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53화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린 남자가 얼른 병원으로 달려갔다.
승용차 6대, 관광버스 3대의 9중 충돌 사고로 모든 환자들이 가장 가까운 이 병원으로 옮겨진 듯, 병원 입구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아…….”
이런 처참한 광경은 영화 속에서나 봤던 남자가 침음성을 내뱉었다.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들은 피와 먼지, 그을음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머리카락과 얼굴, 겉으로 드러난 팔다리도 굳은 피와 먼지로 가득했다.
몇몇 사람들은 치료가 끝났는지, 붕대를 감고 근처에 지친 듯 앉아 있었다.
‘근데…….’
분위기가 생각과 달랐다.
고통이 섞인 신음과 울음소리로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앓는 소리가 꽤 들려오긴 했지만 그렇게 어두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꺄하하하!”
이마에 거즈를 붙인 아이들이 아프지도 않은 듯 뛰어다녔다.
겉모습만 보면 어디 엄청난 사고를 당한 듯 보이지만, 분위기만 보면 겉만 그럴듯하게 분장해 놓은 엑스트라들 같았다.
“희한해. 나 사고 났을 때 다리가 안 움직여서 큰일 났구나, 했는데 그낭 찰과상만 입은 거더라.”
“저도요. 운전대랑 차 문 사이에 팔이 끼여서 구조대원들이 어렵게 꺼내줬는데, 제가 봐도 영 가망이 없었거든요. 근데 이것 보세요. 움직이잖아요. 의사쌤이 진짜 천운이라고 하더라고요.”
“들어보니까 생각보다 중상자가 별로 없다던데. 수술받은 사람들도 수술 잘됐고.”
“의식 없던 애들도 병원에 도착하니까 금방 정신 차렸다잖아요.”
“……여기 터가 좋은가?”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가 병원을 올려다보다가 아차, 하고 얼른 아내가 입원해 있는 병실로 올라갔다.
“왔어?”
“몸은 괜찮아?!”
병원복을 입고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모습에 울컥, 눈물이 났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남편의 모습에 아내가 작게 웃었다.
“괜찮아. 튼튼이도, 나도.”
“다행이다…….”
남편이 조심스럽게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아내는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자신도, 아이도 위험할 뻔했다는 의사의 말을 삼키며 떨리는 남편의 손을 토닥여주었다.
“아, 그 도와주신 분 연락처는 알아?”
“아니, 안 가르쳐 주시더라.”
“얼굴은 봤고?”
“우느라 잘 못 봤어. 그리고 한 분이 아니라 다른 일행분들도 같이 도와주셨어. 같이 어디 가는 길이셨나 봐.”
“그렇구나. 꼭 보답하고 싶은데…… 나중에 인터넷에 글이라도 올려볼까?”
남편의 말에 아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뜩 떠오른 것을 말했다.
“아, 그건 기억나. 도와주신 분이 엄청 잘생기셨다는 거!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미처 생각 못 했는데 말이야. 처음 봤을 때는 천국에서 천사님이 오셨나 했어.”
천국에, 천사님이라니…….
그건 좀 위험한 거 아닌가.
내심 식겁한 남편이 아내와 마주 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후광까지 보였다니까!”
“……우느라 잘 못 봤다며?”
“그래도 느껴지는 잘생김이 있지! 완전 서준이 보는 느낌!”
평소와 다름없이 밝은 얼굴로 재잘대는 아내(새싹)의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나오는 남편이었다.
“태교하면서 너무 이서준 배우 사진만 봐서 잘못 본 건 아니고? 너무 아프면 잘못 볼 수도 있잖아.”
“아냐! 진짜 잘생겼다니까!”
부부는 투닥거리며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을 보냈다.
* * *
“도착하려면 아직 남았지?”
“어. 조금 더 가야 해.”
빙 돌아가는 길은 제법 시간이 걸렸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무대미술과 4학년들의 대화를 들으며 황도윤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도착하면 바로 저녁 먹어야겠는데요?”
“그러게. 뭐 먹을래?”
“가볍게 먹죠.”
가까운 곳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서 그런지 입맛이 별로 없었다. 다들 동의하는 듯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술팀 팀원이 시꺼먼 연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다들 괜찮겠지?”
“괜찮을 거예요.”
어쩐지 믿음이 가는 서준의 말을 이어, 켜놓은 라디오에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적 같은 일입니다.
놀람과 감탄이 서린 목소리에 서준과 선배들이 귀를 기울였다.
