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64화
언제부터 내리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숙소 마당과 지붕 위에 새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그 위로 새로운 눈들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나가볼까.”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게 조심하면서 씻고 나온 서준은 두툼한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일어난 사람이 없는지 주변이 조용했다. 잠깐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들이 흩날리는 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 다시 고요히 눈이 내렸다.
서준은 방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눈으로 뒤덮인 풍경을 바라았다. 점점 밝아오는 하늘과 새하얀 눈이 뒤덮여 있는 높은 산들. 장관이 따로 없었다.
“멋지네.”
하고, 탄성을 흘리자, 하아- 눈처럼 새하얀 입김이 나왔다.
고요하고 새하얀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서준이 입을 열었다.
“눈, 얼마나 쌓이려나?”
서준은 오른발을 내밀어 눈 위를 밟았다.
사박, 하는 소리와 함께 아무런 흠도 없는 깨끗한 눈밭 위로 서준의 발자국이 남겨졌다.
“음. 아직 조금 얕은 것 같은데?”
오른발을 들어 올리자 나타난 발자국은 눌린 눈과 함께 마당의 흙바닥이 조금 보였다. 그렇게 많이 쌓인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그림 그리기는 힘들겠는데…….”
서준이 쪼그려 앉아 맨손으로 눈을 만지작거렸다.
미술팀과 함께 회의를 해서 눈에도 종류가 있다는 걸 알았다. 조금 습한가? 서준은 마치 눈 감별사라도 되는 듯 만지작거렸다.
물론 서준의 체온에 금방 녹아 물이 되어버렸지만, 눈은 많으니 바로 옆에 쌓인 눈을 다시 한 움큼 집어 살펴보았다.
“물감을 뿌려봤으면 좋겠는데…….”
어느새 눈 구경은 뒷전이고, 촬영할 수 있나 없나, 이 정도 습기면 물감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지? 하고 고민하는 서준이었다.
그렇게 눈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달칵하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준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누군가 빼꼼 고개를 내밀어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아주 간절히 눈이 오길 기다렸던 황지윤이었다.
“……진짜 눈이네……?”
반쯤 잠에 취해 있던 황지윤의 얼굴이 천천히 밝아졌다. 꿈인 줄 알았나 보다.
“지윤 누나.”
“어? 서준아. 거기서 뭐 해?”
눈이 와서 기쁜 듯이 환하게 웃는 표정의 황지윤이 쭈그려 앉아 있는 서준을 발견했다. 손에는 눈 장난이라도 한 듯 눈 알갱이가 묻어 있었다.
“눈 좀 살펴보고 있었어요. 습기가 얼마나 있나 싶어서요.”
“하하. 그래? 그럼 나도 나갈까.”
“추우니까 잘 챙겨입고 나오세요.”
“그래.”
황지윤이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탁탁, 두 손을 부딪쳐 손에 묻은 눈 알갱이들을 털어냈다. 얼마나 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지 손바닥과 손가락이 붉게 변해 있었다.
잠시 후, 서준과 마찬가지로 패딩으로 몸을 감싸고 밖으로 나온 황지윤이 밝은 표정으로 눈을 밟아댔다. 사박사박, 소리마저 즐거웠다.
“생각보단 덜 내렸는데, 오늘 촬영은 해도 되겠다.”
“그쵸?”
오늘 촬영할 예정이었던 장면은 [화]의 세계에서도 첫눈이 오는 날, 무명 화가가 창밖으로 눈 내리는 걸 보는 장면과 민한이 마당의 눈을 치우는 장면이었다.
“도윤이 형은 촬영 때도 눈을 치우는 거네요.”
“NG 나면 계속 치워야겠지.”
서준과 황지윤이 키득키득 웃었다.
“근데 언제부터 나와 있던 거야? 손이랑 얼굴이 완전 빨간데?”
“별로 안 됐어요.”
“그래도 배우가 아프면 큰일이지. 식당에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마실래?”
“네. 좋아요.”
서준과 황지윤이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의 앞쪽은 유리로 된 슬라이딩 도어라, 눈 내리는 마당이 아주 잘 보였다.
컵에 뜨거운 물을 받아 티백을 넣은 서준과 황지윤이 의자에 앉아 밖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눈 계속 오겠죠?”
“그렇겠지. 촬영은 괜찮겠지만…… 아무래도 안전에 주의해야 할 것 같네.”
