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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555화 (555/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55화

고사를 끝내고 대충 정리한 [화]팀은 숙소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촬영장으로 출발했다.

1종 면허가 있는 무대미술팀 3학년이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을 운전해 먼저 저택으로 향했고, 나머지 팀원들은 주섬주섬 개인물품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서준도 연기과 1, 2학년들과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입김이 하아 하고 나올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그럼 학교에는 뭐라고 하고 온 거야?”

“맞아. 한 달 동안 빠지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미국에 간다고 하고 왔어.”

고등학교 친구들에게는 솔직히 촬영한다고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둘러댄 상태였다.

“회의만 하고 온 거라고 하면 작품이 실제로 나오지 않아도 되니까. 기획 단계에서 엎어지는 것도 많잖아.”

서준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러네.”

“미국이라니…… 둘러대는 스케일도 참 남달라.”

2학년의 감탄에 서준과 1학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촬영장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선배들이 트럭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미술팀, 소품팀, 촬영팀 할 것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안으로 옮기면 돼요?”

서준과 연기과 학생들도 거들었다.

“1층 방문에 종이가 붙어 있을 거야. 의상은 의상 쪽에 넣고 소품은 소품 쪽에 넣어둬. 큰 가구는 소품팀이 옮길 거니까 괜히 다치지 않게 손대지 말고.”

김세연이 목록을 체크하며 말했다. 황지윤은 저택 안쪽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촬영 도구는 오후부터 촬영할 거니까 여기 놔두면 될 것 같아.”

“넵!”

서준과 연기과 학생들이 소품팀 팀원이 트럭에서 건네주는 짐들을 가지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텅 빈 것만 같았던 촬영장이 학생들로 시끌벅적했다.

처음 촬영장을 보는 연기과 학생들의 고개가 연신 휘휘 움직였다. 어디 체험관이나 박물관이 아니면 이런 옛날 느낌이 나는 저택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곳이 있었구나.”

“되게 멋있지 않아요?”

“그러게.”

잠시 구경을 하고, 서준과 연기과 학생들은 의상실로 변한 방에 의상을 옮기고 소품실로 변한 방에 소품을 옮겼다. 배우 정은미와 김상식이 정리를 도와주고 있었다.

“독립영화라는 게 배우들 손까지 필요할 때가 많이 있거든.”

“우리도 화팀이잖아?”

말리던 황지윤도 사람 좋게 웃는 두 배우의 모습에 포기한 모양이었다.

다음 짐을 옮기려고 다시 밖으로 나가려는 서준과 연기과 학생들을 눈에 고풍스러운 옷장을 번쩍 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소품팀(무대미술과)이 보였다.

짙은 고동색 나무에 무늬가 새겨진 옷장은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였는데, 힘든 기색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와아…….”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무대미술과 선배님들 힘 엄청 세시네.”

“그러게요.”

하긴 무대에 올라갈 소품이나 장식을 직접 만들어내는 학과였다. 무거운 자재들도 옮기는 일이 많을 테니, 저런 가구쯤은 문제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안 무거워.”

서준과 연기과 학생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선발대로 같이 온 소품팀 팀장, 무대미술과 4학년이 웃으며 말했다.

“색을 진하게 칠하고 느낌을 무겁게 내서 그렇지, 저래 보여도 제일 가벼운 소재로 만들었거든. 보는 것보다 훨씬 가벼워.”

“오호.”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짜 소품들처럼 옷장의 무게감은 눈의 착각인가 보다.

“저건 뭐예요?”

다른 팀원들이 나무판 같은 것을 2층으로 옮기고 있었다. 나무판의 색이 옷장처럼 무거운색이었지만, 가볍게 들고 움직이는 걸 보니 이것도 눈의 착각인 듯했다.

“무명 화가 침대. 2층에서 조립할 거야. 매트리스도 저기 오네.”

이후로도 서준과 연기과 학생들이 자잘한 소품들을 옮길 때마다 테이블과 의자, 책상, 식탁 같은 것들도 차곡차곡 안으로 들어왔다. 부피가 큰 건 촬영장에서 조립할 생각인지 재료만 있는 것도 있었다.

“거의 이삿짐을 옮기는 것 같은 느낌이네.”

서준의 말에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을 몽땅 트럭에서 저택으로 짐을 옮기고 정리하는 데 써버리고, [화]팀은 숙소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 휴식 시간을 가졌다.

