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56화
“그럼 바스트샷 촬영가겠습니다!”
풀 샷 촬영을 위해 두 배우에게서 멀어져 있던 촬영팀, 조명팀, 음향팀이 거리를 좁혔다.
첫 촬영부터 오케이를 받았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다시 대사를 맞춰보는 황도윤과 김성식의 상반신이 카메라 앵글에 담겼다.
“그럼 우린 일이나 계속할까.”
“넵!”
첫 촬영을 구경하기 위해 왔던 소품팀은 가구 조립을 위해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분장 수정을 위해 팀원 하나를 남겨둔 미술팀장 유서영과 미술팀원들도 그 뒤를 따라갔다.
클라이맥스 부분뿐만 아니라 [화]의 전체적인 이미지도 미술팀이 맡았기 때문이었다.
바깥에서의 촬영이 끝난 후, 이어질 촬영 장소인 거실로 조립한 가구를 옮기고 정리하던 소품팀 팀원이 입을 열었다.
“나중에 무명 화가 방, 벽지랑 바닥도 다 덮어야 하는 거죠?”
소품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감 튀는 장면도 있으니까 나중에 복구하려면 그게 낫지. 기존 벽지에 붙이지 말고 테이프로 고정만 하자. 그렇다고 급하게 할 필요는 없다더라. 우리가 준비하는 동안에 다른 장면 먼저 찍는다고 하니까.”
“옙!”
거실을 싹 바꿔야 하는 소품팀이 바쁘게 움직였다. 미술팀도 손을 보탰다.
“이거 치울게요!”
“저거 덮어씌울 만한 거 없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치우고, 고정된 것은 겉만 그럴듯한 장식품 모형이나 가구들로 가리면서, 점점 어느 정도 현대 느낌이 남아 있던 거실이 백여 년 전의 고풍스러운 서양식 저택으로 변하고 있었다.
* * *
그사이, 바깥에서는 한창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촬영팀 박우진은 이 저택에 처음 들어오는 ‘민한’의 시선으로, 민한이 대문이 열리고 정면에 보이는 붉은 벽돌의 저택에 놀라 위로 올려다보고 양옆으로 고개를 돌려 저택을 구경하는 듯이 카메라를 움직이며 촬영하고 있었다.
아마 관객들에게 [화]의 배경이 될 이 저택을 소개하는 장면이기도 할 터였다.
그러니 좀 더 자연광을 의식하며 신경을 썼다. 서양식 저택을 자주 봤던 관객들에게도 인상 깊게 남을 수 있도록.
“그럼 바로 민한, 이씨 아저씨 준비해 주세요.”
깔끔하게 담긴 영상에 만족한 황지윤의 말에, 난로 옆에서 몸을 녹이며 준비하고 있던 황도윤과 김성식이 다시 카메라 앞으로 향했다.
옥에 티가 나오지 않도록, 조금 전 촬영할 때의 모습에서 머리카락 한 올도 변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짐 보따리를 든 황도윤과 김성식이 나란히 섰다.
카메라 체크, 조명 체크, 음향 체크까지 끝낸 황지윤이 크게 외쳤다.
“레디, 액션!”
* * *
“이 저택엔 처음 들어오는 거지?”
“네. 들어오려고 하면 아저씨가 맨날 막았잖아요.”
정신이 팔린 듯, 저택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민한의 말에 이씨 아저씨가 픽, 웃었다.
“내가 여기서 얼마나 지냈는데, 담벼락에 개구멍 만드는 놈은 처음 봤다. 처음 봤어.”
“하하하. 근데 얼마 못 가서 아저씨가 바로 달려왔잖아요.”
마치 남의 일인 양 뻔뻔하게 웃는 민한의 뒤에서, 저택의 관리자인 이씨 아저씨가 활짝 열린 대문을 닫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쿵!
대문을 굳게 닫은 이씨 아저씨가 민한의 옆에 서서 저택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마당 청소도 좀 도와주고. 아, 저기 보이지? 2층에 커튼이 쳐져 있는 곳. 거기가 도련님 방이야.”
이씨 아저씨의 말에 민한이 고개를 들었다.
“거기가 제일 풍경이 좋거든. 이런 촌에서 무슨 풍경이겠냐고 하겠지만…….”
“……아저씨.”
“응?”
민한의 부름에 저택 입구로 향하던 이씨 아저씨가 뒤를 돌아보았다. 2층을 올려다보고 있는 민한의 눈동자가 묘하게 갈 곳을 잃은 듯 보였다.
“……코튼이 뭐예요?”
* * *
“컷! 오케이!”
