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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548화 (548/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48화

“맞아. 그럴지도.”

“근데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나?”

고개를 갸웃하는 강재한에 김하운이 조금 냉소적으로 말했다.

“뉴스로 나오는 것만 봐도…….”

“아…….”

어느 단체든 구린 구석이 한두 군데 있을 테지만, 군대처럼 일반인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곳이라면 알려진 것보다 조용히 묻힌 일들이 더 많을 터였다.

“아무 이유 없이도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인데, 군대 홍보라는 명목까지 있으면 진짜 서준이를 주연으로 영화 한 편 만들지도 모르지.”

양주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비도 크게 안 들 것 같지 않아?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작가도 있을 거고, 감독 지망생도 있을 거고. 배우나 배우 지망생도 있을 테니까.”

“엑스트라는 널렸지.”

“소품도 뭐, 따로 제작할 필요도 없고.”

말하면 말할수록 그럴듯했다.

“전쟁 영화는 힘들 테니까, 테러 진압이나 인질 구출 쪽으로 가려나?”

“그럴 듯.”

다들 배우라서 그런지 벌써 그럴듯한 시나리오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신무기들도 등장할 거고.”

“희생 장면은 꼭 나올 것 같지?”

벌써부터 끈끈한 전우애와 강한 군대, 우수한 무기들이 보여주는 화려한 전투 장면과 전우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장면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공군이랑 해군까지 추가되면 장난 아니겠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전투기들과 바다를 가르며 이동하는 거대한 군함.

“거기에 서준이까지 있으면…….”

그리고 카메라의 중심에 서 있는, 강렬한 눈빛의 서준까지.

홍보와 클리셰로 뒤범벅될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서준 자체가 개연성이지 않나. 얼굴과 연기력으로 관객들을 설득시키는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괜찮을 것 같은데?”

친구들마저 설득당한 모양이었다.

“너희까지 그러면 안 되지.”

어이없는 얼굴로 말하는 김하운에 서준과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 만들어진다면 그럴 것 같다고.”

“영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영상 한두 개 정도는 찍을 것 같지 않아?”

“화보까진 아니어도 사진도 찍을 것 같고.”

“대외 행사에도 얼굴 좀 비치고.”

유명한 배우나 가수, 아이돌들도 그런 일을 하고는 했으니, 서준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인지도가 전 세계급이다 보니 더 많이 불려 다닐지도 몰랐다.

“으음.”

서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신음성을 흘렸다. 아이들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장난스럽게 이야기했지만, 본인에게는 큰일일 터였다.

서준의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미없는 대본은 싫은데.”

“그거냐.”

아이들이 이마를 짚었다.

그 반응에 키득키득 웃던 서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일 안 생기게 최대한 비밀리에 갔다 와야지.”

* * *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오후 수업까지 끝낸 서준이 연기과 연습실로 향했다. 연습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황도윤이 서준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도윤 선배님!”

“아, 왔어? 그냥 형이라고 불러. 서준아.”

“그럴까요? 도윤이 형?”

“빠르네!”

서준의 말에 황도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감독님은 괜찮으세요? 저번에 통화하니까 다 죽어가던 목소리시던데…….”

“완전 좀비야. 이제 촬영이 한 달 정도밖에 안 남았잖아. 소품, 가구, 의상…… 준비하느라 바쁘지, 뭐.”

아무리 독립영화라도 촬영 날이 가까워질수록 바쁠 수밖에 없었다.

“팀원들은 다 정해졌어요?”

“그래. 배우들도 다 정했고 스태프들도 다 모았어. 스태프 중에 우리 과 1, 2학년도 있더라.”

하긴. 촬영을 직접 보는 것도 꽤 도움이 될 터였다.

“촬영 날 만나면 난리 나겠네요.”

“그러게 말이야.”

서준과 황도윤이 킥킥 웃었다.

“음악팀은요?”

“음악팀. 음악팀 팀장이 특이해.”

황도윤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17살이거든.”

……오.

어쩐지 아는 사람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권세아라고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영화음악에 관심이 있어서 이번에 신청했다고 하더라고.”

