖아요. 편지랑 사람은 계속 오는데 도련님 그림 도구만 오지 않으니까 그러죠.”

그 말에 도련님이 작게 웃다가 말했다.

“그럼 편지라도 보내보면 어때요? 겸사겸사 형도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사고요. 돈은 제가 낼게요. 저번에 준 선물을 보답이에요.”

자신을 생각해 준 그 마음에 대한 보답이었다.

“아…….”

도련님의 말에 민한이 데굴 눈을 굴리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게…… 제가 아직…… 글을 몰라서요.”

“……아.”

“그래도 이씨 아저씨는 글을 아니까! 아저씨에게 부탁하면 될 것 같아요. 한양 물건이라…… 한양에서 뭐가 제일 유명하죠?”

놀란 얼굴로 눈을 끔벅이는 도련님의 모습에 민한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마을 사람들 중 반은 글을 모르니 그동안은 별생각이 없었지만, 자신보다 어리면서도 똑똑한 도련님을 보니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럼…… 글 배워보는 건 어때요?”

작게 열어놓은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와 함께 도련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는 도련님에, 잠시 멈칫한 민한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걸 내가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민한이 테이블에 놓인 종이와 붓, 벼루와 먹을 바라보았다. 도련님한테 줄 물건들이었는데 이렇게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지 몰랐다.

제 앞에 놓인 물건을 낯설게 쳐다보는 민한에 도련님이 작게 웃었다.

도련님이 떨리는 손으로 무언가 적힌 종이를 테이블 한쪽에 올려놓았다. ㄱㄴㄷㄹ 자음과 ㅏㅑㅓㅕ 모음이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

“이씨 아저씨께 적어달라고 했어요. 배우기 쉬우니까 형도 금세 배울 거예요. 나중에 제가 여길 떠나도 편지를 주고받을 수도 있고요.”

잔뜩 긴장한 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글도 배우면서 겸사겸사 숫자도 배우죠.”

“아, 숫자는 알아요. 돈 계산할 때 필요할 것 같아서 배웠어요. 덧셈하고 뺄셈도요.”

당당하게 말하는 민한의 모습에 멍해 있던 도련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한글은요? 계약서 같은 거 쓸 때, 사기당하지 않으려면 필요하잖아요.”

“이런 시골에서는 계약서를 쓸 일은 거의 없거든요.”

그래서 필요한 것만 배웠다.

“그래도 글을 알고 있으면 나중에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한양에서 장사를 할 수도 있고요.”

“……한양에서 장사라…….”

그건 민한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커다란 가게, 이왕이면 기와지붕…… 아니, 이 저택처럼 서양식 가게도 괜찮을 것 같았다. 돈도 엄청나게 벌 수 있겠지.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민한에게 도련님이 말했다.

“그럼 먼저 첫 번째 글자부터…….”

민한이 얼른 먹물이 묻은 붓을 어설프게 들고 도련님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컷! 오케이!”

“바로 클로즈업 샷 찍겠습니다!”

클로즈업 샷을 찍기 위해 깨끗한 종이와 붓을 다시 세팅하는 사이, 바람에 흩날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서준의 눈에 ‘그것’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것’은 힘을 써서 붓과 종이를 만든 것인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민한처럼 ㄱㄴㄷㄹ, ㅏㅑㅓㅕ를 적고 있었다. 사람이 하는 건 다 재미있고 따라 하고 싶은 모양인가 보다.

‘촬영에 방해만 안 되면 괜찮겠지.’

“클로즈업 샷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그것’에서 시선을 뗀 서준이 다시 촬영에 집중했다.

* * *

“글자는 다 외운 것 같으니까 이제 단어를 써볼까요? 형 이름부터 적어보죠.”

도련님의 말에 민한이 새하얀 종이 끝에 붓을 갖다 댔다. 새까만 먹물이 새하얀 종이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ㅁㅣㄴㅎㅏ

민한은 한 글자 한 글자 떨리는 손으로 신중하게 적어 나갔다.

“틀린 곳은 없죠?”

