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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561화 (561/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61화

“레디, 액션!”

말문을 튼 도련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양화에 필요한 그림 도구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도련님의 주문을 받은 이씨 아저씨가 방 밖으로 나와 민한을 바라보았다.

“……잘했다.”

묘하게 물기가 어려 있는 눈빛이었다.

그저 몇 개월 요양하러 온 손님인데도 이씨 아저씨도 그렇고 고성댁 아주머니도 그렇고 정이 든 모양이었다. 뭐, 자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아, 아뇨. 그냥,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걸요.”

“아니. 민한이 네가 도련님께 제일 필요한 걸 준 거야. 잘했다. 잘했어.”

민한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고 1층으로 내려가는 이씨 아저씨를 뒤쫓았다.

“근데 왜 도련님 방에 그림 도구가 없었던 거예요?”

“그야…… 한양에서는 그걸 보고 발작을 했었으니까.”

……아.

민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까 앞으로 주의해서 살펴봐. 지금이야 괜찮은 것 같지만 나중 일은 모르니까.”

“……네.”

민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2층, 도련님 방 쪽을 바라보았다.

무언가에 의해 절망하기도 하고, 활력을 얻기도 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어느 정도로 그림을 좋아하면 그럴 수 있는 걸까.

그렇게 진심으로 무언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는 민한은 문득 궁금해졌다.

“컷! 오케이!”

* * *

눈이 내리기 전, [화]팀은 차근차근히 해야 할 일들을 마쳐갔다.

눈이 없는 배경의 장면들을 촬영했고 클라이맥스 부분을 찍을 장소인 언덕을 정리했다. 그리고 미술팀이 맡고 있었던 클라이맥스 부분의 스케치도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마테오와 서준의 의견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감정이 폭발해서 강렬한 부분들도 있겠지만, 곳곳에 번지는 듯한 느낌이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무명 화가는 한동안 아파서 체력도 별로 없잖아요.”

제대로 걷기 힘든 눈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많은 체력이 필요했다. 요양하러 온 무명 화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온 힘을 다해 그리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림을 그릴 곳이 야트막하지만, 오르막이기도 하니까 가끔 비틀거리면서 넘어질 뻔한 느낌을 주는 식으로…… 아니면 진짜 넘어져서 눈 위에 그 자국을 남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요? 마지막 부분도 그렇잖아요.”

-/그런 움직임의 흔적 하나하나가 그림의 일부분이 된다라…… 좋네요./

서준과 마테오의 말에 유서영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붓을 놀렸다. 새하얀 백지 위로 붓이 스쳐 지나가며 색을 남겼다.

짙은 고동색 줄기에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 드문드문 꽃잎처럼 비틀거리는 자국을 붓으로 찍었다. 어느새 클라이맥스 부분의 이미지가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스케치는…… 이 정도면 되려나?”

유서영이 붓을 내려놓자, 숨을 죽이고 완성되어가는 그림을 보고 있던 서준과 마테오, 미술팀 팀원들의 표정이 점점 환해졌다. 탄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좋은데요!”

-/멋지군요!/

유서영도 벅찬 얼굴로 드디어 완성된 그림을 보았다. 그림은 곧바로 감독 황지윤에게로 전해졌다. 황지윤이 눈을 반짝였다.

“완전 좋은데! 진짜 잘 그렸다!”

“종이 위니까 그렇지. 눈 위에 그리는 건 완전 다른 이야기야.”

황지윤의 감탄에 유서영은 조금 쑥스러워하면서도 사실을 직시했다.

종이 위에서는 손바닥만 한 꽃을, 몇십 배로 확대해서 눈 위에 그려야 하니 만만치 않은 대형 작업이었다.

“아, 눈 위에 그리는 거니까 실수하면 큰일이지?”

“그건 괜찮을 것 같더라. 약간의 노동력이 필요하지만.”

자문을 맡은 마테오가 가르쳐 줬다.

“실수한 부분을 삽으로 들어내고 새하얀 눈을 퍼와서 거기에 덮으래. 그리고 거기에 다시 그리면 된대.”

“수정할 때 시간이 좀 걸리겠네.”

“최대한 실수 안 하고 그려야지, 뭐. 연습 시간만 많이 줘.”

“그래. 알았어.”

유서영의 말에 황지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의 촬영 스케줄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다음 날.

소품팀과 미술팀이 클라이맥스 촬영장으로 향했다.

“그 나무 기둥은 오른쪽으로요! 1미터만 더!”

완성된 스케치를 보며 유서영이 지시를 내리자, 위에 있던 소품팀 팀원들이 작품 속 꽃의 줄기가 될 나무기둥을 옮겼다.

“이거 조금 작지 않아?”

인위적으로 가공한 것이 아니라 스케치에 나오는 길이와 다른 나무들이 많았다. 유서영이 소품팀 팀원의 말에 대답했다.

