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49화
“있다고 해봤자 어렸을 때 발자국으로 작게 그려본 게 다고.”
더 나아간다고 해도, 눈밭에 드러누워 파닥파닥 팔다리를 휘저어 천사 모양의 자국을 만드는 정도였다.
유서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눈 위에 그림을 그리는 건 다들 처음이라서 감을 못 잡고 있어.”
“그, 캔버스 대신 눈 위에 그림을 그린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당연하지! 처음 쓰는 재료잖아. 재료를 자세히 조사하지도 않고 어떻게 그림을 그리라는 거야? 너희도 그렇잖아.”
황지윤의 말에 유서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키드100? 인가 하는 카메라로 연습하다가 영화과 난리 났다며.”
“아…….”
유서영의 말에 황지윤이 볼을 긁적였다.
일주일 전, 코코아엔터에서 보내준 키드 100 세 대가 한예대에 도착했다.
프로젝트팀에 배정된 사무실 안에 보관해 뒀는데, 촬영팀이 연습을 해본다는 이유로 키드100을 들고 교내를 촬영하고 돌아다니는 바람에 키드 100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버렸다.
“우진 선배님! 저도 한 번만!”
“세연아!”
[화]팀에 아는 사람이 있는 영화과 학생들은 눈에 불을 켜고 한 번만 찍어보자며, 정 안 되면 한 번만 만져보자며 따라다니기도 했다.
“우리 과 애들이 영화과 애들 뭐 잘못 먹은 거 아니냐고 하더라.”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초반 이틀은 하악하악거리며 몰려다니는 바람에 다른 과 학생들이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피하기도 했었다.
그 추태를 기억하는 황지윤은 민망한 마음에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여튼, 너희도 새로운 카메라 들어오면 여러 가지로 연습해 보잖아. 그래야 카메라에 어떤 기능이 있는지 알고, 실제로 찍으면 스크린에 어떻게 나오는지 잘 알 수 있으니까.”
“그렇지.”
황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마찬가지야. 재료 파악이 1순위라고. 같은 크레파스를 쓴다고 해도 도화지에 묻어나는 질감이나 번짐의 정도 같은 걸 잘 아는 화가와 잘 모르는 일반인의 그림은 전혀 다르잖아.”
유서영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가 오죽하면 직접 얼음을 갈아서 눈처럼 만들어서 실험까지 해봤겠어?”
그 말에는 황지윤도 크게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미술팀도 엄청 노력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일단, 이걸 1순위로 해놓자.”
미술팀의 만장일치를 받은 그림을 보던 황지윤과 유서영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 * *
황지윤에겐 [화]의 제작으로 스트레스와 고민이 쌓일 때, 힐링하기 위해 가는 장소가 있었다.
바로 A관에 있는 연기과 연습실.
구석 자리에 앉아 조용히 서준과 황도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꿈속에서 봤던 인물들이 튀어나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진짜 꿈에서 보긴 했지.’
그중 하나가 황도윤이라 조금 몸서리가 쳐졌지만…… 잘 어울리긴 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때마침 오늘 연습하던 장면이 클라이맥스 부분이었다. 조금 전까지 황지윤과 유서영이 고민하던 부분이었다.
‘무명 화가’의 탈을 뒤집어쓴 서준은 눈앞에 있는 새하얀 눈밭을 바라보았다. 후욱, 하고 입김이 나올 것 같고 사박사박 눈 밟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스키장에 간 게 도움이 됐네.’
몇 달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얼굴에 부딪히던 차가운 바람과 몸을 으슬으슬하게 만들던 추위, 빛이 반사되던 새하얀 눈과 그걸 밟고 던지고 맞았던(눈싸움도 했다) 기억은 생생했다.
무명 화가가 눈 위로 발을 내디뎠다.
폭신하게 쌓인 눈 아래에 뭐가 있는지, 미끄러지지는 않을지, 조심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어딘가 넋이 나간 듯 사박, 하고 발을 내딛-
“하아…….”
작은 소리였는데도 연습실이 조용해서 그런지 크게 들렸다. 한숨을 내쉰 당사자, 황지윤도 놀라고 말았다.
“앗! 미안. 조용히 할게! 계속해!”