“역시.”

“어? 아는 사이야?”

서준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1학기 때 같은 수업 들었거든요.”

진로에 대해 약간의 상담도 했었다.

‘영화음악을 하고 싶다고 해서 언젠가 만날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네.’

황도윤이 오호,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곡도 들어봤어?”

“아뇨. 그건 못 들어봤어요.”

“그럼 들어보자. 지윤이가 너한테도 들려주라고 했거든.”

황도윤이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두드렸다.

“이걸 그대로 화에 쓰는 건 아니고 이거랑 비슷한 느낌으로 작곡할 거래.”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음악이 재생됐다.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삐죽삐죽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 들려왔다. 아마도 ‘무명 화가’와 ‘민한’의 다투는 장면에서 쓰일 곡이 아닌가 싶었다.

다른 곡들도 좋았다.

“이야기 들어보니까 작곡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던데, 잘하지?”

“네. 어떤 장면인지 금방 생각나네요.”

영화음악을 하겠다고 결심한 이후로 권세아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는지 알 것 같았다.

왠지 서준이 다 뿌듯해졌다.

“음악은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미술팀은 어때요, 형?”

“미술팀은 3학년이 팀장이 됐어. 유서영이라고 작년 전시회에서 제일 인기 많았고 기사도 많이 났던 학생이야. 졸업하면 곧바로 유럽으로 유학 간대.”

“4학년이 아니라요?”

“4학년은 졸작 만드느라 정신없을걸.”

아……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은 이런 느낌이야.”

황도윤이 휴대폰으로 유서영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넓은 캔버스 안, 창문에 비친 비 오는 호숫가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창문 유리에 부딪히고 있는 듯한 빗방울은 방울방울마다 선명했고, 유리 너머 호숫가의 풍경은 물기 때문에 흐릿했다. 그 두 부분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어, 사실적이기도 하고 몽환적이기도 했다.

눈을 반짝이며 감탄하던 서준이 물었다.

“클라이맥스 부분 그림도 이분이 그리시죠?”

아무래도 맡은 배역이 화가다 보니 그림이 가장 신경 쓰였는데, 화가가 중심이 되는 [화]는 온전한 그림이 나오는 장면은 이 클라이맥스 부분뿐이었다.

그래서 더 강렬해야 하고, 더 인상 깊어야 하고 더 몽환적이어야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

“어떤 그림이 나올지 궁금하네요.”

서준의 말에 황도윤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황지윤이 [화]에 가지고 있는 애정을 생각하면 클라이맥스 부분의 그림이 그렇게 쉽게 나올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촬영 전까진 결정하겠지.’

볼을 긁적인 황도윤이 입을 열었다.

“그럼 연습 시작할까?”

“네!”

서준이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10월 초.

배우 김종호가 귀국했다.

[배우 김종호, 귀국!]

[이서준 사단의 두 번째 할리우드 배우! 김종호!]

[ONE, 2편 만들어지나?]

[배우 김종호도 시리즈 영화 출연?!]

“시끌벅적하네.”

“그럴 만도 하죠! ONE도 엄청 흥행하고 있잖아요.”

서준의 말에 작게 웃은 이지석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단골 고깃집의 개인실.

이서준 사단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박도훈이 웃으며 김종호에게 말했다.

“고생하셨어요. 삼촌.”

“그래. 고맙다.”

“차기작도 할리우드 영화라니, 대단해요!”

이다진의 말에 김종호와 이지석이 기분 좋게 웃다가 서로 눈이 마주쳐버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쟤랑 또 같은 영화라니…….”

“이러다 차차기작까지 같이 하는 거 아니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진심이 가득 담긴 대화에 서준과 이다진, 박도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같은 영화 오디션 보는 거, 알고 지원한 거 아니에요?”

“아니. 진짜 몰랐어. 내가 오디션 볼 때는 종호 형이 촬영 중이어서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어. 촬영 끝난 후에도 의논한 적은 없었는데 말이야.”