“아까 반 토막 난 기둥 있던데, 그거랑 이으면 되지 않을까요?”

“일단, 해볼게.”

[화]팀 팀원들의 활약으로 나름 평평해진 땅 위로, 마치 설계도를 보고 옮기는 것처럼 반쯤 타버린 나무 기둥들과 잔재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아래요!”

나중에 눈이 내리면 꽃들을 그려 넣을 부분을 텅 비워두고, 그 아래 크고 작은 나무기둥을 가로로 이어붙여 나뭇가지처럼 표현했다.

지금이야 다 비슷비슷한 색이지만, 나중에 눈이 내리면 새하얀 백지 위에 고동색 가지가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뻗어 있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약간, 살짝만 오른쪽으로요. 네네…… 좋아요!”

그렇게 마지막 나무기둥까지 스케치대로 옮겨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유서영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 언덕 아래로 내려온 팀원들이 스케치와 언덕을 번갈아 보았다.

“이게…… 저렇게 된다고?”

“일단 눈이 내려봐야 알 것 같지만…… 네! 최대한 그림처럼 만들 생각이에요.”

“……진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요.”

그 말에 모두 다 같은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레디, 액션!”

똑똑-

문을 두드린 민한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노을이 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 밖은 밝은데 도련님의 방은 아직 깜깜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도련님은 빛을 싫어했다. 아마 마차 사고를 당한 게 낮이라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이거 마을에서 갖다준 떡인데…… 드세요.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이런 어두운 방에서 도련님은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정신은 차렸으나 아직도 넋의 일부가 어딘가 빠져나간 것 같은 모습에 민한은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문득, 커튼이 쳐져 있는 창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풍경을 그리신다고 들었는데…….”

“……네.”

도련님이 흥미를 가진 것 같았다.

단순하다면 단순하달까.

민한은 어떻게 하면 도련님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이씨 아저씨가, 이 방에서 보는 풍경이 가장 좋다고 하더라고요. 이 근처가 시골이라서 딱히 재미있는 건 없는데, 산 하나는 멋지거든요.”

민한이 커튼 쪽으로 다가갔다. 도련님의 시선이 등 뒤로 따라붙었다. 고개를 돌려 슬쩍 보니 덜덜 떨리는 도련님의 두 팔이 이불을 붙잡고 있었다. 손에 잡힌 이불의 주름 수만큼 긴장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커튼을 모두 걷어 밖을 보여주는 건 무리인 것 같았다. 민한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다음으로 멋진 건 노을이에요. 여기 오신 손님들이 노을만큼은 한양보다고 낫다고 하시거든요.”

노을.

무명 화가는 엉망이 된 기억 속에서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리고자 했던 것이 바로 노을이었다. 낮을 보내고 밤을 맞이하는 그 깊은 색의 노을을 캔버스에 고스란히 담고 싶었다.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탄식과 함께, 강한 열망이 찾아왔다.

보고 싶었다.

자신이 그리고자 했던 그 노을을.

“열어도 될까요?”

“……조금만…….”

무명 화가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 대답에 민한이 조심스럽게 커튼을 열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빛 한줄기와 동시에 흡,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민한이 커튼을 꽉 쥐었다. 아차 싶으면 얼른 닫기 위해서였다.

긴장된 분위기 속.

겨우 한 뼘도 되지 않는 커튼의 틈으로 주황빛 노을이 비추었다.

자신을 비추던 새하얀 빛과는 달랐다.

너무 강하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으나, 하늘 전체를 고르게 이불처럼 덮는 따뜻하고 포근한 주황빛. 그에 무명 화가의 긴장도 탁, 하고 풀려 버렸다.

민한이 도련님의 상태를 살피며 창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 답답한 공기를 날려 버리듯 차가운 바람이 살살 들어왔다. 커튼이 살며시, 물결처럼 움직였다. 그와 함께 주황빛 노을도 물결처럼 일렁였다.

사아아.

희미한 바람 소리와 함께, 어두운 방 안에 주황빛 파도가 밀려 들어왔다가 물러가고 다시 밀려 들어왔다가 물러갔다. 어느 순간에는 무명 화가의 발끝까지 다가왔다가 물러가기도 했다.

무명 화가는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이나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황지윤 감독의 외침에 곧바로 촬영장이 시끌벅적해졌다. 보통 때보다 더욱 시끄러운 상태였다.

“참가할 거야? 담력 훈련?”

“아직 생각 중이야.”

“간단하게 한다니까 그렇게 안 무서울 것 같지 않아? 서준이도 연기 힘 빼고 하기로 했고.”

손은 능숙한 솜씨로 촬영 장비를 정리하고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입은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전 참가하려고요. 겨울에 담력 훈련이라서 웃기기는 한데, 재미있을 것 같아요.”

“나는 구경만 할래.”

