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58화
다음 촬영은 부엌에서 이루어졌다.
이 저택의 부엌에는 큰 냉장고도 있고 다른 장식들도 완전 현대식이라서 아예 새로 만들어야 해서 1층 가장 넓은 방을 부엌으로 꾸몄다.
“잘 만들었다.”
“그러게.”
금방이라도 100여 년 전 사람이 나와 요리를 할 법한 멋들어진 부엌이 거기에 있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그릇들과 식기구, 허리까지 오는 개수대와 탁자,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하늘하늘한 커튼이 잘 어울렸다.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김세연의 외침에 분장을 끝낸 황도윤과 정은미가 각자의 자리로 이동했다.
* * *
“이래서는 말동무는 못 하겠는데…….”
도련님의 방에서 쟁반을 들고나오던(문을 꼭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민한이 목덜미를 매만졌다.
저택에 들어온 지 이틀째.
민한은 매 식사 시간마다 도련님에게 식사를 나르는 일만 하고 나머지는 이 씨 아저씨를 도와 저택의 일을 돕고 있었다.
식사를 가져다줄 때도, 치울 때도 도련님은 침대에 누워 등만 보이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진짜 죽은 것처럼 보여 저도 모르게 조용히 숨소리를 듣기도 했다.
한숨을 내쉬며 쟁반을 들고 나무 계단을 내려가는 민한의 눈에 음식이 담긴 그릇이 보였다. 영 죽을 생각은 아닌지 음식이 반쯤 비어 있는데, 다섯 살 아이가 먹은 것처럼 음식의 잔해들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직 팔이 아픈 건가?”
젓가락 대신 포크가 있는 걸 보면 자해로 인한 상처가 다 낫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어제도 피까지 날 정도로 탁자를 내려쳤는데 성할 리가 없었다.
“저야 뭐, 돈만 받으면 상관없지만…… 이래도 될까요?”
저택의 부엌.
쟁반을 건네며 묻는 민한에 고성댁이 조금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도련님이…… 마음 정리가 다 안 되셨나 봐.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정말로 그림을 좋아하셨다고 하더라고.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려 오셨대. 호평도 많이 받고.”
“그래요?”
민한이 데굴 눈을 굴렸다.
아무리 그림을 좋아한다고 해도, 겨우 못 그리게 된 것 정도로 피까지 흘러가며 자신의 몸을 학대할 만한 일인가 싶었다.
‘누군 먹고살기에도 바쁜데…….’
쟁반 위 그릇들을 치우는 고성댁의 모습이 보였다.
다치더라도 이렇게 돌봐줄 사람이 있는 곳에 요양까지 보내줄 가족들이 있는 부잣집 도련님이니, 그 이상의 어려움은 겪어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마차에 치였으면…….’
재활치료를 위한 요양은커녕, 치료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 있을 때부터 함께였던 우울함이 끈적하게 발목을 잡는 듯했다. 민한은 얼른 그 우울함을 털어냈다. 이런 우울에 빠지는 것도 민한에겐 사치였다.
“아직 어리시니까 민한이 네가 잘 보살펴드려.”
“네.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해는 가지 않지만, 뭐,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어깨를 으쓱인 민한이 이씨 아저씨가 맡긴 일을 하러 걸음을 옮겼다.
* * *
오늘은 밤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밤이라고 해봤자 겨울이라 오후 6시쯤 해가 지는 터라, 저녁을 먹고 조금 쉬다가 촬영하는 정도였다. 그래도 [화]팀 팀원 중 일부만 참여해도 괜찮다고 황지윤이 말했지만, 오늘 촬영하는 장면의 주인공이 주인공이니만큼 한 명도 빠짐없이 참여했다.
“어쩐지 서준이가 찍을 때마다 이럴 것 같은데…….”
황지윤의 말에 김세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김세연이 생각하기에도 그럴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잠시 쉰 [화]팀이 다 함께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는 길을 걸어갔다. 밤이 되어 더 온도가 떨어져서 춥긴 했지만 다들 재잘대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눈은 언제 오려나?”
