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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560화 (560/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60화

“/그럼 오른쪽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왼쪽은 계획 좀 세워봐야겠는데요./”

-/일단 못 옮길 정도로 큰 나무들이나 뿌리가 박힌 나무를 생각하면서 스케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유서영과 마테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서준과 미술팀이 도움을 줄 소품팀에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대본 보셔서 아시겠지만, 여기에 꽃 그림을 그릴 거에요.”

“눈 위에 그린다는 거지?”

“네. 눈이 내릴 때, 낮은 곳은 눈에 파묻히지만 높은 곳은 윗부분에만 눈이 쌓이잖아요.”

눈 내린 산에 가 보면, 눈에 완전히 파묻혀 보이지 않는 작은 돌들과 달리 커다란 돌은 윗부분에만 새하얀 눈이 쌓이고 그 아래는 원래의 색이 드러난 것을 볼 수 있다.

“그걸 이용해서 여기 타다남은 나무 기둥들이나 잔재들을 이용해서 꽃의 줄기랑 주변을 표현할 거거든요.”

“……오…….”

꽃을 그린다는 건 알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모르는 소품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눈이 내리기 전에 미리 낮은 곳과 높은 곳의 차이를 만들 계획이에요.”

서준의 말에 소품팀 팀장이 다시 앞쪽을 바라보았다. 불규칙적으로 위치한 타다 남은 나무들이 보였다. 눈이 내리면 듬성듬성 거뭇한 것이 보일 터였다.

“확실히. 지금 이 상태로 놔두면 그림 그리기는 애매할 것 같네.”

“일단 오른쪽은 여백으로 만들 거라서 아예 다 치워야 하고요. 왼쪽도 꽃의 줄기로 표현할 곳을 빼면 다 치워야 해요. 근데 지금 어떻게 그릴지 회의하고 있으니까 오른쪽 먼저 치우면 될 것 같아요.”

“그래. 알았어.”

목장갑을 낀 소품팀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져온 톱과 삽을 챙겼다.

“저희도 도와드릴게요.”

미술팀 팀원들과 서준도 목장갑을 끼고 합류했다.

“이 정도 높이는 눈 쌓이면 파묻히겠지?”

“네. 그럴 것 같아요.”

소품팀과 미술팀은 야트막한 산의 오른쪽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일정 높이 이상의 나무나 돌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네!”

그렇게 산 위, 오른쪽 끝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제법 큰 돌을 데굴데굴 굴리며 산 아래로 치우던 미술팀 팀원이 읏차, 하고 커다란 돌을 가뿐히 들어 옮기는 서준을 보며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서준이 너. 운동하니?”

“아, 언제 액션 작품이 들어올지 모르잖아요. 미리 대비해서 조금씩 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연기력도 좋으면서 성실하기까지 하다니.

저 정도는 해야 슈퍼스타가 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서준아! 이쪽으로 와볼래?”

“네!”

서준이 생각보다 힘이 좋은 듯해, 어느새 작은 것들을 옮기는 미술팀이 아니라 큰 것들을 옮기는 소품팀과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물 드세요! 스포츠음료랑 간식도 있어요!”

차에 다녀온 미술팀 팀원이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보급해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구슬땀을 흘리고 있던 소품팀 팀장이 허리를 폈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네!”

화재가 있었던 곳이라서 그런지, 다행히 치울 만한 건 적었다. 틈틈이 쉬면서 했는데도 벌써 오른쪽 부분의 3분의 2를 치울 수 있었다.

숙소에서의 저녁 식사 후.

지친 팀원들은 방으로 향하고, 팀장들은 식당에 모였다. 서준도 거기에 함께했다.

“여기까지 치웠어.”

미술팀 유서영이 보여주는 비포 에프터 사진에 황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품팀 팀장이 말을 보탰다.

“내일, 모레까지 하면 다 치울 수 있을 것 같더라.”

“며칠 후에 눈 온다고 들었는데 그전에 끝낼 수 있을까요? 눈 내릴 때 옮기면 위험할 것 같은데…….”

“맞아요. 미끄러질 수도 있고.”