다들 나름의 이유로 오늘 밤에 있을 담력 훈련에 참가하기도 하고 불참하기도 했다. 불참하는 사람들은 숙소에서 쉬거나 구경하거나 담력 훈련 진행을 돕기로 했다.

진행팀 중 귀신 역할을 할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김세연, 박우진, 황도윤, 이서준과 학생들이 머리를 맞대고 저택과 마당 내에서의 위치를 정했다.

“창문에 손자국도 좀 찍죠! 핏자국도 만들고!”

“천 조각들을 길게 만들어서 2층 창문에서 떨어뜨리는 것도 괜찮지 않아?”

“마당에도 숨어 있다가 포위하는 건 어때요? 옷을 뒤로 돌려 입어서 머리 돌아간 것처럼 보이게 하면 완전 놀랄 것 같은데!”

박우진이 열렬히 회의하는 학생들에 볼을 긁적였다.

“다들 너무 진심인 것 같지 않아, 서준…….”

“1층 창문마다 똑같은 얼굴로 분장해서 손전등 비추고 있으면 완전 무서울 것 같지 않아요?”

“인원수가 부족하지 않을까?”

“그럼 휴대폰을 사용하죠!”

……너도 진심이구나.

열정적으로 의견을 내놓는 서준의 모습에 박우진이 하하, 웃고 말았다.

* * *

-준비 끝났어!

김세연의 연락에 첫 순서의 학생들이 출발했다.

2인 1조로, 미술팀 팀원과 음향팀 팀원은 서로 딱 달라붙어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금방 만든 거니까, 별로 안 무서울 거야.”

“네. 네.”

코스는 ‘ㅏ’ 모양으로 꺾이는 도로 입구부터 저택 마당과 1층을 지나 2층 도련님 방까지였다. 도련님 방에 있는 ‘참 잘했어요!’ 도장을 손등에 찍어오는 것이었다.

담력 훈련에 참가하겠다고 말한 과거의 자신을 뚜드려 패고 싶은 마음으로 두 학생이 오들오들 걸음을 옮겼다.

그때, 빠아앙!

커다란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하고 놀란 두 학생이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니 트럭이 있었다. 트럭의 와이퍼가 오른쪽 왼쪽으로 흔들리고 있었는데, 운전석에는 아무도 없었고 천장의 전등만이 깜빡깜빡거렸다.

“까, 깜짝이야…….”

“……저건 도대체 어떻게 한 거래?”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부여잡은 두 학생이 트럭을 지나 저택 대문으로 향했다. 눈을 데굴데굴 굴려 가며 대문을 통과하는데,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

단번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아니, 어디까지 진심이길래 배경음악까지 준비한 거야?!”

스피커를 어디다 설치했는지는 몰라도,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음산한 배경음악은 아주 잘 들렸다. 청각 효과까지 더해지자 두 학생은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그때였다.

저택이 가까워졌을 때, 1층 창문 하나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까지는 어두워서 거울처럼 밖을 비추기만 하던 창문에,

“어, 언니…… 저, 저거……!”

파란 불빛과 함께 새하얀 얼굴이 생겨났다.

그걸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옆의 창문에도 똑같은 얼굴이, 그 옆의 창문에도 똑같은 얼굴이 생겨났다.

“……!!…….”

“……으허허허…….”

두 학생이 놀라 뒷걸음질 칠 때, 하늘에서 무언가 희끄무레한 것이 눈앞으로 떨어졌다.

---!!

비명이 되지 못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 * *

으아아악!!

굵직한 비명 소리와 함께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리거나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문 앞에서 포위당한 것 같은데?”

“계단에서 거꾸로 내려오는 귀신 만난 거 아니고?”

손등에 ‘참 잘했어요!’ 도장이 찍힌 학생들도 조금 힘이 빠지긴 했지만, 킬킬 웃어대며, 스포일러가 되지 않게 속닥거리는 중이었다.

“와…… 그거 누군진 몰라도 진짜 대단했어.”

“나도 거기서 기절하는 줄.”

다닥다닥!

구두 소리와 함께 계단을 네발로 기어 내려오던 귀신을 떠올린 학생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근데 중간에 포기하는 애들 없이 잘도 끝까지 다녀오네.”

미술팀 유서영의 말에 먼저 다녀온 음향팀 팀장이 으으으,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보통 때였으면 기절했을 텐데, 오늘은 할 만하더라고. 난이도 조절이 딱 적당하달까.”

“그래? 다들 회의 열심히 했나 보다.”

열심히 회의를 하긴 했지만,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원인은 바로 학생들의 머리 위에 있었다.

[(선) 신성양의 양털] 새하얗고 복실복실한 양털이 조금 줄어들어 있었는데, 공포도 불행으로 취급해 흡수하는 모양이었다.

“근데 서준이는 뭐 했어? 진짜 안 무서워?”

유서영의 물음에 음향팀 팀장은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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