“기상청에서는 다음 주쯤 첫눈이 온대요.”
연기과 2학년의 말에 서준이 대답했다.
[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눈이라 다들 매일같이 날씨를 체크하고 있었다.
“기상청…… 믿을 수 있을까.”
1학년의 중얼거림에 주변 학생들이 킥킥 웃어댔다. 기상청 말만 믿고 나갔다가 비에 홀딱 젖어 집에 돌아온 경험이 있는 게 한둘이 아닐 터였다.
“세아 너도 가도 돼? 잘 시간 아니야?”
[화]팀의 유일한 미성년자로 팀원들이 동생 취급하는 권세아가 미술팀 팀원의 장난스러운 말에 울상을 지었다.
“아직 10시도 안 넘었어요. 그리고 이 시간 자는 고등학생이 어디 있어요. 언니. 중학생도 이렇게 일찍 자진 않을걸요.”
“하하. 장난이야. 장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저택에 도착했다.
어두울까 봐 1층에 불을 켜놓고 가긴 했지만, 밤에 보니 좀 으스스한 것 같았다.
“……우리 나중에 여기서 담력 훈련이나 해볼까?”
황도윤의 말에 작은 비명들이 들려왔고, 일부 학생들은 즐거운 듯 웃어댔다.
“괜찮네! 미술팀이랑 소품팀도 있으니, 퀄리티 있게 만들 수도 있고.”
“의상도 마침 한복이 있어서 괜찮을 것 같은데?”
“재미있겠네요! 마침 열연해 줄 배우들도 있잖아요.”
질색하는 일부 학생들을 보며 킬킬 즐겁게 웃던 학생들의 귀에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귀신 연기는 제가 해도 돼요?”
서준이었다.
정말로 하고 싶은 듯 눈을 반짝이는 서준에, 질색하던 학생들과 킬킬 웃던 학생들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배우 이서준이 귀신 연기를 한다고?
현실감 넘치는 연기를 하는 배우가 바로 눈앞에서 그 연기를 보여준다면 어떨까. 그것도 담력 훈련 중에 귀신으로.
“……나 지금 기절해도 돼?”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나는 이미 죽었음.”
“범인은 이서준이라고 써놔야지…….”
하며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오들오들 떨었고, 놀릴 생각이 가득하던 학생들도 갑자기 급상승한 담력 훈련의 난이도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
먼저 담력 훈련 이야기를 꺼낸 황도윤이 눈을 반짝이는 서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달 동안 연습을 함께해서 그런지, 서준이 연기하면 어느 정도로 귀신다울지 저절로 떠올랐다. 어쩐지 온몸에서 삐질삐질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촤, 촬영해야지!? 놀 시간이 어디 있어! 빨리 가서 촬영하자!”
“촬영! 촬영!”
와아아아!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리나케 도망가는 선배들을 보며 서준이 에이, 하며 아쉬워했다.
* * *
촬영은 2층에서 진행되었다.
미리 준비를 다 해놓은 상태라서 배우들의 분장만 끝나면 곧바로 촬영에 들어갈 수 있는 상태였다.
곧 이번 장면에 출연할 서준과 황도윤이 옷을 갈아입고 2층으로 올라왔다.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배우들과 팀원들이 각자의 자리로 이동하고 카메라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황지윤이 목소리를 높였다.
“레디,”
서준이 눈을 깜빡였다.
“액션!”
이 저택에서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무명 화가가 묘한 표정으로 달빛이 비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 * *
툭.
희미한 소리에 자기 방 침대에 누워있던 민한이 번쩍 눈을 떴다.
밤 귀가 밝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딱딱한 바닥에서 자다가 난생처음으로 푹신한 침대에서 자게 되어 아직 적응 못 한 탓도 있었다.
툭. 툭.
또다시 들려오는 소리에 민한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 쪽으로 향했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이씨 아저씨나 고성댁 아주머니일까. 아니, 두 분 다 1층에서 지내시는데 한밤중에 올라올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도둑?