-소방본부에서는 사고가 터널 안에서 일어난 데다가 한 차례 폭발도 있어, 수많은 사상자가 나올 거라고 예상하였습니다만…… 예상과 달리 사망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
-병원으로 향한 중상자들의 치료도 무사히 끝났으며, 고령자들이 타고 있어 우려하던 세 대의 관광버스에서도 더 이상의 중상자는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나운서의 말에 그제야 모두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진짜 다행이네!”
“그러게 말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선배들이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저녁 삼겹살 먹을까?”
“좋지!”
“소주도 있던가?”
“소맥 먹죠. 소맥!”
“다들 마시는 건 좋은데, 내일은 오늘 못했던 일까지 해야 하니까 많이 마시면 안 돼요.”
“아…….”
황지윤의 말에 다들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오늘, 내일 나눠서 할 일이었는데,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오늘 일까지 내일 하게 되어버렸다.
“여기가 숙소야.”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는 민가와 가로등이 있는 좁은 길을 지나, [화] 선발대는 숙소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서준과 선배들이 기지개를 켜는 사이, 먼저 답사를 와본 황지윤과 무대미술과 4학년들이 잽싸게 돌아다니며 숙소의 불을 켜기 시작했다.
ㄷ 자의 숙소에는 넓은 마당과 평상, 마당 한쪽의 수돗가가 있었다. 시골집 같으면서도 꽤 수가 되는 방들을 보면 민박집 같기도 했다.
“여기를 다 쓰는 거예요?”
안다호와 부모님께 잘 도착했다고 연락한 서준은 아예 통째로 빌린 듯한 숙소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황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로 촬영 오는 팀들도 있고 놀러 오는 사람들도 있어서 아예 민박으로 만든 곳이야. 통째로 쓰는 경우도 종종 있대.”
벌써 배정된 방에 들어간 황도윤이 외쳤다.
“여기 방, 리모델링한 것 같은데? 완전 좋아!”
거기에 부엌도 있었고 냉장고도 큰 게 두 대나 있었다. 요리에 필요한 냄비나 프라이팬, 요리기구와 수저, 접시 등도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 있는 건 다 써도 된대.”
“그럼 재료만 챙겨오면 되겠네요. 꼭 MT 같아요.”
서준의 눈이 반짝이자, MT의 실상을 아는 황지윤이 볼을 긁적였다. 매일 라면만 안 먹어도 다행일 거다.
“서준아. 지윤아. 일단 짐부터 옮기자.”
[화]팀은 여기서 대략 한 달 동안 지낼 예정이었다.
선발대가 이용한 9인승 승합차는 한 달분의 짐까지 싣기에는 조금 작아, 서준과 선배들의 나머지 짐은 후발대와 함께 올 예정이었다.
다들 간단히 들고 온 3일 치 짐을 미리 배정해 둔 방에 넣어두고 부엌에 모여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가져온 즉석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프라이팬에 삼겹살을 굽고, 상추와 깻잎, 쌈장 등 밑반찬도 준비했다. 어느새 소주와 맥주도 식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된장찌개도 끓일까요?”
“……할 수 있어?”
재료를 가져오긴 했지만, 손도 못 대고 씻고 굽는 것만 하던 선배들이 서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한 달 내내 라면 아니면 고기만 구워 먹을 줄 알았더니…… 요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네.”
“그러게 말이에요. 서준아. 도와줄까?”
“네. 그럼 이것 좀 잘라주세요.”
“……이렇게?”
“네. 조금만 더 작게요.”
조금 어설픈 미술팀 팀원의 모습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서준이 너 한식 자격증 있댔지?”
“네.”
오오. 감탄이 흘러나왔다.
곧 서준이 만든 된장찌개가 식탁 위에 올라왔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에 다들 꿀꺽 침을 삼켰다. 박우진이 한 국자씩 퍼서 나눠주자, 다들 얼른 숟가락을 들었다. 뜨끈한 국물에 저절로 크으, 하고 탄성이 나왔다.
동시에 엄지를 들어 올리는 선배들의 모습에 서준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뜨끈한 된장찌개에 잘 구워진 삼겹살까지 있으니 금세 분위기가 들썩거렸다. 반주 삼아 잔에 따라진 소주 한 잔과 맥주 한 잔을 아껴 먹으며 무대미술과 4학년들이 흑흑 울상을 지었다.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한 잔만 더 주라…….”
“안 돼요.”