지금까지 계속 연습을 구경하러 오긴 했지만, 황지윤이 연습 중 소리를 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쩐지 들어올 때부터 황지윤의 표정이 안 좋긴 했었다.
“아니다. 나 이만 가 볼게! 열심히 해!”
당황하다가 사과하며 벌떡 일어나려는 황지윤보다 먼저 서준이 입을 열었다.
“도윤이 형, 우리 잠시 쉬었다 할까요?”
“그래. 그러자.”
서준의 말에 황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무슨 일 있냐고 묻는 서준과 황도윤에, 황지윤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1순위로 꼽은 그림도 보여주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으음. 조금 아쉽긴 해요.”
의아해하는 황도윤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서준.
미술의 ‘ㅁ’ 자도 모르는 ‘민한’과 뛰어난 화가인 ‘무명 화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이라, 황지윤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게다가 또 다른 문제가 있어. 눈 위에서 쓸 물감을 만들어야 한대.”
“물감이요?”
“응. 일반적인 종이하고 물기가 있는 눈은 물감이 번지는 게 다르잖아. 너무 잘 번져서 색이 옅어져서도 안 되고 너무 안 번져서 뭉쳐진 것처럼 보여도 안 된대. 그 농도를 알아야 한다더라. 게다가 자연에서 쓰는 거니까 문제 생기지 않게 친환경적으로 만들어야 하고.”
서준과 황도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보다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그런 장면을 잘도 만들 생각을 했네.”
“나도 미술 쪽은 잘 모르니까 무작정 될 거라고 생각했지. 뭐, 어쩌겠어. 할 수 있는 만큼 해야지. 이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난 좋은 것 같은데?”
황지윤이 한숨을 내쉬고 황도윤이 턱을 긁적이는 사이,
‘눈 위에 그림이라……’
서준은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본 적이 있었다.
넓은 눈밭 위에 알록달록한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을.
‘아, 수채화 작품도 있단다. 눈 위에 그린 그림도 있었지. 사진으로 남겨뒀는데 보겠나, 준?’ 하고 제자를 자랑하던 아르노 교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본 사진.
보통 쓰는 캔버스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눈 위에 그리는 것이라 낯설 텐데도, 마치 익숙하다는 듯 번짐이나 색과 색의 섞임, 그러데이션까지도 훌륭하게 표현한 대단한 그림이었다.
그런 그림을 그렸던 마테오라면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을 터였다.
“제가 아는 화가가 있는데 물어볼까요?”
서준의 말에 황도윤과 황지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준이 아는 화가라면…… 미리내 예고 미술과 학생인가? 아니, 그러면 친구나 선배라고 말하지, 화가라고 말하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서준이 먼저 이야기할 정도라면 큰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고등학교 후배라도 괜찮으니, 황지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좀 물어봐 줄래?”
“네. 잠시만요.”
서준이 웃으며 휴대폰을 두드렸다.
지금이 오후 5시니, 프랑스는 오전 10시쯤일 거다.
<마테오.
<지금 통화 가능해요?
>마테오 : 얼마든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로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던 덕분인지(서준이 찍은 영화 속 궁궐과 풍경, 미술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금세 답장이 도착했다. 서준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얼마 안 가 반대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Ciao! JUN.
“챠오. 마테오.”
황지윤과 황도윤은 서준의 입에서 나온 이탈리아어에 눈을 끔벅였다.
* * *
다음 날.
한예대 교내 [화] 프로젝트팀 사무실.
“서영아.”
“……으어?”
반쯤 좀비가 된 유서영이 황지윤의 부름에 삐걱삐걱 고개를 들었다.
클라이맥스 부분 그림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인지 계속 고민한 모양이었다. 사무실 내에 있던 미술팀 팀원들도 초췌하긴 마찬가지였다.
“너 마테오라고 알아? 화가.”
“……마테오?”
졸업 후 프랑스 파리로 유학 갈 예정인 유서영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다른 미술팀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마테오? 지금 프랑스에서 공부 중인?”
“……응.”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는 거야?
황지윤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리가! 요새 제일 잘나가는 화가잖아!”
“저 전시회 가 보고 싶었는데!”
“나도!”
유서영과 미술팀 팀원들이 다다다 말을 내뱉었다.
마테오.