서준의 물음에 이지석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김종호가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영화가 영화라서 그런 것 같더라. 다른 영화들보다 한국인 배역이 많았어.”

“어떤 영화길래요?”

“한국인 이민자들의 이야기야.”

이지석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 가족이긴 하지만 이민자 1세대와 2세대라는 세대 차이가 있는 가족들과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작품이야. 주인공은 2세대 아들이고.”

“배경이 한국인이긴 한데, 한국인에 한정 짓기보다는 이민해 온 다른 나라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많이 넣었더라고.”

오호.

흥미로운 줄거리에 서준과 박도훈, 이다진이 눈을 반짝였다.

“그런 영화면 확실히 한국인 배우들하고 만날 확률이 높겠네요.”

서준의 말에 김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주인공 배우가 한국계 미국인이긴 한데, 다른 배역에 한국 배우가 캐스팅될 수도 있겠더라고.”

“어때? 너희도 오디션 보는 건?”

이지석의 물음에 박도훈이 이다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오디션 끝난 거 아니었어요?”

“촬영이 내년이라 아직 오디션 중이야.”

“나도 우리 회사 배우들한테 권유하고 있고.”

김종호는 떠들썩하던 소속사를 떠올렸다. 그중 몇이나 합격할지 모르겠지만,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했다.

“으음. 그럼 한번 해볼까?”

박도훈과 이다진이 고민하는 걸 보던 이지석의 시선이 서준에게로 향했다.

“근데 서준이가 할 만한 역이 있던가?”

“아, 저는 못 할 것 같아요.”

서준의 말에 네 배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서준이 배역을 마다하다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왜? 왜? 무슨 일 있어?”

서준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저 내년에 군대 갈 거거든요.”

……!!

배우들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그래서 지금 스케줄 정리 중이에요.”

뭐, 스케줄이랄 것도 없지만.

촬영하고 싶어서 입대를 미루지 않기 위해서, 대본을 보는 건 자제할 예정이었다.

‘진짜 자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눈앞에 대본을 두고 끙끙 앓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은 서준이었다.

그런 서준의 옆에서 놀란 마음을 수습하던 김종호가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었다.

“……서준이가 언제 이렇게 자랐대?”

“……그러게 말이야.”

진심이 가득한 배우들의 탄성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서준이 학교 수업과 황도윤과의 연습으로 신나게 10월을 보내고 있을 때, 황지윤과 [화]팀도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이것도 아니야…….”

절망 속에서.

황지윤의 말에 미술팀 팀장 유서영이 하아아, 한숨을 내쉬었다. 황지윤이 앉아있는 테이블 주위에는 퇴짜맞은 새하얀 도화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니, 이거 괜찮지 않아?”

유서영이 미술팀 팀원들에게 만장일치를 받은 그림을 다시 내밀었다. 황지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가로저었다.

“괜찮아. 괜찮은데…… 뭔가…… 뭔가 부족해.”

“그 뭔가가 도대체 뭔데…… 설명 좀 해봐…….”

이번 프로젝트팀에서 처음 만났지만, 준비하는 동안 친해진 황지윤과 유서영은 서로를 답답한 듯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촬영 날이 가까워질수록 마음만 조급해졌다.

“좀 더 뭐랄까,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그리는 느낌이랄까?”

“……난 회화전공이야.”

“그래도 어떻게 안 될까?”

황지윤의 간절한 눈빛에 유서영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진상 클라이언트를 만난 기분이었다.

‘근데 이해가 가서 문제야.’

[화] 대본 봤을 때, 유서영은 이 클라이맥스 부분이 얼마나 이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인지, 인상적인 부분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장면을 영화로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자신이 그 영화의 미술팀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 강렬한 장면을 만들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 유서영이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이 그림이 그 장면에 어울리나.

자신이 정성껏 그린 그림이긴 했지만, 황지윤의 말대로 무언가 부족하긴 했다.

유서영이 복잡한 마음에 머리를 쓸어올렸다.

“문제는 나를 포함해서 우리 팀원들 중에 눈 위에 그림을 그려본 사람이 없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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