오후부터 촬영해서 그런지, 별로 촬영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은 금세 흘렀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지기도 하고.”
촬영팀 4학년의 말에 다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랬던 하늘이 슬슬 노을이 져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오늘 못한 촬영은 내일 해야겠네요.”
황지윤과 촬영팀이 모여 내일 촬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햇빛의 방향이 있으니, 오늘 촬영했던 것과 비슷한 시간에 촬영해야 했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죠. 세연아. 소품팀, 촬영장 작업은 어디까지 끝났대?”
황지윤의 말에 조감독 김세연이 대답했다.
“일단 거실은 끝났대. 지금은 계단하고 복도 작업 중이고. 복도가 끝난 다음에는 바로 무명 화가 방 작업한다고 하더라.”
어느새 촬영 도구를 정리하고 있던 조명팀, 음향팀 영화과 학생들까지 모여 동기와 선배들의 회의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작은 회의 하나하나가 나중에 자신의 작품을 만들 때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럼 내일 오전에는 거실에서 찍고, 오후에는 오늘 못 찍은 거 찍으면 되겠네.”
“그다음 날에는 무명 화가 찍고?”
“네. 그리고 숙소 가서 오늘 찍은 거 다시 살펴보고 모자란 게 있으면 더 촬영하려고요.”
“하긴. 눈 내리기 전에 다 찍는 게 낫지.”
클로즈업 샷에는 눈이 없는데, 풀 샷에는 새하얀 눈이 내렸다면 그것만큼 몰입을 깨는 것도 없을 터였다.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만 한대요!”
그 외침이 저택 이곳저곳에 전해졌다. 복도에서 바닥과 벽을 작업하고 있던 소품팀이 기지개를 켜고 스트레칭을 했다. 사다리에 올라가 있던 2학년이 내려오며 말했다.
“이대로 놔두고 갈까요?”
“공구만 정리하고 가자. 내일 누가 밟으면 큰일이니까.”
주섬주섬 손에 들고 있던 공구들을 정리한 소품팀이 1층으로 향했다.
회의가 끝난 촬영팀과 조명팀, 음향팀이 촬영 도구를 정리하고 1층에 보관실로 쓰고 있는 방으로 옮기고 있었다.
“선배님. 내일은 어디까지 작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황지윤의 물음에 소품팀 팀장이 작업 계획서를 보며 말했다. 황지윤과 김세연도 종이를 가리키는 팀장의 손가락을 주시했다.
“복도는 아직 진행 중이야. 한 10퍼센트쯤?”
“으음. 그럼 모레 무명 화가 장면 촬영 가능할까요?”
소품팀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힘들걸. 생각보다 디테일 작업이 시간이 걸리더라고. 가구들을 조립하고 배치하는 정도는 모레까지 가능하겠지만, 아마 마음에 들 정도로 완성할 수는 없을 거야.”
황지윤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이 장면은 조명을 약하게 쓸 거거든요. 아마 디테일은 어두워서 안 보일 것 같은데…… 그래도 힘들까요?”
“그래? 으음. 디테일을 뺀다면야 괜찮을 것 같은데…… 자세히 좀 이야기해 봐.”
다시 한번, 회의가 시작되었다.
* * *
숙소로 돌아온 [화]팀이 저녁을 먹고 식당에 있는 빔프로젝터와 스크린을 이용해 오늘 찍은 분량을 모니터링했다.
“피곤한 사람들은 일찍 들어가도 됩니다! 내일도 촬영이 있으니까 자기 컨디션은 자기가 잘 챙깁시다!”
황지윤의 말에도 어색한 얼굴로 앉아 있는 1, 2학년들에 황도윤과 각 팀 팀장이 얼른 방으로 보냈다. 오전에 짐을 옮기고 오후에 촬영까지 했으니, 얼굴에 피곤이 훤히 보였다.
“서준이 넌 괜찮고?”
“오늘 별로 한 것도 없는걸요.”
한자리를 차지한 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황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것치고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 같던데?”
“그러게요. 아까 조명팀 일도 도와줬어요.”
“음향팀도요. 어디서 배운 것처럼 잘하더라고요.”
그 말에 미술팀 팀장 유서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 소품팀 일도 도와줬는데?”
여기저기서 나오는 증언에 팀원들의 시선이 서준에게로 향했다.
황지윤과 김세연도 황당한 얼굴이었다. 아까 모니터링할 때 계속 보고 있어서 촬영장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어느샌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도와준 모양이었다.
“하하. 진짜 괜찮아요. 하나도 안 피곤해요. 그러니까 보고 가도 되죠?”
