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46화
“축젠데…… 연기과 연극 재미있다던데……!”
김세연이 안타까운 얼굴로 시끌벅적한 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테이블로 고개를 돌렸다.
감독 황지윤과 조감독 김세연, 촬영팀 박우진과 4학년 선배, 조명팀, 음향팀 3학년 친구 둘까지. [화]팀의 중심이 되는 여섯이 모여 있었다.
“첫 촬영이 11월 초라니…… 솔직히 말하자면 미친 일정이라고 생각해.”
“눈 내리기 전에 가야지.”
“그건 알지만…….”
에휴, 한숨을 쉰 김세연이 저번주부터 들어온 신청서들을 살펴보았다.
쌓여 있는 종이들을 보니 다행히도 사람이 모자랄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처럼 다들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적어넣으려고 열심힌가 보다.
“이거 오늘 들어온 거.”
조명팀을 맡은 친구가 새로운 신청서들을 가지고 왔다. [화]팀은 종이를 받아 한 장 한 장 넘기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헐! 지윤아. 이 선배님이랑 같이 하자! 저번에 전시회 봤는데 소품 엄청 잘 만들어. 이것 봐.”
“그러게. 예쁘다.”
“그치?”
“나도 얘랑 해봤는데 마감은 꼭 맞춰줘.”
박우진의 말에 황지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김세연이 신나게 신청서에 크게 동그라미를 그려넣었다.
“다음은…… 음악과 권세아?”
“나 걔 알아. 완전 천재래. 우리 학교 조기 입학했다더라.”
4학년 선배의 말에 오오, 탄성이 흘러나왔다. 조명팀 친구가 말했다.
“메일로 자작곡 보냈대.”
“그래? 그럼 좀 있다가 다같이 들어보면 되겠다. 다음은…….”
황지윤이 종이를 넘겼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김세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종이를 바라보았다.
“헐. 도윤 오빠네!”
박우진과 세 사람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도윤이라면 괜찮지. 연기도 잘하고.”
“맞아. 연기과 중에서는 탑이잖아. 이미지도 어울리고.”
“아는 사람이라 편하고 괜찮은 것 같지 않아요?”
흘러가는 분위기에 황지윤이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 * *
“오빠 진짜 할 거야?”
“응.”
“왜?”
“대본이 좋아서?”
황도윤의 말에 황지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이서준 배우가 출연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지…… 솔직히 말하면, 네 대본 처음 읽었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어. 근데 계속 사건이 터져서 말 못 한 거야. 그러다가 서준이가 연기하는 거 보니까 더 관심이 간 거고.”
황도윤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도 고민 많이 했어. 서준이가 나오는 작품에 감독 가족이 배우로 들어가면 말 많을 거라는 거 알아. 그래서 그런 말 안 들으려고 연습 열심히 했거든? 그러니까 다른 거 다 떠나서 오디션만 보고 결정해 주라. 연기 보고 마음에 안 들면 떨어뜨리면 되잖아.”
웬수지만, 간절한 표정에 조금 마음이 약해졌다.
“……뭐, 그러든가.”
“하핫, 감사!”
황지윤이 한숨을 내쉬며 희희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는 황도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한예대의 축제가 끝나고 민한 역의 오디션날.
심사는 [화]팀 여섯 명 모두 함께 하기로 했다.
연기과 3, 4학년들이 한 명씩 들어와, 촬영팀 박우진의 상대역으로 삼아 연기를 보여주었다. 제법 아는 사람들이 많아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근데 무명 화가 역은 안 뽑아?”
“그건 이미 캐스팅해서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4학년이 나가고 마지막 지원자가 들어왔다. 황도윤이었다.
황지윤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찐남매의 모습에 [화]팀이 킥킥 웃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대본을 들고 있던 박우진이 먼저 대사를 쳤다.
황도윤이 민한의 대사를 내뱉었다. 오디션장으로 마련된 방안을 넓게 활용하며 움직였다. [화]팀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연기를 끝낸 황도윤이 오디션장을 떠나고, 김세연이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윤 오빠가 저렇게 잘했었나?”
“1학기에는 학생회 활동만 했다더니 어디 박혀서 수련한 줄.”
“그러게 말이야.”
황도윤과 단편을 찍어본 적이 있는 박우진도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이 정도면 그냥 황도윤으로 해도 되겠는데?”
“그러게요. 딱 봐도 차이가 나던데…….”
[화]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황지윤도 그렇게 생각했다. 잘하긴 했다. 근데 진짜 오빠를 써도 되나, 싶었다.
“우린 다 합격인데, 지윤이 넌?”