그게 아니면 같은 층을 쓰는 도련님뿐이었다.
문득 피가 묻었던 손바닥이 떠올랐다. 또 자해를 하는 걸까.
이래서 자신의 방이 2층이구나, 생각하며 민한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와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하며 거실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오면 바로 보이는, 오른쪽의 도련님 방과 왼쪽의 민한의 방 사이에 있는 2층 거실이었다.
다른 방들보다 커다란 창들과 커튼이 있는 곳.
커튼이 걷어져 창밖의 달빛이 들어오는 그 아래에 서양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주 고요히 서 있었다.
벽에 몸을 숨긴 민한은 숨을 죽이고 도련님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마구 날뛰던 모습과 달리, 어딘가 묘한 표정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몽유병까지 있는 건가 싶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바라보고 있으니, 가만히 서 있던 도련님이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또 내려치려나, 달려가려고 몸을 움찔할 때,
……!
민한이 나오려던 탄식을 집어삼켰다.
가슴께까지 올라간 도련님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가만히 떨리는 두 손을 내려다보던 도련님이 순간 이를 악물었다. 얼굴이 찌푸려지고 목에 핏줄이 선히 보일 정도로 팔에, 온몸에 힘을 주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도련님의 두 팔과 손은 그대로였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듯, 마치 누가 따로 조종하고 있는 듯 계속 덜덜 떨리기만 했다. 그 확연한 떨림은 마을에 사는 노인의 손 떨림보다 심각해 보였다.
왜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지, 왜 쟁반 위에 포크가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저런 손으로는 일상생활도 겨우겨우 할 수 있을 터였다.
문득, 도련님이 자해를 했을 때가 떠올랐다. 자신의 손에 잡혔을 때, 떨리던 두 팔은 사실은 고통 때문이 아니라 원래 그런 증상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련님은 민한이 생각하는 사이에도 두 손을 쥐었다 펴며 떨림을 제어해 보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한두 번 해본 모습이 아니었다.
아마도 어두운 방 안에서도 혼자 그렇게 노력하고 또 노력하다가, 참고 또 참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한 마음이 자해의 형식으로 나타난 게 아닐까 싶었다.
민한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자신과 다른,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생각에 부럽고 질투가 나, 저도 모르게 옹졸한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어 껄끄러웠는데, 저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흐으…….”
민한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련님이 울고 있었다.
떨리는 두 손을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소중히 감싸 쥐고, 마치 기도하듯 이마에 맞댄 채,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흐으, 흐느끼듯 울고 있었다.
얼굴이 일그러지며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그 눈물 한 방울 한 방울마다 놓지 못한, 놓치고 싶지 않은 그림에 대한 미련이 가득한 것 같았다.
그런 처절한 슬픔 사이에도 두 손과 팔은 볼품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게 서럽고 서러워서 도련님은 결국 두 손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몸을 웅크린 채 조용히 어깨를 떨며 서글프게, 그러나 조용히 울었다.
손을 보호하듯 몸을 둥글게 만 도련님의 뒷모습에, 민한은 어쩐지 봐서는 안 되는 모습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미술팀과 권세아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어느 직업이 안 그렇겠냐마는, 특히 미술과 음악은 손이 중요했다. 가끔 사고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손을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무명 화가인 도련님의 마음이 더욱 절절히 느껴졌다.
거기에는 서준의 애절한 연기도 한몫했다. 저렇게 몰입하면 빠져나오기 힘들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컷! 오케이!”
그런 걱정과 달리, 황지윤의 외침에 서준은 언제 서럽게 울었냐는 듯 말짱한 얼굴로 일어났다. 덜덜 떨고 있던 손도 멈춰져 있었고 표정도 밝았다. 붉어진 눈동자와 남은 눈물 자국만이 조금 전 서준이 울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땠어요?”
“잘 찍혔어! 와서 봐봐.”
황지윤의 말에 활짝 웃는 서준의 모습은 조금 전 서럽게 울던 ‘도련님’과 전혀 달라, 보고 있던 학생들과 김성식, 정은미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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