“반찬은 일주일에 세 번씩 온다고?”

“응. 더 자주 시킬 수도 있고. 가끔 특식도 있을 거래.”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의 식사(그것도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일일이 준비할 수는 없어 가까운 반찬 가게에서 조달할 계획이었다.

물론 가깝다고 해도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반찬 가게는 장거리 배달은 물론이고 이전에는 없던 특식까지 만들어 메뉴에 넣을 정도로 [화]팀의 주문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밥값도 장난 아니겠다.”

“최대 한 달이니까 최대한 빨리 찍으면 일주일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날씨가 따라줘야지.”

서울보다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제작비를 걱정하던 황지윤과 김세연은 이내 첫 번째 촬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배우분들 의상 갈아입으시고 분장실로 이동해 주세요!”

서준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황도윤과 김성식을 바라보았다. 아쉽게도 [화]의 첫 촬영은 서준이 맡은 ‘무명 화가’가 등장하지 않았다.

“근데 우리 분장팀이 있었어요?”

“미술팀이 해주기로 했어.”

“오…….”

김세연의 말에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분장실로 변한 1층 방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붓과 물감 대신 화장품을 들었지만, 왠지 잘할 것 같았다.

“멀티탭 어디 있어?”

“조명! 조명 이쪽!”

배우들이 준비하는 사이, 촬영팀과 조명팀, 음향팀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준과 연기과 학생들, 그리고 권세아도 물품을 찾는 외침에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선 밟지 않게 조심하세요!”

촬영팀 팀원이 전기릴선을 당기며 움직이자, 노란색의 기다란 전선이 저택에서 촬영할 저택 입구까지 이어졌다. 저택에서 끌어온 전기를 사용할 계획이었다.

“트럭도 옮길게요.”

짐을 옮기느라 저택 가까이에 주차해 두었던 트럭이 이동했다.

“지윤아. 카메라, 일단 세 대 다 준비할까?”

“네. 여기랑 여기. 저기. 이렇게 놓는 건 어때요?”

촬영팀과 황지윤이 의논을 하며 카메라의 위치를 조정했다. 첫 촬영이라서 조금 허둥지둥하는 느낌이 있었지만 몇 번 촬영을 하면 익숙해질 터였다.

잠시 후.

아무것도 없던 저택 앞이 어느새 촬영장으로 바뀌었다. 조명에도 밝은 빛이 들어오고 한쪽에 마련된 모니터에도 카메라가 찍고 있는 화면이 아주 잘 비쳤다.

“진짜 촬영장이네.”

“그러게.”

서준과 연기과 학생들이 들뜬 표정으로 촬영장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촬영할 장소는 아니었지만, 배우라서 그런지 카메라가 돌아가고 조명이 켜진 촬영장만 봐도 마음이 부푸는 것 같았다.

다른 학생들도 비슷했다. 다들 긴장감과 함께 느껴지는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이었다. 가구를 조립하고 있던 소품팀 팀원들도 첫 촬영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고 분장을 끝낸 미술팀도 하나둘 나타났다.

그 뒤를 이어 첫 촬영의 배우들이 등장했다.

구한말.

농촌의 농민들이 겨울에 입었을 법한 옷을 입은 황도윤과 김성식의 모습에 학생들이 탄성을 흘렸다.

“김 배우님. 춥지는 않으세요?”

“옷 안에 핫팩을 넣어서 괜찮습니다.”

“추우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오빠도.”

황지윤의 말에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있던 황도윤이 도와주는 서준에게 속삭였다.

“서준아. ‘오빠도’에는 좀 영혼이 없는 것 같지 않아?”

무언은 긍정이라고, 서준이 웃기만 했다.

분장을 끝낸 배우까지 등장하자, 촬영장에 긴장감이 흘렀다. 이제 정말로 촬영을 시작하는 거였다.

배우 황도윤과 김성식이 카메라 앵글 안쪽으로 들어가고 다른 학생들은 촬영장 밖으로 물러났다. 촬영팀과 조명팀, 음향팀이 자리를 잡자, 모니터 쪽에 있던 감독, 황지윤이 벅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 금방이라도 고장이 나버릴 것 같았다. 정말로, 드디어 [화]를 촬영하는 것이었다.

“모두 짧은 시간 동안 준비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11월 4일! 영화 화의 첫 촬영을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

커다란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서준도, 연기과 학생들도, 권세아도 두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마주쳤다.