이탈리아인으로 현재 프랑스 파리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유명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고 작품들도 절찬리에 팔리고 있으며 회화뿐만 아니라 설치미술 등 다른 부분에서도 훌륭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천재 예술가!
“우리가 제일 먼저 찾아본 것도 그 마테오의 그림이야. 마테오도 눈 위에 그림을 그린 적이 있거든.”
“대단했죠. 그거.”
“맞아. 규모도 엄청 컸고.”
기운 없던 미술팀 팀원들이 재잘거리며 이야기했다. 가장 침울해 있던 유서영마저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어제 통화 이후로 조금 알아본 터라 유명한 화가라는 건 알았지만, 미술팀 전원을 들썩이게 만들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근데 갑자기 마테오는 왜?”
“마테오가 우리 영화 미술 자문을 해주시면 어떨까?”
“……하핫.”
하고 웃은 유서영이 황지윤의 이마에 손을 댔다. 너무 자연스러운 동작이라 황지윤은 눈만 끔벅이고 말았다.
“열은 없는데?”
“그래도 어디 아픈 건지도 몰라요.”
“그래. 지윤이도 요새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어.”
당장에라도 병원에 보낼 듯, 안쓰럽게 바라보는 미술팀에 황지윤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진짜 아픈가 보다.”
“그러게.”
진심으로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미술팀에, 아하하하 웃던 황지윤이 시계를 살폈다.
이제 곧 올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소개 안 했지. 우리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무명 화가 역 배우.”
“? 응.”
갑자기?
마테오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배우에 대해 이야기하는 황지윤에 다들 눈만 끔벅였다.
“이 배우가 마테오랑 아는 사이거든. 그래서 우리 영화에 도움을 주시기로 했어.”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어디선가 ‘오늘 만우절이에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태오 아니야? 마태오.’, ‘마 씨가 있던가?’, ‘네. 있어요.’ 조곤조곤 대화 소리도 들려왔다.
실실 웃고만 있는 황지윤의 모습에 유서영이 입을 열려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왔다.”
들어오라는 소리에 문이 열렸다.
누가 들어올까, 궁금해하던 미술팀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잠시 뇌가 인식하지 못한 듯했다.
아니, 잠깐.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곧바로 머리 위로 수십 개의 느낌표가 떴다.
“안녕하세요. 연기과 1학년 이서준입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서준이 빙그레 웃으며 꾸벅 인사했다. 주변으로 반짝임이 보이는 것 같았다.
……왜 네가 여기서 나와?
배우 이서준의 등장에 미술팀 팀원들은 입을 쩌억 벌린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서 와, 서준아. 오빠는?”
마법에라도 걸린 듯 사무실 내에 움직이는 건 서준과 황지윤밖에 없었다.
“음료수 사 오신다고 저 먼저 가라고 하셨어요.”
허어억!
하고 멈춰 있던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이서준 목소리였다. 미술팀 팀원들의 요동치는 눈동자가 황지윤에게로 향했다.
“다시 소개할게. 우리 영화의 주인공 중 하나인 무명 화가 역을 맡은 배우, 이서준이야.”
미친……!
어디선가 들려온, 진심 어린 목소리에 서준과 황지윤이 작게 웃었다. 그게 주문이라도 된 듯 미술팀 팀원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이서준 차기작은 할리우드 영화라고…….”
“표절 사건 때문에 학생이랑은 안 한다고 하던데.”
“잠깐. 그러고 보니 그 표절 원작이 지윤 언니 거잖아요.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이 영화!”
허어어!
그렇게 된 거였어? 하는 눈빛에 서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된 거예요. 대본이 마음에 들어서요.”
“……미쳤다…….”
미술팀 팀원들은 놀란 얼굴로 서준과 황지윤을 번갈아 봤다.
“아, 안녕하세요. 미술과 3학년 유서영이라고 합니다. 화의 미술팀 팀장을 맡고 있어요.”
정신을 차린 유서영을 시작으로 하나둘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너무 놀라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던 유서영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휙! 하고 황지윤을 바라보았다.
무명 화가 역의 배우가 소개해 준 화가.
그 무명 화가 역의 배우가 할리우드 배우 이서준이라면…….
“……그럼 마테오도…… 진짜……?”
“응. 우리 영화 자문을 맡아주기로 했어.”
황지윤의 대답에 유서영의 눈과 입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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