“난…… 좀 더 생각해 볼게.”
황지윤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화제를 돌렸다.
“권세아 씨 곡은 어땠어요?”
“좋던데? 역시 천재는 다르더라. 작곡까지 잘할 줄이야.”
“그래도 아직 어린데 다 맡기긴 좀 불안하지 않아?”
“에이. 우리도 그렇게 나이가 많지는 않죠.”
“그리고 따지자면 세계 무대에서 활동했던 권세아 씨가 훨씬 선배잖아요. 분야는 다르지만.”
“……그러네.”
[화]팀의 회의는 늦게까지 이어졌다.
* * *
집에 도착한 황지윤이 황도윤을 살폈다.
“아이스크림 사 왔냐?”
“여기.”
“오. 메론!”
황도윤은 평소처럼 행동했다. 황지윤도 그게 마음이 편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TV를 보던 남매의 입에선 오디션의 ‘ㅇ’ 자도 나오지 않았다.
하아, 한숨을 내쉰 황지윤이 침대에 누웠다.
무명 화가 역을 해결하니, 민한 역이 문제였다.
‘황도윤이 연기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괜히 찝찝하달까.’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황지윤이 눈을 감았다.
하루 종일 생각해서 그런지, 머릿속에 저절로 [화]가 떠올랐다. 서준의 연기를 본 이후로 무명 화가는 서준의 얼굴로 등장했다.
언제나 그렇듯 무명 화가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그 옆에는 희미한 이미지의 민한이 있었다.
희미한 이미지.
어제까지는 분명 그랬었다.
황지윤이 감고 있던 눈을 뻔쩍 떴다. 커다란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요동쳤다. 황지윤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으으으.
“……악몽이야…….”
황도윤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황지윤이 비척비척 방에서 걸어나왔다. 묘하게 데자뷔 같은 느낌에 황도윤이 물었다.
“또 대본 수정했냐?”
“오빠 연기가 그 정도는 아니거든?”
“? 뭔 소리야?”
서준의 연기는 대본을 수정할 정도로 임팩트가 있지만, 황도윤의 연기는 대본을 수정할 만큼의 임팩트는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배역은 확실하게 차지했다.
한숨도 자지 않고 오디션을 봤던 다른 배우들을 떠올려봐도, 어느새 ‘민한’은 황도윤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밤새 황도윤의 얼굴이 떠오르다니, 악몽이 따로 없었다.
‘……근데 어울리긴 했어.’
한번 겪어봐서 그런지 포기가 빨랐다.
에휴, 한숨을 쉰 황지윤이 비틀비틀 부엌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잘해. 진짜로.”
잠시 그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황도윤이 곧 활짝 웃었다.
* * *
9월 중순.
김종호 조연, 이지석 단역의 할리우드 영화 [ONE]이 개봉했다.
[배우 김종호, 첫 할리우드 조연작! ONE 개봉!]
[예매율 82%! 기대감 상승 중!]
[이지석 첫 할리우드 영화, ONE에서의 역활은?]
할리우드 영화라서 그런가 홍보도 상당했고, 한국인 배우가 둘이나 출연하는 만큼 한국인들의 관심도 높았다.
“벌써 후기가 올라왔어요.”
“그래? 어때?”
“다 좋아요! 재미있대요.”
박도훈의 물음에 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서준은 이지석과 박도훈, 이다진과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늦은 밤 영화관으로 향했다. 김종호는 홍보 일정 때문에 함께하지 못했다.
“다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러게요.”
이다진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홍보하러 가신 건데 어쩔 수 없지.”
“그래. 난 아예 못 갔잖아.”
박도훈의 말에 이지석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주연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고 난 후에는 매번 홍보 행사에 참여했었는데, 이렇게 다시 단역부터 시작하게 되니 신선한 느낌이었다.
서준과 이다진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럼 들어갈까?”
시간에 딱 맞춰온 덕분인지 금세 상영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자리에 앉은 서준과 세 사람이 기대가 가득한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곧 상영관 내부가 어두워졌다.
[ONE]은 은행강도와 경찰들의 이야기로, 특이한 점은 거기에 모방범들이 끼어든다는 것이었다.
진짜 은행강도단이 3개의 은행을 털고 도주하고 난 후, 그 방법이 뉴스를 통해 알려졌다. 그걸 보고 따라하기로 결심한 모방범들이 은행 하나를 노리는데, 우연히도 그 은행이 진짜 은행강도단도 노리고 있던 은행이었던 것이었다.