곧 짧고 굵었던 환호성이 잦아들었다. 서준과 배우들, 그리고 팀원들은 눈을 빛내며 감독의 지시를 기다렸다.

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촬영 바로 직전의 고요한 적막 사이로,

“레디…….”

조금 떨리는 듯한 황지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액션!”

* * *

저택으로 가 보라는 노인의 말에 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에는 일거리도 없으니 저택에서 잡일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주섬주섬 짐보따리를 챙긴 민한은 초가집 가득한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있는 서양식 저택으로 향했다.

이 서양식 저택은 조선에 온 서양 상인이 세운 저택으로, 처음에는 상인과 그 가족들의 별장으로 쓰였다가 지금은 상인의 지인들에게 빌려주고 있었다. 아마 어제 왔다는 화가 손님도 서양 상인의 지인 중 하나일 터였다.

저택으로 향하는 길목, 머리를 짧게 자른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이씨 아저씨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래. 아픈 곳은 없고?”

“저야 뭐, 건강 빼면 시체죠.”

환하게 웃는 민한에 이씨 아저씨도 빙그레 웃었다.

이씨 아저씨는 예전부터 고성댁 아주머니와 함께 이 저택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마을에 올 때면 민한에게 이것저것 신기한 음식이나 물건들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얼마 전에 새로 손님이 오셨던데…… 화가라고 들었어요. 손을 다쳤다고요.”

“아…….”

이씨 아저씨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 얼굴에 민한은 화가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아직 어리지만 한양에서는 유명한 화가였다고 하더라.”

이씨 아저씨의 얼굴에 걱정과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근데 한양에서 마차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크게 다쳤어. 서양인 의사한테 치료도 받아 봤다던데…… 일상생활도 조금 힘들 정도인 것 같더라고.”

이씨 아저씨의 말을 들은 민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이런 시골에 올 게 아니라 한양에서 계속 치료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장님 말씀으로는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했다고 하더라. 이제부터는 재활치료를 해서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만이라도 고쳐야 하는데…… 환자에게 나아지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면서.”

이씨 아저씨가 쯧쯧,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민한이 그 뒤를 따랐다.

“그나마 풍경 좋고 조용한 여기서 요양을 하면 마음의 병이 나아지지 않을까, 보내신 거라더라.”

“마음의 병이요?”

“으음……”

이씨 아저씨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재활치료를 해도 일상생활은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만…… 더 이상 붓을 잡기는 어려울 거라고 하더라고.”

“아…….”

그림을 그릴 수 없는 화가라니.

민한이 안타까운 듯 침음성을 내뱉었다. 이씨 아저씨도 같은 마음인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민한이 네가 옆에서 좀 도와줬으면 해서 불렀다. 나이 차이가 좀 있긴 한데, 마을에 또래가 너밖에 없더라.”

“어, 어. 저 치료 같은 건 전혀 모르는데요?”

당황하는 민한의 모습에 이씨 아저씨가 피식, 비웃었다.

“기대도 안 한다.”

당연한 말인데 조금 열이 받는다.

“그냥 말동무나 해주고 필요한 게 있으면 나나 고성댁한테 전해주면 돼.”

“그 정도는 아저씨가 해도 되지 않아요?”

저거 성질 나온다.

그래도 어른이라 그럼 왜 불렀냐며 왁왁대려다 참으면서도, 성질을 다 숨기지 못하고 삐딱하게 말하는 민한을 보다 웃은 이씨 아저씨가 굳게 닫힌 저택의 문을 열었다.

“와아…….”

민한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저택이 열리는 모습에, 퉁명스러웠던 태도도 잠시 접고 눈과 입을 크게 벌리며 감탄했다.

매일같이 초가집만 보고 살던 민한의 눈에 서양식 저택의 내부는 별세계나 다름없었다.

연신 우와, 우와거리며 구경하는 민한을 보며 이씨 아저씨가 중얼거렸다.

“그 도련님 성질도 보통이 아니라서 말이야…….”

며칠을 시달렸던 이씨 아저씨가 부르르 몸을 떨며, 이제부터 자신 대신 그 성질머리를 받게 될 제물 아닌 제물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자, 들어가자.”

“옙!”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민한과 이씨 아저씨를 따라 카메라가 이동했다.

“컷,”

잠시 정적이 흐르고,

“오케이!”

황지윤 감독이 벅찬 마음을 내리누르며 외치는 첫 오케이에 큰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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