“신발에 끼울 스파이크도 있고, 타이어에 끼울 스노우 체인도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황지윤이 나왔던 방문이 벌컥 열리는 게 보였다.
“눈! 눈이다!!”
황지윤 못지않게 눈을 기다렸던 조감독 김세연이었다. 조용히 나왔던 서준과 황지윤과 달리, 제법 큰 목소리였다. 그 들뜬 목소리를 들은 듯, 김세연의 뒤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이 사람, 유서영 또한 황지윤 못지않게 눈을 기다렸다.
“눈!!”
눈동자에서 빛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미술팀 팀장 유서영은 겉옷도 입지 않고 방 앞에 쭈그려 앉아, 두 손으로 눈을 조물락거리기 시작했다.
“서준이 너랑 똑같네.”
“하하.”
자신 못지않게 진지하게 눈을 살피는 유서영의 모습을 보니 반박할 말이 없어, 서준은 웃기만 했다.
그사이, 김세연이 어느새 손이 붉게 변한 유서영을 방 안으로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따뜻하게 입고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김세연의 목소리가 여기저기 들린 모양이었다. 좀 있으면 일어날 시간이기도 했다. 하나둘 문을 열거나 창문을 열어 밖을 살펴보았다.
“진짜 눈 내리네?”
“어쩐지 춥더라!”
“오오! 눈싸움할 사람!”
와아아아!
어젯밤,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느니, 치우려면 고생이겠다더니 하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다들 우르르 튀어나와 눈 만난 개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
습기가 적어서 그런지 눈뭉치는 꽉꽉 뭉쳐지지 않았다. 허공을 날아가다가 부스러져 바람에 흩날리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우와! 추워!”
“옷 입고 와야지!”
춥다며 다시 방으로 들어가 옷을 껴입고 나오는 학생들의 얼굴이 흥분과 추위로 금세 붉어져 갔다.
“다들 씩씩하네요.”
“그러게요.”
두툼한 겉옷을 입은 김성식과 정은미가 웃으며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미리 히터를 켜 놓은 식당은 따뜻했다.
“두 분, 차 드실래요?”
“좋지.”
“고마워.”
그렇게 추위가 싫은 학생들도 하나둘 식당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추운 건 싫지만…… 그래도 눈 내려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근데 쟤들 저렇게 놀다가 감기 걸리는 거 아니야?”
박우진의 말에 황지윤이 벌떡 일어나 식당 문을 열고 소리쳤다.
“적당히 하고 들어가세요! 괜히 감기 걸리지 말고!”
“알았어!”
“네엡!”
그 말에 다들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다시금 와하하! 떠들며 놀기 시작했다. 거기엔 황도윤도 있었다.
“진짜 알아들은 건지 모르겠네.”
“하하하.”
이마를 짚은 황지윤의 모습에 서준과 팀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한바탕 눈놀이 후, 아침 식사까지 끝내고 [화]팀은 두 팀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저택에서 촬영을 할 촬영팀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술팀과 소품팀이 포함된 클라이맥스 촬영장으로 향할 팀이었다.
“눈 내렸으니까, 촬영 장소가 어떤지 살펴봐야지.”
미술팀 팀장 유서영이 말했다.
“계획대로 땅이 전부 눈으로 뒤덮여 여백은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꽃을 그릴 빈 부분은 생겼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수정도 해야 해.”
눈이 내렸으니 할 일이 많았다.
“눈 더 내리면 치우기도 힘들 테니까, 소품팀도 지금 같이 가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렇게 미술팀과 소품팀이 떠나가고, 촬영팀도 저택으로 이동했다.
사박사박 눈을 밟으며 도착한 저택 앞.
박우진은 곧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황지윤에게 물었다.
“뒷문으로 가야 되지?”
“네.”
이만한 인원이 저택의 마당을 가로지르면 발자국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네 사람이 사는 저택에 그런 흔적이 남는 건 이상한 일. 그래서 앞으로 대부분의 촬영에서는 모두 뒷문으로 다녀야 했다.
뒷문을 통해 저택 안으로 들어온 촬영팀이 밖보다 따뜻한 공기에 두꺼운 옷을 벗고 촬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것’도 합류해 도움을 주거나 구경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의상을 갈아입으러 가던 서준은 생각했다.
‘지박령 같은 건 아니라서 저택을 못 나오는 건 아닐 텐데…….’