진짜 은행강도단은 모방범들과 맞닥뜨리고 경계했고, 흉내 내고 있던 모방범들은 기겁했고, 경찰들은 갑자기 2배로 불어난 은행강도단의 인원에 혼란스러워했다.
‘개판이네.’
그래도 그 흐름을 감독이 아주 잘 풀어내가고 있어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야기거리가 많아 늘어짐도 없이 속도감이 붙어 재미있었다.
[ONE]의 주인공은 모방범의 리더였고, 모방범 멤버 중 하나가 한국에서 대도로 이름을 알리고(주인공이 어렸을 적, 술김에 이야기했다.) 현재 미국에서 열쇠수리공으로 일하고 있던 김종호였다.
-하아,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그런 김종호를 잡고 총을 들이미는 것이, 경찰로 출연하는 이지석이었다.
-헤이, 손 들어.
물론 단역이라 금세 주인공의 공격에 기절하고 말았지만, 이후에도 이지석은 제법 얼굴을 비추고 대사를 치고는 했다.
“경찰 제복 엄청 잘 어울렸어요. 형.”
“맞아요.”
서준과 이다진의 말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이지석이 앓는 소리를 했다. 영화를 보고 집에 데려다주는 중이었다.
“벌크업 하려다 죽는 줄 알았다.”
서준과 박도훈, 이다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앓는 소리를 해도 이지석이 얼마나 열심히 그 역할을 준비했는지 알고 있었다.
“결말도 재미있었어요.”
“맞아.”
온갖 총기들로 중무장한 진짜 은행강도단과 초짜인 모방범들과 3번이나 은행강도단을 놓쳐 바짝 곤두선 경찰특공대의 싸움은 치열했다.
‘뭐, 모방범들은 그냥 고래 싸움에 낀 새우 같은 느낌이었지만.’
주인공과 멤버들이 각자의 능력으로 위험을 빠져나가는 것이 흥미로웠다. 왜 저런 멤버들을 모았나 싶은데 다 활용할 곳이 있었다.
그 치열한 전투 중, 진짜 은행강도단은 다 죽어버리고 말았고 모방범들은 간신히 탈출했다.
회의 중인 경찰들의 모습이 나왔다. 3번이나 은행강도단을 놓쳤는데 또 새롭게 등장한 모방범들을 놓치고 말았다.
-두 개의 강도단이 침입했는데 하나는 그대로 놓쳐 버렸다고 이야기하라고?!
-차라리 하나의 강도단이 양동작전으로 침입하는 바람에 잠시 혼란은 있었지만, 차분히 대처한 덕분에 대부분 사살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일부 놓쳐 버렸다! 라고 변명하는 게 났지!
모방범들이 지폐와 보석, 금을 보며 환호하고 있을 때, 뉴스가 나왔다.
모방범들에 대한 뉴스였는데 조금 이상했다. 어느새 진짜 은행강도단이 저질렀던 범죄들이 모방범들이 한 짓으로 되어버린 것이었다.
-뭐!? 저건 우리가 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증언해 줄 진짜 은행강도단은 다 죽어버렸고, 진짜 은행강도단의 방법을 고스란히 따라해 은행에 침입했던 모방범들은 탈출해 버렸다.
자수하면서 ‘저건 우리가 한 게 아니다.’ 하고 말하지 않는 이상, 해명은 불가능했다.
‘물론 해명해도 들어줄까 싶지만.’
그렇게 가짜에서 진짜가 되어버린 모방범들이 경악하는 모습을 끝으로 영화가 끝났다.
“아마 2편이 나오면 그걸 해명하는 이야기지 않을까?”
이다진의 말에 박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이 입을 열었다.
“아니면 아예 주인공이 삐뚤어져서 진짜 은행강도가 되는 이야기일지도 몰라요. 2편 주인공은 경찰이구요.”
“그럴 수도 있겠네.”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 하는 박도훈에 서준과 이다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 다 왔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세 이다진이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이지석이 차를 세우자 안전벨트를 푼 이다진에게 서준과 박도훈이 웃으며 인사했다.
“잘 가요. 누나.”
“조심해서 들어가.”
그때 벨소리가 들렸다. 이지석의 휴대폰이었다.
“이 시간에 전화라니…… 무슨 일이지?”
이지석이 전화를 받았다. 막 차에서 내리려던 이다진도, 서준과 박도훈도 궁금한 얼굴로 이지석을 바라보았다. 어, 어. 하고 대답하고 있던 이지석의 눈이 점점 커졌다.
“무슨 전화에요, 형?”
서준의 물음에 이지석이 조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말했다.
“……오디션, 합격했대.”
이지석의 두 번째 할리우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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