하고 묻는 서준의 모습이 너무 생생해 보여 다들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분명 웃는 얼굴이기는 한데, 강렬한 눈빛이 ‘꼭 보고 갈 거예요.’ 하고 말하는 듯했다.
“그럼 모니터링 시작할게요.”
황지윤의 말에 서준과 남아 있는 팀원들의 시선이 스크린으로 향했다. 커다란 스크린 속에서 오늘 촬영분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서준이 눈을 빛내며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 * *
다음 날.
오늘 촬영은 저택 내 거실에서 진행되었다.
“바깥보다는 덜 추워서 좋네.”
“그러게. 근데 거실 되게 잘 꾸몄지 않아?”
서준의 말에 연기과 학생들과 권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현대 물건들이 여기저기 보였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도 모형인데 진짜 잘 만들었어.”
“그러게요.”
무슨 박물관에 온 것 같기도 했다.
“여기 좀 도와줘! 전선이 꼬였어!”
“네! 지금 갈게요!”
서준과 연기과 학생들, 권세아가 잡일 담당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다른 팀들을 돕다 보니 금세 촬영 준비가 끝났다.
황지윤 감독이 목소리를 높였다.
“레디, 액션!”
저택 밖도 신기한 게 천지였지만, 저택 안은 그보다 더 별천지 같았다.
밋밋한 초가집의 벽과 달리 멋진 문양들이 있는 벽과 처음 보는 장식품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와 촛불들. 바닥마저 반짝거리는 것 같아, 발을 딛는 게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저기 있는 게 시계야.”
“그 정도는 알거든요!”
그런 민한의 긴장을 풀어주는 건, 조금 전 코튼 사건 이후 새로운 거다 싶으면 가르쳐 주는 듯 놀리는 이씨 아저씨였다.
“시계를 어떻게 알아? 본 적 있어?”
“예전에 이 저택 손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회중시계? 라던가? 그걸 보여주신 적이 있어요.”
간장 종지 같은 작은 물건 안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바늘들의 모습에 어렸던 민한은 깜짝 놀랐었다.
민한의 말에 이씨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사장님 손님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니까 신기한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계시지.”
“근데 다시 오시지는 않네요.”
“뭐, 다들 바쁘시니까. 다시 만나고 싶은 분이라도 있어?”
민한이 유난히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려던 찰나,
데엥! 데엥!
큰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헉!”
“시계는 봤어도 괘종시계는 처음 보지?”
괘종시계에서 들리는 종소리에 놀라는 민한의 모습에 이씨 아저씨가 킥킥 웃어댔다.
* * *
“고성댁! 민한이가 왔습니다.”
이씨 아저씨의 목소리에 복도에서 한복을 입은 중년 여인이 손을 닦으며 나오고 있었다. 정은미 배우가 연기하는 고성댁 아주머니였다.
“안녕하셨어요. 아주머니.”
“민한이도 어디 아픈 곳은 없지?”
꾸벅 인사하는 민한에 이씨 아저씨가 말했다.
“어째 나한테 인사했던 것보다 정중해 보인다?”
“앞으로 아주머니께서 제 밥을 준비해 주실 거잖아요. 먹을 거 주는 사람한테는 잘 보여야죠. 앞으로 맛있는 밥 잘 부탁드립니다.”
민한의 말에 이씨 아저씨와 고성댁이 웃음을 터뜨렸다.
“민한이 방이 2층이죠?”
“그렇긴 한데 아직 청소 중이라서요. 도련님부터 만나는 건 어때요?”
“으음. 그럴까요?”
잠시 생각하던 이씨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인사부터 나눌까?”
“네. 어차피 말동무를 하는 거면 빨리 친해지는 편이 나으니까요.”
민한이 조금 떨리는 표정으로 계단에 발을 디뎠다. 이런 멋들어진 계단을 걷는 것도 처음이었다. 뭐, 산에 계단이 있겠나, 초가집에 2층이 있겠나. 계단이 있어도 돌계단 정도였다.
“아, 그러고 보니 아저씨. 전……그 손님을 뭐라고 부르면 돼요? 손님? 화가님?”
“그냥 도련님이라고 불러.”
도련님…….
주위에 양반도 없는 터라, 그런 호칭으로 불러본 적이 없는 민한이 어색하게 되뇌었다.
하긴 서양 상인의 지인이라면 부잣집 도련님일 게 분명했다. 화가라는 직업도 그런 바탕이 있지 않으면 힘들 터였다.
‘그런데 사고를 당했다니.’
민한은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아주 조금…….
그때였다.
희미하게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씨 아저씨도 그 소리를 들은 듯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2층 방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민한도 얼른 그 뒤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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