“글쎄. 그냥 막 치우는 거면 눈 내리기 전에 될 것 같은데, 왼쪽은 밑그림이 있잖아. 그게 먼저 나와야 그 그림에 맞게 치우지.”

소품팀 팀장의 말에 학생들의 시선이 미술팀 유서영에게로 향했다.

“최대한 빨리, 그려볼게요.”

“정 안되면 촬영팀 몇 명만 놔두고 다 이쪽으로 부르면 되니까, 천천히 해.”

“아니야. 서준이 설명도 있었고 대충 이미지는 잡은 것 같아.”

유서영의 말에 황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

“아, 나 건의할 거 있는데.”

황도윤이 손을 들었다. 다들 황도윤을 바라보았다.

“눈 내리기 전에 담력 훈련하자.”

그 말에 반사적으로 서준에게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서준의 눈이 다시 반짝 빛났다.

“그거 아직 포기 안 했어?”

황지윤의 말에 황도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서준이가 귀신 역만 안 하면 되는 거잖아.”

“저 하고 싶은데요.”

“하하. 서준이가 귀신 역만 안 하면 되는 거잖아.”

“저기요. 도윤이 형?”

자신을 부르는 서준에 황도윤이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서준이 진심 어린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진짜 힘 빼고 연기할게요.”

“못 믿어.”

“진짜 힘 빼고 한다니까요? 진짜! 막! 허접하게!”

“그렇게 믿음이 안 가는 말도 없을 것 같은데…….”

다른 팀장들도 거기에 동의했다.

“아니. 방법은 있어.”

촬영팀 박우진이 웃으며 말했다. 다들 궁금한 눈으로 박우진을 바라보았다.

“서준이가 귀신 역을 맡은 연기 못 하는 배우를 연기하는 거야.”

……오…….

서준과 학생들이 탄성을 흘렸다.

“약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는 한데…… 안심은 되네.”

“그러게요.”

“서준이 넌 어때?”

“재미있을 것 같아요.”

연기 못하는 배우 역이라니.

보통 작품에서는 만날 수 없는 캐릭터 아닌가. 이미 귀신보다 연기 못하는 배우 역에 흥미가 생긴 서준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귀신이라면 질색인 애들도 있으니까, 진짜, 꼭 하고 싶은 애들만 모아서 하기로 하죠.”

“코스도 안전하게 하고요.”

“저택에서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장비는 다 치우고.”

어느새, 회의는 담력 훈련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 * *

“레디, 액션!”

2층을 청소하고 있던 민한이 저택으로 오는 인영을 발견했다. 보부상이었다. 이씨 아저씨가 보부상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고 얼른 대문 쪽으로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민한의 인사에 보부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짐 상자 안에서 작은 보자기를 꺼냈다. 네모난 모양을 보니 안에 나무 상자가 든 것 같았다.

“어, 얼마에요?”

보부상이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보였다.

비싸다! 아니, 각오했던 것보다는 싸긴 한데…… 한양 물가 비싸구나.

민한이 떨리는 눈으로 주섬주섬 돈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소중히 간직해 반들반들한 동전 다섯 개가 보부상의 손 위에 올려졌다.

돈을 챙긴 보부상이 이씨 아저씨와 민한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려 저택을 떠나갔다.

“민한아. 뭐 산 거야?”

“하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궁금해하는 이씨 아저씨에 민한이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보부상에게서 받은 보자기를 들고 얼른 방으로 향했다.

“도련님 점심 식사 잊지 말고!”

“네!”

* * *

1층 부엌에서 점심 식사가 올라간 쟁반을 받아 2층으로 올라온 민한은 2층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보자기도 챙겼다.

똑똑.

오른쪽 세 번째 방의 문을 두드리고 불빛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꼭 닫았다.

밝은 밖과 어두운 안.

민한은 잠시 눈이 익숙해지길 기다렸다가 테이블로 걸어갔다. 여기서 두 팔을 내려치던 도련님의 모습이 생생했다. 이어, 한밤중 숨죽여 울고 있던 모습도 떠올랐다. 보자기를 든 손이 묵직해졌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점심 식사 가져왔어요.”