민한이 마지막 글자 ㄴ까지 적고 붓을 벼루에 올려두고 묻자, 도련님의 눈이 크게 요동쳤다.

“어, 없는데…… 형 성이 민이었어요?”

지금까지 그를 민한이라고 불러온 도련님이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씨 아저씨도, 고성댁 아주머니도 민한이라고 불러서 이름인 줄 알았는데, 민이 성이고 한이 이름이었던 모양이었다.

도련님의 말에 민한이 제가 쓴 이름을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 이름이 민한 맞아요.”

아, 다행이다.

“성이 없거든요.”

……큰일인데?

안도했다가 울상이 된 도련님의 표정에 민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제 이야기를 들은 손님들은 다 비슷비슷한 표정을 짓고는 했다.

“원래는 이름도 없었어요.”

민한이 다시 제 이름으로 적은 이름을 보며 이야기했다.

“요 근처 산에서 혼자 발견됐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일을 겪었는지 옷은 다 너덜너덜하고 몸 상태도 안 좋았대요. 그대로 산속에서 죽을 뻔했는데, 마을 사람들 덕분에 살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이 마을에서 살게 됐고요.”

도련님은 조용히 민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나이도 이름도 알아낼 수가 없었대요. 키를 보니, 대강 일고여덟 살이겠거니, 해서 여덟 살이 됐고, 이름도…….”

민한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민한이라는 이름도 이 저택에 머물렀던 손님이 지어주신 거고요.”

아…….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민한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중에 꼭 만나서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그때 저한테 주신 이름, 정말 마음에 든다고, 잘 쓰고 있다고. 그리고……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잘 살겠다고.”

뭐, 가족이 있는 마을 사람들과 도련님을 질투하기도 했지만.

멋쩍게 웃은 민한이 말을 이었다.

“그분이 그러셨대요. 성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성을 따르라고.”

존경하는 사람.

그건 분명 그분밖에 없을 거다.

“그냥 여기서 그분의 소식을 기다릴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도련님 말대로 나중에 한양에 큰 가게를 세우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민한이라는 이름이 알려지면 그분도 알 수 있을 테고, 언젠가 찾아올 수도 있을 테니까요.”

도련님은 멍하니 민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족도 만들고 싶어요. 배를 곯지 않게, 어디 아파도 고칠 수 있게,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게 돈도 많이 벌고 싶고요. 그분을 만나면 당신이 이름을 준 고아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보여드리고 싶어요.”

* * *

오늘 촬영은 야외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첫 야외촬영이라 할 일이 많았다. 이동 수단이 9인승 승합차밖에 없는 터라 필수 인원만으로 촬영팀을 구성해도 세 번은 왕복해야 했고, 저택에 있는 카메라나 조명 같은 촬영 도구들도 다 실어서 옮겨야 했다.

용케도 야외촬영인 걸 알았는지, ‘그것’ 또한 [화]팀의 트럭을 뒤따라왔다. 서준이 슬쩍 보니 처음 나오는 밖인 데다가 학생들까지 있어 신난 모습이었다.

“여기서 클라이맥스를 촬영한다는 거지?”

“응.”

연기과 1학년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촬영 장소는 클라이맥스를 촬영할 장소였지만, 그 장면을 찍는 건 아니었다.

이곳에 처음 오는 팀원들이 이리저리 구경하러 다니고, 촬영으로 바빠 눈이 내리고 난 후에는 처음 오는 서준도 천천히 촬영 장소를 둘러보았다.

“완전 좋지 않아?”

미술팀 팀장, 유서영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눈만 더 쌓이면 바로 촬영해도 되겠어요.”

새하얀 여백이 되어야 하는 오른쪽 부분에 아직 거뭇거뭇한 땅바닥과 돌, 잔재들이 보이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지금 물감 연구 중이야. 후보가 두 개까지 줄여졌어. 눈 더 내리면 바로 그림 그리는 거 연습할 거야.”

“저도 도와드려도 되죠?”

“당연하지! 이제 와서 빠지려고?”

하하, 웃은 유서영이 미술팀 팀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미술팀은 촬영장과 조금 떨어진 눈밭에 옹기종기 모여, 삽으로 눈을 어느 정도 쌓은 후, 물감 후보 1, 후보 2를 뿌리며 실험을 하고 있었다.