인간을 좋아하는 느낌이라 숙소까지 따라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무래도 태어난 곳이 저택인 데다가 아직은 저택 밖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만약 서준의 생각을 알았다면 무시무시한 인간 너 때문이라고, 너만 아니었으면 벌써 나갔다고 외쳤을 ‘그것’은 잔뜩 흥분한 인간들과 함께 있었다.
“역시 키드 100!”
키드 100 카메라로 진짜 눈을 찍는 건 처음인 촬영팀과 영화과 학생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황지윤과 김세연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좋다…….”
“그러게.”
선명하게 촬영된 새하얀 눈과 풍경에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실제 스크린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현재 있는 모니터에 나오는 영상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오. 바람 분다!”
“찍어요! 찍어!”
내리는 눈송이들과 섞인 바람이 크게 불었다.
보통 카메라라면 흐리게 보일 풍경이 키드 100에서는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촬영됐다.
오오!
그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에 다시 한번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런 학생들 사이에 끼어 있던 ‘그것’만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가 인간들이 좋아하는 거니 좋은 거겠지! 하고 헤헤 웃었다.
잠시 후.
촬영 준비가 모두 끝나고, 서준과 황도윤이 2층으로 올라왔다.
“레디, 액션!”
똑똑똑똑-
보통 때보다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슬슬 잠에서 깨던 무명 화가가 놀라 몸을 일으켰다.
“……누, 누구…….”
“도련님. 저예요. 민한. 들어가도 될까요?”
그 목소리에 가득한 들뜸을 뒤늦게 알아챈 무명 화가가 들어오라고 말했다.
“이른 시간에 죄송해요. 근데 빨리 알려드리고 싶어서.”
곧 문이 열리고 성큼성큼 들어오는 민한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무명 화가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떨리는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커튼 좀 걷어도 될까요?”
“……커튼요?”
고개를 갸웃하다가 끄덕이는 무명 화가의 모습에 민한이 활짝 웃었다.
“이것 보세요. 첫눈이 내렸어요.”
촤악, 하고 커튼이 양옆으로 밀려났다.
이제는 활짝 열 수 있게 된 커튼. 그 너머로 빛과 함께 새하얀 설원이 보였다.
무명 화가는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나와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무로 가득하던 산들이 새하얀 눈 이불을 덮고 있었다.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눈들이 빛에 반짝이는 것도 보였다. 저도 모르게 숨을 쉬는 것을 멈춰 버릴 것 같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벅찬 풍경이었다.
넋이 나간 듯한 무명 화가는 창문 유리에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댔다. 누르는 압력 때문인지 떨림이 조금 사그라든 것 같았다.
민한이 흐뭇하게 웃었다.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다.
“창문도 열까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민한이 창문까지 활짝 열었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내리던 눈송이들이 자신의 얼굴에 하나둘 내려앉는데도, 난생처음 보는 풍경에 압도당한 무명 화가는 꽤 오랫동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컷! 오케이!”
* * *
눈이 그쳤다.
마당으로 나온 민한과 이씨 아저씨는 대문부터 저택 입구까지 일직선으로 빗자루질을 시작했다.
“여기 다 정리하면 대문부터 길까지도 쓸어야 해.”
“……어차피 여기 다니는 사람은 아저씨랑 저밖에 없으니까 적당히 치우면 안 돼요? 아주머니는 추워서 안 나온다고 하시고.”
“모르지.”
민한과 함께 마당을 쓸고 있던 이씨 아저씨가 고개를 들어 2층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활짝 열어놓고 있으면 고뿔에 걸린다는 고성댁의 잔소리에 조금 열린 창문이 보였다. 그 앞에 앉아 있는 젊은 청년도.
“도련님이 산책을 나올지도.”
민한도 계속 빗자루질을 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언가를 발견한 민한이 입을 열었다. 차가운 온도에 입김이 함께 흘러나왔다.
“아저씨. 그림 도구는 언제 도착한대요? 눈 내리면 온다면서요?”
“글쎄다. 요새 상단에 할 일이 많아서 좀 늦어질 것 같은데…….”
“저렇게 기대하는데…….”
무언가 그리는 듯 떨리는 손으로 허공을 짚고 있는 도련님의 모습이 보였다.
“확실히 오긴 오는 거죠?”
“온다니까. 기다려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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