침대 쪽을 살펴보니, 도련님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누워 있었다.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 그 모습에 민한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주 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다. 그런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민한이 쟁반 옆에 보자기를 올려놓았다.

사라락-

보자기를 풀자 나무 상자가 나타났다.

“제가 그림에 대해서 잘 몰라서…… 방 안을 살펴보니까 없길래…… 아니, 아주머니가 도련님이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셨다고 하셔서요.”

대답은 없었다.

허둥지둥 말하던 민한이 조금 민망한 듯 목덜미를 만졌다.

“붓하고 재료하고…… 좀 준비해 봤어요.”

어쩐지.

어둠 속에서 도련님의 몸이 움찔한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전 동전을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거든요. 돈을 안 써도요. 그래서 도련님도 이걸 보면 기분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마치 그 움찔했던 것이 착각이라는 듯, 도련님은 조용했다. 민한이 입을 달싹거리다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달칵.

하고 문이 닫혔다.

카메라가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서준을 주시했다.

붓, 재료.

그 단어들에 천천히 어둠에 잠식해가던 무명 화가의 의식이 깨어났다.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희미한 마음이 자신도 그렇다고 수긍했다.

그래. 무명 화가도 그랬다.

새하얀 종이와 붓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이 백지를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지, 비어 있는 부분에는 어떤 의미를 담을 것인지 생각할 때의 들뜸. 붓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새하얀 백지를 물들이며 자신이 상상한 것을 그대로 담아낼 때의 벅참. 완성된 그림을 보며 느끼는 만족감.

무명 화가는 그 모든 것이 그리워졌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지금까지도.

그 마음이 눈을 감고 있는 무명 화가의 얼굴에 드러났다.

카메라가 서준의 표정을 담았다.

온기 하나 없이 죽어가던 얼굴에 천천히 그리움과 슬픔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희미하던 감정이 천천히 세를 불려 나갔다. 얼굴의 근육이 연약하게 떨리고 지금의 심정을 표현하듯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마침내, 금방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서준의 표정이 흐려졌다.

무명 화가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리움을 참지 못했다.

부스럭.

떨리는 팔로 침대를 짚고 일어났다. 애써 부들부들대는 손을 무시하고 천천히 테이블 쪽으로 걸어 나갔다.

익숙한 쟁반 옆에, 처음 보는 나무 상자가 있었다.

어쩐지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조금 목이 타는 것 같기도 했고 붕 떠 있는 기분이기도 했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았다.

숨까지 멈춘 것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후유증 때문인지, 자신의 마음 때문인지 모르겠다) 나무 상자의 뚜껑을 잡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열었다.

“……하하!”

상자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종이와 붓, 그리고 먹과 벼루를 보며 무명 화가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웃고 말았다.

“컷! 오케이! 바로 다음 장면 가겠습니다!”

* * *

잠시 후.

쟁반을 치우기 위해 민한이 들어왔다. 가장 먼저 테이블 위로 시선이 갔다. 나무 상자는 뚜껑이 덮인 그대로였다.

‘꼭 보라고 쟁반 바로 옆에 놔뒀는데…….’

열어보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민한이 아쉬운 얼굴로 쟁반을 치우기 위해 테이블로 향하는데,

“저…….”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민한이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뭐, 뭐…….”

떨어질 뻔한 심장을 부여잡으며 엉거주춤 선 민한이 고개를 돌렸다. 자해할 때를 빼고는 누워 있던 도련님이 침대에 앉아있었다. 민한이 헛숨을 들이켰다.

“도, 도련님?”

“저,”

오래도록 말하지 않아서 그런지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민한과 달리 도련님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서양화 그려요.”

……?

동양화와 서양화가 다른 건 알지만, 그리는 데 필요한 재료까지는 잘 모르는 민한이 눈을 끔벅였다.

“그래서 벼루랑 먹은 안 써요.”

!!

민한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종이랑 붓은 쓰는데, 전혀 다른 거예요.”

민한이 저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렸다. 이내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돈은 돈대로 썼는데 영 결과가 좋지 못했다. 이씨 아저씨나 고성댁 아주머니에게 먼저 물어볼 걸 그랬다, 고 생각하는데 도련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어쩐지.

도련님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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