연기과 1학년이 속삭였다.

“난 이제 저 팀이 미술팀인지 과학팀인지 헷갈려. 숙소 마당에서도 실험하더라.”

그 말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좀 이르지만 점심 먹고 할까?”

“그래. 그러자.”

아무래도 해가 가장 높이 떠 있는 점심때가 제일 따뜻하니, 일찍 밥을 먹고 점심 내내 촬영을 하기로 했다.

[화]팀은 간이 천막을 치고 옹기종기 모여 간단히 준비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아직 따뜻한 밥과 국이 추위를 사르르 녹여주는 듯했다.

다들 시끌벅적 떠들며 점심을 먹고 있는데 빼꼼, ‘그것’이 고개를 내밀었다.

인외와 관련된 지식은 꽤 있지만, 인간들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다 보니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동화 속에서 도깨비가 괜히 사람들한테 속는 게 아니구나.’

저택에서도 그랬듯,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는 녀석이 밥을 먹는 팀원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모습이니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됐기도 했고.

‘어쩔 수 없지.’

속으로 한숨을 내쉰 서준이 ‘그것’에게 손짓했다. 잠시 눈을 데굴 굴리던 ‘그것’이 쪼르르 서준에게 다가왔다. 서준은 아무도 모르게 방울토마토 몇 개를 건네주었다.

얼른 입 안에 방울토마토를 넣은 ‘그것’이 다시 빤히 서준을 바라보다가 계란물을 묻혀 노릇하게 구워진 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제 제법 이 무서운 인간이 편해졌다.

그 뻔뻔한 모습에 어이없어하던 서준이 에휴, 한숨을 내쉬며 젓가락으로 햄을 주었다. 묘하게 동생들도 생각나서 어쩔 수가 없었다.

얼마나 맛있는지 볼은 빨갛게 상기되고 눈이 반짝반짝하다. 다음에는 밥, 다음에는 국. 햄스터 같은 볼이 오물오물 열심히 움직였다.

“저 조금만 더 주세요.”

“어? 벌써 다 먹었어? 그래.”

그렇게 ‘그것’을 먹이고 나서야 제대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던 서준이었다.

* * *

‘그것’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처음으로 밖으로 나왔고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으나 처음 보는 것들이 많았고 인간들 사이에서 신나게 뛰어놀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무시무시한 인간이 더 이상 무시무시하지 않다는 거였다.

밥까지 챙겨 주지 않았나!

자신은 착한 존재.

은혜를 받았으면 갚아야 했다.

“레디, 액션!”

하고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을 외치는 인간이 보였다. 그 목소리에 이제는 안 무시무시한 인간이 둔갑술을 쓴 것처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걸어갔다. 그 옆에 또 다른 인간도 있었다.

밝게 빛나는 조명 위에 앉아 다리를 동당거리며 그 모습을 보던 ‘그것’이 눈을 빛냈다.

생각났다. 은혜를 갚을 방법.

얼마 전 인간들이 기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이 휘이익, 팔을 크게 내저었다. 그 손짓에 따라 허공에 작은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지금은 눈이 내리지 않으니 바닥의 눈을 끌어올려야 했다.

그때 인간들이 봤던 눈바람처럼.

바람과 함께 눈이 휘몰아쳤다.

그렇게 강한 바람은 아니라 촬영 도구들이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카메라 화면에는 확실히 찍혀 버렸다.

“아, 바람…… 컷! NG! 다시 찍을게요!”

……?

‘그것’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인간들을 보았다. 당연하게도 저번처럼 오오,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던 인간들이 잠잠했다.

‘좀 더 세게 해야 했나?’

다시 한번 힘을 쓰려는데, 왠지 뒤통수가 따가웠다. 등골이 오싹했다. ‘그것’이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안 무시무시한 인간이 다시 무시무시해졌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두 배, 세 배, 네 배로 무시무시해진 것 같았다.

‘그것’은 깨달았다.

뭔가 아주 크게 잘못됐다는 걸.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