단호한 감독의 말에 내심 기대하고 있던 박우진과 황도윤마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서준과 미술팀 팀원이 하하하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고사 언제 지내?”
“아, 고사는 안 지낼 거예요.”
박우진의 물음에 황지윤이 고개를 저었다. 무대미술과 4학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한다고? 정말로?”
“네. 그런 거 다 미신이잖아요.”
황지윤의 말에 박우진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미신이긴 한데……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들을 보면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그 말에 다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표절 사건에 터널 사고까지.
무사히 해결되긴 했지만 까딱하면 큰일 날 뻔한 일들이었다.
황지윤도 반박할 수가 없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간단한 아침 식사 후, [화]팀 선발대는 짧게 회의했다.
“선배님들은 저랑 소품, 가구 배치할 위치 다시 확인하고, 우진 선배는 오빠랑 같이 카메라로 건물 외부 내부 찍어봐 주세요. 저도 나중에 합류할게요.”
그리고 서준과 미술팀 팀원은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무명 화가’가 그림을 그릴 장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세연이한테 연락해 주시고요.”
“세연이도 바쁘겠네.”
아마 조감독 김세연은 하루종일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어야 할 터였다.
“그럼 출발합시다!”
촬영장은 숙소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밭을 따라 걷다가 ‘ㅏ’ 모양의 갈림길에서 오른쪽 꺾어 안쪽으로 쭉 걷다 보니,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담에 둘러싸인 2층짜리 서양식 저택이 보였다.
창틀은 하얀색으로, 벽은 붉은색 벽돌로 만들어진 저택은 고풍스러웠다.
“진짜 대본 속에서 그대로 꺼내놓은 것 같은 저택이네요.”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았는지 탄성이 나올 정도였다.
“그치? 이 건물 찾는다고 고생 좀 했어.”
서준의 감탄에 황지윤이 활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황지윤을 선두로 일행은 잘 관리된 마당을 지나 저택 안으로 향했다.
영화 속에서 볼 법한 내부에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입구를 지나 넓은 로비가 나오고 중앙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무게가 느껴지는 고동색 방문들도, 빛이 비치는 넓은 창도 저택에 잘 어울렸다.
“우리가 촬영할 방이나 복도의 짐은 미리 말해둬서 다 뺀 상태예요. 가끔 별장으로 쓰는 곳이라 전기도 쓸 수 있고 물도 나온다고하니까, 조명이나 다른 기계 작동도 문제 없을 거고요.”
저택을 한 바퀴 둘러본 [화] 선발대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지윤과 무대미술과 4학년들은 촬영할 방들과 복도를 돌아다니며 다시 한번 소품과 가구가 놓일 위치를 확인했다.
박우진은 키드 100을 통해 화면에 비친 저택의 모습을 확인했다. 시간에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색과 방향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도윤아. 여기서부터 걸어가 봐.”
“이렇게?”
주인공 중 하나인 황도윤이 모델로 박우진의 작업을 도와주었다.
서준과 미술팀 팀원은 클라이맥스 부분을 찍을 장소로 향했다. 차로 이동해야 하는 곳이라 서준이 운전대를 잡았다.
“여긴가 봐요.”
“그러게.”
클라이맥스를 촬영할 장소는 야트막한 산으로 몇 달 전에 불이 나서 지금까지 그 흔적이 남은 곳이라고 했다.
그 말대로 명확한 경계선을 그은 것처럼, 전부 불에 타버린 부분과 슬슬 잎이 떨어져 가는 나무들이 우뚝 서 있는 부분이 확실히 나눠져 있었다.
불타버린 부분이 일그러진 네모 모양이라, 눈이 내리면 새하얀 도화지처럼 변할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리기 딱 좋았다.
“근데 꼭 쥐가 파먹은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땜빵 생긴 것 같다.”
서준과 미술팀 팀원이 웃으며 그 장소의 사진을 찍어 서울에 있을 미술팀에게 보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미술팀 팀장 유서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생각보다 넓네! 물감이 예상보다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거기 넓이 재 줄 수 있어?
“네. 그럴게요.”
-그리고 거기 쓰러진 나무 기둥 같은 것도 확인해 주고. 기울기는 어때?
“꽤 낮아서 물감이 아래로 흐를 것 같지는 않아요.”
-그건 다행이네. 다른 특이점은 없어?
서준과 미술팀 팀원은 촬영 장소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유서영과 통화를 이어나갔다.
* * *
그리고 다음 날 오후.
[화]팀의 후발대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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